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圃隱 鄭夢周 先生 行狀

야촌(1) 2011. 2. 25. 20:35

포은선생 행장(圃隱先生行狀)

 

공(公)의 성(姓)은 정(鄭)이고 휘(諱)는 몽주(夢周)이며 자(字)는 달가(達可)요. 호(號)는 포은(圃隱)으로 경주부 영일현 사람이다.

 

원조(遠祖) 습명(襲明)은 이름난 선비로서 고려 인종 때, 벼슬하여 벼슬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이르렀으며, 증조(曾祖) 인수(仁壽)는 봉익대부, 개성윤(奉翊大夫開城尹) 상호군(上護軍)에 추증되고 고(考) 운관(云瓘)은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판병조사(判兵曹事) 상호군(上護軍)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 영천이씨(永川李氏)는 변한국대부인에 추증되고, 선관서 승(膳官署 丞) 약(約)의 딸이다.

 

어머니가 임신하였을때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문득 놀라 떨어뜨린 꿈을꾸고 깨어나서 공(公)을 낳았는데 지원(至元)(즉 원순제(元順帝)때의 연호로 1335~1340년을 말함) 정축년 충숙왕 6년 1337년12월 무자(戊子)일이며 따라서 공(公)을 몽란(夢蘭)이라 이름지었다.

 

공(公)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빼어났으며 어깨에 검정사마귀 일곱이 북두칠성의 형상처럼 벌여 있었다.

9세가 되었을때에 낮에 어머니가 검은 용(龍)이 정원안에 배나무에 오르는 꿈을 꾸고 놀라 일어나보니 公이 였는데 그래서 또 몽용(朦龍)이라 이름지었는데 관례를 치르고 나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정(至正) : 원 순제때 연호(1341~1367년) 을미 공민왕 4년 1355년 11월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 3년상을 마쳤다. 정유(丁酉) 1357년에 감시(監試)에서 3번째로 합격하였다. 경자(庚子) 1360년에 정당문학 김득배(金得培) 추밀원학사 한방신(韓邦信)이 예위(禮圍)을 맡았는데 공(公)이 삼장에서 잇달아 으뜸을 차지하고 드디어 첫째로 뽑혔으므로 훌륭한 명성이 크게 퍼졌다. 壬寅1362년에 뽑혀서 예문검열,에 보임되었다.

 

갑진(甲辰) 1364년에 한방신(韓邦信)이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고 태조(이성계)가 병마사가 되었는데 公이 종사관으로 따라가 화주(和州)에서 여진의 삼선 삼개(三善三介)를 쳐서 패주(敗走) 시켰다. 곧 수찬에 오르고 여러번 벼슬을 옮겨서 전농시 승에 이르렀다.

 

을사(乙巳) 1365년 봄 정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그때는 상제(喪制)가 문란하여 사대부가 상을 당하면 모두 다 100일만에 길복을 입는데 公만은 두 어버이의 묘소(墓所)에서 여묘를 살고 애례를 모두 극진히 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아름답게 여겨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 하였다. 복상을 마치고서 통직랑.전공정랑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정미(丁未) 1367년에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직하였다. 이때에 국가가 申丑1361년兵禍(홍건적 사건)를 입은 이래로 학교가 황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뜻을 기울여 다시 일으키고 성균관을 새로세웠으나 학관이 적으므로 영가 안동인(永嘉 安東人) 김용구(金容九) , 반양 반남인(潘陽 潘南人) 박상충(朴尙衷), 밀양인 박선중(朴宜中), 경산(京山) 성주인 이숭인(李崇仁)과 공(公)이 같은 큰 선비를 뽑아서 학관을 겸하게 하고 목은(牧隱)이 문정공 이색으로 대사성을 겸하게 하였다.

 

그때에 동방에 온 경서(經書)는 주자집주(朱子集註) 뿐이었는데 公의 강설(講說)이 발월하여 여느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어 벗어나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운봉[雲峰=운봉은 호이며 이름은 호병문(胡炳文) 임]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게 되어서는 공(公)이 강론한 것과 꼭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선비들이 더욱더 탄복하였으며 목은은 자주 이것을 칭찬하여 [달가의 논리는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않는것이 없으니 동방이학의 시조(始祖)로 추대한다]하였다.

 

무신(戊申) 1368년에 승진하여 봉선대부.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무릇 제수가 있을때에는 다 삼자(三子)와 관각(館閣)의 직함을 띠었다. 홍무(洪武=명나라 연호,1368~1398) 신해(辛亥) 1371년에 옮겨서 중의대부.태상소경이 되었다가 이윽고 옮겨서 성균사성이 되고 품계는 중정대부가 되었다.

 

임자(壬子) 1372년 봄에 서장관으로 지밀직사사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서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자제(子弟)의 입학을 청하였다. 가을8월에 태창(太倉)으로 돌아오는길에 바다 가운데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배가 깨어지서 표류하여 암도에 닿았는데 홍사범(洪師範)은 익사하고 公은 꼭 죽을 처지에서 살아났다.

 

말다래를 베어 먹은것이 13일인데 이 일이 알려지매 황제가 배를 갖추어 보내어 데리고 돌아가 후하게 구휼하였고 이듬해 가을 7월에 돌아왔다. 갑인(甲寅) 1374년에 외직으로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나갔다 을묘(乙卯) 우왕 원년 1375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우사의 대부 예문관 직제학에 제배 되었고 곧 성균관의 벼슬로 들어가 대사성이 되었다.

 

당초에 명(明) 나라가 일어나자 공(公)이 조정에서 힘써 청하여 맨 먼저 명(明)나라에 귀부(歸附)하였으므로 고황제에게 크게 칭찬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현릉(玄陵)이 시해(弑害)되고 금의(金義)가 중국 사신을 죽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떨어서 감히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公이 먼저 대의(大義)를 아뢰어[요즈음의 변고는 빨리 상세하게 주달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혹이 없게 하여야 할것인데 어찌 미리 스스로 의심하고 이반하여 백성에게 화(禍)를 만들어 줄수 있겠습니까?]하니 그제야 사신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또 금의(金義)의 일을 변명하게 하였다.

 

을묘년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 왔는데 그 조서에 거만한 말이 있었으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고 그 사신을 맞이할 것을 논의하니 公이 문신 열 두어 사람과 함께 글을 올려 논열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사연이 매우 박절하였으므로 지윤.이인임,이 매우 꺼려서 公을 언양으로 귀양보내고 나머지도 죄다 먼 고을로 귀양 보냈다가 한 해를 넘겨서 公을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에 왜구가 많이 나타나서 바닷가의 고을들이 쓸쓸하게 모두 비었으므로 국가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전에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하도록 타일렀으나 그 섬의 주장(主將)이 홍유(洪瑜)를 가두었으므로 굶어 죽게 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돌아온 일이 있었다.

 

권신(權臣)이 전의 일에 원한을 품고 그 뒤를 이어 公을 사신으로 보내니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으나 公은 조금도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패가대에 가서는 고금의 교린(交隣)하는 이해를 극진하게 설명하니 주장이 경복(敬服)하여 관대가 매우 후하였고 侍를 구하는 왜승(倭僧)이 있으면 公이 붓을 들어 당장에 써 주었는데 호준(豪俊) 한 경책(警策)이었다.

 

그래서 중들이 모여들어 날마다 公의 가마를 메고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라고 청하였다.

돌아 올 때에는 잡혀갔던 윤명(尹明) 안우세(安遇世)등 수백인을 쇄환하고 드디어 三島로 하여금 모두 침략을 금지하게 하였다 왜인이 지금까지도 공(公)을 칭찬하여 마지않거니와 공(公)의 졸서(卒逝)를 듣자 슬프하며 놀라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재를 올려 복을 비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공(公)의 신의가 능히 완고한 자를 복종시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안우세(安遇世)는 태조에게 귀부하여 섬겨서 공(功)로가 있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그 뒤에 이자용(李子庸)이 사신으로 갔다가 또 홍유 처럼 갇혔다. 그래서 국가에서 공(公)의 전대(專對)를 더욱 중히 여겼다.

 

몇 해 지나서 公이 왜적이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를 종으로 삼은 것을 걱정하여 속(贖)하고 돌려올 것을 꾀하여 재상들에게 힘써 권하여 각각 사재를 조금씩 내게 하고 또 글을 써서 윤명에게 주어 보내니 왜적의 괴수가 글의 사연이 간절한 것을 보고 잡혀간 사람 백여인을 돌려 보냈다. 이때부터 윤명이 갈때마다 반드시 포로를 찾아 돌아왔다.

 

무오 1378년에 정순대부, 우산기상시에 제배 되었다. 기미 1379년에 정공사,예의사,전법사,세 관사의 판서를 지냈고 품계는 봉익대부가 되었다. 경신 1380년에 판도사판서가 되었다. 가을에 태조를 따라 운봉에서 왜적을 크게 이기고 돌아와 벼슬을 옮겨서 밀직제학 상의회의도 감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임술 1382년 여름에는 금은(金銀)을 바치고 겨울에는 또 시호를 청하러 두번째 경사에 갔다.

계해 1383년에 동북면 조전원수로 다시 이성계(글에는 당연히 태조라고 칭했다.)를 따라 정벌하러 갔다.

갑자년(1384년)에 광정대부,정당문학에 올랐다.

 

그 때에 국가에 말썽이 많았으므로 고황제 가 노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쓰려하고 시공(歲貢)을 양마(良馬=양과 말) 5천필, 금(金) 5백근, 은(銀) 오만냥 및 은우(銀兩)과 같은 필수(匹數)의 세포로 늘려 정하고는 5년 동안의 세공이 약속과 같지않았다 하여 입조(入朝)한 사신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生) 이자용(李子庸) 등을 먼 고을로 장류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성절(聖節)을 축하하러 가야할 것인데 재상들이 다 가기를 꺼려서 규피하였고 마지막에 밀직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기로 주의하였으나 평중(平仲)이 노비 수십구를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드디어 병(病)을 핑계로 사퇴하니 견미(堅味)가 곧 공(公)을 천거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공(公)을 불러서 보고 이르기를,..[근래 우리나라가 중국조정에서 책망받는 것은 다 大臣의 잘못이나 경(卿)은 고금에 널리통하고 또 짐의 뜻을 잘 알거니와 이제 평중이 앓아서 가지 못하므로 경(卿)으로 갈음하였는데 경(卿)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매 대답하기를...(임금의 명은 물불도 피하지 않는것인데 더구나 천자를 뵈러 가는 것이 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南京에서 무릇 팔천리 떨어져 있으므로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로 90일 길인데 이제 성절까지 겨우 육순(旬)이 남았으므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이 열흘이라면 나머지 날자가 겨우 50일이니 이것이 臣의 한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어느날에 떠나 나겠는가?] 하매 대답하기를,(어찌 머물러 자겠습니까.)라고하였다. 드디어 떠나서 밤낮으로 길을 곱잡아 절일에 미쳐가서 표문을 바쳤다.

 

황제가 표문을 보고 날짜를 헤아리고 말하기를..[너희 나라 배신들이 서로 사고를 핑계하여 오려하지 않으므로 날짜가 촉박하여서야 너를 보냈구나 너는 전에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러 함께 차출하여 온 사람이 아니냐?] 하매, 公이 그때 배가 깨어져 머물러 묵었던 일을 죄다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그렇다면 중국말을 알겠구나]]하고 옥음(玉音)을 부드럽게 하여 특별히 위로하고 예부에 命하여 너그러히 예대하여 보내게 하고 드디어 홍상재,등을 놓아 돌려보냈다.

 

을축1385년에 동지공거로서 우홍명(禹洪命)등 33인을 뽑았는데 세상에서 마땅한 선비를 뽑았다고 일컬었다. 병인1386년에 세공을 줄여 주기를 청하려 경사(京師)에 갔는데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백하였으므로 지난 5년동안 바치지 못한 것과 늘려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영구히 면제받고 공물로 종마(種馬) 50필만을 정하여 받았다.

 

公의 지극히 정성스러운 忠義가 연충(淵衷)에 감오(感悟)되어 천위(天威)를 개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돌아오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의대와 안마(衣帶鞍馬=허리띠와 말안장)를 내리고 이어서 문하평리를 제배하였는데,이듬해 청하여 해직되었다.

 

무자1388년에 삼사좌사에 제배되었다. 그때 권세있고 간사한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써서 백성의 전지를 강탈하여 차지한 것이 수기(數圻)에 이르되 한없이 탐욕하여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여위므로 公이 이를 뼈에 사무치게 아프게 여겨서 청하여 사전(私田)을 없애었으므로 백성이 힘입어서 살았다.가을에 문하찬성사에 제배되었다.

 

경오년(庚午年) 공양왕2, 1390년 가을에 순충론도좌명공신의 호(號)를 받고 품계는 중대광에 올랐으며 찬성사로서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영서운관사 익양군충의군이 되었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여 교서에 이르기를,[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서 바른 세상으로 돌이키는 것은 참으로 사직의 안위를 감당하는 충신(忠臣)이 하는 일이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숭상하고 골로가 있는 사람에게 보상하는 것을 실로 국가의 법이 하는 일이다

 

순충론도좌명공신 중대광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춘추관사 겸(兼)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 정몽주(鄭夢周)는 천인(天人) 학문과 왕좌(王佐)의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서 석책하여 잇달아 괴과에 붙고 여묘(廬墓)하여 능히 孝志를 폈으나 오직 안에 배식된 근본이 확고하여 뺄 수 없고 그러므로 밖으로 발산되는 영수(英粹)가 찬란하여 문채가 있으매 선왕이 임용하여 사륜을 맡기고 후생이 경모하되 산두山斗와 같이 하였다.

 

염락의 道를 창명하고 불노(佛老)의 말을 배척하여 강론이 오직 정(精)하여 성현의 오지(奧旨)를 깊이 알고 교회(敎誨)가 게으르지 않아서 인재의 흥작이 많이 있으니 덕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지고 명성이 이 때문에 크게 떨첬다.

 

명나라가 발흥한 처음에 국가가 맨 먼저 귀부하고 신료에서 삼가 가려 경(卿)을 서장관에 거용하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다가 태풍에 날려서 꼭 죽게 된 것을 겨우 벗어나서 돌아오니 더욱이 구중(九重=궁궐의 문을 9개를 통과하여 들어감으로 이를 王이 있는 구중이라칭함) 의 사랑을 입었다.

 

현릉(玄陵)이 빈천(賓天)한 뒤이고 金義가 호(胡)=북원北元을 가리킴) 로 달아난 때에 權臣은 호의(狐擬)의 마음을 갖고 서관은 준분(駿奔)하는 일을 꺼리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 하지 아니하여 장차 백성에게 禍가 돌아가게 하려 하는데 경(卿)이 정도전(鄭道傳:號는 삼봉으로 봉화정씨) 등과 함께 힘써 말하기를, "근래 변고가 잇달았는데 어찌하여 사정을 갖추어 아뢰지 않습니까?

 

천자에게 죄를 얻게 된다면 국가에 복조(福祚)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하였으므로, 사신이 가서 신하의 분수를 차렸으니 동방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면 경(卿)들의 계책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 뒤에 호사(胡使)가 왔을때에 글의 사연이 불순하였는데 그때 경교(京校)에 나가서 맞아들이자는 의논을 크고 작은 모든 관원이 다 옳게 여겼으나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의 무리를 거느리고 옳지 않다고 극진히 아뢰얶으므로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의 무리에게 거슬리어 용납되지 못하고 영남(嶺南)으로 귀양간 것이 두어해 이고 日本에 다녀오느라 한 해를 넘겼다.

 

작은 나라가 조빙(朝聘)을 늦춘 까닭으로 중국(中國) 조정의 엄한 꾸중을 가져왔으므로 국운이 위태롭고 인심이 두려워할 때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가서 천자의 얼굴을 친히 우러러 보매 비로소 王이 조근하는 길을 열고 마침내 세공의 액수를 줄이니 예전부터 큰 나라를 섬기던 예의를 어기지 않아서 이제까지 백성을 보전하는 복이 있을 수 있었다.

 

갑인년(甲寅年) 1374년 부터 기사년(己巳年) 1389년 까지 불행히도 우(禑) 창(昌)이 참람하게 왕(王)위를 훔친 화(禍)가 있으므로 늘 적장처럼 회복하려는 충성을 품으니 하늘이 참으로 그 마음을 굽어보아 일이 마침내 뜻대로 이루어졌다.

 

洪武22년(명태조때의 연호) 공양왕 원년1389년 10월에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이 경사에서 돌아오매 성지를 삼가 받아 보니 고려의 王위는 후사가 끊어졌거늘 王氏를 빌었을지라도 이성(異姓)으로 하였으니 또한 삼한이 대대로 지켜온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다.

 

이해 11월15일에 卿들이 계책을 정하여 천자의 명을 펴고 대비의 말을 여쭈어 과궁(임금의 자칭)을 추대하여 정통을 잇게 하니 위로는 조종의 끊어졌던 제사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의 끝없는 복을 늘였다.

 

그래서 기강을 정돈하고 예약을 수명(修明)하며 전법을 바루어 쟁송(爭訟)을 그치게하여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여 현량(賢良)을 거용(擧用)하였다 조정에서 시행하는 것은 참으로 요군순민(僚君舜民)의 뜻이며 경연(經筵)에서 계옥(啓沃)하는 것은 다 이훈(伊訓) 열명(說命)의 말이므로 기재(奇才)는 참으로 고굉(股肱)에 합당하고 성열(盛熱)은 대려(帶勵)에 있을 수 없으니 포숭(褒崇)하는 이수(異數:특이한 은수(恩數)를 말함)가 없다면 어떻게 장래를 권려(勸勵)하겠는가?

 

그러므로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에 새겨 공적을 적으며 三代의 祖考를 추증하고 영세토록 자손을 사유(赦宥)하며 토전(土田)을 내리고 노비를 곁들이며 또 은(銀) 50냥과 구마(駒馬)1필을 내린다.

 

아! 내가 어렵고 큰 기업을 이어받아 허물을 면하려고 생각하니 경(卿)은 보좌하는 마음을 더욱 굳혀서 끝내 명예를 길이 하라]] 라고 교서를 내렸다.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에 올랐다. 그때 국가에 일이 많아서 기무(機務)가 호번(浩繁) 하였는데 公이 승상이 되어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서 큰일을 처치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며 좌우로 주답(酉州 答)하는 것이 모두 적당하였으므로 감히 이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의 풍속은 무릇 상제(喪祭)에 오로지 불법을 숭상하여 기일에는 재승(齋僧)하고 시제에는 명가(名家) 일지라도 지전 만을 진설 하였다가 제사가 끝나면 불살랐고 혹 폐지하는 사람도 자못 많았는데 公이 청하여 사서(士庶)로 하여금 주자가례를 본받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예의의 풍속이 다시 일어났다.

 

이보다 앞서 수령(守令)에는 참외(參外) 이서(吏胥)를 섞어 임용하였으므로 직질(職秩)이 낮고 인물이 어리석어서 침노가 갖가지로 많아 백성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매 청하여 청렴한 명망이 있는 참상으로 갈음하고 감사 수령관을 보내어 출척(黜陟)을 엄정하게 하니 피폐하였던 것이 되살아났다

 

도평사사가 국정을 전총(專摠)하여 금곡(金穀)의 출납을 오직 육방의 녹사가 백첩(白牒)으로 시행하여 외람된 일이 많으므로 경력(經歷) 도사(都事)를 두어 서무를 종리하고 그 출납을 치부하니 폐단이 없어지고 일이 다스려졌다.

 

公이 또 학교가 많지 못한것을 걱정하여 경중에는 오부(五部)의 학당을 세우고 외방에는 작은 고을에도 향교를 두니 문풍이 다시 떨쳤다. 기강을 가다듬어 국체(國體)를 세우고 용산(龍散)을 태거하여 준량(俊良)을 등용하고 호복을 폐지하여 화제를 따르고 의창(義倉)을 세워서 궁핍을 진구(賑救)하고 수참(水站)을 두어서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도 다 公의 계획이었다.

 

그밖에 시행하고 폐지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이 은택을 입게 한 것을 이루 다 적을수 없다.

우리 성조(盛朝)가 천명을 받으려 할때에 公이 절의를 위하여 운명하니 곧 임신년(공양왕4 1392년4월4일)이었으며 수는 56歲이었다.

 

처음에 해풍군(海豊郡)에 장사하였다가 영락,명성조,때의 병술년(태종 6년 1406년 3월)에 용인현의 치소(治所) 북쪽에 있는 쇄포촌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을유(1405년)에 선정 문충공 권근(先正 文忠公 權近)이 상서하여 봉증(封贈)을 더하고 그 子孫을 녹용(錄用)하여 후인을 권려(勸勵)하기를 청하니 전하(태종:이방원)가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여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감예 문춘추관사,익양부원군을 추증 하고 文忠이라 증시 하였다.

 

公은 천품이 지극히 고상하고 호매(豪邁) 하기가 여느 사람보다 뛰어났다.

젊어서부터 큰 뜻을 가졌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뭇 서적을 널리 보고 날마다 중용,대학을 외우며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지식을 추극하고 자신을 돌이켜 실천하여 참된 것이 쌓이고 힘쓴 것이 오래매 전하여지지 않은 염락(簾洛)의 비지를 혼자서 알았다.

 

그러므로 사업에 시조 하고 의논에 발설한 것이 모두 이의할 수 없어 광명정대 하여 워낙 이미 청사(靑史)에 빛났으니 참으로 일세에 빼어난 재주라 하겠다.

 

아! 公과 같은 재주로 흥하는 임금의 사업을 도와 그 배운 바를 죄다 폈더라면 백도(百度)를 단청(丹靑)하고 一世를 도견하여 성대한 경륜이 천고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인데 불행하고 운 나쁘게 쇠망에 가까운 때를 만나 천명이 이미 가고 인심이 이미 떠났는데 홀로 끝내 절조를 한결같이 하다가 드디어 목숨을 버리기에 이르렀으니 통탄스럽다.

 

그러나 그 큰 충절은 바로 일월과 함께 우주에서 빛을 다투니 본디 公의 불행이 아니다.

公이 지은 詩文은 매우 많으나 公의 아들 형제가 젊어서 상란(喪亂)을 만나 거의 다 산실하고 장년이 되어서 유고를 모아 겨우 詩 몇몇 수 를 얻었으니 그 글이 일실(逸失)된 것은 아까우나 후세 사람이 시의 호방 하고 준결한 것을 보면 公의 사람됨을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永樂 庚寅 太宗10년 門人 推忠翊戴開國功臣 姿憲大夫 東原君 寶文閣提學 咸傅霖 撰

 

[지은이]

함부림(咸傅霖)

공민왕 9년 생으로 字는 윤물(潤物) 號는 난계(亂溪) 본관은 강릉 으로 벼슬은 예문관검열등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어 중방 무신에게 항거하다가 파직되고 공양왕 4년에 병조정랑,으로서 도평의사사도사,를 겸직하고 이해에 조선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예조의랑, 좌산기상시, 명성군에 봉해지고 태종 3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동원군에 개봉, 뒤에 대사헌, 형조판서, 전라, 황해, 경기, 충청, 경상도 도관찰출척사등을 역임 했다. 시호는 정평(定平)으로 태종10년에 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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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포은집(圃隱集)

 

圃隱 先生 行狀

 

公姓鄭。諱夢周。字達可。號 圃隱。慶州府迎日縣人。遠祖襲明。以名儒仕高麗仁宗朝。官至樞密院知奏事。曾祖仁壽。贈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祖裕。贈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考云瓘。贈愼德守義誠勤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兵曹事,上護軍,領景靈殿事,日城府院君。妣永川李氏。贈卞韓國大夫人。膳官署丞約之女也。妣有娠。夢抱蘭盆忽驚墮。寤而生公。乃至元丁丑十二月戊子也。因名公夢蘭。公生而秀異。肩上有黑子七。列如北斗形。至九歲。妣晝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公也。又名夢龍。旣冠。乃改今名。至正乙未冬十一月。丁內艱。廬墓終制。丁酉。中監試第三名。庚子。政堂文學金得培,樞密院學士韓邦信掌禮圍。公連魁三場。遂擢第一。華聞大播。壬寅。選補藝文撿閱。甲辰。韓邦信爲東北面都指揮使。我太祖爲兵馬使。公以從事官從擊女眞三善三介于和州走之。尋陞修撰。累遷至典農寺丞。乙巳春正月。丁外艱。于時喪制紊弛。士大夫遭喪。皆百日卽吉。公獨廬二親墓。哀禮俱盡。國家嘉之。爲㫌其閭。服闋。除通直郞,典工正郞。辭不就。丁未。以禮曹正郞兼成均博士。國家自辛丑被兵以來。學校荒廢。至是恭愍王銳意復興。新創成均館。以學官小。選碩儒若永嘉金九容,潘陽朴尙衷,密陽朴宜中,京山李崇仁及公兼學官。以牧隱李文靖公兼大司成。時經書至東方者唯朱子集註。而公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雲峯胡氏四書通。與公所論。靡不脗合。諸儒尤加歎服。牧隱亟稱之曰。達可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戊申。進奉善大夫,成均司藝,知製敎。自是凡除授。皆帶三字及館閣。洪武辛亥。轉中議大夫大常少卿。俄遷成均司成。階中正。壬子春。以書狀官從知密直司事洪師範赴京。賀平蜀。兼請子弟入學。秋八月。還道大倉。至海中許山遭颶風。船敗漂抵巖島。師範溺死。公萬死乃生。割韂而食者十三日。事聞。帝具舟楫取還。厚加賙恤。翌年秋七月。乃還。甲寅。出按慶尙道。乙卯。還拜右司議大夫藝文館直提學。尋復入成均爲大司成。初。皇明之肇興也。公力請于朝。首先歸明。大爲高皇帝所嘉。至是玄陵被弑。金義殺使。國人恟懼。不敢通使朝廷。公首陳大義。以謂邇來變故。當早詳奏。使上國釋然無惑。豈可先自疑貳。構禍生靈。於是始遣使告哀。且辨析金義事。乙卯。北元遣使來。其詔有慢語。權臣李仁任,池奫欲復事元。議迎其使。公與文臣十數人抗章論列。請却不納。詞甚剴切。池,李深忌。貶公彦陽。餘悉流遠州。踰年賜環。時倭冦充斥。瀕海州郡。蕭然一空。國家患之。嘗遣羅興儒使覇家臺說和親。其島主將拘囚興儒。幾致餓死。僅保性命還。權臣嗛前事。繼使公。人皆危之。公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鄰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公援筆立就。豪俊警策。於是緇徒坌集。日擔公之肩輿請觀奇勝。及歸。刷還俘尹明,安遇世等數百人。遂使三島悉禁侵略。倭人到于今稱之不已。初聞公之卒。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公之信義能服頑梗者如此。遇世歸事太祖有勞。官至二品。厥後李子庸奉使。又被拘囚如興儒。於是國家益重公之專對也。越數年。公憫念倭賊奴我良家子弟。迺謀贖歸。力勸諸相各出私貲若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詞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戊午。拜正順右散騎常侍。己未。歷典工禮儀典法三判書。階奉翊。庚申。判書版圖。秋從太祖擊倭雲峯。大捷還。遷密直提學,商議會議都監事。明年。僉書密直司事。壬戌夏。進貢金銀。冬又以請謚再赴京。癸亥。以東北面助戰元帥。復從太祖赴征。甲子。陞匡靖大夫政堂文學。時國家多釁。高皇帝震怒。將兵于我。增定歲貢良馬五千匹。金五百斤。銀五萬兩。細布匹數如銀兩。乃以五歲貢不如約。杖流入朝使臣洪尙載,金寶生,李子庸等于遠州。至是年當賀聖節。諸宰相皆憚行䂓避。㝡後乃擬遣密直副使陳平仲。平仲以臧獲數十口賂權臣林堅味。遂辭疾。堅味卽擧公聞。王召公面諭曰。邇來我國見責朝廷。皆大臣過也。卿博通古今。且悉予意。今平仲疾不能行。乃代以卿。卿意何如。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况朝天乎。然我國去南京凡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去聖節纔六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王曰。何日就道。對曰。安敢留宿。遂行。晨夜陪道。及節日進表。帝覽表畫日曰。爾國陪臣等。必相托故不肯來。日迫乃遣爾也。爾得非往者以賀平蜀同差來者乎。公悉陳其時船敗留滯。帝曰。然則應解華語。溫其玉音。特賜慰撫。勑禮部優禮以送。遂放還洪尙載等。乙丑。同知貢擧。取禹洪命等三十三人。世稱得士。丙寅。以請减歲貢赴京。奏對詳明。得永除前五年未納者及增定歲貢常數。只定貢種馬五十匹。公之忠義至誠。動能感悟淵衷。開霽天威者如此。及還。王喜甚。賜衣帶鞍馬。仍拜門下評理。明年。請解職。戊辰春。拜三司左使。時權奸專柄。豪奪民田。占至數圻。貪饕無厭。國窶民瘠。公痛之次骨。請革私田。民賴以生。秋。拜門下贊成事。庚午秋。賜純忠論道佐命功臣之號。階加重大匡。以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領書雲觀事,益陽郡忠義君。冬。恭讓王卽位。敎曰。撥亂反正。誠社稷之忠臣。崇德報功。實國家之令典。純忠論道佐命功臣,重大匡,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鄭夢周。天人之學。王佐之才。射策而聯捷魁科。廬墓而克伸孝志。惟根本培植於內者確乎不拔。故英粹發越於外者煥乎有文。先王任用而俾掌絲綸。後生景慕而如仰山斗。唱鳴濂洛之道。排斥佛老之言。講論惟精。深得聖賢之奧。敎誨不倦。欝有人材之興。德望由是而益崇。聲名以之而大振。聖明勃興之伊始。國家歸附之㝡先。愼簡臣僚。擧充書狀。航滄海而乃往。因颶風之所飄。僅脫萬死以旋歸。尤荷九重之眷顧。迨玄陵賓天之後。當金義奔胡之初。有權臣執狐疑之心。謂庶官憚駿奔之役。莫肯遣使於上國。將欲嫁禍於生靈。卿與鄭道傳等力言。以謂邇來變故之相仍。盍具事情而申達。苟獲罪於天子。難延祚於邦家。故有使介之行。以明臣子之分。顧東方之寧謐。繇卿輩之謀猷。厥後胡使之來。書詞不順。當時郊迓之議。小大皆然。率李詹,伯英之徒極陳不可。忤仁任,池奫之輩未得見容。竄逐嶺南者數年。往還日本者經歲。由小邦覲聘之緩。致天朝譴責之嚴。國步危疑。人心恐懼。跋涉山川之遠。親瞻天日之容。始通王覲之途。終减歲貢之額。惟自昔罔愆事大之禮。肆至今克有保民之休。粤自甲寅。以至己巳。不幸有禑,昌僭竊之禍。居常懷狄,張興復之忠。天實臨於爾心。事竟成於有志。洪武二十二年十月間。門下評理尹承順回自京師。欽奉聖旨。高麗君位絶嗣。雖假王氏以異姓爲之。亦非三韓世守之良謀。是年十一月十五日。卿等定策。宣天子命。禀大妃言。推戴寡躬。俾承正統。上以奉祖宗旣絶之祀。下以延子孫無疆之休。於是整頓紀綱。脩明禮樂。正田法而息爭訟。汰冗官而擧賢良。廊廟施爲。實堯君舜民之志。經筵啓沃。皆伊訓說命之言。奇材允叶於股肱。盛烈難忘於帶礪。苟無褒崇之異數。何以勸勵於將來。是用立閣圖形。勒碑記績。追贈三代祖考。宥及永世子孫。錫之土田。副以臧獲。仍賜白金五十兩。廐馬一匹。嗚呼。予惟襲艱大之業。思免厥愆。卿益堅弼亮之心。以永終譽。尋進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書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時國家多故。機務浩繁。公爲相。不動聲色。而處大事决大疑。左酬右答。咸適其當。諸相無敢有異同者。時俗凡喪祭。專尙桑門法。忌日齋僧。時祭雖名家。只設紙牋。祭竟焚之。或廢者頗多。公請令士庶倣朱子家禮。立廟作主。以奉先祀。禮俗復興。先是。守令雜用參外吏胥。秩卑人劣。侵漁百出。民不堪命。請代以參上有淸望者。仍遣監司首領官嚴其黜陟。疲瘵復蘇。都評議使司專揔國政。而金穀出納。唯六房錄事白牒施行。事多猥濫。置經歷都事。綜理庶務。籍其出納。弊祛事理。公又患庠序之未廣也。內建五部學堂。外於十室之邑。亦置鄕校。文風復振。至於整紀綱而立國體。汰冗散而登俊良。革胡服而襲華制。立義倉以賑窮乏。設水站以便漕運。皆公畫也。其他施罷利國澤民者。不可勝紀。及我盛朝將受命。公伏節以終。乃壬申四月初四日也。壽五十六。初葬于海豊郡。永樂丙戌三月。遷葬于龍仁縣治之北曬布村之原。歲在乙酉。先正文忠公權近上書請加封贈。錄其子孫以勵後人。殿下嘉納。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公天分至高。豪邁絶倫。少有大志。好學不倦。博覽羣書。日誦中庸大學。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眞積力久。獨得濂洛不傳之秘。故其措諸事業發於議論者。十不能二三。而光明正大。固已炳燿靑史。眞可謂命世之才矣。嗚呼。使公而佐興王之業。盡展其所學。則丹靑百度。陶甄一世。經綸之盛。當無愧於千古矣。不幸阨會衰叔。天命已去。人心已離。而獨終始一操。遂至捐生。痛哉。然其大忠大節。直與日月爭光宇宙。初非公之不幸也。公所著詩若文甚多。而公之嗣伯仲氏少遭喪亂。散失殆盡。及其壯。裒集遺藁。僅得詩若干首。惜乎其文之逸也。後之人觀詩之豪放峻㓗。則可以想公之爲人矣。<끝>

 

永樂庚寅三月日。

門人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東原君,寶文閣提學咸傅霖。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