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변한국대부인유씨묘지명 병서(卞韓國大夫人柳氏墓誌銘 幷序)

야촌(1) 2010. 5. 7. 22:57

■ 변한국 대부인 유씨 묘지명 병서

   (卞韓國 大夫人 柳氏 墓誌銘 幷書)

 

◇국재공 권부 배위(菊齋公 權溥 配位)

◇익재 이제현의 장모님

 

이제현 찬(李齊賢 撰)

 

자서(子壻) 추성량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이동사 영예문관사 상호군(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二同事領藝文館事上護軍) 이제현(李齊賢)이 찬(撰)하고, 증손(曾孫) 선무장군 합포진변 만호부만호 봉익대부우상시(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 권용(權鏞)이 전자(篆字)로 쓰다.


시령 유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이 있었는데 태조(太祖)를 도와 공이 있었고, 그의 7세손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은 문학으로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우복야(右僕射) 택(澤)을 낳았으며, 복야공이 시중 문정공(侍中文正公) 휘 경(璥)을 낳았으며, 문정공이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 정신공(貞愼公) 승(陞)을 낳았는데,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보(洪)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부인을 낳았다.


13세에 권씨(權氏)에게 시집가서 지금 영첨의사사 영가부원군(領僉議司事永嘉府院君) 국재공(菊齋公)의 아내가 되었다. 구고(舅姑)에게 효도하고 친척에게 인후하며 자손을 예의로 가르치고 비첩(婢妾)을 의리로 부리며, 얼굴에 분(粉)을 바르지 않고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무당ㆍ여승ㆍ점ㆍ비는 일 등을 드물게 말하고, 원금과 이자 계산하는 것을 마음에 부끄럽게 여겼으며, 국재공과 동거(同居)한 지 67년 동안 시종 조그마한 거역도 없이 화열(和悅)하였다.

 

지정(至正) 4년(1344년 충목왕 즉위) 8월에 병을 얻어 임술일(壬戌日)에 훙(薨)하였는데,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사를 돕게 하매 국재공이 사양하니, 왕이 특별히 변한국 현신화숙대부인(卞韓國賢信和淑大夫人)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그해 9월 갑진일(甲辰日)에 덕수현 발송원(德水縣鉢松原)의 북쪽에 하관(下棺)하니 예에 따른 것이다.


아들 준(準)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이요, 종정(宗頂)은 출가하여 조계종 도총섭대선사(曹溪宗都摠攝大禪師)가 되었고, 고(皐)는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요, 후(煦)는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인데 덕릉(德陵)이 양자로 삼아 종부시(宗簿侍)에 부적(附籍)하였고, 겸(謙)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다. 세 아들이 모두 원 나라의 조서(詔書)를 받아 준과 겸은 모두 만호(萬戶)가 되었고 후는 군공(郡公)이 되었다.


맏딸은 밀직 우부대언(密直右副代言) 안유충(安惟忠)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종실(宗室) 순정대군(順正大君) 왕도(王璹)에게 시집갔고, 넷째딸은 종실 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에게 시집갔다.

 

세 사위 또한 원 나라의 조서를 받아 안유충은 만호요. 이제현은 단사관(斷事官)이요 왕도는 몽고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내외의 모든 손자와 증손자가 남녀 모두 1백여 명이므로, 매양 세시(歲時)에 모일 때면 수레와 일산이 문을 메웠고 주자(朱紫 관리의 등급을 나타내는 옷의 빛깔로 고관을 가리킨다)가 뜰에 가득하였으며, 현손들이 부인의 앞에서 채화(綵花)를 희롱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아, 성하도다! 어찌 선을 쌓은 보람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권공(權公)의 문생일 뿐만 아니라, 공을 장인이라 부르고 공은 나를 사위라 하는도다. 

변한국 대부인이 훙하매 공이 나에게 명하여 명(銘)을 지으라 하였도다. 

느끼어 생각나는 회포를 이 글에 붙였으니 친혐(親嫌)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았도다.

 

그러나 부인은 능히 구고(舅姑)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온순하여,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면서 함께 팔순(八旬)을 살았고, 위의(威儀) 있는 자손이 수없이 많도다. 살아서는 작명(爵命)을 받았고 죽어서는 시호(諡號)를 받았도다. 

 

일생의 애환(哀歡)이 곽분양(郭汾陽)과 같았으니, 나의 글이 아니라도 으레 끝없는 세대에 꽃다운 이름을 전하리라.


[주01]곽분양(郭汾陽) :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를 말하는데 분양은 봉호(封號)다.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웠다. 《唐書 卷一百三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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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변한국대부인유씨묘지명 병서

   (卞韓國大夫人柳氏墓誌銘 幷序)

 

子壻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領藝文館事,上護軍李齊賢。譔。曾孫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權鏞。書篆。

 

始寧柳氏。自國初爲著姓。有大丞車達者。佐太祖有功。其七世孫文簡公諱公權。以文學參大政。生右僕射諱澤。僕射生侍中文正公諱璥。文正生知僉議司事貞愼公諱陞。娶同知樞密院事洪諱縉之女。是生大夫人。年十三。歸權氏。爲今領僉議司事永嘉府院君菊齋公之室。孝舅姑。仁親戚。敎子孫以禮。使婢妾以義。不御鉛華。不服文綉。巫尼卜祝。罕言於口。子母利息。恥計於心。與菊齋公居六十七年。終始無小忤。雍雍如也。至正四年甲申八月感疾。壬戌薨。王聞訃。命有司襄葬事。公辭焉。則特贈諡卞韓國賢信和淑大夫人。其年九月甲辰。窆于德水縣鉢松原之北。禮也。男曰準。吉昌府院君。曰宗頂。出家爲曹溪宗都摠攝大禪師。曰皐。知僉議司事。曰煦。雞林府院。大君德陵養爲子。附籍宗簿寺。曰謙。僉議贊成事。三子受元朝宣命。準,謙皆爲萬戶。煦郡公。女適密直右副代言安惟忠。次適判三司事李齊賢。次適宗室順正大君王璹。次適宗室淮安大君王珣。三壻亦受宣命。惟忠萬戶。齊賢斷事官。璹蒙古翰林學士。內外諸孫及曾孫男女一百有餘人。每歲時內集。軒蓋塡門。朱紫盈庭。至有玄孫之戲綵于前者。嗚呼盛哉。豈非積善之報也。銘曰。予於權公。匪惟門生。謂公曰舅。公謂我甥。卞國之薨。公命作銘。感念之懷。得寓斯文。自不計於親嫌之倫也。然其克孝於姑。克順於夫。相敬如賓。偕登八旬。兒孫棣棣。百十其麗。爵命其膺。諡策其承。哀榮終始。女中汾陽。微予之辭。固足以歷世而流芳者矣。

益齋亂稿卷第七

 

至正四年九月日。刊。

 

자료 :익재난고(益齋亂藁) >益齋亂稿卷第七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