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평양박씨족보 서(平陽朴氏族譜 序)

■ 평양박씨 족보서(平陽朴氏族譜書) 《고족성서(古族姓書)》에는 박씨(朴氏)라는 성씨가 없는데, 다만 우리나라에서 신라왕(新羅王) 삼성(三姓) 박(朴)ㆍ석(昔)ㆍ김(金) 가운데 하나가 박씨였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모두 대족(大族)이 되었으니, 평양 박씨가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충원 박씨(忠原 朴氏)는 그 세대(世代)가 워낙 먼 데다 흥체(興替 : 흥성함과 침체함)가 무상하여 또한 상민(常民)으로 강등되어 버린 자도 있다. 그 가운데 다만 평양 박 씨가 세상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원종(元宗)과 참판공(參判公) 휘(諱) 팽년(彭年) 때문이다. 평성부원군은 혼주(昏主 :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킴)를 폐(廢)하고 중종(中宗)을 보필해서 기..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치다.

■욕심 때문에 몸을 망치다. 처음에는 떠나지 않고, 도중에는 깨닫지 못하고, 결국에는 빠져 죽는다. 初而不去。中而不覺。終而溺焉。 초이불거。중이불각。종이익언。 ------------------------------------------------------------------------------------------------------------------------------------ [해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그래서 흔히 욕심 많은 사람을 자신의 몸이 타 버리는 줄도 모르고 화려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비에 비유하기도 한다. 조선중기의 문신 주천(舟川) 강유선(康惟善) 선생이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열린 술 단지..

팔고조도(八 高 祖圖)

■八高祖 關係 呼稱圖(팔 고조 관계 호칭도) 外外 曾外家 外外家 外曾外家 外家 陳外 曾外家 陳外家 曾外家 本家 外外曾外祖母 外外曾外高祖父 外外高祖母 外外高祖父 外曾外高祖母 外曾外高祖父 外高祖母 外高祖父 陳外曾外高祖母 陳外曾外高祖父 陳外高祖母 陳外高祖父 曾外高祖母 曾外高祖父 高祖母 高祖父 外外 曾祖母 外外 曾祖父 外曾祖母 外曾祖父 陳外 曾祖母 陳外 曾祖父 曾祖母 曾祖父 外祖母 外祖父 祖母 祖父 母 父 我 ■ 가족법에 따른 법률용어 ○直系家族(직계가족)-부모와 자녀 ○直系卑屬(직계비속)-자기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혈족(자녀, 손, 증손) ○直系姻戚(직계인척)-배우자의 직계혈족,직계혈족의 배우자 ○直系尊屬(직계존속)-조상에서 자기에 이르는 혈족들(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直系親(직계친)-직계혈족..

한훤당 김굉필 신도비명 병서(寒暄堂 金宏弼 神道碑銘 幷序)

한훤당 김선생 신도비명 병서 (寒暄堂 金先生 神道碑銘 幷序) 여헌 장현광 찬(旅軒 張顯光 撰) 명(明) 나라가 문명(文明)의 운(運)을 열자, 우리 조선의 여러 성왕(聖王)들이 운을 따라 계속하여 나와서 덕을 쌓고 교화를 높였다. 이에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전해지니, 바로 선생이 그러한 분이다. 선생은 휘(諱)가 굉필(宏弼)이고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호(號)가 한훤당(寒暄堂)이다.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과 《경현록(景賢錄)》에 기재된 것을 삼가 살펴보면 김씨는 황해도(黃海道) 서흥부(瑞興府)가 본적(本籍)이니,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위 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낸 휘 보(寶)가 9세조이다. 낭장의 손자인 휘 천록(天祿)은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

진주 촉석루기(晋州矗石樓記)

■ 진주 촉석루기(晋州矗石樓記) 누관(樓觀)을 경영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의 여사(餘事)이긴 하나 그 흥하고 폐하는 것으로써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짐작할 수 있다. 세도는 오르내림이 있는 까닭에 인심의 슬픔과 즐거움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그에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누관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때의 세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여사로만 돌리고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고 더욱 믿어진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석벽 위에 있는데, 나는 옛날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누의 규모는 우람하고 넓어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그 밑으로는..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송시열(宋時烈)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우암(尤庵)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은진(恩津)이다.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아들로서, 선생이 늘그막에 사문전수(師門傳授)의 서적을 주었으며, 관직은 유일(遺逸)로 좌상(左相)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기사년에 화를 당했다.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성무(聖廡)에 종사되었으며,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송준길(宋浚吉)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고, 병오생이며, 관향은 은진이다.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서, 관직은 유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며, 성무에 종사되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이유태(李惟泰) 자는 태지(泰之..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윤선거(尹宣擧)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이고, 경술생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로서, 생원이며, 관직은 유일로 집의(執義)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봉향되었으며, 문집을 남겼다. 유 계(兪 棨)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기계(杞溪)이다. 문과로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정축년에 척화(斥和)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천(林川)의 칠산서원(七山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집을 남겼다. 이 선(李 選)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이고, 관향은 전주(全州)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아들이다. 문과로 이조 ..

사계 김장생 선생 행장(沙溪金長生先生行狀)

■사계 김선생 행장(沙溪金先生行狀)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씀 본관(本貫)은 전라도 광주 평장동(平章洞)이다. 고조(高祖) 휘(諱) 극뉵(克忸)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으며, 비(妣)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를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비는 영산 신씨(靈山辛氏)로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계휘(繼輝)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중봉 조헌 선생 행장(重峯 趙憲 先生 行狀)

■ 중봉 조선생 행장(重峯 趙先生 行狀)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씀 선생의 휘(諱)는 헌(憲)이요 자(字)는 여식(汝式)이요 자호(自號)는 후율(後栗)이다. 또 다른 호는 도원(陶原)이고 중봉(重峯)은 노후(老後)에 부르던 호이다. 본관(本貫)은 배천(白川)이다. 윗대에 휘 문주(文胄)라는 이가 있었는데 고려조(高麗朝)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당시 몽고(蒙古)의 군대들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방에 주둔해 있으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공(公)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元) 나라에 가서 이런 폐단에 대해 간곡히 아뢰었더니, 원 나라 임금이 감동하여 병력을 철수시키게 하였다. 휘 천주(天柱)는 홍건적(紅巾賊)의 난리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토벌하다가 안주(安州)에서 전사..

우복 정경세 시장(愚伏 鄭經世 諡狀)

■우복 정공 시장(愚伏 鄭公 諡狀) 선생의 휘는 경세(經世), 자는 경임(景任), 성은 정씨(鄭氏)이며 호는 우복(愚伏)이니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9대조 택(澤)이 상주 통판(尙州通判)을 지내고 한 아들을 남겨 자손들이 거기에서 대대로 살았다. 고조는 번(蕃), 증조는 계함(繼咸), 조부는 은성(銀成), 아버지는 여관(汝寬)이다.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유아(儒雅)한 것으로 저명하였다.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니 강양군 요(江陽君瑤)의 후예로 학생공(學生公) 가(軻)의 딸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해년(1563, 명종 18) 9월 1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월등히 영리하여 8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문리를 터득하였다. 이때부터 글을 짓기도 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