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이자춘 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이성계 아버지

야촌(1) 2011. 2. 27. 14:04

이자춘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 1315년(충숙왕 2)~1360년(공민왕 9)

고려국 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高麗國 贈 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判典理司事 完山府院君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榮祿大夫 判將作監事 李公神道碑銘 幷序)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다.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다.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다.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다.

장군 양무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다.

안사는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의주(宜州)의 수령으로 어진 정치를 펼쳤다.

 

인척 때문에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살았다. 대개 그 곳의 풍속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 이곳 현령의 뜻을 거슬리자, 현령이 해(害)치려는 사실을 어떤 사람이 공(公)에게 알렸다.

 

공은 가족을 이끌고 몽고씨(蒙古氏)에게 달아났다. 몽고씨가 그를 남경(南京)에 살게 하고, 5천 호소(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삼았다. 다루가치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千戶) 행리(行里)를 낳고, 그의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천하의 병선(兵船)들이 우리나라에 모여들었다. 충렬왕(忠烈王)은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군함(軍艦)을 만들게 하고, 명장을 뽑아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남경천호(南京千戶)도 또한 원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왔다.


충렬왕을 만나보는 일이 두세 번 거듭될수록 공은 더욱 공경하고 더욱 삼가하였다. 매양 왕에게 사죄하여 말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이의 입을 벗어나려고 하였을 뿐이며,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왕은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어버리겠는가. 이제 경의 하는 일을 보니 마음에 있는 바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호장(登州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어 찬성사(贊成事)로 추증된 춘(椿)을 낳았다. 춘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에 왔다. 충숙왕은 상품을 더욱 넉넉하게 주어, 그의 충성을 권장하였다. 찬성사(贊成事 : 椿)는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증된 박광(朴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에게 아버지이며, 어머니이다.

 

공의 이름은 자춘(子春)이며, 자(字)도 자춘이다. 이(齒)를 갈만한 나이에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바가 있었다. 차츰 자라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아버지의 벼슬을 계승하자 사졸(士卒)들이 즐겨 따랐다.

 

지정(至正) 을미년(공민왕 4, 1355) 선왕(先王)을 뵈었더니, 선왕은 “그대의 조부와 아버지가 몸은 비록 외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우리 고려의 왕실에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실로 총애하고 칭찬하셨다. 이제 그대가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으니, 내 장차 너를 옥(玉)같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은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관리의 다스림이 소략하나 땅이 비옥하여 인구가 많아지자 우리 나라의 동쪽과 남쪽에 살던 항산(恒産)이 없는 백성들이 많이 옮겨 갔다. 국가가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알리자, 황제의 명령을 받아 파견된 관리가 왔으며 요양성(遼陽省)에서도 또한 관리가 왔다.

 

선왕은 성낭중(省郎中) 이수산(李壽山)을 보내 새 호적(戶籍)의 백성과 옛 호적의 백성을 가려 구분하게 하였다. 이를 삼성조감호계(三省照堪戶計 : 세 성(省)이 호적의 수를 대조하여 감정(勘定)함)라 하였다.

 

그 뒤에 위무(慰撫)하고 안정시키는 일이 마땅한 바를 잃어 백성들이 점차 떠나자, 공에게 이곳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여러 대에 걸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포상한 것이다. 백성들은 이때부터 각자의 생업에 안정함을 얻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봄 공이 내조(來朝)하자, 선왕은 맞아들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안정하게 하는데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그 때 기씨(奇氏)의 모란(謀亂)을 밀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쌍성의 관리가 이에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선왕은 공에게 “경(卿)은 진(鎭)으로 돌아가라. 우리 백성 중에 만일 변란이 있거든 마땅히 나의 명령과 같이 하라”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하였다. 재상 유인우(柳仁雨)에게 쌍성으로 가서 잔당을 토벌하고 또 평민에게 두려워하지 말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유인우가 접경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못하였다.

 

임금은 공에게 소부윤(小府尹)과 중현대부(中顯大夫)의 관계(官階)를 내리면서,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시켜 내응(內應)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공은 명령을 듣고 즉각 행군하여 유인우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쫓았다.

 

소생도경이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이에 임금은 “쫓아야 할 자는 갔다. 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음식물을 갖고 와서 군사를 환영하였다. 주현(州縣)의 이름도 모조리 그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고주(高州) 요덕(耀德) 장평(長平) 원흥(元興) 정주(定州) 함주(咸州)가 바로 그것이다.

 

9월 공의 관계(官階)를 대중대부(大中大夫)로 하고 사복경(司僕卿)에 임명하고, 개경(開京)에 집을 하사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에 승진되고, 통의(通議) 정순(正順)의 두 대부가 더해졌다.

 

이 해에 이색(李穡)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뜰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니, 낯은 주홍 빛깔이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감히 지위의 순서를 뛰어 넘어 서로 더불어 대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풍채는 지금도 오히려 나의 마음과 눈에 남아 있어 잊을 수가 없다.

 

경자년(공민왕 9, 1360) 봄 3월 영록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 判將作監事)로서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었다. 4월 갑술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나이 46세였다. 아깝다. 부음(訃音)을 듣고 현릉(玄陵 :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을 하고 예(禮)에 따라 부의를 보냈다.

 

사대부들은 모두 놀라 “동북 방면에 사람이 없어졌구나” 하였다. 그 해 8월 병신일 함주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세 번 장가들었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해졌는데, 문하시중 영흥부원군(門下侍中 永興府院君)으로 추증된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 성계(成桂)를 낳았다.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兼 判典農寺事 上護軍 完山府院君)이다.

 

딸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 용원부원군(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 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정화택주(貞和宅主)에 봉해져 있다. 측실(側室) 이씨(李氏)의 아들은 원계(元桂)이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 중대광 완산군(推充節義輔理功臣 重大匡 完山君)이다.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로 봉했으며, 아들 화(和)는 지금 성근보조공신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誠勤輔祚功臣 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上護軍)이다. 판삼사공(判三司公 : 이성계)은 먼저 부인 한씨(韓氏)는 원신택주(元信宅主)로 봉해졌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은퇴한 경(卿)의 딸이다.

 

아들 방우(芳雨)는 전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방과(芳果)는 추충여절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推忠礪節翊衛功臣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兼 軍簿判書 鷹揚軍上護軍)이며, 방의(芳毅)는 중정대부 신호위대호군(中正大夫 神虎衛大護軍)이며, 방간(芳幹)은 전 군기소윤(軍器少尹)이며, 방원(芳遠)은 통직랑 예의정랑 지제교(通直郞 禮儀正郞 知製敎)이며, 방연(芳衍)은 종사랑 성균박사(從仕郞 成均博士)이다.


딸 둘이 있으나 모두 어리다. 후취(後娶) 강씨(康氏)는 보령택주(保寧宅主)를 봉해졌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이다. 아들 방번(芳蕃)은 고공좌랑(考功佐郞)이며, 방석(芳碩)은 군기록사(軍器錄事)이고,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의 아들 경(卿)은 진사(進士)이며, 후(候)는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이다. 나머지 사(師) 부(傅) 보(保) 백(伯)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집에 있고, 차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시집갔다.

 

완산군(完山君 : 李元桂)은 문씨(文氏)를 재취(再娶)하여 아들을 낳았다. 양우(良祐)는 전 사복정(司僕正)이며, 천우(天祐)는 전 호군(護軍)이다. 딸은 전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김씨(金氏)는 찬성사(贊成事) 용(鏞)의 딸이다. 아들 조(朝)는 진사(進士)이며, 서(曙)는 전 낭장(郎將)이며,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에게 시집갔다. 다음 두 아이는 모두 어리다.


동지공(同知公 : 李和)의 재취(再娶) 안씨(安氏)는 영동정(令同正) 종기(宗寄)의 딸이다. 아들 지숭(之崇)은 전 연경궁부사(延慶宮副使)이다. 노씨는 경원군(慶原君) 은(訔)의 딸이다. 아들 숙(淑)은 진사(進士)이며, 징(澄)은 별장(別將)이며, 다음 세 명은 모두 어리다. 딸 하나 역시 어리다.


판서(判書 : 방우)는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복근(福根)이며,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 방의)은 간성(杆成)의 수령인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석근(石根)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小尹 : 방간)은 판도판서(版圖判書)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맹중(孟衆)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정랑(正郞 : 방원)은 판전교(判典校)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색(穡)이 계묘년(공민왕 12, 1363)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이듬해 판삼사공(判三司公 : 이성계)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판삼사공이 지문하(知門下)에 임명되었을 때 나는 사공(司空)으로 정당(正堂)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근신(近臣)들에게 묻기를, “문신(文臣) 색(穡)과 무신(武臣) 성계(成桂)가 같은 날 입성(入省)하였는데 조정의 여론들은 어떻다고 하느냐?” 하였다. 대체로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동렬(同列)에 있던 자가 적고 나는 공(公)과 더불어 물처럼 담담(淡淡)하여 오래도록 서로 공경하는 풍모를 가지니 사람들은 간혹 우리들을 사모하였다.

 

그러니 감히 공의 아버지 보기를 나의 아버지 보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의 신도(神道)에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내 이씨(李氏)의 계보를 상고해 보니, 신라의 대아간(大阿干) 인물이 뛰어나고 슬기로와 이미 임금의 제정(祭政)을 도왔네. 후(厚)한 봉록으로 벼슬하는 고관이 대대로 많았네. 오마(五馬)로 삭방(朔方)에 노닐어 위엄과 은혜 아울러 드러났도다.

 

그 곳의 풍속을 즐겨 머물러 사니 삼척(三陟)은 고향과 같도다. 수령이 원망하는 말 있기에 몸을 빼쳐 원(元)나라로 들어갔네. 천부장(千夫長)의 임명을 받았으니 덕망이 있어 백성들이 은혜를 품었으며, 온화하고 공손하게 옛 임금을 섬기니 조빙(朝聘)은 어이 그리 부지런하였던고. 근본을 보답하고 또 처음에 돌아가서 세속을 깨우치고 따라 공훈도 이루었네.

 

더구나 우리의 시중공(侍中公)은 공민왕(恭愍王)이 그 충성을 크게 칭찬하였네.하늘은 어찌하여 그를 빼앗음이 급하였는가. 백성들의 궁(窮)과 통(通)은 누가 맡아 다스릴까. 판삼사(判三司)인 아들이 있어서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자손들이 모두 귀현(貴顯)하였으니, 천도가 무지(無知)함은 아니로다.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는 반드시 무성하며, 근원이 멀면 흐름은 길다. 나의 졸렬한 것이 부끄러우나 명시(銘詩)는 천년으로 밝은 빛을 끼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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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高麗國贈純誠勁節同德輔祚翊賛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完山府院君朔方道萬戶兼兵馬使榮祿大夫判將作監事李公神道碑銘幷序 (李 穡)全之李氏大姓也新羅阿干諱光禧生司徒三重大匡立全司徒生兢休兢休生廉順廉順生承朔承朔生充慶充慶生景英景英生忠敏忠敬生華華生珍有珍有生宮進宮進生大將軍勇夫大將軍生內侍執奏隣執奏娶侍中文公諱克謙之女生將軍陽茂將軍娶上將軍李公諱康濟之女生安社性豪放有志四方甞知宜州有惠政以姻婭故移居江陵府之三陟縣盖樂其土風也以事忤知縣知縣謀害之或以白公挈家奔于蒙古氏蒙古氏處之南京爲五千戶所達魯花赤達魯花赤娶千牛衞長史李公諱公肅之女生千戶行里襲其職世祖征日本天下兵船會于海東我忠烈王遣重臣造大艦選名將領精卒往討焉時南京千戶亦以朝命來會見忠烈王至于再三益恭益虔每謝曰先臣奔于北實脫虎狼之口耳非敢背君父也願上釋其罪上曰卿本仕族豈忘本乎今觀卿擧止足知心之所存矣千戶娶登州戶長崔公諱基烈之女生贈賛成事椿繼志來朝忠肅王錫賚益豐所以勸忠也賛成事娶贈門下侍中朴公諱光之女於公爲考妣公諱子春字子春齠齔異凡兒稍長善騎射繼父之職士卒樂附至正乙未朝先王先王曰乃祖乃父身雖在外乃心王室我祖考實寵嘉之今尒無忝尒祖考予將玉汝於成矣雙城邊遠吏治闊略地且沃野生齒蕃息我東南民無恒産者多歸焉國家聞于中書省奉聖旨差官來遼陽省亦差官來先王馳省郎中李壽山往會分揀新舊籍民謂之三省照勘戶計其後撫綏失宜稍稍流徙則命公主之所以賞累世之忠也民由是得安其業至于今焉丙申春公來朝先王迎謂曰撫綏頑民不亦勞乎時有密告奇氏謀亂者辭連雙城官吏先王語公曰卿且歸鎭吾民脫有變當如吾命五月平奇氏命宰臣柳仁雨往討枝黨且諭平民無恐抑兵至境逗遛不敢進上授公少府尹階中顯以兵馬判官丁臣桂傳旨內應公聞命卽刻含枚就行與柳合兵逐小生都景小生都景棄妻子夜遁於是上命曰可逐者去矣餘皆吾民也無胥戕無胥虐其民也慶壺漿以迎州縣之名悉復其舊曰高州曰耀德曰長平曰元興曰定州曰咸州是己九月進公階大中大夫移司僕卿賜開京第因留居之明年秋進千牛衞上將軍加通議正順二大夫是年穡爲諫大夫在庭中見公顔如渥丹美鬚髯不敢歷位相與言然其風彩尙在吾心目不能忘焉歲庚子春三月以榮祿大夫判將作監事出爲朔方道萬戶兼兵馬使四月甲戌病歿年四十六惜哉訃聞玄陵悼甚遣使弔哭致賻如禮士大夫咸驚曰東北面無人矣其年八月丙申葬于咸州之東歸州之原公凡三娶李氏生男曰元桂今爲推忠節義補理功臣重大匡完山君夫人崔氏封三韓國大夫人贈門下侍中永興府院君諱閑奇之女生男曰成桂今爲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完山府君金氏封貞安宅主生男曰和今爲誠勤輔祚功臣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女適純誠翊衞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原府院君趙公仁璧今封眞和宅主崔氏出也孫男女若干人完山君再娶文氏生男曰良祐前司僕正曰天祐前護軍女適前中郎將李仁雨金氏賛成事諱鏞之女生男曰朝進士曰曙前郎將女適生員盧愼次二人皆幼判三司公再娶韓氏封元信宅主密直副使致仕諱卿之女生男曰芳雨前禮儀判書曰芳果推忠礪節翊衞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敭軍上護軍曰芳毅中正大夫神虎衞大護軍曰芳幹前軍器少尹曰芳遠通直郎禮儀正郎知製敎曰芳衍從仕郎成均博士女二人皆幼京室康氏封保寧宅主判三司事諱允成之女生男曰芳蕃承奉郎考工曹佐郎曰芳碩軍器錄事女適中顯大夫興威衞大護軍李濟同知再娶安氏今同正宗奇之女生男曰之崇前延慶宮副使盧氏慶原君諱訔之女生男曰淑進士曰澄別將曰湛曰淸曰澈皆幼女一人幼外孫男女若干人龍原府院君生男曰卿進士曰候掖庭內謁者曰師曰傅曰保曰伯皆幼女長在室次適內府副令林孟陽曾孫男女若干人判書娶賛成事池公諱奫之女生男曰福根女三人皆幼大護軍娶知府杆城崔仁之女生男曰石▨女一人幼少尹娶版圖判書閔公諱璿之女生男曰孟衆女二人皆幼正郎娶判典校閔公諱霽之女生女幼穡在癸卯承乏密直提學明年判三司公來爲副樞歲辛亥三司公拜知門下余以司空改政堂玄陵問近臣曰文臣穡武臣成桂同日入省廷議以爲如何盖自矜也數十年間同列少在者而吾與公如水之淡久敬之風人或慕之敢不視公父猶吾父乎是以不敢辭而銘其神道云銘曰

 

我考李氏譜新羅大阿干膚敏旣祼將膴仕多高官五馬游朔方威惠廼並彰留居樂士風三陟如故鄕守臣有怨言脫身歸大元授命長千夫世德民懷恩溫恭事舊君朝聘何勤勤報本又返始警俗仍樹勳矧我侍中公玄陵大賞忠天胡奪之亟孰司人窮通有嗣判三司功名冠一時子孫盡貴顯天道非無知本固枝必茂源遠流斯長銘詩愧我拙千載垂耿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