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閔思平 配位 彦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

민사평배위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閔思平配位 彦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 [생졸년] 1302년(충렬왕 28) ~ 1374년(공민왕 23) 이색 찬(李穡 撰)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취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賆)이니 도첨의 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

조선시대 양반들의 족보

■ 조선시대 양반들의 족보 1. 조선 양반의 족보 고려시대에는 씨족(氏族) · 세계도(世系圖) · 가첩(家牒) 또는 족도(族圖)등 고문서(古文書) 형태의 족보(族譜)들이 있었다. 그러나 족보(族譜)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원래 족보(族譜)는 고급 관리(官吏)의 내외자손들이 문음(門蔭)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家系)와 신분을 증빙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족보(族譜)다운 족보(族譜)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체계적인 족보(族譜)는 왕실(王室)에서 먼저 편찬하였는데, 태종(太宗) 임금 때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세종(世宗) 임금 때의 당대 선원록(當代璿源錄)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는 성종(成宗) 7년(1476..

원균장군 묘(元均將軍墓)

▲소재지>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신도비(神道碑) ▲모선재(慕先齋) 경기도 평택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 원균(1540∼1597) 장군의 묘이다. 그의 자(字)는 평중(平仲),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여러 관직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절도사로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 후 선조 25년(1592)의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 30년(1597)에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선조 36년(1604)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공신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그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57호이고. 묘역의 규모는 400㎡이며,..

사류재 이공 비(四留齋 李公 碑)

■ 연안 사류재 이공(延安 四留齋 李公 碑) 사류재 이정암(四留齋 李廷馣)을 말함.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지난 만력(萬曆) 신묘 년에 상(上)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이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한쪽 구석을 의지하여 이웃 나라에 공갈 위협을 가하다가, 침학 행위를 우리에게 자행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중국을 침략할 목적에서, 스스로 영웅인 체 교만을 부리면서 불손한 말을 내뱉고 있으니, 그 화복(禍福)의 이치를 엄중히 유시하여 간악하고 광패한 행동을 미리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종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임진년에 수인(戍人)이 달려와서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했다고 외치었다. 이때 왜구는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재를 넘고 호수..

가수 차중락묘/신경진선생묘/선빈안씨묘/연산군묘/정의공주묘/이인묘

답사지>태강릉과 서울 동부 권역 묘지ㅣ 참가자 : 9명 ↑첫 답사지인 가수 차중락 묘역에서... ↑신경진(신립장군의 아들) 선생의 신도비 모습 ↑ 신경진선생 묘역 전경 ↑일정에 없었지만 주변에있는 태종의 후궁이며, 익령군 이치(태종의 서8남)의 생모인 선빈안씨 묘역을 답사 했다. ↑태릉입구 전경 ↑강릉에서는 나문답의 왕릉답사팀과 조우하고...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간공 이명 묘역내 사당은 보수중이고... 2호차는 네비게이션 문제로 만나지 못하고... ↑연산군 묘역 전경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세종의 2녀) 묘역 전경 ↑이번에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목서흠선생 묘역을 찾았으나 신문에 나온 사진과는 다르고... ↑세종의 서9남 영해군의 아들인 이인 묘역 후경 ↑주변에 있는 영해군파 묘역 중에서 특이하게 생..

百弗菴 崔興遠 墓碣銘/墓誌銘/行狀。

백불암 최공 흥원 묘갈명(百弗菴 崔公 興遠墓碣銘) 지은이 : 진양 정종로 근찬(晉陽 鄭宗魯 謹撰) 大東淑氣。盤旋於嶺以南。其鍾毓而生鴻儒碩師者。盖數百年未已。至我明陵之世。則有若百弗菴崔先生出於八公山之下。諱興遠。字太初。崔氏出慶州。中世有諱鄲。佐我太祖。官夏官卿。至孫知縣孟淵。始居大丘。歷五世至諱誡。以壬亂倡義功。贈夏官貳卿。是生諱東㠍號臺巖。受業寒岡鄭先生門。薦儒行。授大君師傅。明亡。入八公山不出。世高其風。是生諱衛南國子生。是生諱慶涵。是生諱壽學監察。是生諱鼎錫。以厚德稱。娶進士咸安趙崈女。生先生。卽乙酉二月十五日也。早棄擧業。隱居篤學。東南儒士翕然師尊之。稱爲㓒溪先生。方伯繡衣交薦之。正廟戊戌。除莊陵郞。己亥。除童蒙敎官。壬寅冬。以大臣薦。擢掌樂主簿。癸卯春。上特稱先生行義。且曰。聞其有先公恤貧庫。使隣里不知有常賦。仍勸課洞儒。予甚嘉之欲見。命該曹陞職。使上來。又命..

증 사자관 이해룡 병서 - 김성일(金誠一).

학봉집 제2권[해사록(海槎錄) 2] ■사자관(寫字官) 이해룡(李海龍)에게 주다. 병서(幷序) 지은이 : 김성일(金誠一) 만력(萬曆) 18년(1590, 선조 23) 봄에 일본 추장(酋長)이 포로로 잡아갔던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보내고, 우리 변경을 침범했던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오직 통신사가 와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성상(聖上)께서 그의 공손한 것을 보아, 특별히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다. 그리하여 신(臣) 황윤길(黃允吉) 및 신(臣) 김성일(金誠一)에게 명하여 정사와 부사로 삼아 절월(節鉞)을 주어 보냈는데, 무릇 사신이 이행해야 할 중대한 일에 관해서는 성상의 생각으로 재단하여 성산(成算)을 일러 주어 비록 천만 리 밖에 있을지라도 대궐 뜰 앞에 서서 친히 밝은 명을 받아 일을 행하는 것과 같..

내가 우는 닭을 죽이려고 하나...

■ 이원(李黿) 익재(益齊)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나주(羅州)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공은 기상이 당당하여 절개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니,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 하였다. 《사우명행록》 ●공의 아버지 공린(公麟) 벼슬은 현령이다. 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 명이 절하면서 청하기를,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는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공린이 놀라서 일어나 보니, 음식 만드는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로 국을 끓이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세 와 대(世와代)

■ 세 와 대(世와代) 世와 代는 동의어로서, 족보 간행시 시조로 부터 몇 世 또는 몇 代중 어느 용어를 선택 했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족보 또는 세보(世譜)에, 시조를 1世로 시작하였으면 世를 단위로 한 것이고, 代를 사용 하였으면 대를 단위로 한 것이다. 즉 시조는 1 代이다. 世와 代는 기준이고, 世孫 또는 代孫, 世祖 도는 代祖로 나와의 관계를 밝히려면 기준 世와 代에 헤아리는 첫 번째 기준은 제외하고 祖, 孫,을 붙혀 世孫, 代孫, 世祖, 代祖로 표기하면 된다. 즉 世와 代에 1世(代) 빼고, 世孫, 代孫, 世祖, 代祖로 칭한다. ● 世와 代의 기준표 ◇世와代 = 기준의 시작인 組를 포함 나까지의 組孫을 헤아리는 단위이다. ◇世孫 = 기준이 되는 祖를 제외 하고, 後孫만을 헤아리는 祖孫간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