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첩의역사

야촌(1) 2010. 5. 15. 13:16

한국 문학의 사회사 중에서 / 임종국 저

 

■첩의 역사

 

첩(妾)은 접(接)과 서로 통하니 <붙는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즉 남녀가 정식 부부가 되지 않고 그냥 접근해서 사는 형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다처(多妻)주의에서 유래했으니 일찍이 요임금은 정비(正妃) 이외에 3명의 차비(次妃)를 거느렸다.

 

하우씨(夏禹氏)는 도합 12명을 거느렸고, 주나라 시대에 그 수효는 후(后) 1명, 부인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시녀(侍女) 81명을 합쳐서 121명으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기 내칙편(內則篇) 주(註)는 그 규칙을 말하고 있었다.

천자(天子)는 어처(御妻, 시녀) 81명이 9일을, 세부 27명이 3일을, 빈 9명이 1일을, 부인 3명이 1일을, 후 1명이 하룻밤을 나누어 모시는 법이었다.

 

제후는 9명의 처첩을 거느리되 부인 1명이 하루를, 첩 2명이 하루를, 시녀 6명이 하루를 번갈아 모셨다.

그리고 경대부(卿大夫)는 1처에 2첩을 두었으며, 사대부는 1처 1첩을 두는 법이었다.

 

이러한 제도가 한국에는 3국 시대에 이미 수입이 되어 있었다.

즉 고구려 유리왕에게는 왕비 송씨 이외에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두 첩이 있었다.

 

왕비가 죽가 화희는 치희를 시샘하여 모욕을 주었다.

치희가 고국인 한(漢)나라로 돌아가자 왕은 슬퍼한 나머지에 <황조가>를 지었다는 사화(史話). 이렇게 시작한 풍습이 후세에는 남성 전제(專制)의 횡포로서 관습 및 제도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첩이라면 측실(側室), 부실(副室), 별실(別室), 소실(小室), 소가(小家)로도 불려지는데 정처(正妻)인 정실(正室), 본처(本妻)에 비해서 하나같이 비하한 명칭이다. 따라서 첩이라면 <둔다>, <얻는다>, <본다>, <살린다>는 식으로 물건이나 동물을 다루는 동사를 이용했다.

 

그뿐 아니라 본처는 <댁(宅)>으로 존칭하는 반명에 첩은 <집>으로 낮추어 불렀다.

즉 수원댁, 서울댁인 본처에 대해서 첩은 평양집, 전줏집이다.

 

아랫것들 까지가 경멸해서 첩은 그저 <마마>일 뿐 <마님>, <아씨>로는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양첩(良妾), 천첩(賤妾)을 가리지 않고 모든 첩에게 적용이 되었다.

 

양첩이라면 양가(良家)의 여자로 첩이 된자를 말하는데 남편이 사모(紗帽)의 양 뿔을 떼고 상견례를 행했다.

천첩이라면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라 기생, 관비, 사비로서 첩이 된 자를 말한다.

 

그나마 천대받는 지위가 천첩은 양첩에 비해서도 한결 가혹한 처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즉, 소위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제도에 의해서, 첩의 자손은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 경우에도 2품 이상 문무관이라면 양첩의 자손이 최고 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천첩의 자손이라면 정5품이 한정이다.

 

또 이조 최대의 악법이라는 서얼금고(庶孼禁錮)의 법률도 첩의 소생을 벼슬에서 배제하고 있다.

양반의 혈통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반사(半士), 좌족(左族), 불치(不齒), 사점(四點) 박이로 불리며 천대를 받았는데, 제9대 성종이래 로는 마침내 소과에도 응시를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처첩(妻妾)의 제도는 사회 국가에 허다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첫째는 윤리를 상함이니 첩을 탈취하던 상하의 악습 - 연산군이 황윤헌, 성세정의 첩을 빼앗은 따위이다.

 

둘째는 왕정(王政)의 문란이니 성종의 정비인 폐비 윤씨는 후궁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했다.

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자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숙청하면서 소위 갑자사회의 피 보라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회에 혼란을 가중한 점도 결코 경시할 수 없었다.

 

재상의 서출인 박응서 등 7명은 적서(嫡庶)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부랑배로 몸을 던졌다.

새재(鳥嶺)에서 은(銀) 장수를 죽이고 은 수백 냥을 탈취함으로써 소위 칠서지옥(七庶之獄)을 일으켰던 것이다(광해군 때). 또 서자가 주동이 된 반란 사건만도 윤인발(尹仁發)의 난, 이몽학(李夢鶴-왕실의 서얼출신)의 난 등으로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처첩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가도(家道)를 크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1920년대에도 상류층은 예외 없이 축첩을 하면서, 심지어는 팔선(八仙)녀(女)까지를 앉혀 가면서, 가독(家督) 분쟁과 재산 싸움, 처첩의 갈등은 도처에서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첩은 우선에 여권(女權)에 대한 유린이다. 축첩(蓄妾)이라 하지만 그 축(蓄)자는 기를 축(蓄)자 - 축재(蓄財)며 가축(家畜)과 통하는 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