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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류재 이공 비(四留齋 李公 碑)

야촌(1) 2009. 5. 15. 16:20

■ 연안 사류재 이공(延安 四留齋 李公 碑)

     사류재 이정암(四留齋 李廷馣)을 말함.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지난 만력(萬曆) 신묘 년에 상(上)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이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한쪽 구석을 의지하여 이웃 나라에 공갈 위협을 가하다가, 침학 행위를 우리에게 자행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중국을 침략할 목적에서, 스스로 영웅인 체 교만을 부리면서 불손한 말을 내뱉고 있으니, 그 화복(禍福)의 이치를 엄중히 유시하여 간악하고 광패한 행동을 미리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종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임진년에 수인(戍人)이 달려와서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했다고 외치었다. 이때 왜구는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재를 넘고 호수를 건너서 무엄하게 내지(內地)를 밟아 들어와 잠깐 동안에 드디어 우리 사경(四境)을 크게 유린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수군(水軍)으로 한산(閑山)을 거수(拒守)하면서 적의 예봉을 해상에서 꺾었고, 절도사(節度使) 김시민(金時敏)은 고군(孤軍)으로 진양(晉陽)을 지키면서 남주(南州)의 난(難)을 방어하였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의병(義兵)으로 연안(延安)을 지키면서 앞에서 충성을 떨치었고, 원수(元帥) 권율(權慄)은 남군(南軍)으로 행주(幸州)에 주둔하여 뒤에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또 마침 천조(天朝)의 대장군(大將軍)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평양(平壤)의 적을 격파함으로써 성세(聲勢)가 신장되어 서로 사방에서 기각(掎角)의 형세로 적을 협공하여 우리 삼경(三京)을 수복하고 재차 팔도(八道)를 온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천자(天子)가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금(金)을 하사하였다. 그래서 이에 천하의 유담(游談)하는 이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무부(武夫)는 그것이 직무이거니와, 유자(儒者)도 또한 그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을사년에 상이 공신(功臣)으로 책 록 하여 상(賞)을 내렸다. 또 그로부터 4년 뒤인 무신년에 연안인(延安人)으로 공의 공적을 기재해서 영원히 전하기를 꾀하는 이가 있어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하였는데, 사양해도 되지 않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고(故)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월천군(月川君이공(李公)의 휘는 정암(廷馣)이고 자는 모()이다.

 

공이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에 주상(主上)이 서쪽으로 몽진하면서 공의 아우인 정형(廷馨)이 앞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은혜를 끼친 것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여 정형에게 개성에 머물러서 진무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정형이 형과 함께 가서 지키기를 요청하여 공과 함께 갔었다.

 

그랬다가 임진(臨津)의 군대가 궤멸됨에 미쳐서는 공이 형편을 가려서 나누어 지킬 계책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2일에 연안(延安)에 당도하니, 부중(府中)의 유지인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백여 인의 무리를 모아 놓고 공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공의 옛 은혜가 본토(本土)에 있으니,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살려 주기 바랍니다.”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죽을 곳을 얻었도다.”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성(城) 안으로 들어가서 5백여 인을 모집하여 그들을 이끌어 통제하며 말하기를,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사문(四門)의 자물쇠를 관장해 주려는가. 누가 능히 갑옷을 입고 성가퀴에 올라가서 적들로 하여금 감히 참호를 범접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누가 능히 우리 군량을 관장해 주겠는가. 누가 우리 기계(器械)를 수리해 주겠는가.”하고, 재능에 따라 부서를 나누어 편성한 다음, 돈대(墩臺)에는 대포(大砲)를 모아 진열하고, 그 곁에는 솥을 줄지어 걸어 놓으니, 노약자들도 일을 돕고 뭇사람들이 다 직무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달 28일에 적추(賊酋) 장정(長政)이 재령(載寧), 신천(信川) 등 여러 군(郡)을 겁략(劫掠)하고 해주(海州)를 함락시킨 다음, 군사 3천여 인 및 강음(江陰)의 적들을 거느리고 정예한 군대를 총동원하여 쳐들어오자, 성중(城中)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진(陣)을 나가려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민(兵民) 들과 사생(死生)을 함께하기로 약속해 놓고 백성을 죽을 자리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일만 성취하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참으로 몹시 공포를 느끼는 자는 스스로 성을 나가도록 맡겨 두고 너희들을 구속하지 않겠다.”하니, 온 군중(軍中)이 모두 사수(死守)하기를 원하였다. 이날 해가 이미 기울었을 때, 적들이 진격해 와서 세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이윽고 한 적수(賊帥)가 성 밖을 두루 살피고 성루(城壘)에 접근하여 지나가는데 그 형세가 매우 치장하였다. 이때 문장(門將) 장응기(張應棋)가 일전(一箭)을 쏘아 그의 가슴을 관통시켜 죽이자, 적의 사기가 몹시 저상되어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적들이 별도로 서성(西城)에서 비충(飛衝)을 이용하여 성중을 내려다보고 대포(大砲)를 쏘아 대니, 화전(火箭)이 어지러이 발사되었다. 그런데 포위된 안에는 초옥(草屋)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연기와 불꽃이 밖으로 흩어져 버리니, 적의 계책이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적들이 여사(盧舍)를 훼철하여 참호(塹壕)를 메우고, 마침내 북을 울리는 가운데 군졸들이 성벽을 기어올라 떼를 지어 개미처럼 붙어 오르므로, 공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이에 쌓아 둔 마초(馬草) 위에 앉아서 아들 준(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거든 분신 자결(焚身自決)해야 한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감읍(感泣)하여 모두 힘을 합쳐서 함께 죽기로써 싸웠다. 

 

무릇 4일 동안을 이렇게 싸우다 보니, 적들 또한 사상자가 절반을 넘었으므로, 이날 밤에 적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리하여 적들은 이미 죽은 병졸의 시체들을 한데 모아서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야 포위를 풀고 떠났다. 그래서 아군(我軍)은 겨우 적병의 목 18급(級)을 베고, 우마(牛馬)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탈취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上下)가 모두 근심하여 위태롭게 여겼는데, 첩보(捷報)가 이름에 미쳐서는 다만, “적이 모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모일에 포위를 풀고 갔다.”라고만 말하였고, 장황(張皇)한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적을 물리치기는 쉬우나, 자기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上)이 공에게 특별히 가선(嘉善)을 더하여 본도(本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서 문무(文武)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공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인하여 제장(諸將) 이하에게 상을 내렸다.

 

공이 군문(軍門)에 있을 적에 거가(車駕)는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행행하였는데, 공은 몹시 더운 절기에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송경(松京)에 웅거하여 황주(黃州), 봉산(鳳山)에 군영(軍營)을 배열해서 강음(江陰)까지 죽 연결시키고, 패강(浿江)을 위동(危動)시키면서 곧바로 관서(關西)를 요동시켰다.

 

이때 적장 장정(長政)은 바닷가에서 미쳐 날뛰면서 병졸들을 놓아 사방으로 겁략을 자행함으로써 남로(南路)가 막혀 끊어졌었는데, 공이 한바탕 싸움을 벌여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버리니, 적들은 숨이 차고 땀이 흘러서 스스로 겁략을 중지하였고, 꼴 베고 말 먹이는 적들도 감히 공의 성(城) 아래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해서(海西)의 십삼주(十三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남(二南)의 근왕병(勤王兵)들이 아산(牙山), 강화(江華)를 경유하여 용강(龍岡)을 건너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해서 분문(奔問)할 길이 있게 되고 수륙(水陸)의 화물 운송에도 장애가 없게 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공은 경주인(慶州人)으로 나와 시조(始祖)가 같아서 서로 좋게 지냈었다. 나이 18세에 상상(上庠)에 올랐고, 21세에 명경(明經)으로 급제하였다. 잠시 지방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는 백성들이 소두(召杜)로 호칭하였고, 전형(銓衡)에 참여함에 미쳐서는 세상에서 요송(姚宋)으로 기대했으며, 여사(餘事)로 여긴 문장(文章) 또한 세상을 울린 것이 많았다.

 

그런데 불행히 난리를 만나 소륵(疏勒)에 공훈이 빛나서, 국가 중흥의 우두머리가 되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작질이 오르고 공훈이 높아서 큰 제사를 흠향하고, 국은(國恩)이 조선(祖先)에게 미루어져서 일의 기록이 끝없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미 충효(忠孝)를 겸전하였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둘 다 지니었으니, 공과 같은 위인은 참으로 장부(丈夫)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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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비충(飛衝) : 적진(敵陣)에 돌진(突進)하는 병거(兵車)로서, 즉 충거(衝車)의 별칭이다.


[주-02]

소두(召杜) : 지방민(地方民)들이 태수(太守)의 선정(善政)을 칭찬하여 이른 말이다. 전한(前漢) 때 소신신(召信臣)이 일찍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그를 친애(親愛)하여 소부(召父)라 호칭했는데, 후한(後漢) 때 두시(杜詩)가 또 남양 태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남양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소부(召父)가 있었고,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도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3]

요송(姚宋) :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상(名相)인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합칭한 말이다.


[주-04]

소륵(疏勒)에 공훈이 빛나서 : 왜란(倭亂) 때에 왜적을 물리치고 지방민들을 잘 보호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소륵은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인데, 후한(後漢) 때 반초(班超)가 장군으로 서역에 출정(出征)하여 구자(龜玆)에게 멸망당한 소륵을 다시 세워서 오랫동안 돌봐 주어, 심지어는 소륵 사람들이 반초를 부모처럼 의지했던 데서 온 말이다.《後漢書 卷47 班梁列傳》


<白沙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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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延安李公碑 - 李恒福

 

昔在萬曆辛卯。 上謂羣臣曰。日本酋秀吉。塹海負隅。虛喝隣邦。虐始於我。終圖射天。夸慢自雄。出不遜語。其嚴諭禍福。逆折姦猖。毋俾再肆。明年壬辰。戍人走呼。有寇大來。踣釜拉萊。踰嶺涉湖。袒裼而蹈腹內。指顧之頃。遂大鞣我四境。時則有若李統制舜臣。以舟師拒閑山。挫銳海上。有若金節度時敏。以孤軍嬰晉陽。抗難南州。有若李招討廷馣。以義旅守延安。奮忠於前。有若權元帥慄。以南軍鎭幸州。嘬鋒於後。會 天朝大將軍李提督如松。提兵五萬。擊破平壤。聲生勢張。互爲掎角。以能復我三京。再全八路。 天子嘉之。褒 詔賜金。於是天下游談者咸一口言曰。武夫職耳。儒者乃亦爾耶。後十三年乙巳。上策勳頒賞。又後四年戊申。延安人謀所以載烈垂永者。來問銘余。辭不可。謹按。故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 筵,春秋館,成均館事,月川君李公諱廷馣字某。故爲吏曹參議。時 主上西廵。以公弟廷馨。前守開城。寄惠未亡。 命留鎭之。廷馨乞與兄同守。及臨津師潰。公擇形便爲分守計。以是年八月二十二日。至延安。府中豪傑有宋德潤,趙光庭等。聚徒百餘。迎曰。公有舊恩。在本土乞留活我。公笑曰。吾今日得死所矣。卽入城。募得五百餘人。提衡以勒之曰。疇能爲我管四門鑰。疇能坐甲登陴。使賊不敢近壕。疇能管我粮餉。疇繕我器械。隨才部分訖。聚礟於墩。列釜於傍。老幼趍事。羣能看職。二十八日。賊酋長政。刦掠載,信諸郡。攻陷海州。以兵三千餘人與江陰之賊。悉銳而來。城中色駭。有欲出陣計者。公曰。我旣與兵民約同死生。陷民自濟。所不忍也。良怖甚者。任自出城。不汝拘也。一軍咸願死守。日旣昗。賊進圍三匝。俄有一賊帥周觀城外。摩壘而過。勢益張甚。門將張應祺一箭洞胸而死。賊氣死。不敢輕出。別於西城以飛衝。下瞰城中。以大砲碎之。則亂發火箭。圍中多草屋。人皆心內惧洶洶。忽廻風大起。烟焰外靡。賊計無奈何。撤廬舍塡壕塹。遂皷士陵城。羣而蟻附之。公知不可爲。乃坐積蒭。戒其子濬曰。城陷可自焚。聞者感泣。一力而齊致死。如是者凡四日。賊亦死傷過半。是夜師熸。賊已聚死屍盡焚之。翌朝。乃解圍去。我軍僅斬一十八級。奪牛馬九十餘疋。軍粮一百三十餘石。朝廷聞公被圍。上下憂危。及捷至。只言賊以某日圍城。以某日解去。一無張皇語。議者咸言却賊易。不伐功尤難。 上特加嘉善。爲本道都廵察使。文武將官。皆聽公節制。仍賞諸將以下。公之在兵。 車駕西狩龍灣。隆景持重兵據松京。列營黃,鳳。連綴江陰。危動浿江。直搖關西。長政猖海?濱。放兵四刦。南路阻絶。公一戰而剪其觜距。賊喘汗自戢。蒭牧不敢近公城下。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二南勤王之士。由牙山,江華。渡龍岡達 行在。奔問有路。漕輓無碍。公之力也。公慶州人。余同自出相善。年十八。陞上庠。二十一。明經及第。少試郡邑。民呼召杜。及參銓衡。世期姚宋。餘事文章。亦多鳴世。不幸遭亂。功光䟽勒。弁冕中興。精神汗竹。秩登勳尊。享有元祀。 恩推祖先。事載無止。旣全忠孝。兩有文武。作人如公。寔維丈夫。<끝>

 

백사집 > 白沙先生集卷之三 /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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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川府院君李公神道碑銘 幷序 - 宋時烈

 

壬辰延安之戰。載在國乘。野史至今談之者。莫不壯其事偉其忠而如見其人焉。今觀李公行狀一通。又知公之忠勇。性於天養於素。而非一朝臨亂慷慨者比也。公諱廷馣。字仲薰。上世有謁平佐羅祖。賜籍于慶州。歷高麗入本朝。世有聞人。曾祖諱莒。登第。嘗爲獻納。有諫臣風。卒官監正。祖諱達尊。進士。考諱宕。社稷令。始爲訓導官。多所成就。妣義城金氏。通政應辰之女。公生而聰慧。八歲。能屬文。十二三。已有能詩聲。十八。進士。十九。魁課試。二十一。及第。由槐院爲翰林注書。陞典籍。爲工禮曹佐郞。明廟薨。適詔使至。公爲諸公所任。吉凶儀節。多所講定。改兵曹郞。歷全羅咸鏡京畿都事。間爲禮兵刑正郞。兼知製敎。奉命覆審江原京畿災傷。爲正言。請削乙巳僞勳。爲持平。欲論當路不法事。當路覺之。駁遞之。以直講兼春秋館。與修明廟實錄。自後出爲延安,長湍,楊州,平山。入則爲諸司官。低徊宂散者十三年。其在延安。決大訟。權貴人銜之。卽棄歸。在楊州。大修鄕校及道峯書院。癸未。栗谷先生建白設纂修廳。招集文學人。公與焉。拜掌令,司成,掌樂正。遭喪服除。復正諸司。朝廷以倭奴爲憂。拜公東萊府使。秀吉遣使來。先是倭人之來。官吏多賂賄。公與邊將約束痛絶。又所給倭人稅米。例和水使脹。以足其數。過海則爛不堪食。公以爲此非誠信交隣之道。卽禁切之。瓜遞。爲判決事。折訟不顧勢力家。拜大司諫,承旨,工曹參議。自後多在政院爲承旨矣。壬辰四月。倭寇猝至。公時爲吏曹參議。語夫人曰。國事至此。不如自盡。遂經于房裏。賴救者不死。時大駕已西幸。公追及於松都。公弟廷馨爲松都留守。請曰。臣兄無職事。願與同事。許之。大駕旣向關西。公知松都難守。負母夫人過延安。延安人喜迎曰。是我舊使君也。時賊入海西。通誘列邑曰。迎者賞逃者斬。以是吏民牛酒市歸。公遂傳檄遠近。諭以逆順。仍招集義旅。金公德諴,趙公廷堅等來會。遂得數千官兵。王世子聞之。以便宜拜公招討使。公遂入延安城。建大將旗。書奮忠討賊四字。賊乘未備。悉收諸屯賊來攻。煙焰漲天。人皆勸公避去。公奮曰。經幄老臣。旣不得執靮從君。則當乘一障以效死。豈可苟活。況諭民入城。何忍棄之。遂下令曰。不願留者皆去。仍令奴積草而坐曰。城陷。汝便火之。城中皆感奮。賊遂四合。聲振天地。公益安閒無怖色。夜半令吹角。諸軍及老弱男女。皆吶喊以應之。若將出戰然。賊甚疑懼。乃作飛樓。俯臨城中。公以大砲中碎之。賊又積草塡塹。四面蟻附。公預作灼鐵大炬。一齊投下。忽東風大作。焰衝發。賊大挫却。公簡銳突出。斬獲甚多。賊復百道攻城。公隨機應變。殺傷無數。賊不能支。焚尸宵熸。公遣兵追之。獲其所掠。以與士卒。特旨超授同知中樞府事。贈官其考。王世子亦下書褒美。初公獻捷。只曰賊某日圍城。某日解去。論者服其不伐。自是遠近聞風。皆據營壘以禦賊。賊退據白川。自秋至翌年春。日來索戰。知不可犯。遂棄白川遁去。以兵曹參判。召至行在。俄拜全州府尹。旋爲全羅監司。天將顧養謙主和。將奏封秀吉。欲令我同奏。公上其事。上怒欲罪公。賴牛溪及諸宰。只遞職。旋復授全州府尹。擒誅土賊鞫僞伏。移按忠淸道。會李夢鶴叛旣平。臺諫劾公濫殺。已而上超加知中樞府事。兼黃海道都巡察使。陛辭。引見慰諭。解賜貂裘。丁酉。以事罷。母夫人歿于僑居。會倭寇再逞。有命起復。辭不許。俾守延安。公上箚論時事十條。不報。賊退。還喪次。服闋。屢辭除命。仍居鄕里。每朔望。朝服望闕拜。庚子。懿仁王后薨。入臨還。其年九月十日卒。將卒。自書二挽以見志。享年六十。公自少有忠孝大節。聰明秀發。目光炯然。觀書五行俱下。讀不過五遍。終身不忘。未娶。有醜而貴者。求以妻之。公不許。尹元衡居比隣要相見。亦不肯。又知鄭汝立兇悖。擧世推許。而公痛絶之。坐枳仕途而不悔也。天將劉綎贈公白金。公不敢受。封納朝廷。立朝四十餘年。而卒之日。無甔石之資。有喪禮抄,讀易考證倭變抄,詩文若干卷。其餘著述。皆失於兵火。自號四留居士。後改以退憂。夫人坡平尹氏。光富之女。仁善好施與。先沒而祔焉。公事親。人稱老萊子復生。而公則曰。繄內之助云。男澕縣監。湳贈刑曹正郞。濬直長。湋贈工曹佐郞。沔奉事。二女適宋廷光,尹漵。縣監男慶長,慶成。壻守門將孫虎臣,趙庭堅,文科申易于。刑曹妻閔氏。遇賊死節。男慶胤。壻吳慶餘。直長壻司藝鄭道亨,沈誼。工曹男慶蘭。奉事男慶久,慶厚,慶隆。壻羅孝彰,執義成台耇,鄭維頀。宋廷光男以隆,以昌,以亨。壻金自躍,林茂,李深根。尹漵壻兪企曾也。公沒後。錄勳追贈左議政月川府院君。諡忠穆。又特命旌閭。延安人爲立祠。春秋俎豆焉。公後承甚多。長曾孫武科承旨靖。賢而無嗣。爲其後而主公祀者。慶蘭孫希賢也。今請文樹碑者。慶隆及司藝男經歷鄭勔也。余先人每言壬辰四月十三日曉。將詣闕下。公策馬西走謂曰。大駕出。而亦使吾輩不知矣。於是始知上夜發也。因涕泣言當時事矣。今茲序公。怳如隔前晨矣。竊不勝愴然而悲也。銘曰。

公始在家。文藝孝友。其在王朝。頹然固守。逢世之亂。乃奮身手。詩書干櫓。仁義介胄。用不缺折。功莫與懋。聖主褒加。而公不有。雖不有之。卒遌其垢。故於登庸。人先己後。喪亂纔平。長城遽頹。上思其忠。聿有榮哀。丹書鐵券。追上雲臺。非公所期。實惟倘來。我觀厥成。以究根基。苟無其孝。忠焉用移。旣全其德。慶譽無虧。錢浦之東。寺前江月。是公遺詞。千古瑩澈。

[주-D001] 煙 : 煙一作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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