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박순 신도비명(朴淳神道碑銘) - 宋時烈 撰

야촌(1) 2011. 2. 27. 19:13

■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병조판서 증시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치사 봉조하 송시열은 글을 짓다.


국조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을사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도가 크게 변하고 사문이 땅에 떨어져, 성현의 글은 화근으로 지적되고 선비가 일삼는 것은 과거시험보기 위한 글뿐이어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비들이 대거 배출되어 명종, 선조 시대에는 정치와 교화가 크게 밝아짐으로써 선비된 이가 공자 · 맹자와 정자 · 주자를 근본으로 삼아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백성들이 이 아래에서 새로워 삼대(하 · 은 · 주)의 융성한 치도에 가까워졌다.

 

이때에 맑은 의론을 주창하고 선비들을 끌고 나아가 우뚝하게 영수가 된 이는, 사암 선생 박공이니, 휘는 순이요 자가 화숙인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세운이 험악하고 시론이 뒤틀려, 공이 그만 낭패을 당하여 덕업이 중도에서 막혔으므로 지금까지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긴다.

 

공은 본관이 충주이다. 박씨의 계보는 고려시대 부정 영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뒤 8세손 소가 처음 조선조에 벼슬하여 은산군수가 되었다. 아들 지흥은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아들 우는 생원과에 장원, 명경과에 합격하여 벼슬은 우윤에 이르고, 호는 육봉이다. 그 형인 상은 세칭 눌재 선생으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다.

 

육봉이 당악 김씨를 맞이하여 가정 계미년(중종 18, 1523년)에 공을 낳았는데, 뛰어난 자품에 기색이 맑고 평이하여 마치 금의 정수와 옥의 윤기 같았다. 8세에 입을 열어 사물을 읊으면 으레 온 좌석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이웃에 사는 교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의 스승 노릇을 하겠느냐?”하였고, 육봉도 평소 문장으로 자부해 왔으나 공의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마땅히 이 늙은 무릎을 꿇어야 되겠다.”하였다.


18세에 진사과에 합격, 서경덕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정미년(명종 2, 1547년)에 육봉의 상을 당하여 초막을 짓고 시묘하였는데, 너무 애통해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하였고, 소상이 지난 뒤에도 죽을 먹었다.

 

상을 마친 뒤에는 산으로 들어가 글을 읽다가 1년이 넘어 돌아왔고, 치재 홍인우를 찾아가 장횡거의『정몽』 「태화」 편 등의 글을 강론하자, 치재가 감탄하기를, “학문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숙(和叔)뿐이다.”라 하였다.


계축년(명종 8, 1553년)에 명종이 직접 경서로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논설이 정확 투철하여 온 시험장 안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므로, 드디어 수석 급제를 내렸다. 여러 관직을 역임, 이조 좌랑 · 홍문관의 수찬 · 교리를 지내고 호당에서 사가독서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의를 강론시키고 제술을 명한 다음, 손수 푸른색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권하고 또 소식의 금련촉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 이튿날 대신 상진 등이 그들을 거느리고 궁전의 섬돌에 나아가 사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당대의 성사로 여겼다.


검상 · 사인이 되었고, 어명으로 호서에 나가 재변을 조사하고 돌아와서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그때 홍문관에서 임백령의 시호를 의논하여 올리게 되었다.

 

원래 임백령은 을사사화 때 윤원형 · 정순붕 · 허자 · 이기 등과 어울려 간악하고 음흉한 짓을 멋대로 부려 문충공 규암 송인수 이하 제현을 남김없이 희생시키고 사당에 고해지고 훈적에 기록되었으며, 윤원형은 왕실의 가까운 외척으로 마침내 영의정이 되어 국권을 잡았으므로, 간당들이 그를 배경으로 삼고 바른 선비들을 노리고 있는 터이라, 임백령에게 만약 좋은 시호가 주어지지 않으면 큰 화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홍문관 관원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공이 홀로 분연히 나서서, 공소로 의정하였으니, 이는 포폄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윤원형이 흐느끼며 말하기를, “임공은 나라의 원훈으로, 시호에 충(忠)자가 없으니, 그들의 마음이 너무 흉측하다.”하고는 모두 국문하여 죄로 다스리려 하자, 온 사류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고, 임금이 공에게 중형을 가하려 하였으나 구원하는 이가 있어 파출만 명하였다.


처음에 공이 의금부에 자진 출두해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기 위하여,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나왔으므로, 집안사람들은 일이 생긴 줄을 알지 못하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공이 그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마터면 너를 다시 만나지 못할 뻔했다.”하였다.

 

그 이튿날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임술년(명종 17, 1562년)에 한산군수로 제수되었는데, 1년 만에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고, 공무가 끝나면 으레 정자에 나가 독서로 일과를 삼으므로 인근 고을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계해년(명종 18, 1563년)에 성균관 사성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 차자를 올려 시사를 논하였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이후로는 승지가 결원되면 공의 이름이 그 추천 명단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조참의에서 사간원 대사간으로 전임되었다가 체직되었고,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어서는 요승 보우의 죄를 논하고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한편, 윤원형의 파출까지 논하였다. 이는 을사사화 이후로 윤원형이 임백령 · 허자 등을 심복으로 삼아 선비들을 제거하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쳐 국세가 불안, 조석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다.

 

공이 개탄하기를, “양기를 탄핵하고 외척 두헌을 베어서 세도를 만회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하고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하자, 이공도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공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승락하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조복도 벗지 않은 채 촛불을 켜놓고 계사를 작성, 날 새기를 기다려 입궐하여 계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때 문정대비가 승하한 지 겨우 5개월이었으므로 임금이 차마 이를 윤허하지 못하다가 공의 논쟁이 더욱 강경해지자, 마침내 좌의정 심통원까지 파출시키므로, 백성들은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외방의 선비들은 선으로 향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에 육행을 지닌 선비를 선발하여 벼슬길을 깨끗이 하는가 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여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나라를 좀먹거나 백성을 해치는 일을 일체 혁파하였다. 한편 문순공 이황 이하 여러 현인이 다 세도를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하여 원우 시대와 같은 성세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번의 혁신을 주창한 초기에는 문순공 역시 의문을 품고 위험하게 여겼으니, 공이 아니었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이후부터 체직과 관직 제수가 거듭되었다.

 

병인년(명종 21, 1566년)에 부제학으로 있으며 문순공에게 서찰을 보내어, 다시 조정에 나오기를 권유하였으며, 융경 1년 정묘년(명종 22,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무진년(선조 1, 1568년)에 사신 구희직이 황제의 명으로 와서 명종의 시호로 대행왕을 전하므로 공이 원접사로 나가 영접하였는데, 조사가 공의 절도에 맞는 예의를 보고는 늠연히 존경심을 가졌고, 함께 시를 수창하면서 감탄하기를, “송대의 인격에 당대의 시격이로다.”라고 하였다.

 

구희직이 돌아간 뒤 그해 3월에 황제가 또 검토 성헌과 급사 왕새를 보내 황태자 책립조서를 전달하므로 공이 막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제수되어 있다가 다시 접반사를 맡았는데, 그들로부터 이전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성공이 공을 위하여 평원정 십절을 써 주었는데, 평원정은 나주에 있다. 공이 이 임무를 마치고 나서 대제학의 자리를 문순공에게 옮겨 주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계사에 이르기를, “제학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직책이기는 하나 결국 대제학과 같은 중요한 직분은 아닙니다.

 

지금 이황은 고령의 큰 선비로 제학이 되고 신은 그 위에 있으니, 이는 너무 전도된 일입니다.”라고 하므로 임금이 대신과 의논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문순공이 다시 사퇴하여 공에게 넘겼다.

 

공은 도학에는 『심경』 · 『근사록』을 근본으로 삼고 문장에는 한유 · 사마천 · 이백 · 두보를 주로 하니 선비들의 습속이 크게 달라졌다. 기사년(선조 2, 1569년) 4월에 주강에 나아가 고봉 기대승과 함께 문소전 부례에 대해 논하였다.

 

원래 이기 등이 문정대비의 뜻을 받들어, 인종은 재위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은 임금이라 하여 문소전에 합사하지 않고 연은전에 합사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개해하였다.

 

이때 공이 이를 통절하게 논하였고 문순공도 전옥을 변통할 제도를 논하였으나 모두 대신에게 저지되었다. 이해 여름에 판서 김개가 몰래 기회를 보아 공과 제현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습속은 이미 기묘사화 때처럼 되어 버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남곤 · 심정의 남은 수법을 그대로 따르려는 속셈인 것이다.

 

송강 정철이 지평으로 입시하였다가 김개의 간특한 형상을 면박하자, 그가 흐느껴 울면서 물러갔다.

문순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찰에 이르기를, “요즈음 한 차례의 소동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였으나 그 의도는 사실 나에게 있었다.”하자, 삼사가 함께 김개의 관작 삭탈할 것을 논하였다.

 

이때 공이 선류의 종주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문성공 이이가 권유하기를, “선비들을 모아 임금의 마음을 계도해 드려야 하고, 소인들로 하여금 이를 무너뜨리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고 임금도 공의 사퇴를 윤허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출사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본직을 사퇴하고 예조 판서로 체임되었으며, 신미년(선조 4, 1571년)에 무주 적상산성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다시 이조 판서에서 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임신년(선조 5, 1572년)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연경에 사행가 신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고사에, 외국의 진주사는 으레 협문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은 표문은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논의하여, 그것이 이내 정식으로 되어 버렸고, 이 사행을 통해 평소 공의 명성을 들은 중국 사람들이 연도에 나와서 시를 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주사가 교역하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은 재물을 좋아하신 적이 없소.”라 하였다.

 

계유년(선조 6, 1573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왕수인의 그릇된 학설을 적극 논하였고, 좌의정에 승진되어서는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사헌부에 통사시키기를 주청하였다.

 

갑술년(선조 7, 1574년)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자, 옥당에서 임금에게 공의 유임 권유를 주청하기를, “심복을 부탁할 만한 충현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을해년(선조 8, 1575년)에 의성대비의 상을 당하자, 두 차례나 의론을 올려 3년 동안 백의관으로 지낼 것을 주청하였고, 그 뒤 인순대비의 상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당시의 속론이 공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으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이해 가을에 물러났다가 다시 나왔는데, 일찍이 경연에서 문성공 이이의 훌륭한 학문 · 도덕을 상세히 논하였고, 겨울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었다. 기묘년(선조 12, 1579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건의한 바가 많았다.

 

즉, 노산군의 묘를 봉식하자는 일과, 문간공 성혼의 진술한 것을 채택하고 그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자는 일과, 김효원을 수용하여 동서의 당론을 씻어 버리도록 하자는 일과, 문성공 이이를 주청사로 삼지 말자는 일과, 경제사를 설치하여 공물에 대해 기록한 문부를 개정하자는 여러 가지 일로, 혹은 시행되기도 하였고 혹은 물정에 어둡다 하여 쓰여지지 않기도 하였다.

 

소재 노수신은 의견의 차이가 거의 없었고 김우옹은 일마다 강력히 찬동하였다.

임오년(선조 15, 1582년)에 서교에 나가서 조사 황홍헌 · 왕경민을 영접하였다.

 

계미년(선조 16, 1583년)에 이호 탕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공이 북쪽 지방을 염려하여 계책을 세운 바 있었고 또 인재를 구별해 놓았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성공이 병조판서가 되어 안으로는 군사의 모책을 마련하고 밖으로는 병마를 조달하여 모든 처사에 실책이 없으므로 임금이 이를 의지하여 적도를 토벌하려 하였다.

 

하루는 문성공이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오랜 시간을 끌게 되자, 임금이 어의를 보내 병을 보게 하고 또 물러가서 조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간의 탄핵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자, 문성공이 소를 올리고 죄를 기다렸다.

 

공이 동료 재상들과 함께 임금에게, 문성공의 출사를 간곡히 권유하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뒤에 대간의 탄핵이 다시 일어나, “나랏일을 멋대로 다루고 임금을 무시하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하였다.

 

한편, 이호가 여러 진보를 연달아 함락시켜 정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대간의 계사가 그치지 않고 기어이 문성공을 제거하려 하므로, 공이 병조판서를 잠시 체직시키기를 주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라 공에게 병조판서를 겸임시켰다.

 

이때 문간공이 소를 올려, 당시 무리배들이 붕당을 만들어 참소하는 정상을 극론하자, 공이 청대하여 충과 사를 분별하여 그 시비가 매우 뚜렷하였다. 이에 삼사에서 공의 열 가지 죄를 논하고 이이와 성혼, 두 현인을 아울러 탄핵하므로 공이 강사로 물러났다.

 

조정의 신하들과 유생들이 함께 글을 올려 신변한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우의정 정지연이 공을 구원하는 데 전력하므로 임금이 친히 교서를 지어, 주론자를 특별히 유배시키고 나머지 도당은 모두 외직에 전보시키면서 이르기를, “나는 주자를 본받기 위하여 이이와 성혼의 당을 불러들여야겠다.”하였다. 공에게 다시 들어오기를 간곡하게 권유하므로, 공이 할 수 없이 명에 응하였다.

 

갑신년(선조 17, 1584년)에 문성공이 별세하자, 공이 고단해진 처지로, 함께 협력할 사람이 없는 것을 자나 깨나 근심하고 탄식만하다가 을유년(선조 18, 1585년)에 사직하고 체직되어 강사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노수신의 직언으로 귀양간 사람들이 특별 사면되었고, 가을에는 이발 등이 공과 제현을 무고 훼방하여 그 이름을 당적에 써 넣었다.

 

병술년(선조 19, 1586년) 8월에 공이 휴가를 얻어 영평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중사를 동문 밖까지 보내어 술을 내려 전송하였다. 영평에는 백운산이 있어 시내와 못의 절경이 뛰어났으므로, 공이 이내 집을 짓고 살았는데, 깨끗이 속세에서 벗어나 시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매일 촌민 야로들과 함께 자리를 다투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서로 토론하여 지칠 줄을 몰랐다.

 

거기에는 유명한 배견와 · 이양정 · 토운상이 있고 백운계 금수담 · 창옥병이 둘러 있는데, 흥이 날 적에는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소요하였고, 혹은 금강산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영원히 떠나 버릴 뜻이 있음을 알고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세 차례나 소명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으며, 기축년(선조 22, 1589년) 7월 21일에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가 훌쩍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

 

이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우레가 진동하다가 이윽고 상서로운 광채가 대지를 비춰 달처럼 환하므로 산중의 백성들이 놀라고 의아하여 달려왔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해 9월에 종현산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고씨로 딸 하나를 두어 군수 이희간에게 출가시켰다.

 

공은 어린 나이에 도를 구하여 가정에서 이미 학행을 닦은 데다가 화담 서경덕을 따라 수업하였고, 만년에는 문순공 이황의 가르침을 받아 세도의 성쇠를 일체 함께하였으며, 또 문성공 이이와 함께 이기의 깊고 아득하고 크고 작고 열리고 닫히는 오묘함을 논하였으니, 그 학문의 연원과 조예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조정에 나가 반열에 서서는 오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일생 동안 힘쓴 바는 선악을 분별하여 현인과 악한 사람을 진퇴시키는 데 있었으므로, 공과 함께 재직하고 협력한 이는 모두 어질고 덕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조정이 맑아지고 백성이 안정되었다. 공이 만약 끝까지 재직하여 배운 바를 다 발휘하였다면 그 치도의 성과가 어찌 이 정도에서 그쳤겠는가. 참소를 만나 버림을 받고 임천으로 돌아와서는 매일 초야의 수재들과 함께 선왕의 도덕을 노래하면서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채 지냈고, 묵묵히 마음에 터득되는 바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곤액을 겪을수록 더욱 드러난 이가 아니겠는가.

 

상공 백사 이항복이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중에는 자못 빠진 데가 있으니, 이는 위간재의 묘문과 같은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군수 이희간의 아들 탁이 문정공 청음 김상헌에게 공의 문집에 대한 서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공의 모든 행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추중되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고 남방의 선비들이 많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으며, 영평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1백 년도 가지 않아서 공에 대한 공론이 확정된 셈이다.

 

은산공의 묘소가 회덕 선암천 서쪽 기슭에 있는데, 공이 일찍이 그 앞에 집을 짓고 그 이름을 사암이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공을 사암 선생이라 칭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세도의 성쇠는 바로 그 인물에 달려 있고
그 인물이 말미암는 바는 오직 의와 인이라네.

 

의로는 임금을 바르게 하고 인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네
본조의 치도가 밝고 공은 남방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는 우리 명종 선조시기였으니 진정 성세였지

 

많은 인재 포용하니 덕이 어찌 이웃이 없을 것인가
율곡을 따르고 퇴계를 존경하여
본체 밝혀 실제에 적용하니 진실로 참된 유자로다.

 

현명한 인재 길러낸 교화로 수많은 인재들 많아졌네
예로 불러들임 계속되어 태공과 이윤 같은 이 있었네.

 

조정에서 자문할 때 공이 이를 주도하니
간악한 무리 물러가고 준수한 인재 활약하여
거의 태평성대 이루어 요순의 임금과 백성 보려다가
평지에 험난함 없을 수 없어 현자의 길 가시밭길 되었네.

 

공더러 붕당을 짓는다라고 열 가지 죄 열거하니
공이 끝내 초야에 숨어 어느 누가 큰 경륜 맡을 것인가

 

백운산은 높고 험하며 물 또한 깊고 넓은데
배견과 창옥병 등 그윽한 곳에
지팡이 나막신으로 목욕하고 봄바람 쐬면서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이는 저 서방의 미인이었네.

 

유연히 이 세상 뜨고 나니 우레와 비 새벽에 시끄러웠지
옛날 유원성이 죽을 적에 이 같은 이변 있었네.

 

유원성의 그 기상 철벽 은산 같았는데
공도 진실로 그와 같아 끝내 물들거나 부숴지지 않았네
내가 이 명 지어 이 곧은 옥돌에 새기노라.



개국 518년 기유년(1909년) 5월 일에 삼가 세운다
외십대손 이승회는 삼가 전액을 하고
외십일대손 이최수는 삼가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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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朝鮮國領議政文忠公 思庵朴先生神道碑銘」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兵曹判書 贈諡文忠公思菴朴先生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 經筵事致仕奉朝賀宋時烈撰」

 


國朝屢更土禍至於乙巳而極矣世道大燮斯文倒地聖賢之書指爲禍胎士子所事詩文而已而國勢之危己甚矣天佑我東士流蔚興 宣宜

之際」治敎大明爲士者誦法孔孟程朱人倫明於上小民親於下庶幾乎三代之隆矣當是時主張淸議引進士類卓然爲領袖者曰思菴先生朴公諱淳字」和叔其人也世運平陂時論乖張公遂跋疐奔迸德業中沮至行爲識者之恨焉公忠州人朴氏譜自高麗副正英八世而有曰蘇始仕本朝爲殷山郡」事是生智興成均進士是生祐生員壯元明經及第官至右尹號六峰其兄祥世稱訥齋先生爲己卯名賢六峰娶棠岳金氏女生公于嘉靖癸未姿稟」絶異色夷氣淸金精玉潤八歲開口詠物輒驚座人隣有敎師曰吾不敢爲爾師六峰嘗以文自負見公作曰老膝當屈矣十八成進士受學於徐先生」敬德于未六峰歿廬墓毁幾滅性練浚猶啜粥服闋入山讀書逾年而歸訪耻齋洪仁祐講橫渠太和等篇耻齋歎曰可與共學其惟和叔乎癸丑 明」廟以經書親臨試士公擧止雍容辨釋精透庭中屬目遂賜第居首歷數官爲吏曹佐郞弘文館修撰校理賜暇湖堂一日 上召對湖堂學士講論經」理且命製述親執靑鍾滿酌以侑而又倣蘇軾金蓮燭故事以送之翌日大臣尙震等率詣殿陛陳謝一時以爲盛事爲檢詳舍人奉命檢灾于湖西陞」弘文應校時館中將議上林百齡謚號百齡當乙巳士禍與尹元衡鄭順朋許磁李逞其姦兇圭菴宋文忠忌以下諸賢無遺類而告廟錄勳矣元衡以」肺腑親方爲領相執國命姦黨視爲城社視正士眈眈百齡如不得美謚則大禍復作矣以故館中相顧依違公獨奮然議定曰恭昭蓋袞鉞間矣元衡」喑噫噫曰林公國之元勳謚無忠字意在區測將鞫治士類洶懼而公夷然 上將置重典有救者只命罷黜始公將待命金吾入室更衣㘿㘿而出家人」不知有事及歸幼女出迎公執手笑曰幾不得復見汝矣翌日南歸壬戌除韓山郡守期年而政成邑民愛戴如父母每衙罷輒處亭舍課日讀書傍郡」之士聞風坌集癸亥以成均館司成召人歷侍講院輔德司憲府執義弘文館直提學箚論時事陞爲承政院同副承旨自是每承旨有闕公名未嘗不」在焉由吏曹叅議移司諫院大司諫遞復拜論妖僧普雨罪請寘法又論黜元衡蓋自乙巳以來元衡與百齡許磁等結爲腹心芟刈士流流毒百姓國」執臲卼將不保朝夕公慨然歎曰劾冀誅憲挽回世道吾責爾就議於大司憲李公鐸李公難之公徐譬而始許焉公歸不脫朝服取燭草啓遲明入啓」時 文定薨才五月 上不忍遞允公爭益力遂倂左議政沈通源而迸黜百姓歌舞於道中外之以儒爲名者沛然有向善之心於是選六行之士以」淸仕路伸雪寃死之人復其官爵凡係蠹國害民之事一切革罷而文純公以下羣賢皆以世道爲己任相與先後焉蔚然有元祐之望當其孚號之初」文純赤且疑而危之匪公則難矣特拜司憲府大司憲自是旋遞旋拜丙寅爲副提學以書勉文純公赴朝隆慶丁卯 明廟昇遐翌年戊辰行人歐希」稷以 皇帝命來頒 大行諡號公以遠接使往迎詔使見公禮儀中度凜然起敬及與酬唱歎曰宋人物唐詩調也旣伴送還朝其三月 帝又遣成」檢討憲王給事璽頒 皇太子冊立詔公始拜兩館大堤學復受儐事其見敬禮如前成公爲公題平遠亭十絶亭在錦城畢事請以文衡移授文純公」其啓曰提學雖是館閣之職而終不如大提之重今李滉以高年碩儒顧爲提學而臣乃處其上顚倒甚矣 上議于大臣而從之文純公復辭遞於公」公論道學則以心經近思錄爲本論文章則主於韓馬李杜土習丕變焉己巳四月晝講與奇高峰大升論文昭殿祔禮蓋李等承順 文定意以」仁廟爲未踰年之君不祔文昭殿而祔於延恩國人悲憤公論之痛切文純亦論殿屋變通之制皆被大臣沮格夏判書金鎧潛伺間隙欲陷公以及諸」賢以爲今日士習己成己卯盖欲紹述袞貞餘論也鄭松江澈以持平入侍面斥鎧姦狀鎧涕泣而出文純公與人書曰近日一番騷動雖攻他人意實」在滉於是三司倂論鎧削奪時公爲善流宗主遂以爲吏曹判書公固辭不出李文成公珥勉之曰當裒聚士流啓迪上心不可使小人壞弄也 上亦」不許其辭故遂出仕翌年正月辭遞爲禮曹判書辛未奉安實錄于茂朱復以吏判陞贊成壬申拜右議政赴京師賀 神宗皇帝登極故事外國進奏」皆由夾門公爭之表文由正門入自是遂爲定式是行中朝人素聞公名沿途索詩者甚衆將還主事問開市公曰寡君未嘗好貨癸酉還朝極陳王守」仁學術之非陞左議政請以未出身人通臺憲甲戌辭遞玉堂請勉留曰忠賢無腹心之寄秋復拜左議政乙亥 懿聖大妃喪再度獻議請以白衣冠」以終三年後於 仁順大妃喪亦然俗論不能奪然測目者多矣秋引入復出嘗於經席極備文成公學問道德之懿冬辭遞己卯拜領議政多所建白」如封植 魯山墓如採用成文簡所陳勿許其退如收用金孝元洗滌東西黨倫如勿以李文成爲奏請使如設經濟司改貢案諸事或蒙採施或以爲」迂闊而不用惟盧蘇齊守愼頗無異同而金公宇顒則事事力主焉壬午迎詔使黃洪憲王敬民于西郊癸未尼胡叛先是公以北路爲憂有所規畫又」區別人才及是文成公爲本兵內籌軍謀外調兵馬擧無遺策 上方倚以討賊一日文成承召詣闕忽眩作淹滯 上劾醫看病且令退去調治而臺」遣闖發文成上疏待罪公與僚相請敦諭出仕後臺劾重發以爲壇國慢君將欲何爲時尼胡連陷鎭堡勢甚危急而臺啓不止必欲擊去文成故公請」姑遞本兵 上從之而以公兼兵判時文簡公上疏極論時人朋讒之狀公請對辨別忠邪是非甚晳於是三司論公十罪倂劾兩賢公退出江舍於是」朝紳儒生倂上伸辨之章者至於累百人右相鄭芝衍專救公 上親製敎書特竄主論之人其餘黨與並補外而曰予欲法朱子入於珥渾之黨又勉」諭公入來甚勤公不得已應命甲申正月文成公歿公子然孤居無與協恭寤寐憂嘆而已乙酉辭遞歸江舍夏以盧相言特赦竄逐人秋李潑等誣毁」公及諸賢書名黨籍丙戌八月乞暇沐浴于永平 上遣中使宣醞於東門外永平有白雲山溪潭絶勝公仍卜築居之潚灑出塵口絶時事日與村岷」野老爭席忘形有來學者則相與討論亹亹不倦有拜鵑窩二養亭吐雲床名號環以白雲溪金水潭蒼玉屛興至杖屢逍遙或遊楓嶽諸山 上知公」有長往志遣醫問疾召命三至而終不赴己丑七月二十一日早作吟詩倏爾乘化春秋六十七是日天雨雷震俄而祥光燭地晃若晈月山氓驚訝坌」集則已三皐矣其九月葬于鍾賢山夫人高氏生一女適郡守李希▨公髫齡求道旣受家庭之學又從花潭受業晩又服習李文純公消息盈虛無不」與同至與文成公論理氣沖漠大小闔闢之妙則其淵源造詣槪可見矣及其立朝就列惟以格君心爲本而所務者分別淑慝進退賢邪故其所同寅」協恭無非賢德俊乂之流以故朝著淸明生民乂安若得終始展布以盡所學則其治敎之效豈至於此而止哉及其遭讒擯棄返身林泉日與村秀才」子歌詠先王之道德欣然不知老之將至而泯然有會於心則蓋有人不及知者豈因阨窮而愈表見者歟白沙李相公恒福嘗狀公行而頗有脫略處」豈魏艮齋墓文意耶李郡守之子䕪爲請文集序於淸陰文正公其發揮引重無復餘蘊矣其後朝廷賜謚文忠南中章甫多立祠俎豆之永平亦然公」論之定不待百年矣殷山公葬在懷德般巖川西麓公嘗築室其前名曰思菴故學者稱爲思菴先生云銘曰」


世道汚隆職由其人其人所由惟義與仁義仁義以正君仁以安民本朝休明公起南垠際我 明宣寔曰昌辰休休有容德豈無隣於惟栗翁尊尙文純明」體適用實儒之眞掝樸之化群哲振振旋招繹續惟渭與莘咨于在庭公秉樞勾姦倖屛跡俊乂躍鱗庶幾熙載親見君民平無不陂賢路荊榛謂我邦」朋十罪斯陳公遯于野誰任經綸白雲崷崒其水奫淪鵑窩玉屛寂寞之濱我杖我屨詠沂上春永言不忘彼西方人悠然乘化雷雨警晨昔元城歿斯」畢斯臻元城氣像壁鐵山銀公實如之終不緇磷我作銘詞篆此貞珉」 <끝>

 

開國五百十八年己酉五月 日 謹竪」
外十代孫 李承會謹篆」

外十一代孫 李㝡秀謹書」

 

시암 박순 신도비[舊]>우측 일부분 파손 되어 있습니다.

 

시암 박순 신도비[신] /옥동 서원 앞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