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知禮縣監李寗墓碣銘 - 퇴계(退溪)의 조카

■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지례현감(知禮縣監) 이공(李公) 묘갈명 ◇1527년(중종 27)~1588년(선조 21) ◇지례현감(知禮縣監) 이영(李寗)선생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넷째 형님이신 온계(溫溪) 이해(李瀣)선생의 둘째 아들로, 배위(配位)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선생의 종조부(從祖父)이신 첨정(僉正) 이정(李侹)공 의 따님이다 이항복 찬(李恒福 撰) 이씨(李氏)는 진보(眞寶)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현리(縣吏)인 석(碩)이 아들 수(脩)를 낳았는데,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 후 이대(二代)를 전하여 휘 계양(繼陽)에 이르러서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아서 고사전(高士傳)에 우뚝이 드러나 있는데, 이분이..

12대 조모님의 친정댁을 찾고 싶습니다.

저는 퇴계선생 집안인 진성이가(眞城李哥) 이병은 이라고 합니다. 퇴계선생(退溪先生) 넷째 형님이신 온계(溫溪) 이해(李瀣)선생의 13세손입니다. 다름 아니라 온계 선생 둘째 아드님 찰방을 지낸 휘 영(寗)의 배위(李命健 女)가 백사(白沙) 이항복선생의 종조부(從祖父)이신 휘 정(挺)자 어르신의 따님입니다. 이분이 저에게 12대 조모님이 되시는데 이분의 친정 후손 분들을 찾고 싶어 이렇게 메모를 남깁니다. 그리고 경주이씨 무슨 파에 속하는지 알고 싶고, 또한 직계 계보도도 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첨언하여 말씀드리면 백사 이항복선생께서12代祖(寗字) 묘갈명(墓碣銘)을 직접 찬(撰)하셨습니다. 아시는 분은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처 이병은 011-708-4674(서울거주) 전 문화부장관(영화감독)..

풍고집(楓皐集)-김조순(金祖淳).

■ 풍고집(楓皐集) ●형태서지 권수제 풍고집(楓皐集) 판심제 풍고집(楓皐集) 간종 활자본(整理字) 간행년 1854년 간행 권책 16권 8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0×16.7(cm)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46-가187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89 ●저자 성명 김조순(金祖淳) 생년 1765년(영조 41) 몰년 1832년(순조 32) 초명 낙순(洛淳) 자 사원(士源) 호 풍고(楓皐) 본관 안동(安東) 봉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시호 충문(忠文) 특기사항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 김려(金鑢), 이만수(李晩秀), 심상규(沈象奎) 등과 교유 ●가계도 金達行 │ │--------金履基(牧使) │ ∥ ㅣ 李榕의 女 ㅣ │--------金履中(瑞興府使) ㅣ ∥ ..

경회루기(慶會樓記) - 하륜

■ 경회루 기(慶會樓記) 하륜(河崙) 찬(撰) 전하『殿下, 태종(太宗)』 즉위 13년 봄 2월에 뒷 대궐 서루(西樓)가 기울어지고 또 위태하므로, 경복궁(景福宮) 제거사(提擧司)에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여 전하께 아뢰니, 전하께서는 놀래어 탄식하며 이르시기를,“우리 선고(先考)께서 창업(創業)하시고 처음으로 세우신 것인데, 이제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이냐.”하시고, 이내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하명(下命) 하시기를,“농사 때가 가까웠으니, 아무쪼록 놀고먹는 자들을 부려서 빨리 수리(修理)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래서 박자청 등은 지면(地面)을 헤아려서 살짝 서쪽으로 당기고, 그 터에 따라 약간 그 규모를 넓히어 새로 지었으며, 또 그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樓)를 에워서 못을 팠다. 완..

18세기 이후 족보와 문집 등의 위서(僞書) 유행!

■18세기 이후 족보와 문집 등의 위서(僞書) 유행! 역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씨줄 날줄이 얽혀서 만들어진 하나의 진실이다. 그러나 후세에 어떤 문중이나 욕심 많은 공상가가 자신의 조상을 미화 또는 과대, 과장하기 위해 종종 위서를 만들어 낸다. 때문에 수백 년 이상의 시간대를 뛰어넘어 그동안 익힌 한문,한시 실력을 밑바탕으로 한편의 소설을 만들어 내니,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심각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위서를 금쪽같이믿는 탓에 인터넷마저오염시키고이러한 일로 갑론을박,시간낭비를 재촉하고 있다. 특히 위서는18세기 이후 꾸준히 나타나 일제 강점기 에도 그 부끄러운 유습은 이어졌고, 심지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도 그 가짜 문집이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두찬(杜撰),위서(僞書..

공수법(절 하는 법)

■ 공수법(교과서의 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절하기 왕은 나라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것을 지존(至尊)이라 했다. 왕이 행하는 모습이 백성과 달라야 했고, 백성이 왕의 지존을 취하면 역적이 되었다. 왕이 지존이므로 왕실법도가 있었고, 왕실법도를 지키기 위해 백성법도가 따로 있었다. 해서, 왕실 말(王室言語)이 있었고, 백성 말(百姓言語)이 따로 있게 되었다. 또한 왕실혼례와 백성혼례가 따로 있게 되었으며, 왕실절하기와 백성절하기가 따로 있었다. 왕에게 올리는 절하기는 신하가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읍(揖)을 먼저 하고, 허리를 굽혀서 꿇어 엎드려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이는 배(拜)를 하고, 반쯤 일어나서 다시 꿇어앉는다. 절을 할 때 두 손이 들입..

묘제(시향)때 홀기(식순) 내용

■ 묘제의 홀기 제례(묘제포함)의 절차는 가문,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달라, 홀기 역시 조금씩 다릅니다. 몇개의 예문을 올리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1. 獻官以下 在立者皆 序立 (헌관이하 재립자개 서립) 헌관 이하 모든 제관은 재배 할 정도의 간격으로 서 주십시오. 2. 贊引 引 初獻官 皆 神位前 (찬인 인 초헌관 개 신위전) 찬인은 초헌관을 신위전에 안내하세요. 3. 點視 陳設 (점시 진설) 헌관은 진설을 점검하세요. 4. 贊引 詣 初獻官之左 謹具 請行祀 (찬인 예 초헌관지좌 근구 청행사) 찬인은 헌관 좌측에 서서 공손히 읍하고 제사 준비 다 되었으니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청을 하세요. 5. 仍 降復位 (잉 강복위) 본래 자리로 돌아오세요. 6. 行 降神禮(행 강신례) 강신례를 올리겠습니다. 7..

공수법(절 하는 법)

■ 공수법(교과서의 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절하기 왕은 나라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것을 지존(至尊)이라 했다. 왕이 행하는 모습이 백성과 달라야 했고, 백성이 왕의 지존을 취하면 역적이 되었다. 왕이 지존이므로 왕실법도가 있었고, 왕실법도를 지키기 위해 백성법도가 따로 있었다. 해서, 왕실 말(王室言語)이 있었고, 백성 말(百姓言語)이 따로 있게 되었다. 또한 왕실혼례와 백성혼례가 따로 있게 되었으며, 왕실절하기와 백성절하기가 따로 있었다. 왕에게 올리는 절하기는 신하가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읍(揖)을 먼저 하고, 허리를 굽혀서 꿇어 엎드려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이는 배(拜)를 하고, 반쯤 일어나서 다시 꿇어앉는다. 절을 할 때 두 손이 들입..

고대일록(조선중기 전쟁과 일상에 관한 기록들)

■고대일록(조선중기 전쟁과 일상에 관한 기록들) 저자 : 정경운(鄭慶雲) 임진왜란의 일기 하면 대부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난중일기』이외에도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鎖尾錄)』, 이노(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기(亂中雜記)』등 다양한 일기류 자료가 전한다. 『고대일록(孤臺日錄)』또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일기로서, 최근 남명학연구원에서는 『고대일록(孤臺日錄)』역주본을 출간하였다.(2009년, 태학사 출판) 『고대일록』은 경상우도 함양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정경운(鄭慶雲,1556~1610)이 쓴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대한 전쟁 체험 일기이다. 정경운은 본관이 진양(晋陽)으로 자는 덕옹(德 )이고 함양읍 백연리(栢淵里) 돌뿍[席卜]에서 살았으며 주변..

정장공(鄭莊公) 무덤에서

익재난고 제2권 ■ 정장공(鄭莊公) 무덤에서 선왕이 친족 사랑하는 법 세운 것은/先王樹懿親 근본을 잘 보호하도록 한 뜻이었지/欲使庇本根 경숙이 본래 제 도리 못했지만/京叔固違道 장공도 역시 은의가 적었네/鄭莊亦少恩 여러 공자도 다 본받아/遂令群公子 혼란을 일으키고 백성을 못살게 했네/繼亂殘斯民 얼굴을 바꾸면서 세 임금이나 섬겼으니/革面事三主 채 봉인도 너무나 비루하구나/鄙哉蔡封人 [주01]경숙(京叔)이……적었네 : 경숙은 장공(莊公)의 아우로 이름은 단(段). 어머니 무강(武姜)의 사랑을 받아 경읍(京邑)에 거했기 때문에 경성 태숙(京城 太叔)이라 호했는데, 뒤에 고을의 큼을 믿고 반란을 꾀하다가 형 장공에게 패함을 당하여 공(共) 땅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공숙(共叔)이라고도 불렀다. 이 뒤로 정 나라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