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연안 연성대첩비명 병서(延安 延城大捷碑銘 幷序)

야촌(1) 2011. 2. 28. 05:09

■ 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

 

黃海道 延白郡 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位置한 延城大捷碑는 壬辰倭亂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黃海道 延安府에서 勝戰했던 事實을 記錄한 碑이다.

 

이단(二段)의 長方形 臺石위에 烏石의 大理石 材質의 月頭形 碑身을 세운 碑座圓首形이다. 1608年(宣祖 41年)에 建立된 延城大捷碑에는『延城大捷碑』라는 전서(篆書)가 陰刻되어 있다.

 

領議政을 歷任한 鰲城府院君 白沙 李恒福『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이 左議政 時節에 碑文을 撰述하였고, 刑曹判書를 歷任한 忠敏公 禾谷 鄭賜湖『1553년(명종 8)~1616년(광해 8)』가 司憲府 大司憲 時節에 글씨를 쓰고, 右議政을 歷任한 文忠公 仙源 金尙容『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이 上護軍 時節에 篆額을 쓰고, 그 아래에 분충토적(奮忠討賊: 분발하여 왜적을 격멸한다)의 기치(旗幟) 밑에 성안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1592年 8月 末부터 9月 初까지 延安城에 달려든 倭敵들을 決死的으로 물리친 內容을 적었다.

 

碑文에는 1592年(宣祖 25年)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李廷馣이 延安에서 倭敵을 쳐부수며 善戰했다는 事實과, 1605年(宣祖 38年)에 임금이 포상(褒賞)하고 1608年(宣祖 41年)에는 延安사람들이 議論하여 碑를 세우게 되었다는 事實을 먼저 記錄하고, 李廷馣의 官職名을 자세(仔細)히 적은後, 대첩(大捷)의 전말(顚末)을 詳細하게 밝혔다.

 

李廷馣이 同生 知退堂 李廷馨과 함께 臨津江에서 敵을 막다가 失敗하고 延安으로 들어가 宋德潤, 趙光庭 等과 함께 義兵 500餘名을 모아 延安을 지키는데 倭將이 海州로부터 3,000餘名의 部隊를 이끌고 包圍 攻擊하자 4日 동안 血戰 끝에 敵兵을 半 以上 射殺하였다.

 

이에 倭敵이 끝내 包圍網을 풀고 逃亡하였다고 한다. 碑의 크기는 全體 높이 254cm, 碑身 198cm, 너비 74cm의 規模이다.

 

 

황해도 연안읍 연안성대첩비 북한보물 제9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성대첩비의 탁본문

 

연성대첩비 탁본문(비의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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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留齋集卷之十二

 

연성대첩비명 병서(延城大捷碑銘 幷序)

 

옛날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 1591)에 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은 바다가 막혀있고 멀리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믿고, 거짓으로 이웃 나라를 공갈(恐喝)하며 우리를 업수이 보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천자의 나라마저 공격하려 하는구나. 스스로 으뜸이라고 뽐내며 불손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니, 화복(禍福)의 이치로써 엄히 훈계하고 간사하고 미쳐 날뛰는 행동을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자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다음 해 임진(壬辰)년에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달려와 왜구들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소리 지르더니,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는 재를 넘고 호수를 건너 웃통을 벗어젖히고 서울에 다다르니, 손가락질하고 돌아보는 사이에 이미 우리나라의 사방을 모두 짓밟아 버렸다.

 

이 때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장군은 해군을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막아 해상에서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으며, 절도사(節度使) 김시민(金時敏)장군은 얼마 안되는 군사로서 진양(晋陽; 지금의 진주)을 보호하여 남쪽 지방을 어려움으로부터 막아내었다.

 

또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공은 의롭게 500 명의 군대로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일부)을 지켜내어 앞에서 충성심을 떨쳤으며, 원수(元帥) 권율(權慄)장군은 남쪽의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쳐서 후방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 버렸다.

 

마침 중국에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양을 격파하고 서로 소리 높여 호응하니, 앞뒤로 뿔을 잡고 꼬리를 붙드는 형세를 이루어 적을 협격(挾擊)하여 우리의삼경(三京) 을 수복하고 다시 팔로(八路-전국 八道로 가는 길)를 온전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중국의 천자께서 이를 가상하게 여겨 널리 포상(褒賞)하고 상금을 차등있게 하사하셨다. 이 때에 세상에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맞추어 “무부(武夫; 장수)가 할 만한 일이니, 유자(儒者; 선비)는 네가 하거라”고 할 정도였다.

 

그 후 13년이 지난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왕이 지난 전쟁에서의 공훈에 따라 작위를 책봉하고 상을 내렸는데, 또 4년 뒤인 무신년(선조 31, 1608년)년에 연안(延安) 사람들이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그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사양하였으나 피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돌아가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賛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추증받은 월천군(月川君) 이공(李公)의 이름은 정암(廷馣)이고 자는 중훈(仲薰)이다.

 

이전에 공이 이조참의(吏曹叅議)의 벼슬에 있을 때에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는데, 공의 동생인 정형(廷馨)이 이전에 개성(開城)의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끼친 은혜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개성에 남아 지키도록 하니,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지킬 것을 청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군대가 패하여 무너지자 공은 형편에 맞추어 나누어 지켜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이해 8월 22일에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러니 이 곳의 호걸(豪傑)인 송덕윤(宋德潤)·조광정(趙光庭) 등이 무리 백 여명을 이끌고 맞이하며 말하기를 “공이 이전에 남긴 은택(恩澤)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으니 청컨대 여기에 남아 우리들을 살려 주소서.”라 하였다.

 

이에 공(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을 곳을 얻었도다.”하고는 곧 성으로 들어가 군사 오백 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저울대를 잡고 자세히 말하기를“누구누구는 우리를 위하여 사방의 문을 굳게 지키고, 누구누구는 갑옷을 입고 여장(女牆) 에 올라 적들이 성의 해자(垓字) 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누구누구는 우리 군량미를 책임지고, 누구누구는 병장기들을 손질하라.”고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기를 마치자, 돈대(墩臺)에 돌을 쏘는 쇠뇌들을 모아 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 두었다.

 

어린이와 노인들 까지도 모두 참여하여 모든 사람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였다.28일에 적의 두목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재령(載寧)과 신천(信川)의 여러 군을 겁탈하고 노략질한 다음 해주(海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느린 군사 3,000여 명과 강음현(江陰縣; 황해도 金川郡의 일부)의 도적들을 합하여 예봉(銳鋒)을 날카로이 하여 공격해왔다.

 

성안에서는 놀라 실색(失色)하여 군진(軍陣)을 벗어나 도망가자는 계책을 내어놓는 이도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사와 백성들에게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백성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스스로 빠져 나간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정말로 두려운 자들은 붙잡지 않을 터이니 마음대로 성을 나가도 좋다.”고 하니 모든 군사들이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날이 기울자 적이 몰려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의 장수 하나가 성 바깥을 둘러보고 성채를 만져보고 지나가니 기세가 더욱 커졌다.

 

문장(門將) 장응기(張應祺)가 화살 하나로 가슴을 관통시켜 사살하니 적의 기세가 죽어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였다.

따로 성의 서쪽에서 높은 충차(衝車)로 성을 내려다보며 포를 쏘아 부수고 불화살을 어지럽게 쏘니, 성안에는 초가집이 많은지라 사람들이 모두 속으로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 불꽃과 연기를 바깥으로 몰아내니 적의 계책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적이 오두막 집 들을 철거하여 해자와 웅덩이를 메우고 드디어 북을 치며 성을 기어오르는데 그 무리가 개미가 달라붙은 듯하였다. 공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에 섶을 쌓아놓고는 그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을 질러 죽겠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여 힘을 합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4일 간이나 계속하니 적 또한 죽고 상한 자가 태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의 군대가 훤하더니, 적들이 죽은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는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우리 군대가 참한 적의 수급(首級)이 열여덟이고, 빼앗은 우마(牛馬)가 90여 필이며 군량미가 130여 석이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는데,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그 내용에 단지 몇일날 포위를 당했다가 몇일날 포위를 풀고 떠났다고만 되어 있을 뿐 장황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下)의 품계를 하사하고 본도(本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문무(文武)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공의 명을 받도록 하였다. 이어 여러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

 

공이 병조(兵曹)에 있을 때에는 서쪽으로 수레를 몰아 용강(龍岡)의 바다 지역까지 살펴보았으며, 중무장한 병사들을 개성(開城)에 배치하고 황주(黃州)에서 봉산(鳳山)까지 군영(軍營)을 줄지어 설치하고 강음(江陰)에까지 이르도록 하니, 패수(浿水) 남쪽에서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관서(關西)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바닷가에서 미친 듯 날뛰며 군사를 놓아 사방을 노략질하니 남쪽으로 연결하는 길이 막혀버렸으나, 공이 한 번 싸워 그 예봉을 꺾어 적을 멀리 쫏아버리니, 적들이 땀 흘리고 숨차 허덕거리며 스스로 무기를 거두고 말을 먹일 뿐 감히 공이 있는 성 아래로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서(海西-황해도)의 13개 주(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차지가 되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왕을 모시고자 하는 군사들이 아산(牙山)과 강화(江華)를 거쳐 용강(龍岡)을 건너 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까지 올 수 있었다. 말 달리고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고, 물자를 실어나르는 배와 수레가 막힘이 없게 된 것도 모두 공의 힘이라 할 것이다.

 

공은 경주 사람으로 나와 본관이 같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21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고을의 벼슬을 살았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두(召杜) 라고 칭송하였다. 이조(吏曹)에 나아가 관리의 인선(人選)을 맡으면서부터는 세상에서 요송(姚宋) 과 같은 명재상이 되리라 기대하였으며, 문장 또한 세상에 널리 떨쳤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 그 공적들이 빛을 잃게 되었으나, 뚜렷이 왕실을 중흥하니 그 정신(精神)은한죽(汗竹)에 기록되고, 품계는 높아지고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니, 은택은 조상에게까지 미쳤고 그 사적은 영원히 남을 비석에 새겨졌다. 충효(忠孝)를 모두 온전히 하였으며 문무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공만큼만 한다면 진실로 대장부(大丈夫)라고 할 것이다.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兼 領經筵)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정사호(鄭賜湖) 가 글씨를 쓰고,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지제교(知製敎)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36년(선조 41, 1608) 5월 일.

국역(國譯) : 이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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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延安 延城大捷碑 延城大捷碑(篆題)

 

昔在萬曆辛卯上謂羣臣曰日本酋秀吉塹海負隅噓喝隣邦虐始於我終圖射天夸慢自雄出不遜語其嚴諭禍福逞折姦猖毋俾再肆明年壬辰戌人走呼有寇大來踣釜拉萊踰嶺涉湖袒裼而蹈腹內指顧之頃遂大鞣我四境時則有若李統制舜臣以舟師拒閑山挫銳海上有若金節度時敏以孤軍嬰」晋陽抗難南州有若李招討廷馣以義旅守延安奮忠於前有若權元帥慄以南軍鎭幸州嘬鋒於後會天朝大將軍李提督如松提兵五萬擊破平壤聲」生勢張互爲掎角以能復我三京再全八路天子嘉之褒詔賜金有差於是天下游談者咸一口言曰武夫職耳儒者迺亦爾耶後十三年乙巳上策」勳頒賞又後四年戊申延安人謀所以載烈埀永者來問銘余辭不可謹按故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賛」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月川君李公諱廷馣字仲薰故爲吏曹叅議時主上西巡以公弟廷馨前守開城寄惠未兦」命留鎭之廷馨乞與兄同守及臨津師潰公擇形便爲分守計以是年八月二十二日至延安府中豪傑有宋德潤趙光庭等聚徒百餘迎曰公有舊恩在本」土乞留活我公笑曰吾今日得死所矣卽入城募得五百餘人提衡以勒之曰疇能爲我管四門鑰疇能坐甲登陴使賊不敢近壕疇管我糧餉疇繕我器械」隨才部分訖聚礮於墩列釜於傍老幼趨事羣能着職二十八日賊酋長政刧掠載信諸郡攻陷海州以兵三千餘人與江陰之賊悉銳而來城中色駭有欲」出陣計者公曰我旣與兵民約同死生陷民自濟所不忍也良怖甚者任自出城不汝拘也一軍咸願死守日旣吳賊進圍三匝俄有一賊帥周觀城外摩壘」而過勢益張甚門將張應祺一箭洞胸而死賊氣死不敢輕出別於西城以飛衝下瞰城中以砲碎之則亂發火箭圍中多草屋人皆心內懼汹汹忽廻風大」起烟㷔外靡賊計無奈何撤廬舍塡壕塹遂皷士陵城羣而蟻附之公知不可爲乃坐積芻戒其子濬曰城陷可自焚聞者感泣一力而齊致死如是者凡四」日賊亦死傷過半是夜師熠 賊己聚死屍盡焚之翌朝乃觧圍去我軍僅斬一十八級奪牛馬九十餘匹軍糧一百三十餘石朝廷聞公被圍上下憂危及」捷至只言賊以某日圍城以某日觧去一無張皇語議者咸言却賊易不伐功尤難上特加嘉善爲本道都巡察使文武將官皆聽公節制仍賞諸將以下有差公之在兵車駕西狩龍灣隆景持重兵據松京列營黃鳳連綴江陰危動浿南直搖關西長政猖海濱放兵四刧南路阻絶公一戰而剪其觜距賊」喘汗自戢蒭牧不敢近公城下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二南勤王之士由牙山江華渡龍岡達行在奔問有路漕輓無碍公之力也公慶州人與余同」自出相善年十八陞上庠二十一明經及第少試郡邑民呼召杜及叅銓衡世期姚宋餘事文章亦多鳴世不幸遭亂功光䟽勒辨冕中興精神汗竹秩登勳尊享有 元祀恩堆祖先事載無止旣全忠孝兩有文武作人如公寔維大夫」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監春秋館事 世子傅鰲城府院君李恒福 撰.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鄭賜湖 書.折衝將軍行龍驤衛上護軍知製 敎金尙容 篆.

 

萬曆三十六年五月 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