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점필재 김종직의 학풍

■ 점필재 김종직의 학풍 김종직은 문장중심· 정치중심인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철학의 이론 부문을 치중하던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이 혼합된 시대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변계량. 윤희.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양성지(梁誠之)등 많은 거유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순유(醇儒)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김 균(金 鈞). 김 말(金 末). 김 반(金 泮)등의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과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경학에 정통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문헌이 없어서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뚜렷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의 거두인 김종직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이나 여러 문헌을 통하여 전반에 걸쳐 대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부친 김숙자는 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어받..

경주 숭덕전 춘계 향사 - 동영상

2010년 4월 5일 청명대전(춘계향사) - 숭덕전 숭덕전은 1429년(세종 11년)에 건립되었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1601년(선조 34년)에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관찰사 박경신(朴慶新)이 각각 중건하였고, 1704년(숙종 30년)에는 경주부윤 여필용(呂必容)이 중수하였습니다. 1723년(경종 3년)에는 묘(廟)를 고쳐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현재의 모습은 1735년(영조 11년)에 중건된 것이라고 합니다.

안일 속에서의 방심

■안일 속에서의 방심 편안한 상태로 있으면서 방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태로운 상태에서 스스로 지키는 것이 낫다. 여기안이방심야(與其安而放心也), 녕위이자지(寧危而自持)- 자료 : 유신환(兪莘煥,1801-1859),〈어린아이의 신발에 대한 명[穉子屐銘]〉,《봉서집(鳳棲集)》 ------------------------------------------------------------------------------------------------------------------------------------- [해설] 어린아이가 뒤뚱뒤뚱 걸어 다닙니다. 발에 잘 맞는 신을 신은 아이는 마음 놓고 걷다가 가끔 헛디뎌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헐렁헐렁한 나막신을 신은 아이는 조심조심 걸음을 떼어놓느라 ..

능호(陵號) 별 소재지

■ 능호(陵號) 별 소재지 구분 원 호 원 주 위 치 내 용 1 흥경원(興慶園) 정원대원군(인조父)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의 아들 인조 4년(1626)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인조5년(1627) 양주→김포 천장 인조10년(1632) 원종 추존 시 장릉(章陵)으로 추숭(追崇) 2 육경원(毓慶園) 연주부부인 구씨/ 인조의 어머니 인조 4년(1626) 인조5년(1627) 흥경원 천장시 흥경원으로 합칭(合稱) 인조10년(1632) 인헌왕후 추존 장릉(章陵)으로 추숭(追崇) 3 소령원(昭寧園) 사적 제358호 숙종후궁 숙빈최씨 영조의 어머니 영조 29년(1753)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번지 소령묘(昭寧墓)→소령원(昭寧園) 4 순강원(順康園) 사적 제356호 ..

숙의 경주이씨(淑儀慶州李氏墓) - 조선 제11代 중종의 후궁

■ 숙의경주이씨 묘(淑儀慶州李氏墓) ◇조선 제11代 중종의 후궁 ◇위치 : 성남시 분당구 궁내로67번길 26(궁내동 산17-1) 숙의경주이씨(淑媛慶州李氏) 묘는 원래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있었던 것을 1981년 지금의 위치인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윗말의 북동쪽 구릉으로 이장하였다. 숙의 이씨(淑儀 李氏, 미상 ~ 1524년 9월 29일)는 조선 중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사섬시첨정(司贍寺僉正)을 지낸 이형신(李亨臣)의 딸이다. 아들 덕양군 이기(德陽君 李岐, 1524~1581)를 낳은 후 산고를 이지 못하고 출산 5일만에 죽었다. 이에 아들 덕양군은 같은 후궁인 숙의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이씨의 숙의 봉작은 아마 인종때까지는 종4품 숙원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후 종2품 숙의에 추봉된 듯 하다...

김조서장군 및 김집선생 묘

■ 나홀로 제51차 능원묘 답사 ◌답사지 : 충남 논산/공주 권역 묘지 ◌일 시 : 2010.05.16(일) 08:30 ~19:00 ↑김종서장군 묘역 입구의 신도비 모습. 최근에 건립한 신도비라고 하지만 귀부(받침돌)가 두꺼비로 만들어 져 있습니다. 어떤 분의 자료를 보니 관리인의 말로는 "마을 입구의 지형이 풍수지리학상 지내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지내와 거북이는 서로 상극이어서 부득이 비석의 받침돌을 거북이가 아닌 두꺼비의 형상으 로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김종서장군묘역 전경. 구 묘비 이외의 대부분 석물은 최근에 조성한 듯... ↑김종서장군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이덕사·이태연 묘역전경. 앞단의 묘역이 매우 특이하다. 기존 묘를 납골묘로 하면서 기존의 상석을 둘렀습니다. ↑이태연선생의 봉분앞에서..

동호정(東湖亭)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사진 출처 >엽토 51 ↑동호정 - 정면사진 >엽토 51 ↑동호정 상량문(東湖亭上樑文) ↑장만리(章萬里). 선생 충효정려각/사진 : 감래킹 ↑장만리 정려비 ■ 장만리(章萬里) 조선 선조때의 학자로 자(字)는 문숙(文叔) 호는 동호(東湖)로 본관(本貫)은 거창이다. 선생은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 태생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난 하였는데,선조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호성공신의 원종 공신에 책록하였으며 고종황제는 1892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내렸다. 훗 날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때때로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선생께선 당시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던 충의지사로서 후손..

고종때의 관보

■ 조선 고종때의 관보 1. 宮廷錄事 詔日命掌禮院卿李根秀爲宮內府特進官弘文館學士趙秉弼爲掌禮院卿正二品金鶴鎭爲弘文館學士 二月四日----- 上 號都監都提調臣趙秉世謹奏本都監監造官李祐永成一鎬李晉憲柳錫奎南廷觀金永鎭金纘洙俱以身病呈狀乞遞改差其代前都事閔晚植法部主事趙命熙前博士李膺珪九品洪承翰兪致亨洪淳斌兪相傳差下之意謹上奏 光武六年二月四日奉旨依奏 議政府參政臣金聲根謹奏伏見吉州城津按覈使臣李舜夏書 奏奏下臣府者該郡民擾變係創@而出於新舊鄕之互相傾軋馴致於此語其事則雙非也論其罪則罔赦也其在審愼之道有難輕易酌處迄未敢遽奏者也然而其間屢經大霈一應罪囚罔不均霑洪渥而唯此吉城諸囚罪犯之輕重雖殊然尙在囹圄未蒙一視之澤獨抱向隅之冤者實欠平允之政矣鏡城府警務署移囚罪人許炫許均許燂崔達允許鎭國金承弼崔基俊韓鼎禹金河駿崔錫麟金昌俊崔昌烈金希甲城津港警務署牢囚罪人金宗瑚城津府保囚罪人朴得弼吉州郡..

김만기선생 신도비명 병서(金萬基先生 神道碑銘 幷書)

■ 광성부원군 김공 신도비명 병서 (光城府院君 金公 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1633(인조 11)∼1687(숙종 13).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왕자(王者)의 후예로서 서민(庶民)으로 기신(起身)하여 고려(高麗) 시대에 더욱 현달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였다. 황강공(黃岡公) 휘 계휘(繼輝)는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으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우리 문원공 선생(文元公先生 김장생(金長生))은 도학(道學)으로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었으니, 대체로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은 제유(諸儒)를 집대성(集大成)하였고, 선생은 그의 전통(傳統)을 이어받은 것이다. 선생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은 문경공(文敬公) 집(集)이고, 둘째는 곧 공..

18세기 사대부가의 장서

■ 18세기 사대부가의 서책구입 방법 『비록 우리나라가 좁고 작다고 하지만 두실 심상규(斗室 沈象奎)의 속당(續堂)은 거의 4만 권이 넘고 유하 조병구(遊荷 趙秉龜)와 석취 윤치정(石醉 尹致定) 두분의 집, 또한 3,4만권 밑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진천현(鎭川縣) 초평리(草坪里)의 화곡 이경억(華谷 李慶億)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의 두릉리(斗陵里) 8천권은 또 그 아래가 된다.」 심상규와 조병구, 윤치정 등은 3,4만권, 그리고 이경억은 만권, 서유구는 8천권의 소장가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강관은 이들 외에도 최석정, 원인손, 이만수, 김조순 등도 대형장서가로 보았다. 김영진은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독서차기(讀書箚記)」에 실린 자료를 통해,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