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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정(柳隱亭)

야촌(1) 2011. 3. 9. 02:12

↑유은정(柳隱亭)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성평리 `유은정(柳隱亭)' 중수 완공 기념식이 2010년 8월 27일 오후 5시 현지에서 열렸다.

`유은정'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38세손 이우호(장릉참봉)의 아들 재익이 1936년 세운 정면 3칸, 측면 1.5칸, 방 2개로 큰 바위 위에 지은 팔작지붕 정자이다.

 

정자 뒤편에는 높이 3m 크기의 듬직한 바위가 있으며 벚나무가 정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재익 선생의 손자 기철 씨는 “조상의 숨결이 밴 정자가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중수를 위해 10년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유은정은 2억 5천만원을 들여 기둥과 보만 남기고 부연, 서까래, 마루 바닥을 완전 교체하였다. 또 대들보는 하나 더 추가해 높이를 한자 올렸으며 처마도 한자 늘렸다. 추녀는 한옥의 곡선미를 살리고 대문은 3단으로 증축하고 돌계단을 새로 놓았다.

 

완공식에서 이봉창, 유정희 (이기철 씨 부모) 씨 부부는 인사말을 통해 “조상의 얼이 담긴 유은정은 성평리 주민 모두의 추억이 서린 장소이며 아들에 의해 유은정이 재건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심신 수양은 물론 학문 연마, 문중의 화합과 번영을 위한 회의, 후손들과 함께하는 추억의 장소, 예의범절을 배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살아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성평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섶의 효열각과 선행각은 유서 깊은 마을의 전통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마을은 이수창 삼성생명 대표이사를 비롯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 효열각

 

성평리는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경주 이씨 이은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이 이장서이며 셋째 며느리는 경주 최씨이다.



셋째 며느리는 스물 한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며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시어버님께서 중병으로 수 삼년을 눕게 되자 매일 병간호를 하면서~~~~영험이 있는 약을 구해달라고 지성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서들과 앞개울에 빨래를 하러 갔다가 두 동서가 먼저 집에가고 효성이 지극한 셋째 며느리만 남아서 빨래를 계속하던 중 갑자기2척이 넘는 잉어가 치마폭 안으로 올라오기에 잡아서 병으로 누워 계신 시아버지를 봉양하였고, 엄동설한에 복숭아가 먹고싶다는 시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망태기를 메고 산으로 가던중 덕고개에서 복숭아를 얻었으니,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를 위해 산신령이 내린 복숭아라 했다.



1884년(광무 3)성균 진사 이씨가 이를 임금께 고하여 어명으로 마을 입구에 효열각을 세우게 하여 정려 되었으며. 지금도 그 단청이 선명하다

 

●가선대부 부호군 병윤 묘갈명

 

가선대부 부호군 휘(諱) 병윤(竝閏)은 월성(月城) 사람이다. 월성 이씨는 가계(家系)가 신라(新羅) 공신(功臣) 알평(謁平)에서 시작되었고,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낸 휘 금서(金書)에 와서 비로소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였다.

 

중세(中世)에,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고 호(號)는 제정(霽亭)이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진 휘 달충(達衷)이 있고, 강릉부 판사(江陵府判事)를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휘 수(䇕)에 이르러 본조(本朝: 조선(朝鮮)을 지칭함)에 벼슬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휘 흥상(興商)은 세조(世祖) 때의 공신(功臣)으로 시호가 양희(襄僖)인데, 그 뒤에 대대로 벼슬에 나아가 현달(顯達)하고 영화(榮華)를 누렸다. 이로부터 십여 세(世)를 지나 죄승지에 추증된 휘 중린(重璘)에 이르는데, 이가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된 휘 신영(新榮)을 낳고, 신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추증된 휘 장주(章周)를 낳으니, 이들이 호군에게 있어서는 증조부, 조부, 아버지가 된다.

 

집안은 대대로 예천군 서쪽 덕달리(德達里)에 살았다. 선비(先妣)는 영월 엄씨(寧越嚴氏) 중빈(重彬)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병신년(丙申年1836년) 정월 7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성해서까지 근면하고 검소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는 근본에 힘써서 이에 기틀을 세웠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남에게 덕을 베풀고 자손을 교육하는 것으로 일상을 삼으니, 인근 사람들이 다들 존경(尊敬)하고 감복(感服)하였다. 정부인(貞夫人)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계영(繼榮)의 따님 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이 둘이 있는데 종철(鐘喆)과 종우(鐘佑)이며, 두 딸은 김도영(金道榮)과 엄종섭(嚴宗燮)에게 시집갔다. 종철의 큰아들은 우호(禹頀)인데, 젊은 나이에 집안을 이어받아 선대의 가업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부모의 하늘처럼 끝이 없는 자애(慈愛)와 훌륭한 덕을 그리워하여 묘도(墓道)에 글을 새겨 새롭게 하였으니, 효성스럽다 하겠다.

 

둘째는 부호(富頀)이다. 종우의 아들은 영호(英頀), 순호(純頀), 광호(光頀)이다. 우호의 아들은 재익(宰翼), 재경(宰敬), 재규(宰奎)이며 영호의 아들은 재봉(宰鳳), 재직(宰稷)이다. 외손(外孫)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수성(壽星)이 인후(仁厚)한 마을을 널리 비추니 덕(德)이 있고 현달(顯達)한 곳이로다

훌륭한 관작이 하늘에서 내려옴이여 누차 공덕(功德)을 쌓아 복(福)을 받은 것이로다

 

당산(堂山)이 수려하고 그지없이 높으니 길이 공의 부장(副葬)이 간직된 곳이로다

자손이 번창할 분명한 증거여 송백(松栢)이 그늘을 드리우고 푸르디 푸르도다

 

신유년(辛酉年1921년) 9월 상순(上旬)에 함양(咸陽) 박화진(朴華鎭)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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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정 기

 

공자(孔子)께서는 “효(孝)란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대(先代)의 일을 잘 이어 받드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어찌 예사로이 하신 말씀이겠는가. 가령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지런히 몸을 놀리고 온 힘을 다 기울여 농토와 집을 마련한 뒤에 자손에게 물려주었는데, 자손된 자가 그것을 잘 보전하고 지켰다면 조상의 뜻을 잘 계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훌륭한 경관(景觀)을 좋아하여 터를 잡아놓긴 했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자손된 자가 그곳에 정자(亭子)를 지었다면 선대의 일을 잘 이어 받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는 못하였다. 아,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므로 다르지 않아야 하는데 유능하기도 하고 무능하기도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대체로 그 후사를 이은자손이 현명한가 현명하지 못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월성(月城) 이재익(李宰翼)군은 산남(山南)의 훌륭한 선비이다. 그가 예천군의 서쪽 유천(柳川) 가에 정자를 세운 뒤에 ‘유은정(柳隱亭)’이라 편액(扁額)하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유은(柳隱)은 우리 선친의 호(號)입니다.

 

우리 선친께서는 능침(陵寢)의 참봉으로 벼슬에 나아가려 하시다가 세상이 날로 험난해지는 것을 눈으 로 직접 보시고는 나아갈 뜻을 버리고 미련없이 돌아오셔서 두문불출하 며 스스로 마음을 닦으셨습니다.

 

때로는 검은 사모(紗帽)를 벗고 삿갓을 쓰시고서 친구들을 불러 술병을 들고는 산 좋고 물 좋은 데로 나아가 화 락하게 스스로 즐기면서 세월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지내기도 하셨습니 다. 일찍이 마을의 서쪽, 산의 남쪽 물가에 한 구역을 정하여 몇 그루 버 드나무를 심으시고는 자호(自號)하시기를 ‘유은(柳隱)’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시를 지어 감회를 표현하시면서 이곳에 집을 지어 마음을 오로 지 닦고 학문을 연마할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 일을 준비하시던 도중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아아, 너무도 애통합니다.

 

그런데 올 봄에 여러 아우들과 상의하기를,‘우리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는데 정자를 지으시려던 유지(遺志)를 아직도 이루 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죄이고 우리들의 책임이니 어찌 이제 그 일을 도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재물을 모으고 장 인(匠人)을 모집하여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그렇게 한 지 수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지어진 정자가 비록 낮기는 해도 위로 수집명이 앉 을수 있고 아래로 십여 개 의자를 놓을수 있을 정도입니다. 정자의 제도 를 사치하게 하지 않고 검소하게 한 것은 이 또한 선친의 유훈이 십니다. 백마(白馬)라는 산이 있어 그 정자의 북쪽으로 진을 치고 있고 유천(柳 川)이란 시내가 있어 그 정자의 동쪽으로 흘러 가며 덕달(德達)이란 마을 이 있어 그 정자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좌우로 벌려 있는 것은 샘 과 돌과 바위와 벽이며 사시사철 변하는 것은 연기와 구름과 꽃과 새들 입니다. 그밖의 천태 만상은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이것들은 눈 과 귀를 기쁘게 하고 마음과 가슴을 상쾌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정자를 지은 것은 저의 뜻이 아니라 실로 선친의 뜻이니, 선생께서는 너그러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참으로 효자일세그려.《예기(禮記)》에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유훈 (遺訓)을 감히 잊지 못한다.‘하였고《시전(詩傳》에는 ’뽕나무와 가래나무 도 부모가 심은 것이면 공경한다네.‘하였으며, 《서전(書傳》에는 ’집터를 닦고 집을 지어 아버지의 유업(遺業)을 이어 받든다.‘고 하였는데, 자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구만. 내 일찍이 남쪽 고을 사람들에게 선군자(先君子) 의 훌륭함에 대해 들어온지 오래 되었네. 그리고 또 호를 유은이라 하신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옛날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고 문에 버드나무 를 심고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호(自號)하였으니, 옛날 사람과 지금 사람이 그 자취가 대략 같고 그 흥취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하겠네.

 

이 어찌 ‘위로 올라가 천고(千古)의 옛 사람들과 벗한다’는 듯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공경할 만한 일일세. 지금 이군(李君)은 이미 어버이가 물려주신 가업(家業)을 보전하여 지키고 있는 데다 터를 잡아놓은 곳에 정자까지 지어 올렸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 대(先代)의 일을 잘 이어받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에 즐거이 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

 

병자년(丙子年/1936년) 4월 황매(黃梅) 피는 계절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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