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송석 최명창 묘(경기도 기념물 제178호)

야촌(1) 2007. 5. 29. 08:27

■ 최명창선생 약사「1466년(세조11)~1536년(중종 31)」

 

선생은 개성최씨(開城崔氏)로 자(字)는 여신(汝愼), 호(號)는 송석(松石) , 송음(松陰)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 천보(天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철손(鐵孫)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찰방(察訪) 예경(禮卿)의 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89년(성종 20년), 진사(進士)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이어 저작(著作), 전적(典籍), 정언(正言),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이조정랑(吏曺正郞), 지평(持平),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좌부승지(右左副承持旨)를 역임하고, 1519년, 예조참판(禮曺參判)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전주부윤, 원주목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서울동쪽의 쌍계동(雙溪洞)에 집을 짓고, 송석간(松石間)에 시(詩)를 읊으며 한가로이 지냈으며,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기도 했다.

 

이곳 최명창선생 묘는 2002년 4월 8일 경기도 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에 최명창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묘소 위에는 최명창의 아버지 최철손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매형인 재사당(再思當) 이원(李黿)이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1504년 12월 24일 갑자사화(甲子史禍)에 나주 유배지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참형을 당했는데, 그의 누님은 이미 8월 17일 나주에서 궂겼고, 매형(妹兄)의 가족 또한 모두 죄를 쓰고, 뿔뿔이 귀양 가있어서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아무도 없자,

 

당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벼슬을 내던지고선 시신을 수습(收拾)해 모시다가 오늘날의 양주시 회천읍 덕계리 자기네 선산에 누님과 합폄해서 장례를 치뤘다.

 

 

↑송석 최명창선생 묘

 

묘는 쌍분(雙墳)으로, 왼쪽이 최명창, 오른쪽이 정부인 단양 우씨의 묘이다.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동자석(童子石)·문인석(文人石) 등의 옛 석물을 갖추었다. 좌향은 동향이다.

 

묘표는 2기로 모두 이수형(首形)이다. 왼쪽 비석의 규모는 이수가 너비 53㎝, 두께 20㎝, 높이 34㎝이고, 비석이 너비 47㎝, 두께 16㎝, 높이 75㎝이며, 비석 받침이 너비 77㎝, 두께 46㎝, 높이 36㎝이다.

 

오른쪽 비석의 규모는 이수가 너비 54㎝, 두께 22㎝, 높이 34㎝이며, 비석이 너비 46.5㎝, 두께 16㎝, 높이 75㎝이고, 비석 받침이 너비 75㎝, 두께 47㎝, 높이 37㎝이다. 동자석은 손에 꽃을 들고 고개를 묘소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는 매우 특수한 형태이다. 규모는 총 높이 88㎝이다. 문인석은 복두 공복(頭公服)을 착용하였고, 총 높이는 194㎝이다.

 

 

묘표의 앞면에는 ‘가선대부 예조 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공지묘(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

知經筵事五衛都摠府副摠管崔公之墓)’라 새겼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1537년(중종 32)이다.

 

오른쪽 비석 앞면에는 ‘정부인 단양 우씨지묘(貞夫人端陽禹氏之墓)’라 새겼으며, 역시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1537년이다.

 

묘역의 제일 상단에 조성되어있는 묘는 최명창의 아버지 최철손(崔鐵孫)의 묘이고, 아들 최명창 선생의 묘는

쌍분으로 조성되어있으며, 묘의 좌우로는 문인석 한 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다른 묘역에 비해서 특이한 점은

쌍분 앞에 길쭉한 돌판 들들이 쭉 깔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봉분 앞에 작은 상석이 있으며, 그 앞에 묘비를 세웠습니다. 봉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보면 좌측이

선생의 묘이고 우측이 정부인(貞夫人) 단양우씨(丹陽禹氏) 묘입니다.

 

 

↑신도비

 

이곳 최명창선생의 신도비는 옥개형(屋蓋形)이며, 2면 비이다. 규모는 옥개석이 너비 100㎝, 두께 58㎝,

높이 40㎝이며, 비석이 너비 118㎝, 두께 18㎝, 높이 184㎝이고, 비석 받침이 너비 97㎝, 두께 59㎝, 높

이 42㎝이다.

 

신도비의 왼쪽에는 복두 공복을 착용한 문인석 한 쌍이 신도비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곳 석물은 묘역 조성 당시의 것이라고 하니, 약470년 가까이된 석물들 입니다.

 

 

↑향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