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문집.고서.문헌

조선후기 서적수입과 장서가들

야촌(1) 2010. 5. 15. 07:35

■ 조선후기 서적수입과 장서가들

 

부산대 강명관 교수가 ≪민족문학사 연구≫ 제9호에 발표한 논문 <조선후기 서적의 수입. 유통과 장서가의 출현>의 요약분을 출판저널 제198호(1996년 6월 5일)에서 옮긴다.

 

북경의「유리창」이 공급원.

 

인간 영역의 중국서적 수입이 이루어 지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부터의 일이다.

경전 따위 고전적 저작물이나 실용서는 그 전에도 많이도 수입되었지만 중국 당대의 문인 지식인들의 저작들은 16세기 말경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 지식층의 독서범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1558~1639)는 당시 조선인의 서적 구입열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선인은 책을 가장 좋아한다. 사신의 입공(入貢)은 50인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옛 책과 새책, 패관소설로서 조선에 없는것을 날마다 시중에 나가 책의 목록을 배껴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두루 물어보고 비싼값을 아끼지 않고 구입해 간다. 그래서 조선에 도리어 이서(異書)의 소장본이 있다.

 

조선 지식층의 중국서적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증폭된다.

임진왜란 후, 중국인이 대거 입국해 중국인과 접촉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중국 문단이나 책에 대한 정보를 소상히 알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허균(許筠)의 경우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북경에 갔을 때, 4천권의 책을 사왔고 이의현『李宜顯(현종 10)~1745(영조 21>영조때의 영의정』 도 1720년 북경에 갔을때 서화를 제외하고도 53종 1416권의 책을 사왔다.

 

책은 주로 북경의 거대한 서적 시장이었던 유리창에서 구입했다.

명나라 말기 이래 강남 지방에서 민간 인쇄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고. 여기사 출판된 책들이 유리창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유리창 서점가가 특히 번성하게 된것은 건융(1735~1796) 때 부터인데, 이 무렵(1766)에 북경에 갔던 실학자 홍대용은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서점은 일곱이 있다. 3면 벽으로 돌아가며 수십층의 시렁을 달아매고 상하로 부서별(분야별) 표시를 해서 질서 정연하게 진열해 두었는데, 각 권마다 표지가 붙어있다. 한 점포 안의 책만도 수 만권이나 되어 고개를 들고 한참 있으면 책 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 진다.

 

당시 북경에는 서반(序班) 이라는 말단 구실아치들이 있어 이들이 부업으로 서적 중개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조선 사신들이 책을 사고 싶으면 역관을 통해 이들에게 의뢰했다. 한편 국내에서 서적의 유통을 맡은 것은 역관과 서쾌라는 서적 중개상이었다.

 

역관이 중국에서 책을 수입해 오면 서캐들이 국내 판매를 담당했다.

이들은 또 몰락한 양반 집안의 가장(家藏) 서적이 시중에 흘러나오면 이를 재차 유통시켰다.

이들이 장서가의 출현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서울 장안에 서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말경 부터의 일이다.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면 종각과 광통교(광교) 일때, 그리고 오늘의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에 서화와 서적시장이 형성된다. 이렇듯 시정에서 책의 유통이 활발해진 것도 장서가의 출혈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자자손손 대를 물린 장서가들

 

19세기 문인 홍한주(洪翰周)는 어느 글에서 중국의 이름난 장서가와 함께 우리나라의 장서가를 소개하는 가운데 심상규(沈象奎), 조병귀(趙秉龜), 윤치정(尹致定), 서유구(徐有榘)등과 이경억(李慶億)의 집안을 대표적인 장서가로 꼽았다.

 

이밖에도 서울에서 천권, 만권 정도의 장서가는 일일히 손으로 꼽을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18, 19세기의 대표적인「경화세족(京華世族)」임은 물론이다.

 

그중 4만권 이상을 소장했다는 심상규『沈象奎 : 1766(영조 42)~1838(헌종 4)』는 당대의 명문인 청송심씨로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3-4만권을 소장했던 조병구(趙秉龜) 1801(순조 1)~1845(헌종 11)는 풍양조씨 세도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만영趙萬永: 1776(영조 52)~1846(헌종 12)』의 아들이다.

 

이 집안은 조엄(趙曮)→조진관(趙鎭寬)→조만영(趙萬永)→조병귀(趙秉龜)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벌열 가문이다. 한편 이경억(李慶億) 가문의 장서란 실제로는 이하곤(1677∼1724)의 장서를 말한다.

 

이하곤(李夏坤)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그의 가계(家系)는 이시발(李時發, 형조판서)→이경억(李慶億, 좌의정)→이인엽(李寅燁, 이조판서, 대제학)→이하곤(李夏坤)으로 이어지는 명문가이다.

 

이하곤(李夏坤)1711년 충청도 진천으로 낙향. 서재 이름을 만권루(萬券樓)라 짓고, 책을 몹시 사랑하여 누가 책을 파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그것을 샀고, 비록 병석에 있을 적에도 하루도 손에서 책이 떠난 적이 없었다.한다.

 

실학자인 서유구『徐有榘, 1764(영조 40)~1845(헌종 11)』는 달성서씨로 헌종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가계 역시 서문유(徐文裕 : 형조. 예조판서. 중추부지사)→서종옥(徐宗玉 : 이조판서. 우참찬)→서명응(徐命膺 : 각조의판서. 대제학 수어사)→서호수(徐浩修 : 규장각직제학)→서형수(徐瀅修 : 이조참판)→서유구(徐有榘)로 이어지는 혁혁한 벌열 가문이다.

 

서유구의 장서는 그의 아버지 서형수의 장서를 물려받은 것이니 2대 이상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

서형수는 집뒤에 당(堂)을 지어 만권의 책을 그 안에 쌓아놓고 집안의 자제들에게 그곳에 모여 학업을 닦게 했는데,「자손 중에 반듯이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리라」는 뜻에서 당호를 필유당(必有堂)이라 이름 했다.

 

이밖에도 이름난 장서가들이 많았다. 숙종때, 소론의 영수로 여덟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1646∼1715 /전주최씨). 영조때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원인손(元仁孫,1721~1774 우의정/원주원씨), 순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수(李時秀, 1745~1821, 영의정)와 대제학을 지낸 이만수(李晩秀, 1752~1820)연안이씨 형제, 그리고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조순(金祖淳,1765~1832. 순조의 장인 영안부원군)의 가문 등을 꼽을수 있다.

 

이상의 인물들은 거의 예외없이 18, 19세기의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가문 출신이다. 이들의 장서 취미는 단순히 서적의 집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장서를 골동서화와 함께 그들 특유의 세련된 생활취미, 생활문화로 발전시켰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중국 서적의 대량 유입과 장서가의 출현은 18,19세기의 문학과 학문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유행과 문체의 변화, 고증학풍의 성립 등은 그 특정적인 징후들이다. 이는 나아가 정권과 체제의 안정을 동요 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