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2007.05.01. 08:43
명나라 이여송은 한국계… 유학사 연구에도 단서 제공
씨족의 병력도 드러나 유전병 예방에 도움도
조선조 1850년 무렵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사망인구가 급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염병의 이동 경로를 보자. 외국인 선교사, 상인 등의 이동에 따라 외래 병이 서울에서 창궐한 경우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남까지 확산되는데 충북 대다수 지역은 빠져 있다.
그 후 전염병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호남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해 평안도로 옮아가고 다시 내려와 경상도에 퍼진다. 이후 강원도로 북상한 전염병은 평안북도까지 올라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와 머물다 북상하지만 함경북도 일부에서 멈춘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시대에 전염병의 발생과 이동 경로는 역학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지만 좀처럼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만의 독창적인 족보(族譜)가 그러한 자료를 풍부하게 전해준다.
씨족의 족보에서 특정 기간에 부자, 부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지역과 시기에 차이를 두고 나타났던 것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의 이병창(53) 사장은“족보를 오랜 기간 다루다보니까 몇몇 씨족의 족보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기간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1850년 무렵에서 1900년까지의 경우 평균나이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본관이 거주지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염병의 분포와 확산 경로를 족보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사장의 주장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엔코리안(www.n-korean.com)’가 올해 초 전자족보 형태로 제작한 신안 주씨(新安 朱氏) 대동보(大同譜 : 가장 넓은 범위의 족보로 같은 시조 아래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갖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에 따르면 수록 인원 23만313명 중 남자는 15만 6,646명(68%)으로 여자 7만 3,667명(32%)보다 월등히 많다.
문중 구성원의 출생률은 1~3월에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평균 9.35%), 4~5월이 가장 낮았다(평균 7.66%). 사망률은 1~3월이 가장 높았고(평균 9.25%), 6월이 6.78%로 가장 낮았다.
나주임씨(羅州 林氏), 선산김씨(善山 金氏), 삼척 심씨(三陟 沈氏), 이천서씨 공도공파(利川徐氏恭度公波) 문중의 경우도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1~3월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장흥임씨(長興 任氏) 문중은 출생률은 1월, 사망률은 10월이 각각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출생률이 1월에, 사망률은 5월이 가장 높았다.
엔 코리안 최용석(38) 대표는 “족보에는 문중에 따라 출생과 사망이 특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임신시기에 따라 아들과 딸의 출생률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통계학적 의미를 가질 경우 의학적으로 접근하면 문중마다의 특이 질병력(歷)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적인 성격을 띠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사고를 줄일 수 있고, 나아가 임신 시기를 조절하면 아들ㆍ딸의 출산 확률도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족보를 살펴보면 청주한씨(淸州 韓氏)는 평균적으로 키가 크고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머리와 목소리가 크며 문중에 따라 눈동자의 색깔이 각각 다르고 치아의 테두리도 차이가 있다는 게 족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병창 사장은“족보에는 사람의 DNA를 암시하는 정보도 담겨 있다는 것을 실감 한다”면서 “앞으로 족보를 통해 연구하고 활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족보는 씨족의 특성을 가늠케 하는 요소도 있는데, 청주 한 씨나, 신천 강씨(信川 康氏)가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청주 한 씨는 역사의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 씨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역시 청주 한 씨다.
왕건 어머니의 친척인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은 신라왕 김부(金傅ㆍ경순왕)의 시랑인 김봉휴를 만나 고려의 통일에 공을 세웠고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한 덕종 비(소혜황후) 인수대비,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한명회 등도 청주 한씨 사람이다.
신천 강 씨는 족보상 유대민족과 같은 ‘오뚝이 문중’에 비유된다. 역사상 수많은 씨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 아예 사라지거나 왜소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천 강 씨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핍박은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때 태조의 후비인 신덕황후 강 씨의 두 왕자를 비롯한 일가의 몰락이다.
이후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강순(康純)이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 장군과 함께 처형됐으며 연산군 때는 무오사화의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신천 강씨는 깨지지 않고 문중을 부흥시켰다. 우리 시대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신천 강씨다.
족보는 씨족의 역사책일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린 역사의 틈을 잇는 사료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족보를 ‘이면(裏面)의 역사서’라고도 부른다.
앞서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 씨라는 사실과 한헌옹의 역할은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족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사실로 밝혀낸 것도 족보다.
이여송의 아버지는 이성량(李成梁, 1526~1615)으로 14세기 말 중국으로 건너간 이영(李英)의 후손이다. 이영의 아버지는 이승경(李承慶)으로 성주이씨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손자다.
성주 이씨 대동보는 이여송의 7대조인 이승경의 아버지를 참지공파 이천년(李千年)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 238장 명사(明史)에는 승경이 이조년의 아들로 나와 있다(李承慶兆年之子). 이조년은 이천년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족보상 이여송이 성주 이씨 후손이란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이여송의 후손들은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여송의 13대손인 리쩌멘(李澤綿ㆍ46)이 5월 12일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ㆍ1542~1607) 선생 400주기 추모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족보가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는 물론, 씨족 적 연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및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족보가 역사의 사료차원을 넘어 기존사학계의 통설에 정면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본격 수용되는 고려 말 조선초기의 과정을 족보를 통해 보면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시험관)ㆍ동지공거(同知貢擧=부시험관)와 과거급제자의 ‘좌주(座主)=문생(文生)’관계와 혈연적 연결이 성리학 토착화나 사회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권단(權妊, 1228~1311)은 선구자적 인물로 그가 지공거일 때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백이정 등 엘리트들을 뽑아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심양왕 복위 사건으로 와해되면서 이후 이암(297~364)이 지공거가 돼 문생을 선발하고 그의 제자인 한방신은 동지공거로 포은 정몽주 등을 선발하면서 좌주-문생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이암의 주체적 성리학이 정몽주에게 이어진 것은 그러한 특수 관계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중국 성리학에 충실하였는데 스승인 권보의 사위가 돼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지공거로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 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학계 1세대 대표 학자인 고 이기백 교수(2004년 작고)는 생전에 신라말기의 사병문제를 연구하면서 흥 양 이씨(興陽李氏)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 진주 소씨(晋州 蘇氏) 족보를 통해 신라 시대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이던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ㆍ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2001년 작고)가 평생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한국의 족보였다. 그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도 하였는데 족보에서 한국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옛 정보의 보고(寶庫)인 족보에서 보물을 찾아 다듬는 일은 이제 우리시대의 몫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 / 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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