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민지 선생 묘지명 병서(閔漬先生墓誌銘 幷序)

유원 고려국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판첨의부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 시문인 민공 묘지명 병서(有元 高麗國 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判僉議府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 諡文仁 閔公 墓誌銘 幷序) 추성양절공신 대광 삼사사 예문관 상호군(推誠亮節功臣 大匡 三司使 藝文館 上護軍) 이제현(李齊賢) 지음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는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 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元宗)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 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인 여흥부원군 민공(驪興..

이자춘 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 1315년(충숙왕 2)~1360년(공민왕 9) 고려국 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高麗國 贈 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判典理司事 完山府院君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榮祿大夫 判將作監事 李公神道碑銘 幷序)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다.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다.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

이차돈 순교비

원화 13년(헌덕왕 10; 818) 무술 8월 10일에… 부처…王失義不戡順從 국가에는 애로요 민에게는 고역인데 ▨民에게서 거두어들여 불법을 일으키고 … 국왕은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 가슴이 미어지듯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아! 어찌하리오. 천하에 나 혼자이니,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 하였다.이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을 염촉이라 하였다. 그가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울분이 나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천천히 엎드려 나아가 아뢰기를, “보잘것 없는 제가 생각컨대 왕께서 큰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뭇꾼에게도 자문한다 하였으니, 제게도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곧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하자, 염촉..

孤山處士德山黃耆老墓碣銘

고산처사 덕산 황공 기로지 묘갈명 (孤山處士 德山 黃公 耆老之 墓碣銘) ◇생졸년 :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자(字)는 태수(台叟)인데,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 광적(光迪)의 12세손이다. 선고(先考)는 이름이 이옥(李沃)으로 별좌(別坐)를 지냈고, 조부는 이름이 필(㻶)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귀수(龜壽)로 참판을 추증받았고, 고조부는 이름이 정문(正文)으로 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은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 초서(草書)는 더욱 기이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완호(玩好)하여 보물로 여기면서 이르기를 “왕희지(王羲之) 이후의 제 일인자이다.”라고 한다. 그 필적(筆跡)을 얻고자 비단을 싣고 문전에 이르는 자가 매일 천백..

창녕조씨 시조의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창녕조씨 시조의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의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신라 한림학사(新羅 翰林學士) 이광옥(李光沃-경주이씨 시조로 부터 20世=고정할순 없음)의 딸 이례향(李禮香이다.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善德女王의 夫君)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566~632 : 재위- 579~632=53년]의 사위로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대도독 태자태사(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太子太師)에 올라 창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창녕조씨 시조묘(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91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 2리 초재마을 ↑종덕재 정당 솟을삼문 전경 창녕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1757년(영조 3..

圃隱 鄭夢周 先生 行狀

포은선생 행장(圃隱先生行狀) 공(公)의 성(姓)은 정(鄭)이고 휘(諱)는 몽주(夢周)이며 자(字)는 달가(達可)요. 호(號)는 포은(圃隱)으로 경주부 영일현 사람이다. 원조(遠祖) 습명(襲明)은 이름난 선비로서 고려 인종 때, 벼슬하여 벼슬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르렀으며, 증조(曾祖) 인수(仁壽)는 봉익대부, 개성윤(奉翊大夫開城尹) 상호군(上護軍)에 추증되고 고(考) 운관(云瓘)은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판병조사(判兵曹事) 상호군(上護軍)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 영천이씨(永川李氏)는 변한국대부인에 추증되고, 선관서 승(膳官署 丞) 약(約)의 딸이다. 어머니가 임신하였을때 난초 화분을..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포은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 圃隱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후학 은진 송시열 찬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런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고려에 선생 같은 분..

순종황제 장례식 사진(2)

↑훈련원 영결식장 전경. ↑어장의 사진첩 표지. ↑훈련원 영결식장 전경.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자리 ↑왕실장례행렬에 쓰이던 죽안마. ↑방상시(장례 행렬에 따르는 탈) ↑성복제(상복으로 갈아입고 제를 올림) ↑성복제(상복으로 갈아입고 제를 올림)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창덕궁 앞 풍경 ↑조문객들 ↑조문객들 ↑일본칙사. 창덕궁 희정당 앞 도착. ↑일본칙사. ↑유릉전경(순묘역) ↑공사중인 유릉의 `능상각`이라는 원뿔모양의 덧집을 지은 후 능을 조성했다. ↑공사중인 유릉 모습 ↑대여(왕실의 상여) ↑부장품(도장 등의 부장품들) ↑부장품의(도장 갑) ↑부장품의(패물 등) ↑부장품(패옥 및 시계) ↑부장품의 문구류들 ↑기타 부장품들 ↑대여 발인장면 ↑돈화문 앞에서 대..

순종 장례식 사진(3)

순종 장례식 사진 1926년 4월 25일 아침 6시15분, 평소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이었 순종 (純宗.1874~1926, 재위 1907~10)이 52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신문은 '5백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고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 왕조 5백19년의 막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왕실장례행렬에 쓰이던 죽안마 ↑성복제(成服祭) ↑창덕궁 앞에서 곡을하는 학생 조문객들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 조문객 ↑창덕궁 앞을 오가는 조문객들 ↑창덕궁 희정당 앞에 도착한 일본 칙사(勅使) ↑훈련원 영결식장 전경 ↑발인장면 ↑돈화문 앞을 지나는 어여 ↑살곶이 다리를 건너는 장례행렬 ↑유릉에 도착한 어여 ↑유릉에 도착한 어여에서 관을 내리는 모습 ↑..

박강선생 부자(父子)묘역 외.......

■ 나홀로 제60차 능원묘 답사 결과 ◈답 사 지 : 경기 하남/광주 권역 묘지 ◈일 시 : 2011.02.12(토) 09:00 ~19:00 ◈참가 인원 : 12명 ↑세종의 서5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묘역 전경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1430년(세종 12)∼1479년(성종 10).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침(李琛). 자는 문지(文之).세종의 다섯째 서자이며, 모친은 신빈김씨(愼嬪金氏)이다.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다른 아들들보다 부왕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7세에 밀성군에 봉하여졌고,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우애도 남달리 돈독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큰 일들은 반드시 그의 자문을 받았다. 오위도총부도총관, 각 시(寺)의 도제조, 의금부도위관 등을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