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신숭겸 장군 묘(申崇謙將軍 墓)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 신숭겸 장군 묘와 관직제도 개국공신 묘역 좌우로 용맥 꿈틀… 도굴 막으려 봉분이 3개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의 신숭겸 장군 묘역. ▲장절공 신도비 견훤과의 싸움에서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 장군의 목을 돌려주지 않자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용사했는데 한 사람의 묘의 봉분이 세 개인 것은 도굴을 염려한 태조의 배려다. 이번에는 쓴 지 1080년 된 묘를 찾았다. 신숭겸(申崇謙) 장군. 평산 신씨 시조로 시호는 장절공(壯節公),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다. 서기 927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 태조 왕건 대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 경춘 국도를 따라 북으로 가는 길은 눈 들어 보이는 곳마다 절경 아닌 곳이 없다...

퇴계 이황선생 묘.

↑퇴계 이황의 묘. 죽기 전 유언으로 조정의 예장도 사양했다. 태극훈이 감도는 오룡쟁 주형 명당이다.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도 품격과 비하를 담은 용어들이 다양하다. 서거 운명 별세 승화 입적 화천 선종 소천 절명 등…. 종교와 지역, 또는 학덕의 깊이에 따라 정중한 공경어가 원용되기도 한다. 몹쓸 짓을 많이 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자가 사망했을 때는 겉으로야 삼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뻗었다’고도 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사람에 의해 어떻게 불릴지는 스스로 곰곰이 반추해 볼 일이다. 절대 왕권 시절 임금이 진명(盡命)하면 곧 국가의 지각변동이었다. 붕어 승하 훙서 선어 안가 등이 군왕의 몰세(沒世)와 관련된 지칭어들이다. 그런데 제왕의 타계보다도 지고한 수사가 있다. 바로 역책(易?)이다. ..

덕수궁 실척원도 발견.

현재 규모는 원래의 3분의1… 사라진 18개 건물 나타나 신형준기자 이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왕이나 왕비의 신위를 모신 건물) 경효전(景孝殿),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얼굴을 담은 그림이나 사진)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등 덕수궁 건물을 원래 건축 규모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 덕수궁 내 건물의 크기를 보여주는 ‘덕수궁 평면도’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덕수궁 복원 사업을 위해 발족한 ‘덕수궁 복원 문헌조사단’은 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1907~1910년 제작된 덕수궁 실측 도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덕수궁 도면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건물의 외양만 묘사한 기존 도면과 달리 각 건물이 몇 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도면이라 의미가 크다. 이..

변치않는 도(道)

■ 변치않는 도(道) 맷돌을 돌리면 깎이는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땐가 다하고, 나무를 심고 기르면 자라는것이 눈에 띄지는 않아도 어느새 크게 자란다. 덕을쌓고 거듭 실천하면 당장은 훌륭한 점을 모르나 언젠가는 드러나고 의리를 버리면 그 악한것을 당장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는 망한다. 사람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면 큰 그릇을 이루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이것이 고금(古今)의 변치않는 도(道)이다. - 령원 유청(靈源 惟淸) 스님 - (미상 ~ 1117년 )

계륵(鷄肋)

■ 계륵(鷄肋) 鷄(닭 계), 肋(갈비 륵)이란 말은 닭의 갈비뼈는 먹을 것은 없으나 그래도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무엇을 취해 보아도 이렇다 할 이익은 없지만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은 《후한서(後漢書)》〈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로, 위(魏)나라 조조(曹操)와, 촉(蜀)나라 유비(劉備)가 한중(漢中) 땅을 놓고 싸울 때, 조조는 진격이냐 후퇴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밤늦게 찾아온 부하 한 사람에 대하여 조조는 계륵(鷄肋)이라고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부하는 그대로 돌아와 계륵이 무슨 뜻이냐고 막료들과 의논을 하는데 아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가운데 단지 주부(主簿)로 있는 양수(楊修)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내일..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 묘터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 묘터 이몽일(풍수학자ㆍ지리학박사) ㅣ 2005-12-20 AM4:41 풍수기행 경주시 안강읍 노당(老堂)2리, 속칭 초제(草堤, 草池 혹은 풀못안) 마을에 이 나라 명묘 중의 명묘라 일컬을 만한 분묘가 한 기(基) 있다. 바로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의 묘다.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재위 AD579-632)의 부마(駙馬 혹은 사위)로 왜구가 침입했을 때 보국대장군이 되어 그들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배후에서 지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존했던 통일신라기는 알고 보면 중국으로부터 풍수설이 전래된, 이 나라 풍수사(史)에서 매우중요한 시점이다. 때문에 한국음택(혹은 묘지)풍수의 역사로 볼 때 그의 분묘는 매우 각별한 의..

현와 이도 묘갈명/유허비명/ 행장。

이도『李蒤, 1593년(선조 26) ~ 1668년(현종 9)』 ■ 弦窩李公墓碣銘 幷序 晩求 李種杞 撰 公諱蒤字子韶號弦窩。宗室讓寧大君諱禔六世孫。曾祖諱壽男鎭安副正。祖諱希孫義盈庫奉事。考諱世良齊陵參奉贈戶曹參判完陵君。妣安東金氏禮判之女。以萬曆癸巳三月八日生公。幼岐嶷。弱冠聲譽大噪。己未中生員。銓曹薦于朝屢除郵丞。多不赴。其意不屑屑於宦達也。中歲因兄子曼按察嶺南。公遂遷于草溪。尋移高靈。士大夫莫不願交。負笈請學及乞文者日塡門焉。丙子之亂。南漢被圍。全參議湜擧義兵。辟公爲從事。公旣赴。旋謝病歸。遂上書主將。其略曰今此義兵。與壬辰大不同。壬辰則西南被冦。故人皆死中求生。歸附者多。今則湖嶺稍完。擧皆逃避。師行踰嶺。人無前進之意。粮無可繼之道。莫如把守近地。使賊兵不能南下。待兵鍊粮足。以爲助順之擧。主將從其計。規畫方成。而南漢已解圍矣。語在沙西日錄。自是以後。無意世事。放浪山水間..

현와이공행장(弦窩李公行狀)

弦窩李公行狀[諱 蒤] 張錫英 撰。 [生卒年] 1851년∼1926년 公諱蒤字子昭弦窩號也。我璿潢初載讓寧大君禔太宗元子、有泰伯之德、自降爲別公㫷弟孫也。大君之後、咸陽君 湖山君鉉例、襲封爵湖山生保安副正壽。男副正生翰林希孫、翰林生齊陵參奉贈戶曹參判、完陵君世良是公考也、妣禮曹參判安東金澍女、萬曆癸巳、公生己未擧生員遊太學、學中推傳鉢大得時譽。時昏君在上、權奸用命。公見其不可也、遂不終日遯于南方。從外舅雪壑李公講質道義、南方學者、皆願慕之負笈請業者日益衆。所與交者皆當世名賢、而有若許文正鄭文簡先生其最所厚也。丙子虜大至、乘輿蒙塵、沙西全忠簡。公倡起義兵、辟公爲義兵有司、在軍多設方略、旣而病不能從軍。上書全公陳其成敗利鈍之機。全公深然其策、未及行而南漢辱。公自是慨然無進取之意、放懷於山水間。優遊以自終、銓官薦其行能三遷三道、郵丞公屬籍王室義不敢以自好表襮黽勉、就職亦不欲降志久淹、棄官..

영천최씨(永川崔氏)

영천 최씨(永川崔氏) 편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에 100여호의 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법산 최씨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최씨(崔氏)의 관향은 125여개 본이 전하고 있으나 이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본관은 약 40여본이다. 그중 종인수 등이 많은 주요한 본관으로는 영천(永川)을 비롯해 경주(慶州) 전주(全州) 계림(鷄林) 동주(東州 : 철원) 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탐진(耽津 : 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흥해(興海) 통천(通川) 수성(隋城) 우봉(牛峰 : 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1) 우리나라 최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으로 하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