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종친간의 호칭관계

■ 종친간의 호칭관계 항렬이 같은 사람끼리는 동항(同行)이라고 하여 형제 뻘이 되고, 나를 기준으로 일세(一世) 위는 숙항(叔行)으로 아버지뻘이 되고, 이세(二世) 위는 조항(祖行)으로 할아버지뻘이 된다. 나를 기준으로 밑으로 일세(一世)는 질항(姪行)으로 조카뻘이 되고, 이세(二世) 아래는 손항(孫行)으로 손자뻘이 된다. 친인척을 통틀어 같은 항렬간에는 서로 [형님], [아우님]이고 숙항과 질항 간에는 [작은 아버지], [큰 아버지], [아저씨], [조카], [질녀]로 부르지만 10년 이상 연상인 조카는 [조카님] 또는 호(號), 기타 사회적 직위등의 존칭으로 부른다. 조항과 손항간은 [할아버지], [손자]로 부르지만 팔촌[유복친(有服親=복제(服制)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이 넘는 할아..

유은정(柳隱亭)

↑유은정(柳隱亭)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성평리 `유은정(柳隱亭)' 중수 완공 기념식이 2010년 8월 27일 오후 5시 현지에서 열렸다. `유은정'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38세손 이우호(장릉참봉)의 아들 재익이 1936년 세운 정면 3칸, 측면 1.5칸, 방 2개로 큰 바위 위에 지은 팔작지붕 정자이다. 정자 뒤편에는 높이 3m 크기의 듬직한 바위가 있으며 벚나무가 정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재익 선생의 손자 기철 씨는 “조상의 숨결이 밴 정자가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중수를 위해 10년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유은정은 2억 5천만원을 들여 기둥과 보만 남기고 부연, 서까래, 마루 바닥을 완전 교체하였다. 또 대들보는 하..

장성 가산사 익재공 영정에 대하여...

안녕 하십니까 익재공 후 현감공파 이상헌 입니다. 장성 가산사에 모셔진 익재공 영정에 대해 질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익재공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원작(진감여)외에, 이모 본으로 18세기 말에 그려졌다고 하는데요,(인터넷검색을 하면 이대정,이언경의 업적으로 그렇게 나옴) 최근에 발간된 익재공파 족보에 실려 있는 묘갈명을 보니까 시대가 다르기에 궁금합니다. 묘갈명 내용에 보면, 익재공 12대 후손 이이송(李爾松) 할아버님께서 1684년 서울에 상경하시어 참판 이인환, 이인하 등 집안 분들과 상의하고 전라도 집안 분들과 계를 결성하시어 익재공 영정을 이모 본으로 완성하여 가산사에 모시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22대 현감공(이재인) 할아버지께서 낙향하시어 모셨던 익재공 영정은 이모본이 아니..

피염정(避炎亭)

↑피염정(避炎亭)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갈산 1리 [건 축 주] : 이희음(李希音, 1579년~1641년) [건립개요]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 있으며 1632년(인조10)에 진사(進士) 이희음(李希音)의 건립으로 1729년(영조 5)에 소실(燒失)된 것을 1865년(고종 2)에 중건하였다. 단곡(丹谷) 곽진(郭진)의 기와 순흥(順興) 안연석(安鍊石)의 중건기 및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시와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시가 있다. ●건축이야기 세상살이 열기 까지도 식히길 바램이었던 피염정 영주서 예천으로 통하는 큰 길을 따라 장수면 소재지인 반구(盤邱 : 일명 반두둘)를 거쳐 두어 굽이 산모퉁이를 지나면 장수교(長壽橋)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 큰 길을 벗어나 둑길로 길을 바꾸어 서북..

졸부(猝富), 명부(名富), 의부(義富)

■ 졸부(猝富), 명부(名富), 의부(義富) 「천석군」「만석군」할 때의 '군(君)'은 '임금 군(君)'자에서 비롯된 말이다. 옛날 사람들도 암암리에 부자(富者)를 임금과 같은 반열로 대접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군(君)이 제 역할을 못하면 '꾼'으로 전락한다. '노름꾼', '사기꾼'의 꾼이 바로 이 '꾼'이다. 졸부(猝富)는 꾼에 해당한다. 자기 먹고 마시는 데에만 돈을 쓰는 사람이 졸부이다. 어디에다 돈을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주 인색하면서도 자신의 밑구멍에 들어가는 돈에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졸부이다. 이 졸부는 죽을 때도 나머지 재산을 자기앞수표로 바꾸어서 관 속에 넣고 가는 사람이다. 불가(佛家)의 고승들은 이런 사람들이 죽고 나면 금줄을 칭칭..

연안 연성대첩비명 병서(延安 延城大捷碑銘 幷序)

■ 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 黃海道 延白郡 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位置한 延城大捷碑는 壬辰倭亂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黃海道 延安府에서 勝戰했던 事實을 記錄한 碑이다. 이단(二段)의 長方形 臺石위에 烏石의 大理石 材質의 月頭形 碑身을 세운 碑座圓首形이다. 1608年(宣祖 41年)에 建立된 延城大捷碑에는『延城大捷碑』라는 전서(篆書)가 陰刻되어 있다. 領議政을 歷任한 鰲城府院君 白沙 李恒福『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이 左議政 時節에 碑文을 撰述하였고, 刑曹判書를 歷任한 忠敏公 禾谷 鄭賜湖『1553년(명종 8)~1616년(광해 8)』가 司憲府 大司憲 時節에 글씨를 쓰고, 右議政을 歷任한 文忠公 仙源 金尙容『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이 上護軍 時節에..

박순 신도비명(朴淳神道碑銘) - 宋時烈 撰

■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병조판서 증시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치사 봉조하 송시열은 글을 짓다. 국조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을사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도가 크게 변하고 사문이 땅에 떨어져, 성현의 글은 화근으로 지적되고 선비가 일삼는 것은 과거시험보기 위한 글뿐이어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비들이 대거 배출되어 명종, 선조 시대에는 정치와 교화가 크게 밝아짐으로써 선비된 이가 공자 · 맹자와 정자 · 주자를 근본으로 삼아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백성들이 이 아래에서 새로워 삼대(하 · 은 · 주)의 융성한..

同春堂 宋浚吉 先生 墓表/墓誌銘

■ 동춘당 송선생 준길 묘표 (同春堂 宋先生浚吉之墓表) [생졸년]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외손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민진후 근술 (外孫 崇政大夫 行 兵曹判書 閔鎭厚 謹述)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찬선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 문정공 동춘당 송선생 묘표 음기 선생의 이름은 준길이요, 자는 명보이다. 선계는 은진에서 나왔다. 고려 판원사 대원의 후손이다. 명의라는 분은 사헌부 집단이었고 그 손자 유는 호가 쌍청당이다. 쌍청당의 증손은 이름이 여즙인데 이가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세영이며 조부는 응서인데 군수이다. 아버지는 이창인데 또한 군수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행첨추 은휘의 따님..

안축 묘지명(安軸墓誌銘) - 이곡(李穀)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흥령부원군 영예문관사 시문정 안공묘지명 (大元 故 將仕郎 遼陽路盖州判官 高麗國 三重大匡興寧府院君 領藝文館事 謚文貞 安公墓誌銘) [생졸년] 안축『安軸, 1282년(충렬왕 8) ~ 1348년(충목왕 4)』 / 향년 66歲 내(묘지 찬자인 李穀)가 원나라 수도에 있을 때 근재(謹齋 : 안축)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와서 문병을 하였다.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며, 그 아들 종원(宗源)을 가르키면서, “자네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 하였다. 또 묘지명을 부탁하면서, “내 평생에 아무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무릇 백성들이 강제로 노비가 된 것을 반드시 다..

이조년 묘지명(李兆年墓誌銘) - 이제현 지음

유원고려국 성근익찬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문열공 이공묘지명 (有元高麗國 誠勤翊贊勁節功臣 重大匡 星山君 贈諡文烈公 李公墓誌銘) ◇생몰년 : 1269년(원종 10) ~ 1343년(충혜왕 4) 무덤에 지석(誌石)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무덤이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보면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간직해 둔 것인 줄을 알게 되어, 진실로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성산군(星山君) 이공(李公)이 죽은 지 1년이 넘어서 내가 비로소 공을 위하여 묘지명을 찬술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적(曺頔)의 변란때 영릉(永陵 : 충혜왕)이 불려가 천자를 알현하였다. 승상 백안(伯顔)이 묵은 감정(宿感)을 품고 영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