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80

노공필신도비명(盧公弼神道碑銘) - 신용개(申用漑)

■ 교성군 국일재 노공필(交城君菊逸齋盧公弼) 노공필『盧公弼, 1445年(世宗 27) ∼1516年(中宗 11)』은 朝鮮中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交河. 字는 希亮, 號는 菊逸齋이다. 三重大匡輔理功臣으로 昌城君에 封해진 齊孝公 노진(盧禛)의 後孫으로, 高祖는 保功將軍大護軍을 歷任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追贈된 大理卿 노균(盧鈞)이며, 曾祖는 議政府右議政을 歷任한 恭肅公 노한(盧閈)이며, 할아버지는 同知敦寧府事를 歷任하고 議政府領議政에 贈職된 盧物載이다, 아버지는 翊戴佐理功臣에 策勳되고 議政府領議政을 歷任한 文匡公 眞齋 盧思愼이며, 어머니는 僉知中樞府使를 歷任한 慶由謹의 딸이고, 夫人은 中訓大夫通禮院相禮 이숙(李塾)의 딸 韓山李氏이다. 京畿道交河縣(只今의 坡州) 出身이다. 1462年(世祖 8年) 司馬試에..

포저 조익 선생 신도비명 . 행장( 神道碑銘 . 行狀)

■포저 조익 선생 신도비명 병서(浦渚 趙翼 先生 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조익『趙翼, 1579년(선조 12) ~ 1655년(효종 6)』 송시열 찬(宋時烈 撰) 본조(本朝)의 문치(文治)는 삼고「三古=중국 고대(古代)를 셋으로 나눈 상고ㆍ중고ㆍ하고」 시대의 도(道)를 높이 숭상하여, 퇴계(退溪)ㆍ율곡(栗谷) 이후로 선비들이 더욱 이치와 사물(事物)을 일치(一致)시켜 효도를 충성으로 옮기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설(說)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포저선생(浦渚先生) 조공(趙公)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경훈(經訓)을 독실하게 믿어, 어릴 때부터 늙은이가 되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경건하여 죽고야 말기로 기약하였으니, 성현(聖賢)의 ‘시인(詩人)의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와 ‘늙어서 학문(..

최청 신도비명 병서(崔淸神道碑銘 竝書)

반갑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자부님이 제 고향분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문의 사항은 오문의 1748년(영조 24)에 간행된 무진보에 수록된 관찰사 최청의 배위 정경부인께서 정확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17世 천(蒨) 국당공파 파조(菊堂公派派祖) ㅣ 18世 경중(敬中)-배중(培中)-달충(達衷)-성중(誠中) 문정공 판서공 제정공 정순공 (文貞公) (判書公) (霽亭公) (靖順公) ㅣ ┌──┘ ┌──────┘ ㅣ ㅣ ┌──┘ (1346~1409) ㅣ ㅣ 원(援)─부(扶)─휴(携)─여(女)──여(女)──여(女)──여(女) 19世 ㅣ ㅣ 府使公 府使公 判尹公 南仲文 崔寔 崔淸 吳溥 ㅣ ㅣ ㅣ ㅣ ㅣ 남중문 최식 최청 오보[부] ㅣ ㅣ ㅣ ㅣ ㅣ (宜寧人) (慶州人) (慶州人) (海州人) 觀稼亭公 (134..

이증 신도비명. 시장(李增神道碑銘. 諡狀) - 한산인(韓山人)

[생졸년] 이증『李增,1525년(중종 20) ~ 1600년(선조 33)』 [배 위] 정부인 경주이씨, 1422년(세종 4) ~ 1509년(중종 4)/ 이증 신도비명 병서(李增神道碑銘幷序) - 정두경(鄭斗卿) 찬(撰) 1715년(숙종 41)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건립된 이증(李增)의 신도비이다. 이 비의 제액(題額)은 5대 외손 윤덕준(尹德駿)이 썼고, 비문의 앞면과 음기는 5대 외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비문의 찬자는 정두경(鄭斗卿)이며 추기(追記)는 현손(玄孫) 이집(李潗)이 지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다. 묘소는 정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 이수의 묘표가 있다. 이증「1525(李增, 중종 20)~1600(선조 33)」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이소한 신도비명 병서(李昭漢神道碑銘幷序)

■ 이소한 신도비명(李昭漢神道碑銘) [생졸년] 이소한『李昭漢, 1598년(선조 31) ~ 1645년(인조 23)』 형조참판 증 의정부좌의정 이공 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이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세자부 송시열이 글을 짓고 숭록대부 행 공조판서 이정영이 비문을 쓰고 손녀서 통정대부 호조참의 지제교 김만중은 전액을 쓰다. 본조의 문치가 멀리 전고 시대에 뛰어났지만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치를 이루었다. 이때 월사 이문충공이 문풍을 크게 떨쳐 온 천하가 다 그 이름을 알았고 또 그의 두 아들이 뒤따라 아름다움을 계승 그 광채를 더욱 빛내어 국가의 성대함을 울렸는데 그 계자인 ..

낙랑후 지백호 신도비명 역문(譯文)

낙랑후 지백호 신도비명 역문(譯文) 영가 김철현 찬 경주정씨 시조의 이름은 지백호요. 자는 인세(仁世)로 처음에 진한의 자산 진지촌에 강림(降臨) 하시니 오늘의 경주시 동남쪽이 된다。 영특한 재목과 큰 덕이 여러 사람들의 사모함을 받아 자산 진지촌의 촌장이 되니 알천 양산, 돌산 고허, 무산 대수, 금산 가리, 명활산 고야, 등의 모든 촌장들과 같은 때에 섰고 서로 닿은 이웃이 되어 살으니 이분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신라의 육촌장으로 경주의 사적을 적은 동경지에 기재되어 있는 「육부대인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혹자는 사실이 아님을 의심하나 왕검의 단하에 내려옴과 삼을라의 지중에서 솟아 나옴은 옛부터 그러한 말이 전하고 또 하물며 대인의 태어남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없겠는가? 소순(蘇洵)..

우복 정경세 신도비명 병서

[생졸년]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 ~ 1633년(인조 11)』 우복 정 선생 신도비명 병서 (愚伏鄭先生神道碑銘 幷序) 조경(趙絅) 찬(撰)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 8)에 우복당(愚伏堂) 정 선생이 질병으로 인하여 말미를 받고서 향리로 돌아갔으며, 그 뒤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으로 나오지 않았다. 임신년(1632)에 예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회답하지 않았다. 그다음 해인 계유년 6월 정축 일에 상주의 묵곡(墨谷)에 있는 집에서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은 몹시 애통해하면서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보지 않았고, 예에 따라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특별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그해 8월 갑신 일에 함창현(咸昌縣)의 검..

김우옹 신도비명 병서 - 이현일 찬

[생졸년] 김우옹『金宇顒, 1540년(중종 35) ~ 1603년(선조 36)』 갈암집 제23권>비(碑) / 葛庵 李玄逸 著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시(諡)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 갈암 이현일 찬 동강(東岡) 선생 김 문정공(金文貞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90여 년이 지났다. 선생의 5세손 남수(南粹)가, 선생이 이미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품질..

한계희 신도비명 병서(韓繼禧神道碑銘幷序)

[생졸년] 한계희『韓繼禧, 1423년(세종 5) ~ 1482년(성종 13)』 사가집(四佳集) 보유(補遺)) 제1권 / 비지류(碑誌類) / 서거정(徐居正) 著 추충정난익대 순성명량경제좌리 공신(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서평군(西平君) 증시(贈諡) 문정공(文靖公)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아,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비석에 명을 쓴단 말인가. 나는 나이 15세에 학궁(學宮)에서 유학하였고, 공은 나보다 3세 아래인 12세에 두각(頭角)이 드러나 글을 읽으면 대의(大義)를 통달하였으니 역시 학궁에 와서 배웠다. 인하여 그와 교제를 맺어 어릴 적부터 정이 절친하였으니, 겉으로만 사귄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사귄 것이어서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교제의 도가 쇠하지 않았다. 내..

고경명 신도비명. 시장(高敬命 神道碑銘. 諡狀)

[생졸년] 고경명『高敬命, 1533년(중종 28) ~ 1592년(선조 25)』 유명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증 의정부좌찬성 고선생(휘 경명)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大匡輔國崇祿大夫贈 議政府左贊成 高 先生 諱 敬命 神道碑銘 幷序) 윤근수 찬(尹根壽 撰-윤두수의 동생)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나라가 왜 난을 만나자 참의(參議) 고공(高公)이 그 난에 죽어 큰 절개를 나타내었으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공의 고자(孤子) 고용후(高用厚)가 나를 찾아와 청하기를, “선인(先人)이 공의 형제(兄弟)와 교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국(殉國)한 시종(始終)에 대해서도 공만큼 명확히 아는 분이 없으므로 감히 일언(一言)을 빌어서 인멸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