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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處士德山黃耆老墓碣銘

야촌(1) 2011. 2. 27. 13:22

고산처사 덕산 황공 기로지 묘갈명
(孤山處士 德山 黃公 耆老之 墓碣銘)  

 

◇생졸년 :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자(字)는 태수(台叟)인데,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 광적(光迪)의 12세손이다.
선고(先考)는 이름이 이옥(李沃)으로 별좌(別坐)를 지냈고, 조부는 이름이 필(㻶)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귀수(龜壽)로 참판을 추증받았고, 고조부는 이름이 정문(正文)으로 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은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 초서(草書)는 더욱 기이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완호(玩好)하여 보물로 여기면서 이르기를 “왕희지(王羲之) 이후의 제 일인자이다.”라고 한다.

 

그 필적(筆跡)을 얻고자 비단을 싣고 문전에 이르는 자가 매일 천백(千百)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공은 젊은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세상을 숨어 살면서 스스로 즐길 뿐,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낙동강(洛東江)가 고산(孤山) 아래에 집을 짓고 ‘매학(梅鶴)’이라는 편액을 달아놓은 다음 매화를 심고 학을 길렀으며, 거문고와 책으로 즐기면서 생을 마쳤다.

 

공의 선배(先配)는 심씨(沈氏)이니, 진사 흥원(興源)의 따님이자 청성백(靑城伯) 덕부(德孚)의 후손이다. 후배(後配)는 유씨(柳氏)이니, ▨▨의 따님이다. 심씨의 묘는 공의 묘 아래에 있고, 유씨의 묘는 도진(陶津)의 위 미석산(彌石山= 慶北 龜尾市 海平面 金湖里에 있는 산임) 아래에 있다.

 

선배(先配)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후배(後配)에서 딸 하나를 두었으니 곧 옥산(玉山) 이우(李瑀) 공의 아내이다. 옥산도 역시 서화(書畵)로써 이름을 떨쳤고,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며,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경절(景節)로 벼슬은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에 이르렀고 좌승지를 추증받았다. 2녀는 유학(幼學) 정유성(鄭維城), 찰방 권상정(權尙正)에게 각 출가하였다.

 

승지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즙(檝=노즙. 노집)으로 군수를 지냈고, 차남은 교(穚)이고, 그 다음 차남은 곤(稇)이며, 1녀는 이만겸(李萬兼)에게 출가하였다. 측출의 아들로 구(搆)가 있다.

 

군수는 5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동야(東野)이고, 차남은 동명(東溟)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 및 시종의 신하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지금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다. 그 다음 차남은 동유(東維)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 차남은 동주(東柱), 동로(東老)이다. 교(穚)는 후사가 없어서 동로를 후사로 삼았다.

 

동야의 아들은 증화(增華)이고, 동명의 아들은 정화(鼎華)이다.정유성은 아들 셋을 두었으니 현승(玄升), 덕승(德升), 원승(元升)이고, 딸 넷을 두었으니 그 중 한 딸은 경주부윤(慶州府尹) 박수홍(朴守弘)에게 출가하였다.


권상정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혜(鏸)와 향(銄)이고, 딸 넷을 두었으니 그 중 한 딸은 병조정랑 김하천(金廈梴)에게 출가하였다.
황흠(黃欽)과 황기(黃錡)는 측실(側室)의 소생인데, 흠은 아들이 없고, 기는 아들이 몽길(夢吉)이다.공은 유명(遺命)으로 후사(後事)를 외손 동명에게 부탁하여 제사(祭祀)를 주관하여 받들게 하였다.

 

공의 무덤에 묘갈이 없었고 무덤도 봉분이 무너졌으므로, 오랜 세월이 흐르면 자취가 사라져 없어진 나머지 전해짐이 없게 될까 염려한 끝에, 이미 무덤을 수치(修治)한 다음 또 비석을 세우고 그 대개를 간략히 기록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이곳은 처사의 무덤인데,

영원히 단단하여 손상됨이 없으리라.

이 무덤은 미좌축향(未坐丑向)임.

 

숭정(崇禎) 후 42년 기유년(1669년, 현종 10)

3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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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孤山處士德山黃公耆老之墓碣銘


字台叟高麗僉議中贊諱光迪之十二世孫也考李沃別坐祖諱㻶慶州府尹曾祖諱龜壽贈參判高祖諱正文贈參判公以筆法鳴於天下草書尤奇中國人玩而珍之曰羲之後一人求其筆跡載絹素諸門者日以千百公妙年中司馬遯世自娛累除官不就築室於洛江濱孤山下扁以梅鶴種梅養鶴樂琴書以終先配沈氏進士興源女靑城伯德孚後後配柳氏○○女.墓在陶津上彌石山下先配無子後配有一女卽玉山李公瑀之配玉山亦以書盡名官至軍資監正有一子二女子景節官至掌隷院司議 贈左承旨女幼學鄭維城察訪權尙正承旨有三男一女長郡守次橋次和女李萬兼側出搆郡守有五男長東野次東溟登文科歷剔臺侍今爲安東府使次東維登武科次東柱次東魯稿無後以東魯爲後東野子增華東溟子鼎華鄭維城有子三人玄升德升元升女四人其一慶州府尹朴守弘權尙正有子二人鏸銄女四人其一兵曺正郞金履梴黃欽及錡卽公側出而欽無子錡子夢吉以遺命託後事於外孫東溟主其祀墓無碣且頹圯恐其久而泯没旡傳旣脩治又立石略識其梗槩焉銘曰斯惟處士之藏 而永固旡傷未坐丑向. <끝>

 

崇禎後四十二年己酉 三月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