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송암 김면선생유고.

■ 송암선생유고(松菴先生遺稿) >형태서지 권수제 송암선생유고(松菴先生遺稿) 판심제 송암선생유고(松菴先生遺稿) 간종 활자본(木活字) 간행년 1885년경 간행 권책 3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0×17.0(cm) 어미 上三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811.97/김면/송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5 >저자 성명 김면(金沔) 생년 1541년(중종 36) 몰년 1593년(선조 26) 자 지해(志海) 호 송암(松菴) 본관 고령(高靈) 특기사항 조식(曺植), 이황(李滉)의 문인.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박성(朴惺) 등과 교유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1 4월 2일, 高靈郡 良田洞에서 태어나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지은 서호수의 아들인 서유구가 만년에 저술한 농업백과사전으로,《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또는《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라고도 한다. 총113권 5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16개의 부분으로 나뉜 논저로 구성되는 이 책은 실학파의 학문적 업적을농정학적인 분야에서 체계화하고 총정리하여 필사한 저술이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전원생활을 하는 선비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설명하기 위한 생활과학서의 성격을 띤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내용 가운데는 농기(農器)의 도보(圖譜)와 전국의 시장 날짜가 들어 있다. --------------------------------------------------------..

첩의역사

한국 문학의 사회사 중에서 / 임종국 저 ■첩의 역사 첩(妾)은 접(接)과 서로 통하니 는 의미가 포함된다. 즉 남녀가 정식 부부가 되지 않고 그냥 접근해서 사는 형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다처(多妻)주의에서 유래했으니 일찍이 요임금은 정비(正妃) 이외에 3명의 차비(次妃)를 거느렸다. 하우씨(夏禹氏)는 도합 12명을 거느렸고, 주나라 시대에 그 수효는 후(后) 1명, 부인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시녀(侍女) 81명을 합쳐서 121명으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기 내칙편(內則篇) 주(註)는 그 규칙을 말하고 있었다. 천자(天子)는 어처(御妻, 시녀) 81명이 9일을, 세부 27명이 3일을, 빈 9명이 1일을, 부인 3명이 1일을, 후 1명이 하룻밤을 나누어 모시..

조선후기 서적수입과 장서가들

■ 조선후기 서적수입과 장서가들 부산대 강명관 교수가 ≪민족문학사 연구≫ 제9호에 발표한 논문 의 요약분을 출판저널 제198호(1996년 6월 5일)에서 옮긴다. 북경의「유리창」이 공급원. 인간 영역의 중국서적 수입이 이루어 지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부터의 일이다. 경전 따위 고전적 저작물이나 실용서는 그 전에도 많이도 수입되었지만 중국 당대의 문인 지식인들의 저작들은 16세기 말경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 지식층의 독서범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1558~1639)는 당시 조선인의 서적 구입열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선인은 책을 가장 좋아한다. 사신의 입공(入貢)은 50인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옛 책과 새책, 패관소설로서 조선에 없는것을 날마다 시중에 나가 책의 ..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폐지하고 조용(調用)을 청하는 상소

■ 서얼(庶孽)의 험난한 벼슬길 나라에서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태종(太宗) 을미년(1415, 태종 15)부터 시작되었는데, 실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때문이었지만 정도전의 손자인 문형(文炯)은 그래도 판중추사(判中樞事)를 지냈다. 관습이 점차 고질이 되어 인조(仁祖) 즉위 초에 처음으로 병조와 형조, 공조에 한하여, 허통(許通)을 허락하였으나 역시 이를 적용받은 서얼은 얼마 없었고, 영조(英祖) 임진년에 처음으로 서얼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를 달가워 하지 않아 시행한지 5년 만에 다시 막히게 되었다. 또 금상(今上)께서는 이를 절목(節目)으로 정하여 반포하셨으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에서 여전히 묻어 두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얼금고..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의 건의로 순절인 이경징 등을 치제케 하다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년) >영조 31년 12월 >영조 31년 12월 20일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강하였다. 입시(入侍)한 영사(領事)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고(故) 지평(持平) 채성귀(蔡聖龜)는 여러번 상소하여 척화(斥和)하였고,병자년 이후에는 이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폐인(廢人)으로 자처하였는데, 지은 시율(詩律)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주절의(尊周節義)는 실로 표장(表章)할 만하니, 통정(通政) 직(職)을 추증(追贈)하여 풍교(風敎)를 세움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아뢰기를, “고(故) 대사헌(大司憲) 이목(李楘)이 병자년에 척화를 한 것은 윤황(尹煌) 등 여러 사람과 명성이 같으니, 마땅히 증시(贈諡)의 은전(恩典)..

민진홍 선생의 배위 선계를 찾습니다.

질의자 : 민황기 2010년 5월 5일 21:21 안녕하세요? 귀 문중의 무궁한 발전과 번창을 기원합니다. 저의 선조 여흥 민진홍 선생의 배위(配位)이신 이뢰(李賴)선생의 따님 경주이씨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민진홍(1689년-1742년)선생은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신 입암공 휘 제인의 6대손이며 민하중선생이 선고가 됩니다. 경주이씨 할머니의 파조는 누구시며 관직은 무엇을 하셨고 조부는 누구신지 그 밖에 주목되는 선계도 알고 싶습니다. 적절한 안내와 협조 부탁드리며 거듭 귀문의 건승을 앙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민황기 배상. ------------------------------------------------------------------------------------------------------..

변한국대부인유씨묘지명 병서(卞韓國大夫人柳氏墓誌銘 幷序)

■ 변한국 대부인 유씨 묘지명 병서 (卞韓國 大夫人 柳氏 墓誌銘 幷書) ◇국재공 권부 배위(菊齋公 權溥 配位) ◇익재 이제현의 장모님 이제현 찬(李齊賢 撰) 자서(子壻) 추성량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이동사 영예문관사 상호군(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二同事領藝文館事上護軍) 이제현(李齊賢)이 찬(撰)하고, 증손(曾孫) 선무장군 합포진변 만호부만호 봉익대부우상시(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 권용(權鏞)이 전자(篆字)로 쓰다. 시령 유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이 있었는데 태조(太祖)를 도와 공이 있었고, 그의 7세손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은 문학으로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우복야(右僕射) 택(澤)을 낳았으며, 복야공이 시중 문정공(侍中文..

영가부원군 권보 묘지명/익재 이제현 찬

■ 영가부원군 증시문정권공묘지명 병서 / 익재 이제현 장인 (永嘉府院君 贈諡文正權公墓誌銘 幷序) 이제현 찬(李齊賢 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 삼중대광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 영가부원군 증시문정권공묘지명 병서 (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 三重大匡 脩文殿大提學 領都僉議使司事 永嘉府院君 贈諡文正權公墓誌銘幷序) 사위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良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이제현(李齊賢)이 짓고, 증손 선무장군 합포등처 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武將軍 合浦等處 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玄成君) 권용(權鏞)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씀. 대덕(大德)신축년(1301년 충렬 27)에 국재(菊齋) 권문정공(權文正公)이 과거[春官]를 맡았을 때에 제현(齊賢)이 다행히 병제(丙第)에..

민제인 신도비명(閔齊仁 神道碑銘)

■ 민제인 신도비(閔齊仁 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668년(현종9년)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315cm, 너비 108cm, 두께 21cm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면우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수항(金壽恒) ● 개요 1668년(현종9)에 세워진 민제인(閔齊仁)의 신도비이다. 찬자인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후기 문신 겸 주자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다. 서자는 송준길(宋浚吉,1606~1672), 각자는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다. 민제인(1493~1549)은 조선중기 중종, 인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으로, 전적(典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