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양반들의 족보
1. 조선 양반의 족보
고려시대에는 씨족(氏族) · 세계도(世系圖) · 가첩(家牒) 또는 족도(族圖)등 고문서(古文書) 형태의 족보(族譜)들이 있었다. 그러나 족보(族譜)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원래 족보(族譜)는 고급 관리(官吏)의 내외자손들이 문음(門蔭)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家系)와 신분을 증빙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족보(族譜)다운 족보(族譜)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체계적인 족보(族譜)는 왕실(王室)에서 먼저 편찬하였는데, 태종(太宗) 임금 때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세종(世宗) 임금 때의 당대 선원록(當代璿源錄)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는 성종(成宗) 7년(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년)]가 인쇄 반포(頒布)된 이후 17세기를 거치면서 족보(族譜)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 족보 기록내용
족보(族譜)는 조상(祖上)을 숭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는데, 양반(兩班)들은 이 족보(族譜)를 통해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 차별성을 과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양반(兩班)은 사회적인 여러 특권을 누렸고 상민(常民)과 천민(賤民)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常民)과 천민(賤民)들은 누구나 양반(兩班)이 되고자 하였으며, 이들이 양반(兩班)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족보(族譜)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의해 족보(族譜)는 조선 후기에 더욱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나갔다.
족보(族譜)에는 시조(始祖)에서부터 세대 순(世代順)으로 이름과 자(字) ·호(號)·시호(諡號)·과거(科擧)와 관직(官職)·저술(著述)과 문집(文集) 및 묘지(墓地)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기재된다. 또한 후손(後孫)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養子)를 들인 것인지 양자(養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족보(族譜)는 철저히 남자 중심의 기록물로서 조선시대의 여자들은 대개 이름이 없었기에 여자의 이름이 족보(族譜)에 오를 수 없었으며,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올려지게 되었다.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親庭)의 본관(本貫)과 부친(父親) 및 가문(家門)의 이름난 조상(祖上)이 기록될 뿐이다.
또한 족보(族譜)는 일반적으로 파보는 30∼40년 대동보는 50∼60년마다 또는 100여년 뒤에 반복해서 새로이 편찬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동일(同一) 성씨(姓氏)의 족보(族譜)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3. 족보(族譜)는 양반(兩班)의 표상
조선시대 족보(族譜)는 그 자체가 양반(兩班) 임을 의미하였고, 양반(兩班)의 소유물이었다.
양반(兩班)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祖上)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일부 양반 가문(兩班家門)에서는 왕실(王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始祖)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系譜)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族譜)를 편찬하면서 본관(本貫)을 바꾸거나, 조상(祖上)의 계보(系譜)를 조작(造作)· 윤색(潤色) 하는 사례가 성행하기도 하였다.
성종(成宗)때 문신(文臣)인 서거정(徐居正)이 달성서씨(達城徐氏) 성화보(成化譜)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선에는 원래 족보(族譜)가 없어서 거가대족(巨家大族)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祖上)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실제 성화보(成化譜)에는 시조(始祖)에서 부터 12세(世)까지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달성서씨(達城徐氏) 명문가(名門家)에서도 이러하였으니, 이들보다 뒤늦은 가문의 경우에는 조상(祖上)의 계보(系譜)가 불명확 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이후에 비로써 족보(族譜)를 편찬할 수 있었던 가문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後代)에 편찬된 족보(族譜)에서는 세계(世系)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시조(始祖)와 상대(上代)의 기록이 허위이거나, 적어도 과장(誇張)· 왜곡(歪曲)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성씨(姓氏)와 본관(本貫)을 바꾸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4. 본관(本貫)을 바꿈
성씨(姓氏)의 사용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부터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6· 7세기경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각지의 호족(豪族)들에게 그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성씨(姓氏)를 나누어줌으로써 성(姓)과 본관(本貫)을 토대로한 성씨(姓氏)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지방의 군현(郡縣) 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됨에 따라 지역을 세분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던 본관(本貫)이 15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주읍(主邑) 수령(首領)이 파견된 군현(郡縣)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즉 속현(屬縣)·촌(村)및 향(鄕)·소(所)·부곡(部曲)등이 소속 군현(郡縣)에 통합되거나 소멸됨으로써 그곳을 본관(本貫)으로 했던 성씨(姓氏)는 당초의 본관(本貫)을 버리고 소속 군현(郡縣) 성(姓)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主邑)을 그들의 새로운 본관(本)으로 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관(本貫)을 서로 달리하던 동일(同一) 성씨(姓氏)가 같은 본관(本貫)을 쓰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으며, 이들 동성(同姓) 상호 간에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점차 동성동본(同姓同本)으로 취급되었다.
본관(本貫)이 바뀌는 것은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문벌(門閥)의식이 고조(高潮)되면서 저명한 조상(祖上)이 없는 가문에서는 기존의 명문거족(名門巨族)에 동화(同化) 하기 위해 본관(本貫)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기도 하였다.
5. 가짜 족보(族譜)
조선시대 신분제(身分制) 사회에서 양반(兩班)이 아니면 상놈이고, 상놈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상민(常民)들이 군역(軍役)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族譜)를 위조하여 양반(兩班)이 되는 사례를 지적하였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현족(顯族)의 족보(族譜)에 이름을 기록하여(일명 붙이기) 군역(軍役)에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상민(常民)과 천민(賤民)들은 그들의 시조(始祖)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족보(族譜)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동족(同族)의 혈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들이 족보(族譜)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반(兩班)이 되기 위함이지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이들에게 필요하는 족보(族譜)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양반(兩班)의 족보(族譜) 일 수밖에 없었다. 가짜 족보(族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상민(常民)과 천민(賤民)들만이 아니었으며, 더 훌륭한 가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싶었던 양반(兩班)의 경우에도 더 높은 문벌가문(門閥家門)이 되기 위하여 가짜 족보(族譜)를 만들게 되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성(姓)과 족보(族譜)를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양반(兩班)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원래 우리 모두는 성(姓)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우리 모두 양반(兩班)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모두가 조상(祖上)들에 의해서 양반(兩班)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문음(門蔭) : 공신이나 고위 관리의 자제에게 과거에 의하지 않고 벼슬을 제수하는 것[음서(蔭敍)]
◇현족(顯族) : 이름난 사대부 가문의 명문거족.
야촌 2009.06.0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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