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 ~ 1633년(인조 11)』
우복 정 선생 신도비명 병서
(愚伏鄭先生神道碑銘 幷序)
조경(趙絅) 찬(撰)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 8)에 우복당(愚伏堂) 정 선생이 질병으로 인하여 말미를 받고서 향리로 돌아갔으며, 그 뒤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으로 나오지 않았다.
임신년(1632)에 예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회답하지 않았다. 그다음 해인 계유년 6월 정축 일에 상주의 묵곡(墨谷)에 있는 집에서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은 몹시 애통해하면서 이틀 동안 조회(朝會)를 보지 않았고, 예에 따라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특별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그해 8월 갑신 일에 함창현(咸昌縣)의 검호(檢湖) 서쪽에 있는 묘향(卯向)의 언덕에 무덤을 썼는데, 장사 지내는 것을 관가에서 도와주었으며, 상은 또 낭관(郞官)을 보내어 제문을 지어 제사 지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뒤인 갑오년(1654, 효종5)에 사손(嗣孫)인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정도응(鄭道應)이 공의 문하에 있던 선비 몇 사람과 더불어 계획을 세워 법식에 의거해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고는 직접 고(故) 부제학(副提學)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대부(大父)께서는 처음에는 비록 과목(科目)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은 채 국사를 돌보던 날에 행한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조정에 있은 50여 년 동안에 비록 어렵고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찌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면려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시종일관 그렇게 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사실대로 서술하기만 하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 분을 얻어서 명(銘)을 받아 후세에 전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돌아보건대 우리 대부와 같은 세대에 태어나서 대부의 평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한 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집사(執事)만이 우리 대부께서 신중하게 선발한 동료 관원이었으며, 또한 우리 대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에 감히 비문을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였다. 이에 경(絅)이 대답하기를, “그래야지.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경은 낭료(郞僚)로서 공을 섬기면서 덕스러움을 보고 마음속으로 심취한 것이 여러 해였다.
그러니 이제 공의 묘지명을 짓는 일에 있어서는 의당 자네가 공경스럽게 예를 갖추어서 부지런히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말로 하기 만 할 뿐 글로 쓰지 않는다면 그 말이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부자(夫子)의 교훈도 있다.
그러니 내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실로 글을 지어 묘사하는 재주가 부족하다. 그러니 어찌 능히 대군자(大君子)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지 않겠는가.”하였다.
그러자 정도응(鄭道應) 씨가 다시금 꿇어앉아 예를 올리고는 고집스럽게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를 마지않았는데, 하루 종일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에 경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채로 곧이어 병이 들어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짓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공의 행장(行狀)을 펼쳐 보고는 다음과 같이 서(序)하였다.
공(公)의 성(姓)은 정씨(鄭氏)이고 휘(諱)는 경세(經世)이며, 자(字)는 경임(景任)이고 호(號)는 우복당(愚伏堂)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빼어났다. 말을 겨우 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소학(小學)》 한 권을 읽었는데, 문리가 툭 트여 다른 책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해되어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문장을 잘 지을 줄 알아 16세 때 향해(鄕解)에 나아가 합격하였다. 그러나 평소의 뜻이 오로지 과거 공부만을 하는 데에 있지 않았으므로, 종선여등시(從善如登詩)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으면서 과거 공부로 선비들을 가르쳤는데, 공이 제자로서의 예를 올리고 학업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문충공이 특별히 기특하게 여겨 옛사람들이 학문하던 순서에 대해 말해 주니, 공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가슴속에 새기었다.
2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24세 때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여 2등으로 뽑히었으니, 그때는 바로 만력 병술년(1586, 선조19)이었다. 당시에 서울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그 글을 입으로 전해 외웠다. 그 뒤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봉교(奉敎)가 되었다. 기축년(1589) 봄에 선조(宣祖)가 이조에 명하여 결원이 된 옥당(玉堂)의 남상(南床) 자리를 채워 넣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극선(極選)으로서 예로부터 적임자를 뽑기 어려워하던 자리였다.
이에 두 사람만을 뽑아 의망(擬望)을 갖추자 상이 공을 뽑아 정자(正字)로 삼았으며, 또 호당(湖堂)에 나아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이보다 앞서 공이 사관(史官)으로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선조가 ‘위항(委巷)’의 뜻을 물었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때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나오는 말로, 곡항(曲巷)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니, 상이 몹시 기뻐하였으며, 물러 나옴에 미쳐서는 상이 오랫동안 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옥당에 보임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임금이 알아주는 때를 만나서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옛것을 깊이 상고한 덕분이었다.
그해 겨울에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공이 일찍이 사원(史苑)에 있을 적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을 잘못 천거한 죄로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가 이내 석방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임진년(1592)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난리가 일어나 영남지방이 가장 먼저 혹심한 병화(兵禍)를 입었다. 그러자 상주지방의 인사들이 의병(義兵)을 규합하고는 공을 추대하여 자신들을 이끌게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공은 화살을 맞아 쓰러졌으며, 모부인(母夫人)과 동생 흥세(興世) 역시 해를 당하였다.
순찰사(巡察使)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자 조정에서는 공을 예조좌랑으로 승진시켜 제수하였는데, 공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겨울에 의병들의 군량(軍糧)을 빌리기 위해 호서(湖西) 지방에 갔다가 두역(痘疫)에 걸려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그 뒤 상제(喪制)를 마치고는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에 제수되었으나, 미처 명에 숙배하기도 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수찬에 제수되어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겸임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승진하여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당시에 왜적들이 아직도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쳐들어올 형세가 있었으므로 군신(君臣)들이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었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려 자강(自强)하는 근본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등대(登對)하였을 때 나아가 아뢰기를, “옛날에 큰일을 이룩한 임금들이 치도(治道)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바로 학문(學問)일 뿐이었습니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비단 선왕(先王)들의 서언(緖言)을 그대로 이어받고 경전(經典)의 훈석(訓釋)을 통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도리를 생각하여 시비를 가리는 실제와 차츰차츰 쌓아서 점점 진보함이 있은 다음에야, 학문이 이로 말미암아서 진보하고,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서 밝아지게 됩니다.
이미 이 마음이 학문을 말미암아서 밝아진다는 것을 아신다면, 마땅히 이 마음은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두워진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이 밝으면 빛나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어두우면 시비가 흐려져 변별하지 못합니다.
지금 하늘이 크게 벌을 내려 온갖 일이 모두 무너졌으나,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치도를 밝힌다면, 옛 나라를 새롭게 일으켜 세움이 여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학문을 계속하지 않아 치도가 헝클어지게 된다면, 나라의 형세가 떨쳐지지 못함이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하였는데, 사기(辭氣)가 강개(慷慨)하고 말소리가 우렁차니, 상이 기쁜 얼굴로 들었다.
또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주역》을 성학(聖學)의 정종(正宗)으로 여기고 계시므로 그만두기가 어려워서 경연을 연 처음에 이 책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은 그 뜻이 정미로워서 쉽사리 알기가 어렵습니다. 《춘추(春秋)》는 적을 쳐 복수하는 의리를 밝힌 책이니, 오늘날에 가장 먼저 강론하여야 할 책입니다.”하였다.
상이 이어 《주역》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전(傳)과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의 차이점에 대하여 묻자, 공이 삼성(三聖)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따지고 아래로 소자(邵子)와 목리(穆李)가 발휘한 것이 모두 선천(先天)의 획(畫)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였으며, 이어 정전과 본의가 그렇게 되는 까닭을 밝혔는데, 말이 분명하고도 명백하여 맛이 있었다.
그러자 상이 잘 설명했다고 칭찬하였으며, 반드시 ‘국사(國士)’라고 칭하면서 내구마(內廏馬)와 마장(馬粧)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서 어사(御史)가 되어 영남(嶺南) 지역에 내려가 방수(防戍)하는 곳의 상황을 순찰하였으며, 돌아와서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 봄에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해임되어 전쟁터에 나아가 왜적을 토벌해 복수하는 일에만 전력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 받지 못하였다. 가을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옥당으로 옮겨져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 당시에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의 직임을 대신 맡고 있다가 한산도(閑山島)가 함락되었으며, 중국 장수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을 버리고 도주한 탓에 나라 안이 흉흉하여 왜적들이 서울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에 공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도성(都城)을 사수하여 인심을 견고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뒤에 도로 사인(舍人)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고쳐졌으며, 또다시 어사(御史)가 되어 영서(嶺西)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 분의군(奮義軍)의 장수에 제수되었다.
그 뒤 또다시 교리에 제수되어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는 일을 하였으며, 이를 마치고 나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성상의 특명(特命)으로 인해서였다.
임진년 이래로 남쪽지방이 괴란되어 경내는 굶주린 범의 아가리 같고 왜적을 치는 중국 군대들 역시 몇 만 명이나 되어, 지방을 다스리는 법과 적을 치는 계책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공은 관대한 정사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때에 맞추어서 군량을 운반하니, 백성들이 모두 안도하였으며, 군사들은 굶주린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를 맡아 임기를 반도 채우기 전에 서애(西厓) 상공(相公)이 소인배들에게 헐뜯음을 당하여 서울을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공은 일이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여러 차례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체차되고서 군직(軍職)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자년(1600, 선조 33)에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다음 해에 특별히 서용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또 좌승지와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으로 부름을 받았다.
정미년(1607, 선조 40) 봄에 대구부사(大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정사를 펼침에 있어서 백성들을 먼저 가르친 뒤에 벌을 내렸다. 그러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대구부사의 다스림은 성실하고 순박하여 겉치레가 없으니, 이치(吏治)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 41)에 선묘(宣廟)가 승하하고 광해(光海)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공은 구언 전지(求言傳旨)에 응하여 수천 자나 되는 긴 상소를 올렸는데, 윗부분에서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절약하여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고, 가운데부분에서는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고 사로(仕路)가 혼탁하고 인아(姻婭)들이 용사(用事)한다고 하였으며, 끝부분에서는 임금의 한 마음이 온갖 교화의 근본임을 말하면서 정녕하게 권면하고 규계하되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광해가 크게 노하여 불태워 버리라고 명하였으며, 선조(先朝)를 헐뜯는 말을 하였다는 핑계로 장차 대법(大法)으로 얽어 넣으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우상(右相)으로 있던 이항복(李恒福)이 강력하게 쟁론하는 데 힘입어 단지 삭직(削職)만 되고 말았으며, 얼마 뒤에 다시 서용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동지사(冬至使)에 차임되어 연경(燕京)에 조회하러 갔다. 주객사(主客司)에서 우리나라 사신으로 하여금 현반령(玄盤領) 차림으로 알현하는 반열(班列)에 들어오라고 명하니, 공은 ‘반령은 예복이 아니고 검은색 옷은 바로 재계(齋戒)할 때 입는 옷이니, 조하(朝賀)하는 대례(大禮)에 착용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라고 여겨,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따졌다.
그리고 또 병부(兵部)에 정문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염초(焰硝)를 사다가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을 것이라고 하는 데 대해 따져서 억울함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염초를 정해진 것보다 배나 더 무역하는 것으로 허락받았다. 돌아와서 복명(復命)을 함에 미쳐서는 광해가 매우 기뻐하여 가자(加資)하였다.
이에 공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여름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겨 제수되었으며, 다시 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분을 헐뜯었는데, 공이 〈오현종사집례계첩서(五賢從祀執禮契帖序)〉를 지으면서 이르기를, “어찌하여 성대한 전례를 막 거행하자마자 사특한 말이 문득 행해지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이 이를 듣고는 유감을 품고 있자, 그의 일당들이 이로 인하여 중상모략한 것이다.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공은 무함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내관(內官)이 공의 집안에 있는 글들을 수색하여 올리자, 광해가 다 읽어 보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서찰 가운데 부인네가 쓴 언서(諺書)에도 말이 임금에게 미쳤을 경우에는 반드시 별행을 하여 한 글자를 올려서 썼다.
정경세의 집안에서는 아무리 부인네나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임금을 높이 받드는 의리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역적들과 함께 모의했겠는가?” 하였으며, 얼마 뒤에 석방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였다.
을묘년(1615)에 또다시 심경(沈憬)이 마구 끌어들인 데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광해는 비록 공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짐짓 판결을 늦추면서 속전(贖錢)을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문인(門人)들이 후한(後漢)의 위소(魏劭)의 일을 들어 한강(寒岡)에게 물으니, 한강이 ‘해로울 것이 없다. 옛사람 중에도 그렇게 한 분이 있으니, 바로 산의생(散宜生)이 그렇게 하였다.’ 하였다. 공은 이 소문을 듣고서 한강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옛사람 가운데 비록 그렇게 한 자가 있기는 하나, 오늘날의 일과는 다르다.
그러니 나를 위하여 제군들에게 사과하라.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덕으로써 하는 법이다. 만약 도리를 내팽개치는 일을 한다면 제군들과는 다시 얼굴을 보지 말라.” 하였다.
공이 깊숙하고 어두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날씨마저 엄동설한이었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어떤 재신(宰臣)이 공에게 병들었다는 내용으로 글을 올리라고 권하면서 “응교(應敎) 이명(李溟)은 병들었다고 말하고서 보방(保放)되었는데, 이것이 근래의 규례가 되었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이명은 참으로 몸에 병이 있었고, 나는 몸에 병이 없다.
그러니 어찌 거짓으로 병들었다고 칭탁하여 임금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공은 전후에 세 차례 액운을 당하여 옥에 갇혔는데, 잠자고 밥 먹는 것이나 행동거지를 조금도 변치 않고 평상시에 하던 대로 하였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처지에 따라 순응하면서 한 결 같이 천명(天命)으로 치부하였다. 그러고는 오직 성현들의 책만을 가져다 놓고 더욱더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겨울에 삭탈관작(削奪官爵)되고서 감옥에서 풀려났다. 정사년(1617)에 고신(告身)을 도로 돌려받았다. 이 뒤로는 향리로 내려와 지낸 것이 6년이었다.
일찍이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있을 적에는 제생(諸生)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들어 《가례(家禮)》를 강독하였다. 그 당시에 날씨가 찌는 듯하였으므로 제생들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모두들 괴로움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였으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공경심으로 마음을 유지하여서 그런 것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 1) 3월에 인조대왕이 종사(宗社)를 맑게 하고서 혼조(昏朝) 때 배척받았던 사류(士類)들을 뽑아 들여 중흥하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공을 가장 먼저 뽑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하고는 징소(徵召)하였다.
공은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서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내가 경이 올라오기를 날마다 바랐는데, 노고를 무릅쓰고 멀리까지 와 주었으니 매우 기쁘다.” 하고는, 드디어 등대(登對)를 허락하였다. 이에 공은 나아가 아뢰기를, “맑고 깨끗한 정치를 하는 시초이니, 가장 먼저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여 백성들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가뭄으로 인해 차자를 올려 여(輿)를 타는 잘못에 대해 진달하면서 기휘되는 것도 꺼리지 않았는데, 그 차자에서 이르기를, “선현(先賢)께서 이른 바 ‘세상에 없는 큰 공을 세우기는 쉬워도 지극히 은미한 본심(本心)은 보존하기가 어렵고, 중원(中原)을 쳐들어온 오랑캐는 물리치기가 쉬워도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욕심은 제거하기가 어렵다.’라고 한 말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힘써 잘 지켜, 일신의 사욕(私慾)으로 공도(公道)를 해치지 말고, 안일(安逸)로 태홀(怠忽)을 싹틔우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자연히 정치의 교화가 날로 높아져서 비가 내리고 해가 나는 것이 때에 맞아 백곡이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편안하고 만물들은 잘 자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직접 비답을 써서 내리기를, “내가 즉위한 이후로 한 사람도 나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늘 이 차자의 말을 보니 나도 모르게 경탄스러워 탄복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였다.
고사(故事)에 옥당(玉堂)의 장관은 입시하는 것이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도 경악(經幄)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정경세는 글을 읽고 덕을 기른 사람이니, 규례를 깨고 자주 인견하소서.”라고 하니, 상이 그 말에 따라 하루건너 들어와 참여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만난 시초였다. 성상은 공을 대우함에 있어서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특별히 예우하니, 공도 자신을 알아주는 데 감격하여 아는 것이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끝까지 다 말하였다. 대개 공은 말을 함에 있어서 나직한 소리로 완곡하게 말하였는데, 강론을 통하여 의리를 일으킬 때에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새로워져 예전 사람들이 미처 발하지 못한 것을 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상의 물음을 인하여 장현광(張顯光)과 유진(柳袗)을 행의(行誼)와 문학(文學)이 뛰어나 치도(治道)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천거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당시에 폐서인(廢庶人)된 지(祬)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으로부터 굴을 파고 도망치려 하였다고 고한 자가 있었는데, 법을 맡고 있던 훈재(勳宰)가 의리로써 결단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자신의 뜻을 지켜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상 앞에서 공을 헐뜯었다. 이에 공은 두 차례 상소를 올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또다시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가을에 공이 차자를 올려 여덟 조목에 대해 진달하였다.
첫 번째는 큰 뜻을 세우라는 것[立大志]이고,
두 번째는 성학을 부지런히 힘쓰라는 것[懋聖學]이고,
세 번째는 종통을 중하게 하라는 것[重宗統]이고,
네 번째는 효경을 다하라는 것[盡孝敬]이고,
다섯 번째는 간쟁을 받아들이라는 것[納諫諍]이고,
여섯 번째는 보고 듣는 것을 공평히 하라는 것[公視聽]이고,
일곱 번째는 궁중의 금법을 엄하게 하라는 것[嚴宮禁]이고,
여덟 번째는 민심을 진정시키라는 것[鎭民心]이었는데, 말하는 것마다 분명하고 확실하여 정확하게 요체를 지적하였다.
그 가운데 종통(宗統)을 중히 하라는 한 조목에서는 되풀이하여 철저하게 해 남김없이 다 말하였는데, 끝부분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지금 전례(典禮) 문제에 있어서 오직 공론이 있는 바를 따라서 상고하여 행하고 있으니, 몹시 다행스럽습니다. 다만 이 뒷날에 교묘한 말로 거짓을 꾸며 대면서 엉터리 설을 가지고 은총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나올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과연 그들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엉터리 설이 여기저기에서 나와 마침내 공의 말과 같이 되었다. 이해 12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이변이 일어났고, 다음 해인 갑자년(1624) 원일(元日)에도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이에 공은 구언 전지(求言傳旨)에 응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차자의 대략에, “삼시(三始)와 이단(履端)의 날에 하늘에서 꾸짖음을 보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는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이 큰 화가 아득한 속에 잠복해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하늘이 이런 재변을 내려 전하의 마음을 크게 경동시키는 것인 듯합니다.”하였다.
얼마 뒤에 역적 이괄(李适)이 거병(擧兵)하여 모반하였다. 이에 공은 강도(江都)로 들어가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건의하니, 대가(大駕)가 마침내 남쪽으로 거둥하였다. 공은 이어 명을 받들고 영남 지방을 검찰(檢察)하여 많은 것을 규획(規劃)하고는 장계를 올려서 이를 아뢰었다.
그 뒤에 훈재(勳宰)인 이귀(李貴)가, 공이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에 대해 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노하여 경연에서 심한 말로 공을 공격하였다. 이에 공은 차자를 올려 견책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상이 공의 충성스럽고 곧음을 가상하게 여긴다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더 간절하게 물러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며, 상은 더욱더 허락하지 않으면서 공을 발탁하여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이에 공은 굳게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또 주자(朱子)가 말한 ‘사대부가 사양하고 받으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비로소 체차를 허락하였다. 이에 공은 그날로 배 한 척을 사서 타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이때 부제학에 제수하고서 부르는 명이 거듭 내려왔으니, 대개 하루 사이에 체차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제수한 것이다.
공은 두 차례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나, 상이 회답하지 않고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옮겨 제수하고서 준엄한 내용의 전지를 내려 불렀다. 가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이 공을 인견하여 위로의 말을 하자, 공은 사례하고서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적에 정원(政院)에서 내지(內旨)를 봉환(封還)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승정원에서 옛날의 도를 능히 행한 것이 기뻤습니다.
신이 지금 이 직임을 맡았으니, 성상의 분부에 미진한 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먼저 앞장서서 봉환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얼굴빛을 고쳤다. 9월에 상이 하교하기를, “정경세가 일찍이 《논어(論語)》 한 질을 시강할 적에 마음을 다해 논란하였다. 옛말에 ‘선한 말에 대해서는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특별히 한 품계를 올려 주라.” 하니, 공은 상소를 올려 개정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공자(孔子)께서 말하기를, ‘천승의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쓰임을 절도가 있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일을 공경히 하여 미덥게 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해야 한다.〔道千乘之國 節用而愛人 敬事而信 使民以時〕’ 하였습니다.
성인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그 요체가 여기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중간에 있는 하나의 ‘경(敬)’ 자가 나머지 다섯 가지 일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일을 시행하고 호령을 내리는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이는 문득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순수한 마음으로 공력을 쌓아 극도에까지 이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성상의 은택에 흠뻑 젖어든 온 나라의 신민에게 모두 전하께서 학문에 부지런히 힘쓴 공효를 알게 하신다면, 경악(經幄)의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도 그 영광스러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공의 격언(格言)을 가납하였다.
10월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자 공은 동료들과 더불어 차자를 올려서 공구수성(恐懼修省)하기를 청하였다. 등대(登對)한 자리에서 또다시 훈재(勳宰)로부터 공격을 당하자,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 3) 1월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직하였다. 2월에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려 할 때 공이 세자의 명에 따라 도식(圖式)을 만들어 올렸다. 관례가 끝난 뒤 한 품계를 승진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3월에 큰아들인 검열 심(杺)이 서울 집에서 두역(痘疫)에 걸려 죽었다. 이에 공이 영구(靈柩)를 싣고 남쪽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심(鄭杺)이 끝내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자식의 상에 아비를 해직하는 것은 법례(法例)가 아니다.” 하였는데, 세 차례 고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여름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었다.
그 뒤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자 세 차례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다. 가을에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도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러 궁가(宮家)들이 독점하고 있는 연해(沿海) 어염(魚鹽)의 이익을 혁파하고, 사대부들이 뇌물로 청탁하는 폐단을 엄금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내수사(內需司) 노비(奴婢)에게 급복(給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 1월에 상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상제(喪制)를 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임금이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는 상제를 행하는 것으로 의논해 정하였으며,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으라고 하였는데, 상이 여러 차례 그렇게 하기 곤란하다는 내용으로 전교를 내렸다.
그러자 공은 여러 간관(諫官)들을 거느리고 30여 차례나 합사(合司)하여 쟁집(爭執)하였다. 그때 아뢴 글들이 모두 공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는데, 말이 완곡하면서도 의리가 곧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한 구절도 고치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또다시 상례(喪禮)에 대해 여섯 가지 조목으로 논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 차자의 첫머리 부분에서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지극한 정에 마음이 가리어져서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면 기뻐하고 달리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릇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면 좋아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으로 행하신다면,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하고자 하는 것을 아래에서 아무도 감히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자신의 사심(私心)에 따르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올바른 선비는 날로 멀어지고 아첨하는 말만 날로 이르게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신이 진달할 내용은 거의 수천 마디에 달하는데,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전하와 의견이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전하의 마음만 괴롭게 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중지하지 않고 누누이 진달하는 것은, 실로 사특한 것을 막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마음에 거슬린다고 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나무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경(經)에 의거하고 예(禮)를 인용하여 반복해 논란하였으니, 예학(禮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다만 장기(杖期)의 복을 입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이미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의 상례로 논하였으니, 상장(喪杖)을 짚고 상차(喪次)에 나아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예관(禮官)들에게 명해 사친(私親)의 칭호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은 ‘종통(宗統)의 대의(大義)는 참으로 엄한 것이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미 선조(宣祖)의 친손자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는바,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고(考)라고 칭하여도 고가 둘이 되는 혐의스러움이 없다. 그러니 정원대원군을 고라고 칭하되 현(顯)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의론이 모두 공의 의견에 따랐다.
그런데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박지계(朴知誡)의 말을 빙자하여 이미 결정되고 난 뒤에 다시 삼년상(三年喪)으로 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꾸짖었으나, 뜻을 돌리지는 못했다.
얼마 뒤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곧바로 부제학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세 차례 정고하여 체차되었다.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어 수천 자나 되는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강의 뜻은 ‘치도(治道)가 날로 진보하는 것은 보지 못하겠고 단지 날로 퇴보하는 것만 보인다.’라는 것이었으며, 또 아뢰기를, “백성들을 고무하여 진작시키고 떨쳐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기틀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성(誠)’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오늘날의 병통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근래에 상(喪)을 당한 슬픔으로 인하여 어진 사대부들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 잘못된 정사가 쌓이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대사헌에서 체차되고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분황(焚黃)하기 위하여 말미를 받았으나,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사임하였으며, 곧바로 부제학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전시(殿試)를 치르면서 사사로운 정에 따라서 합격시킨 시관(試官)이 있자, 공은 파방(罷榜)하기를 청하고, 또 법을 세워 응시자들에게 초를 지급해 주지 말기를 청하였다. 겨울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으며, 얼마 뒤에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체차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둘째 아들인 학(㰒)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사 지낼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고 슬펐다. 그러나 논사(論思)하는 직임은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 본도에 명하여 장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해 주게 하였다.
공이 청주(淸州)에 도착하였을 때 오랑캐들이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조정으로 돌아오자,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를 맡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도내에 격문(檄文)을 보내니, 모집에 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군량을 조달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날짜를 정해 올려 보내려고 하다가 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혼자서 강도(江都)로 들어가 복명(復命)하였다.
4월에 대가(大駕)가 서울로 돌아왔다. 5월에 공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는데, 그 차자의 대략에,
“예로부터 비상한 변고를 만난 임금들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운 다음에야 능히 쇠망한 것을 부흥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참으로 뜻을 먼저 세우지 않은 채 무너져 쓰러진 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한다면,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번의 이 오랑캐들의 화란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쪽 지방의 생령(生靈)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심지어 군부(君父)가 몽진(蒙塵)을 하고 묘사(廟社)가 파천(播遷)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옛 도읍으로 어가가 다시 되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이는 역시 제비와 참새가 처마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국가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는 백성들을 단결시켜서 다시 흥성해질 수 있는 법이며, 많은 근심을 겪고 난 다음에는 거룩한 마음을 열 수가 있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우환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기가 꺾이지 마시고 더욱더 자강(自强)하소서. 그리하여 자나 깨나 한 생각을 오로지 수치를 씻고 분을 풀겠다는 데만 두시고, 털끝만큼이라도 무사안일을 탐하는 마음을 그 사이에 섞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전하의 뜻이 설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다. 대강의 내용은 전에 올린 차자와 같았으며, ‘각고면려하겠다는 뜻을 세워 오래도록 성실히 지키라.’라고 청하였는데, 더욱더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말하였다. 이 몇 달 사이에 부제학과 대사헌과 참찬의 자리를 여러 차례 오갔다.
무진년(1628, 인조 6)에 대사헌에 제수되어 유효립(柳孝立)의 역옥(逆獄)을 국문(鞫問)하는 데 참여하였다. 고사(故事)에, 국문에 참여한 관원을 녹훈(錄勳)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공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여름에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어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다음 달에 도로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6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가을에 차자를 올려 변방의 일에 대해 논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 7) 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변이 일어나자 차자를 올려 공구수성(恐懼修省)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뒤에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가서 분황(焚黃)하였으며,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견문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 몸으로 경이 보도해 주는 것에 힘입고 있었다.
그런데 경이 떠나자 얼마 되지 않아 나의 마음이 사욕에 가리어졌다. 논사(論思)의 장관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윤4월에 동궁(東宮)의 명을 받고서 구사구용(九思九容)을 써서 올렸다. 얼마 뒤에 대사헌으로 옮겨졌는데, 손이 마비되는 증세가 생겼으므로 세 번 정고하여 체차되었다. 곧바로 우참찬으로 바꾸어 제수되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는데, 세 번 정고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해직되어 초정(椒井)에서 목욕하여 병을 치료하기를 청하였으며, 이어 치사(致仕)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나를 계옥(啓沃)시켜 준 것이 많았다. 속히 돌아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9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며,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공의 생각에는 문형(文衡)을 맡는 자리와 정병(政柄)을 맡는 자리는 모두가 총명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 자리인데, 자신은 늙어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잇달아 상소를 올려 더욱 굳게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직무를 보게 하였다.
이에 공은 황공하여 조정에 나아가서 일을 보았는데, 일심으로 봉공(奉公)하면서 남과 부딪치거나 남을 붙좇지 않았으며, 어진 인재를 진출시키고 시비를 명백하게 가리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므로 물론(物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인재를 뽑으면서는 먼저 글을 지음에 있어서 글자를 쓴 것의 순함과 이치의 명백함이 어떠한가를 보고서 급제시키거나 낙제시켰으며, 기괴하고 궁벽한 말을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과거 시험의 글을 짓는 습속이 완전히 바뀔 수가 있었다.
경오년(1630, 인조 8) 11월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을 천장(遷葬)하였는데, 명을 받들어 무신년(1608, 선조41)에 쓴 지문(誌文)을 고쳐 지어 올리니, 상이 잘 지었다는 전교를 내렸다. 얼마 뒤에 병을 이유로 말미를 달라고 청하고서 고향으로 내려가 중도에서 강력하게 해직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이 훈재(勳宰)의 의론에 따라 장차 원종(元宗)을 추숭(追崇)하려고 하면서 곧장 명나라에다가 요청하려고 하였다.
공은 ‘처음에 이 예에 대해서 쟁론한 자는 바로 나이니, 지금 병으로 인해 물러나 있다는 핑계로 나의 충성을 끝까지 다 바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는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아주 길어서 몇 천 자나 되었는데, 공이 일생 동안 예학(禮學)에 대해 깊이 공부한 것이 여기에서 다 드러났으며, 임금을 이끌어 올바른 도로 나아가게 하는 정성 역시 여기에서 다 드러났으니,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한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이때 올린 상소의 전문은 공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다.
6월에 오랑캐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보은(報恩)에 이르러 병이 더욱 심해져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동궁(東宮)이 편지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겨울에 상이 의원(醫員)을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동궁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치사(致仕)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지금은 구신(舊臣)이 사퇴할 때가 아니다. 병을 조리하고서 올라오라.” 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상소를 올려 참찬관의 자리와 겸직한 자리를 해면시켜 주기를 요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6월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였다. 공은 병 때문에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고는 죄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병세가 위중하였다가 소생하였다. 6월 17일에 별세하였다. 이보다 하루 앞서서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장사 지냄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동궁이 장차 거애(擧哀)하려고 하였는데, 예관이 “빈객(賓客)의 상에 거애하는 규례가 없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상이 전교하기를, “이 사람은 세자를 가르쳐 주고 일깨워 준 공이 많으니, 거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장사를 지낼 적에 동궁이 별도로 부의(賻儀)를 더 내리고 궁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장례를 보살피도록 명하고는 이르기를, “정 빈객(鄭賓客)은 평소 예를 좋아하였으니, 궁관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일에 선비들로서 와서 회장(會葬)한 자가 400여 인이나 되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영남의 선비들이 건의하여 공을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配享)하여 제사 지냈으며, 정유년(1657, 효종8)에는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모두 십여 권이나 된다. 그러나 《사문록(思問錄)》 몇 권은 미처 간행하지 못하였다.
공의 학문은 서애(西厓) 상공(相公)에게서 나왔으며, 서애의 학문은 퇴도(退陶) 선생에게서 나왔는데, 퇴도가 평생토록 떠받들고 믿은 분은 주회암(朱晦庵)이었다. 이에 퇴도 선생은 대중지정(大中至正)하여 반드시 회암을 준칙으로 삼았으며, 주서(朱書) 중에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나 친구나 문인들과 문답한 서찰 가운데 학문을 하는 데 관계되는 것들을 뽑아 엮어 10책으로 만들고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라고 이름 붙였다.
공은 책이란 책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주서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의논을 하거나 경연에서 강론을 할 적에 한 말들은 주서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말에 대해 제대로 맛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인조가 즉위한 초년에는 자나 깨나 유학(儒學)을 진흥시킬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공을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앉혔는데,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거의 10년이나 되었으니, 인조가 공에 대해 예우하면서 총애한 것이 지극하다고 할 만하였다.
공은 큰일을 할 수 있는 때를 만나서 일을 만나 조처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정확하고 명백하게 하였으며, 논사를 함에 있어서는 임금을 도(道)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였는데, 상도 자신을 비우고 들어주면서 하루라도 공이 곁에 있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니 제아무리 강관(絳灌)이나 허사(許史)와 같이 권세가 있는 신하라고 하더라도 그 틈을 벌어지게 할 수 없었다. 또한 조정 신하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유학에 뜻을 두고 있는 자들은 모두 공이 등용되기를 고대하였으며, 공이 경연에 나아가 강의한 것과 올린 소차(疏箚)의 글을 보고서는 모두 혀를 내두르면서 칭찬하였다.
그리고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같은 분은 강연을 마치고 물러 나올 적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경세는 참으로 시강(侍講)의 인재이다. 어찌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에서만 제일이겠는가. 옛날 사람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였다.
또 임숙영(任叔英)은 재주가 높아서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으나, 유독 공에 대해서만은 마음속으로 열복(悅服)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선조와 인조 두 조정에서 올린 소차(疏箚)가 수십여 통이나 되는데, 일에 따라서 다 말하였는바, 뜻을 세운 것은 비록 달랐으나 대체적인 요지는 어느 한마디의 말도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고 참되고 바른 데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
문장(文章)은 고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사리(事理)는 잘 갖추어지고 타당하여, 풍부하되 한마디 말도 군더더기가 없고, 요약되었으되 한마디 말도 잘못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임금에게 고하는 말의 체모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일찍이 이명준(李命俊)이 상소를 올려 김두남(金斗南)과 조기(趙琦)가 부정한 길을 통하여 조정에 진출하기를 도모하였다고 논하자, 인조가 몹시 노하였는데, 삼사(三司)와 정원(政院)에서 이에 대해 논집(論執)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한 번 차자를 올림에 미쳐서는 성상의 뜻이 얼음 녹듯 풀어지니, 온 조정 사람들이 서로 경하하며 그 차자를 전해 외웠다. 또한 인조가 일찍이 전교하기를, “경이 이끌어 준 덕분에 사사로운 정을 억제하고 잘못을 고친 것이 많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임금과 신하의 사이가 어떠하였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혹자는 공이 어진 임금을 만나고서도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단지 시강(侍講)만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가생(賈生)이나 동생(董生)은 후원(后元)이나 건무(建武)의 시대를 만나서도 치안책(治安策)과 천인대(天人對)만 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두 분 정자(程子)와 주 부자(朱夫子)도 역시 경력(慶曆)과 순희(淳煕) 두 황제의 조정에 있으면서도 큰일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공만이 유독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패술(霸術)에 마음을 두지 않게 하여 온갖 험난하고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서도 종시토록 학문에 전념하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게 한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공은 기사년(1629, 인조 7)에 물러나게 해 주기를 청하면서 올린 상소에서 이르기를, “남의 조정에 서 있으면서 도가 행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신이 비록 형편없이 못났기는 하지만, 염치라곤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후세의 이 세상의 청의(淸議)를 주도하는 자들이 붓을 잡고 평해 쓰기를, ‘아무개는 밝은 시대에 하는 일 없이 관직을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서 그럭저럭 살다가 죽었다.’라고 할까 두렵습니다.
그럴 경우 신이 한평생 예를 강구한 것이 구천(九泉)에서 수치를 받을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런즉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공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의 사람됨은 키가 크고 이마가 넓었으며, 정신과 풍채가 시원하고 맑았다. 또한 두 눈의 눈빛이 형형하였으며,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총명함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함양한 것이 아주 두터웠다.
또한 고고하고 특별난 행동을 함으로써 세속 사람들을 놀라게 해 명예를 취하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재주와 학덕을 감추고 세속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는 척하여 우뚝하게 스스로 서지도 않았다. 평소에 의론을 함에 있어서는 혼후하고 평이하여 비록 평소에 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자들도 한 번 공을 보고 난 뒤에는 덕이 높은 군자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또한 살아 계실 때 봉양하고 죽은 뒤에 장사 지냄에 있어서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임금을 섬기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성실하게 하고 공경 서래하는 실제를 다하였다. 그 나머지 뭇 행실들 가운데 뛰어났던 행실들은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항상 공을 칭찬하기를, “우복은 총명함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아주 은미한 이치를 알아냈고 아주 높은 경지를 보았다. 이에 비록 오현(五賢) 가운데에서 퇴계 선생과 같은 분이라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공에게 뒤지는 점이 있었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한 말이라고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재이(災異)나 군려(軍旅)의 일에 대해서조차도 공은 일부러 관심을 두지는 않았으나, 재변을 만나 진언한 말은 뒷날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여 조처를 한 것은 시귀(蓍龜)보다도 더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니 공은 참으로 넓고도 큰 진유(眞儒)라고 할 만하다.
공은 평소의 성품이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우복산(愚伏山) 속의 시냇가에 몇 칸짜리 집을 짓고는 좌우에 서책을 쌓아 놓고 몇 해에 걸쳐 읽을 계획을 하였다. 그리고 독서하는 여가에는 수석 사이를 오가면서 스스로 즐기는 정취를 왕왕 시로 읊어 발하기도 하였다.
공은 시를 지음에 있어서 억지로 애를 써서 짓지 않더라도 천기(天機)가 저절로 동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시라는 것은 하찮은 기예이다. 나의 심력(心力)을 어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에 헛되이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서법(書法)이 힘차고 아름다워 고체(古體)와 아주 흡사하였으나, 역시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공은 또한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다른 사람이 이론(異論)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선유(先儒)의 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서 꾸짖기를, “막 새로 학문을 배우는 후생들로서는 오직 스승의 설을 독실히 믿는 것이 마땅하다.
비슷한 것을 끌어다 대면서 필설(筆舌)을 가지고 까불대는 것은 가불매조(呵佛罵祖)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처리하여 마치 천균(千勻)의 쇠뇌를 쏘는 듯이 하였으며, 겸양하여 물러나기만 할 뿐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항상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아는 바가 없고 능한 바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은 다음에야, 끝내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하였다.
공은 만년에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에서 봉사(封事), 서기(序記), 비명(碑銘), 제문(祭文)을 뽑아 10책으로 만들고는 《주문작해(朱文酌海)》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책은 대개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표리(表裏)를 이루는 책이라고 한다.
정씨(鄭氏)는 옛 진양(晉陽)의 망족(望族)이다. 공의 9대조이신 휘(諱) 택(澤)은 고려 말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다가 한 아들을 상주에 남겨 두었으므로 이에 드디어 상주에 살게 되었다. 휘 계함(繼咸)은 공에게 증조가 되고, 휘 은성(銀成)은 공에게 조(祖)가 되고, 휘 여관(汝寬)은 공에게 고(考)가 되신다. 이분들은 모두 집안 대대로 의로움을 행하여 향당 사람들이 모두 모범으로 삼았다.
비(妣) 합천이씨(陜川李氏)는 강양군(江陽君) 이요(李瑤)의 후손이며, 학생 이공가(李公軻)의 따님이다. 이분들은 공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은혜를 미루어 3대가 추증되었으며, 비(妣)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전 부인인 이씨(李氏)는 본관이 전의(全義)로,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이시민(李時敏)이고, 아버지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해(李海)이다. 후 부인인 이씨(李氏)는 본관이 진보(眞寶)인데, 호조참판을 지낸 이우(李堣)의 증손녀이며, 할아버지인 이수령(李壽苓)은 황산찰방(黃山察訪)을 지냈고, 아버지인 이결(李潔)은 충순위(忠順衛)였다.
이분께서는 정해년(1587, 선조 20)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천성이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인자하고 어질어서 시부모를 섬김에 효도와 공경으로 하였으며, 군자(君子)의 짝이 되어 도리에 어긋난 행실이 없었다.
또한 여자로서 해야 할 일도 아주 잘하였으며, 《내훈(內訓)》이나 《열녀전(列女傳)》 등의 서책을 즐겨 읽어 재리(財利)에 관한 말을 일찍이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서출(庶出)들을 보살펴 기르고 여복(女僕)들을 거느림에도 모두 은혜로운 뜻이 있었다.
공이 병이 위독할 때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고 부인은 남자의 손에서 운명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니, 부인이 응답하기를, “일찍이 그런 말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공은 항상 부인에 대해서 유력한 내조자라고 칭하였는데, 공이 졸하고 난 뒤 2년 뒤에 졸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출생해서 69세를 살았으며, 공과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심(杺)으로, 약관(弱冠)의 나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사원(史苑)에서 붓을 잡았는데, 사람들이 아버지와 같은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졸하였다. 군수(郡守) 이의활(李宜活)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도응(道應)은 유일(遺逸)로 징소(徵召)되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고, 딸은 봉사(奉事) 조한수(趙漢叟)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학(㰒)으로 선교랑(宣敎郞)이었는데, 현감 강연(姜?)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역시 일찍 죽어서 후사가 없다. 딸은 생원(生員) 노석명(盧碩命)과 승지(承旨) 송준길(宋浚吉)에게 출가하였는데, 송준길은 현재 현량(賢良)으로서 주연(胄筵)에서 진강(進講)하고 있다.
또 측실(側室)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력(櫟)으로 만호(萬戶)이다.
시강원 자의 도응은 지평(持平) 유진(柳袗)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봉사 조한수는 3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노사영(盧思永)의 아내, 전익구(全翼耈)의 아내, 이송래(李松來)의 아내는 모두 생원 노석명의 소출이다. 참봉 송광식(宋光栻)의 아내, 나명좌(羅明佐)의 아내, 수찬 민유중(閔維重)의 아내는 승지 송준길의 소출이다.
정도징(鄭道徵)은 력(櫟)의 소출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백가들이 여기저기 마구 나오매 / 百家烽湧。
우리 도가 쇠미해져 외로워 졌네 / 吾道浸孤。
도가 한번 동방으로 오고 난 뒤에 / 道一于東。
성조에서 유학자들 많이 나왔네 / 煕朝盛儒。
아아 저기 도산의 퇴계 선생은 / 粤惟陶山。
주회암의 정통 도맥 이어 받았네 / 嫡傳晦朱。
아름답다 우리 우복 선생께서는 / 懿哉愚伏。
일찌감치 퇴도 자취 따라 나갔네 / 陶軌夙趨。
학당에서 오고 가며 공부하면서 / 婆娑黨塾。
반우에다 자신의 몸 내맡기었네 / 委己盤盂。
배운 공부 발하여서 글로 지으매 / 發而摛辭。
정밀하게 가다듬어 잡됨 없었네 / 鑿精祛莩。
학문공부 성취한 뒤 벼슬 나가매 / 學成而進。
어진 이의 벼슬길이 반듯하였네 / 賢路不嶇。
사원에서 붓 잡고서 역사를 쓰매 / 簪筆史苑。
동호보다 못하지가 아니하였네 / 上下董狐。
옥당으로 관직 자리 옮기어 가매 / 盛之玉堂。
향안 주위 임금 은혜 서리었네 / 香案恩紆。
어려운 때 임금에게 진달한 말은 / 艱危進說。
역시 모두 구요(咎繇) 올린 계책이었네 / 亦咎之謨。
혼란기와 치세 서로 이어져 오다 / 或荒或理。
혼조 때를 당해서는 도 병들었네 / 遭昏道癯。
수령 되어 수고로움 잊고 일했고 / 尸土忘勩。
사신 가서 자신의 몸 잊고 일했네 / 出疆忘軀。
만난 처지 따라 마음 편히 행하매 / 隨其所遇。
성심에다 절개 둘 다 탁월하였네 / 誠節卓殊。
성인께서 중흥하여 즉위하신 뒤 / 聖人中興。
곧장 바로 조정으로 공 불러왔네 / 訪落須臾。
옥을 차고 긴 옷자락 끌고 나아가 / 佩玉長裾。
당우 시대 일 가지고 진달하였네 / 陳必唐虞。
예조에서 예악 제도 관장하였고 / 南宮禮樂。
이조에서 인재 등용 관장하였네 / 選曹錘爐。
문장의 도 중해지고 가벼워짐을 / 文鼎輕重。
공 아니면 어느 누가 할 수 있으랴 / 舍公誰須。
공께서 이미 임금 인정받으매 / 公旣知遇。
돌과 옥돌 반드시 다 구별되었네 / 珷珉必區。
예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 모두 / 彼論禮者。
모난 것을 깎아 놓고 각졌다 했네 / 削稜謂柧。
버팅긴들 공에게야 뭔 해 됐으랴 / 柱公何害。
공께서는 성무하지 아니하였네 / 公不聖誣。
저기 저 한나라의 조정을 보니 / 顧瞻漢庭。
신과 상이 번갈아서 나아왔구나 / 申商交途。
어느 누가 허탄하다 아니했으며 / 疇不我誕。
어느 누가 어리석다 안 했으랴만 / 疇不我愚。
공은 절대 궤우하지 아니했나니 / 死不詭遇。
확고하고 확고했던 대장부였네 / 確乎夫夫。
함창 땅에 공이 묻힌 묘소 있나니 / 有墓于咸。
검호 못을 마주 보는 산에 있구나 / 面勢檢湖。
호수의 물 가없이 드넓음이여 / 湖水濔濔。
공 이름과 더불어서 영원하리라 / 公名與俱。
구천에서 살아오기 어려웁기에 / 九京難作。
못난 아자 길고 길게 탄식 토하네 / 蛾子長吁。
정헌대부(正憲大夫) 원임(原任)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조경(趙絅)은 찬한다.
[각주]
[주01] 말로 …… 않는다 : 공자가 이르기를, “옛글에 이르기를, ‘말로 뜻을 족하게 하고, 글로 말을 족하게 한다.’ 하였다.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 뜻을 알겠는가. 그리고 말로 하기만 할 뿐 글로 쓰지 않는다면 그 말이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는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5年》
[주02] 남상(南床)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가리킨다. 홍문관 관원들의 좌차(坐次)가 정자가 남쪽 상(床)에 자리 잡고 앉는 데에서 이렇게 이른다.
[주03] 삼성(三聖) : 역(易)의 64괘(卦)를 그은 복희(伏羲)와 괘사(卦辭) 및 효사(爻辭)를 지은 문왕(文王)과 십익(十翼)을 지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주04] 소자(邵子) : 북송(北宋)의 이학가(理學家)인 소옹(邵雍)을 가리킨다. 소옹은 자가 요부(堯夫)로, 역리(易理)에 정통하였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격양집(擊壤集)》을 저술하였다.
[주05] 목리(穆李) : 송나라의 이학가인 목수(穆修)와 이지재(李之才)를 가리킨다. 선천괘도(先天卦圖)는 진단(陳摶)이 충방(种放)에게 전하였고, 충방이 목수에게 전하였고, 목수가 이지재에게 전하였고, 이지재가 소옹(邵雍)에게 전하였다. 《宋元學案 卷9 百源學案》
[주06] 선천(先天)의 획(畫) : 복희씨(伏羲氏)가 그린 선천도(先天圖)를 말한다. 지금 《주역》의 팔괘도(八卦圖)는 문왕(文王)의 후천도(後天圖)이다. 팔괘를 방위에 배정하는 데 있어서 후천도는 진(震)을 동, 태(泰)를 서, 이(離)를 남, 감(坎)을 북, 간(艮)을 동북, 건(乾)을 서북, 손(巽)을 동남, 곤(坤)을 서남에 배정한다.
이에 반해 선천도는 이를 동, 감을 서, 건을 남, 곤을 북, 진을 동북, 간을 서북, 태를 동남, 손을 서남에 배정한다. 이 선천도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사람인 복희가 창조한 것으로, 도가(道家)의 비법으로 전수되다가 소옹(邵雍)이 전수받아 상수(象數)에 의거하여 우주만상(宇宙萬象)의 생성 과정을 연역해 내는 선천상수학(先天象數學)을 확립하였다. 《皇極經世書》
[주07]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 : 광해군 4년에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조작한 옥사이다.
김경립(金景立)에 의하여 역모(逆謀)를 꾀하였다는 무고로 투옥된 김직재가 고문에 못 이겨 이호민(李好閔), 윤안성(尹安性) 등과 함께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거짓 진술함으로써 이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때 소북파 100여 명이 처벌을 받았다. 《燃藜室記述 卷19 金直哉之獄》
[주08] 위소(魏劭)의 일 : 후한(後漢) 때 사람인 위소가 무고를 당해 기시(棄市)의 형(刑)에 처해진 사필(史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팔아 그 돈을 당로자(當路者)였던 후람(侯覽)에게 뇌물로 주고서 사형에서 면하게 한 고사를 이른다. 《後漢書 卷64 史弼列傳》
[주09] 옛사람 …… 하였다 : 은(殷)나라 때, 나중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된 서백(西伯)이 주왕(紂王)에 의해 유리(羑里)에 있는 옥(獄)에 갇히자,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 등이 여상(呂尙)으로부터 황금 천일(千鎰)을 받아 이를 가지고 미녀(美女)와 문마(文馬)를 사 주왕에게 바치고서 서백을 석방시킨 고사를 이른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주10] 보방(保放) : 보증인(保證人)을 세우고 죄인을 석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11] 폐서인(廢庶人) 된 지(祬) : 광해군의 세자를 가리킨다. 지는 광해군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광해군과 함께 폐서인되어 교동도(喬桐島)에 안치되었는데, 굴을 파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주12] 흰 …… 이변 : 흰색의 긴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지나간 것으로, 드물게 나타나는 천상(天象)인데, 옛날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 세상에 비상한 사태가 발생하리란 것을 예고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조짐으로 보았다.
[주13] 삼시(三始)와 이단(履端) : 삼시는 연(年), 월(月), 일(日)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때라는 뜻이고, 이단은 책력(冊曆)을 정하는 원점(元點)이란 뜻으로, 모두 정월 초하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14] 인헌왕후(仁獻王后) : 인조의 생모이다.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에게 시집와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올려졌으며,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고 하였다.
인조 4년 1월 14일에 경희궁(慶煕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상제(喪制)를 상례(常禮)에 따라 할 것이냐 변례(變禮)에 따라 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김장생(金長生)과 정경세(鄭經世) 등은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고 인조는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 등은 인조가 상주가 되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조가 처음에는 삼년복을 입으려고 하다가 조정에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함에 따라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주15] 분황(焚黃) : 증직(贈職)이 되었을 때 교서(敎書)를 베껴 쓴 누런 종이를 추증된 자의 무덤 앞에서 불태우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16] 파방(罷榜) : 과거 급제자를 발표한 뒤에 부정이 탄로 나면 그 발표를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주17] 제비와 …… 것 : 제비와 참새가 사람의 집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집에 불이 나 타고 있는데도 어미와 새끼가 즐거워하며 화가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아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위태롭다는 것을 모르고서 편안히 지낸다는 뜻이다.
[주18] 유효립(柳孝立)의 역옥(逆獄) : 인조반정으로 인해 제천(堤川)에 유배되어 있던 유효립이 몰락한 대북(大北)의 잔당들과 제휴하여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6年 1月 3日》
[주19] 구사구용(九思九容) :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고서는 마땅히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라.〔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處身)함에 있어서 응당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이다.
[주20] 강관(絳灌)이나 …… 없었다 : 임금을 추대하여 강력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나 임금의 외척으로서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복과 인조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인데, 여기에서의 총애받는 신하란 구체적으로 이귀(李貴) 등 인조반정의 주역들을 가리킨다.
강관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강후(絳侯)에 봉해진 주발(周勃)과 영음후(穎陰侯)에 봉해진 관영(灌嬰)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진평(陳平) 등과 서로 대립하였다. 허사(許史)는 한 선제(漢宣帝) 때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허백(許伯)과 사고(史高)를 가리킨다.
[주21] 문충공(文忠公) …… 하였다 : 이 말은 행장이나 연보 등을 보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한 말로 나오는바, 조경(趙絅)이 착각한 듯하다.
[주22] 가생(賈生)이나 …… 뿐이었다 : 가생은 한나라 때 사람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아주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나가면서 상수(湘水)를 건너다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양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있다가 양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
일찍이 문제에게 시국(時局)을 구제하기 위하여 치안책을 올렸었다. 동생(董生)은 한 무제(漢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한 무제가 즉위하여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을 때 현량으로 뽑힌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요지의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올리면서 육예(六藝)의 과(科)와 공자(孔子)의 학술을 배우지 않은 자는 등용하지 말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이 대책을 채택하여 시행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 유학(儒學)이 정통의 학문으로 되었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漢書 卷56 董仲舒傳》
[주23] 시귀(蓍龜) :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으로, 고대 중국에서 점을 치는 데 사용된 재료이다. 일반적으로 점술(占術)을 뜻한다.
[주24] 가불매조(呵佛罵祖) :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쓰는 용어로, 능히 속박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나 전 시대의 사람들이 다다른 경지를 초월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데, 유가(儒家)의 글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25] 반우(盤盂) : 둥글거나 네모진 그릇으로, 옛날 사람들은 여기에 공을 기록하거나 좌우명(座右銘)을 새겨 두고서 항시 이를 보면서 자신을 가다듬었다.
[주26] 동호(董狐)보다 못하지가 아니하였네 : 돌아보거나 기휘(忌諱)함이 없이 사실대로 바르게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동호는 춘추 시대 때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으로, 진나라의 권력자였던 조순(趙盾)이 임금을 시해한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직필(直筆)로 유명한 사람이다.
[주27] 향안(香案) : 대궐 안의 향로나 촛대 옆에 놓아두는 책상으로, 흔히 임금을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28] 구요(咎繇) : 순(舜) 임금 때의 어진 신하인 고요(皐陶)를 가리킨다. 고요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계책을 진달하였다.
[주29] 문장의 …… 있으랴 : 우복이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과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당시의 문장 짓는 풍조를 일신시켰다는 뜻이다.
[주30] 모난 …… 했네 : 분명한 예경(禮經)의 설대로 하지 않고 이것저것 끌어다 대어 두루뭉술하게 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능(稜)은 사방이 각진 나무를 말하고, 고(柧)는 팔방이 각진 나무를 말한다.
[주31] 성무(聖誣) : 성인을 비난하고 법령을 무너뜨린다는 뜻인 비성무법(非聖誣法)을 줄여 쓴 말이다. 《한서》 권68 〈김일제전(金日磾傳)〉에, “성인을 비난하고 법령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란(大亂)이 일어날 재앙이다.” 하였다.
[주32] 저기 …… 나아왔구나 : 조정에 술수를 쓰는 인물들이 번갈아 등용되었다는 뜻이다. 신(申)과 상(商)은 전국 시대 때의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법가(法家)의 중요한 인물로서 정사를 함에 있어서 덕정(德政)을 중시하지 않고 법과 술수에 의해서 정사를 하였다.
[주33] 공은 …… 아니했나니 : 절대로 부정한 방법을 써서 목적을 이루지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궤우(詭遇)는 짐승을 사냥하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모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조 간자(趙簡子)가 말을 잘 몰기로 소문난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인 해(奚)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해가 조 간자에게 ‘왕량은 천하에 보잘것없는 말몰이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량이 다시 말을 몰겠다고 청하여 다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해가 다시 조 간자에게 복명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더없이 훌륭한 말몰이꾼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 간자가 왕량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해의 수레를 타고 말을 몰게 하니, 왕량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위하여 말 모는 것을 법도대로 하였더니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몰아 짐승을 만나게 해 주었더니〔詭遇〕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습니다. 저는 소인과 함께 수레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사양하겠습니다.’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34] 아자(蛾子) : 작은 개미로, 흔히 문생(門生)이나 후생(後生)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예기》 〈학기(學記)〉에, “작은 개미가 수시로 큰 개미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한다.〔蛾子時術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에, “작은 개미가 수시로 큰 개미가 하는 것을 본받아 끊임없이 흙을 날라 마침내는 커다란 개미둑을 이룬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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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愚伏鄭先生神道碑銘 幷序 - 趙絅
崇禎庚午。愚伏堂鄭先生以疾 賜告歸鄕。拜左參贊。不赴朝已。壬申。據禮乞致仕。 不報。明年六月丁丑。卒于尙之墨谷田舍。訃 聞。上恫傷。輟朝二日。賵賻如禮。特贈議政府左贊成。用其年八月甲申。卜竁于咸昌縣檢湖西卯向之原。葬事官庀焉。上又遣郞。文以祭之。粤廿一年甲午。嗣孫侍講院咨議道應。謀諸公門下士若而人。依令式將樹碑于原。手故副學蒼石公之狀。授漢陽趙絅曰。吾大父始雖以科目進。匪躬之晷。靡非格致之學。立朝五十有餘年。雖處艱難顚沛中。何嘗不以是勉吾 君。斯可謂有始有卒。宜得直而不華者銘傳於後。顧與大父幷世而生。知大父平生者已作陳人。無一人在。惟執事寔吾大父愼簡之寮。且知大父深。敢屬以顯刻。絅對曰。唯唯否否。絅以郞寮事公。覿德心醉者有年。今於公幽隧事。宜無待子之請之勤禮之恭。言之不文。行而不遠。夫子之訓也。吾敢違之。絅實彫篆之不足。曷能形容大君子事業文章。子盍改圖。道應氏更跽爲禮。執而不移。終日無倦色。絅累辭不獲。而疾病間之。歷歲于玆。始繙其狀而序之曰。公姓鄭氏。諱經世。字景任。號愚伏堂。生而秀朗。才學語。讀小學一卷。文理驟達。他書肯綮處。迎刃縷解。又妙能爲辭章。年十六。得儁鄕解。然雅志不亶擧子業。作從善如登詩。以見其志云。庚辰。柳文忠公知尙州。以功令厲學子。公執雉請益。文忠獨視韙之。告以古人爲學之序。公悅而服膺。二十。成進士。二十四。登 謁聖科。闡第二名。卽萬曆丙戍也。京師人未見公面。口相傳其文以熟。選入槐院爲副正字。戊子。薦拜藝文館檢閱。俄轉奉敎。己丑春。 宣廟命選曹趣塡玉堂南床員。蓋極選也。自昔難其人。惟以二人備擬。公爲正字。又 賜暇湖堂。一時榮之。先是。公以史官入侍 經筵。 宣廟問委巷義。左右莫能對。公進曰。此出檀弓。猶言曲巷。 上甚悅。及退。目送之。無何。有玉堂之 命。不特際遇有時。稽古之力也。冬。逆獄起。公曾在史苑。誤薦賊甥震吉。同韓柳川下吏尋釋。庚寅。遭外艱。壬辰島夷難作。嶺南刳於兵最先而酷。尙之人士糾合義旅。推公倡。猝遇賊。公中矢仆。母夫人與次子興世被害。巡察使狀 聞。陞拜禮佐。公拜疏辭。冬。爲義旅餉向湖西。遘痘殊死而蘇。制除。拜禮兵郞未拜 命。遷修撰,正言。還修撰兼文學。乙未。陞校理,知製 敎。時大盜猶據左腹。君臣旰食。公上疏請立自強之本。且登對進言曰。古者大有爲之君所以根本治道者。不過學而已。所謂學非襲先王緖言通遺經訓釋而已。須有思辨之實。積累之漸。然後學由是進。心由是明。旣知此心由學而明。當知此心非學而闇。明則光輝。旁燭事物。闇則是非懵然而不辨。天降大割。百事潰裂。勤於學問。以明治道。則舊邦之維新在此。此學不繼。治道多雜。則國勢不振愈甚。辭氣慷慨。敷奏洪暢。 天顏爲之怡然。又曰。 聖意以易爲聖學正宗故難已。開 筵首講是書。然其意精微難曉。春秋明復讎之義。最是今日急務。 上仍問程傳本義異同。公推原三聖。下及邵,穆李發揮皆出先天之畫。仍明程傳本義所以然之故。明剴有味。 上稱善。必曰國士國士。 賜內廏馬馬粧以奬之。丙申。以天官員外受繡衣 命按嶺戍。還拜校理。丁酉春。陞正郞。上疏乞解職從戎。竱力復讎事。 不許。秋拜中書。俄遷玉堂兼弼善。時元均代李舜臣。閑山陷。天將楊元棄南原走。國中凶凶。言賊鋒且至。公與同僚上箚。請守都城以牢人心。俄還中書。改掌令。又承繡衣 命巡嶺西。還拜奮義將。又以校理督運軍餉已。由司諫陞同副承旨。戊戍。由左承拜嶺南觀察使。 特命也。壬辰以來。南服糜亂。吐內餓虎之喙。逐寇 天兵亦且累萬。治法征謨。更僕難數。公能撫民以寬。轉餉以時。民皆按堵。士無飢色。報政未半。聞厓相被群小齕去國。公知事無可爲。累上辭章。遞授軍職。尋除靑松不赴。庚子。除寧海。坐棄官罷。明年 特敍。又明年。拜左承禮議。皆不就。冬以校正廳堂上召。丁未。除大丘府使。爲治先敎化後郵罰。鄭寒岡語人曰。大丘之治。悃愊無華。可爲吏治師。戊申。 宣廟賓天。光海嗣位。公因求言上疏累萬言。上言恤民節儉。中言宮闈不嚴。仕路混濁。姻婭用事。終言人主一心萬化之本。丁寧勸誡。懇懇懃懃。疏入。光海大怒。命焚之。托以語逼 先朝。將繩大何。賴右相李公恒福爭之強。只削職。未幾還敍。己酉。以冬至使朝 京。主客令我國使臣以玄盤領入班。公以爲盤領非禮服。玄且齊服。用於朝賀大禮非禮。遂呈辨禮部。又呈文兵部。以爭我國人偸賣焰硝虜中事。不唯誣枉雪。許我買焰硝比前倍數。及復命。光海大悅加資。公上章辭。不許。夏。拜國子長。冬遷羅州牧。又拜全羅觀察使被參。先是。鄭仁弘上疏誣毀兩賢。公於五賢從祀執禮契帖序。有奈何盛典才擧。邪說便行等語。仁弘聞而嗛之。其黨因是中之。壬子金直哉獄。公遭誣逮。中使搜家書以進。光海覽訖。語左右曰。私書中婦人諺書。如語及上。必別行高書。其家之雖婦人小子亦知尊君義。此與逆乎。無何得釋。癸丑。赴江陵。乙卯。又爲沈憬妄引下理。光海雖知其誣。故遲其決以待贖鍰。門人擧後漢魏劭事。質之寒岡。寒岡曰。無害。古人有行之者。散宜生是也。公聞之與書曰。古人雖有爲之者。與今日事異。爲我謝諸君。君子愛人以德。若斷置道理爲之。請與諸君別。深幽圜墻中。載罹冬嚴。所善宰臣或勸公呈病曰。應敎李溟言病保放。爲近例。公答曰。李自是眞病。吾無病。何可以陽病甘心謾上。聞者歎服。公前後凡三阨保宮。而眠食擧止不少變常度。怡然處順。一聽之天。唯取聖賢書益加硏窮。丙辰冬。削職脫圄。丁巳。給告身。自此遯荒者六年。嘗在玉成書院。諸生會者數十餘人。講家禮。時上下歊赩。諸生汗流被體。皆不能堪。公端坐終日。髀不動搖。色無少倦。持敬然也。癸亥三月。 仁祖大王靖 宗祊。收萃昏朝擯斥士類以潤色中興。公首也以弘文館副提學徵。詣 闕上章辭。 批曰。卿之上來。予日望之。勞苦遠來。予甚嘉悅。遂 賜對。進曰。始政之初。宜先罷內需司以示無私。悅民心。又因旱上箚。指陳乘輿闕失。不避忌諱。有曰。先賢有言。不世之大功易立。而至微之本心難保。中原之戎虜易逐。而一己之私意難除者。甚可畏也。願執德不移。勿以己私妨公道。勿以宴安萌怠忽。自然治化日隆。雨暘時若。百谷用成。民安物阜矣。 上手批曰。自予忝位。無一人謁予過。今日省箚辭。不覺敬服。故事玉堂長入 侍甚簡。 經幄諸臣合辭言鄭某乃讀書養德人。請破例頻接。 上從之。令間日入參。際遇之始也。 上待公禮異諸臣。公感激 知遇。知無不言。言無不盡。蓋其言從容婉曲。因講起義。愈出愈新。發前人未發處多。又承 上問。薦張顯光,柳袗行誼文學可輔治道。 上嘉納。時有告廢庶人鑿垣欲跳者。執法勳宰俱請斷義。公執不猗。李延平貴 上前誶公。公再上章乞遞。 不許。俄拜藝文提學。辭又 不許。秋。上箚陳八條。一曰立大志。二曰懋聖學。三曰重宗統。四曰盡孝敬。五曰納諫諍。六曰公視聽。七曰嚴宮禁。八曰鎭民心。言言鑿鑿中窾。至重宗統。築底反復。無有餘蘊。末乃曰。 殿下今於 典禮。惟公論之所在。是稽而行之幸甚。第恐異日巧舌飾羽。?讕圖寵之輩出。 殿下其絶之邪。其後果有橫議鋒生。卒如公言。是年十二月。白虹貫日。明年甲子元日。白虹又貫日。公應 旨上箚略曰。三始履端之辰。謫見于天若此。此殆不測之禍伏於冥冥中。人莫之知。故天以是大警動于 聖衷也。亡何。逆适擧兵叛。公建入江都非計。 大駕遂南。仍承 命檢嶺南。多所規畫。騰狀以 聞。其後勳宰恚公不論仁城。 筵中四言詬詆。公上章乞行遣。以嘉公忠讜爲 答。公乞退益懇。 上愈不許。擢拜大憲。控辭 不許。又陳難受之義。引朱子之言士大夫辭受出處。關風俗之盛衰。 上始許遞。卽日買舟南歸。副學 召命踵至。蓋一日內旋遞旋拜也。公又上章控辭者再。 不報。移拜知申事。 召旨甚嚴。秋。還朝。 上爲之引對慰諭。公旣謝。 啓曰。臣在鄕時聞政院封還 內旨。臣喜其能行古道也。臣今忝是任。 聖敎如有未盡。封還奚敢後人。 上改容。九月。 上敎曰。鄭某曾講論語一部。盡心論難。古語曰。無言不讎。其特加一資。公上章乞改正。仍獻言。孔子曰。道千乘之國。敬事而信。節用而愛民。使民以時。聖人治國之道要不出此。其中一敬字爲五者之本。施爲政令之間。一毫不謹。便不得爲敬。伏願純心積功。推致其極。使一國臣民涵濡 聖澤。皆知 殿下典學之功。則 經幄末臣。與有榮矣。 上嘉公格言。十月雷雨。公與同僚上箚請修省。登 對。又被勳宰惎之。上箚乞免。 不許。乙丑正月。兼右副賓客。二月。 世子行冠禮。公承 命作圖以進。禮畢。進一階。辭 不許。三月。長子檢閱杺痘殞京邸。公請護櫬歸。 上曰。鄭杺竟至不救。予甚嗟惜。子喪解職非例。三告乃 許。夏拜大憲。辭 不許。尋遞。又拜憲長。謁告至三。秋。由四宰移大司寇。辭 不許。還拜憲長。請罷諸宮家擅海堧魚鹽利。禁士大夫關節。又請勿復內需奴。丙寅正月。 上遭 仁獻王后喪。欲行三年制。公議定不杖期。以綾原君爲喪主。 上屢下疑難之敎。於是公率諸諫官合司爭之凡三十餘。啓文皆公筆。語婉義正。人不敢贊一辭。俄又上箚進喪禮六條。首言曰。竊瞯 殿下爲至情所蔽。顯有喜同惡異之心。夫人君居崇高之位。挾雷霆之威。行之以喜同惡異之心。惟意所欲。下莫敢忤。豈不順適於己私。而其奈莊士日遠。諂言日進。終至於喪邦何。臣之所陳千百言。無一言同於 殿下者。適足以疚 殿下之懷。顧其縷縷不已者。實出於閑邪弼違之誠。惟 殿下勿以逆心而求諸非道。 上批曰。據經引禮。反復論難。足見顓門禮學。但杖一節。旣論以父在母喪之禮。則以杖卽位何失。先是。 上令禮官議私親稱號。公以爲宗統大義固嚴。然 殿下旣以親孫入承。無兩考之嫌。當稱考而不加顯字。廷議咸允。崔完城鳴吉挾朴知誡。於制定後請爲三年喪。公以書折之。不回。俄拜大憲。俄移副學。三告遞。又還大憲。上箚數千言。大意治道有日退無日進爲言。且曰。鼓舞振發之機係於 殿下一心。敢以誠之一字爲今日應病之藥。 上曰。近因哀疚。不接賢士。闕失之積。良以此也。尋遞以副護軍。乞暇焚黃未發。拜大憲辭。旋改副提學。俄還大憲。時 殿試主司有私者。公論罷榜。且請建法勿給擧子燭。冬又拜憲長請急。俄遷副學。乞遞 不許。旣以疏請歸葬次子喪。 上曰。觀卿疏。不覺驚慘。論思之任勿辭。仍 令本道庀葬。行到淸州。聞奴警入 朝。嶺南號召之 命下矣。傳檄一道。應募者衆。將橐糧坐甲。畫日以進。聞賊退。獨身赴江都復 命。四月。 大駕還京。五月。公上箚論時務略曰。自古人君遇非常之變者。必立非常之志。然後能興衰撥亂。志苟不立。因循頹惰。終於不振而已矣。徂玆戎虜之禍。尙忍言哉。西土生靈。翦爲魚肉。至使 君父蒙塵。 社稷播越。今日之旋 駕舊都。亦燕雀之處堂耳。古人云。多難興邦。殷憂啓聖。此正 殿下生於憂患之秋也。願 殿下毋自沮而益自強焉。寤寐一念。惟在於湔羞雪憤。而不以一毫玩愒之心參錯於其間。則 殿下之志立矣。俄遷大憲。又由同樞拜副學。上箚論時務。大意與前箚同。而請立刻苦之心。持之以悠久之誠。尤拳拳焉。數月間。來去副學,大憲,四宰甚數。戊辰。拜大憲。參鞫柳孝立逆獄。故事參鞫官錄勳。公上疏辭。夏除四宰。兼知義禁。浹月還副學。六月加正憲。秋。上箚論邊事。己巳春。有白虹貫日變。上箚請修省。乞暇焚黃。及還朝。以疾辭。 上曰。予以寡昧。賴卿輔導。卿去未久。予心茅塞。論思之長。非卿不可。閏月。 東宮令寫進九思九容。俄而移拜大憲。以手痿三告得遞。旋改四宰。兼知 經筵。請告三猶 不許。俄拜宗伯。乞解浴椒療疾。仍乞致事。 上曰。卿在經幄。啓沃弘多。速返副予意。九月。拜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公意以爲文衡,政柄俱是用聰明地。吾老不可堪其任。遂連章累辭益堅。 上猶不許。強起之。公惶恐起眡事。則一心奉公。不激不隨。薦進良士。明白是非爲己任。物論恰然矣。其知貢擧也。先觀文從字順理明如何進退之。奇怪險僻。絶不得逞。時文之習。幾乎一變。庚午十一月。遷 穆陵。承 命改撰戊申誌文以進。 上有善改之 敎。已而以病乞暇下鄕。中途力乞解職。 上用勳宰議。將行 追崇。欲直請 皇朝。公曰。始以是禮爭之者我也。今不可以疾爲解而不卒吾忠。乃上疏。疏幾千有百言。公一生邃於禮學者盡於此。而引君當道之誠亦盡於此。傳言忠臣死不忘君者。其謂是歟。全文在本集。六月。聞奴警。舁疾登程。到報恩。疾甚不得進。 東宮下札問疾。冬。 上遣醫看疾。 東宮亦令宮官來問。壬申。乞致仕。 上批此非舊臣辭退之時。調理上來。已而。上疏乞免參贊及兼帶。 許之。夏六月。 仁穆王后昇遐。公以疾不能會哭。上疏待罪。九月。拜大憲辭。癸酉。疾漸谻而病。六月十七日。啓手足。前一日。謂家人曰。送我必以禮。訃 聞。東宮將擧哀。禮官啓以賓客無擧哀例。 上敎曰。此人多敎誨之功。擧哀爲宜。及其葬也。 東宮賜賻有加。遣宮官致祭。且令看葬曰。鄭賓客平生嗜禮。宮官毋失禮。葬之日。縫掖來會者四百餘人。乙亥。嶺南士子建議。配享公于道南書院俎豆之。至丁酉。又刊出先生文集。秩凡十。思問錄若干卷。未及付剞劂氏。公之學出於西厓相。西厓之學出於退陶先生。退陶平生所尊信者朱晦庵。大中至正。必以晦庵爲則。揀朱書中公卿大夫知舊門人問答書札之關於學問者爲十冊。名曰節要。公於書無所不讀。最深於朱書。故立 朝議論。 經幄講說。靡所不自朱書中來。可謂有味乎其言之也。當 仁祖初年。寤寐儒學。遂置公論思地。不離者幾十年。 仁祖禮遇眷注至矣。公故遭可爲之時。凡遇事必精白。論思。要以引君當道。 上亦虛己以聽。猶恐一日公之不在側也。雖絳,灌,許,史之貴。莫得間之。朝紳中稍向儒學者。擧皆慕用公。而至觀公登 筵講義及疏箚之文。莫不嘖嘖稱說。李文忠梧里公每自 講筵出。語人曰。鄭某眞侍講才。豈惟今之第一。古亦難得。任叔英才高。眼空一世。獨於公。心服靡間。公於 宣仁兩朝。所上疏箚累十餘章。隨事盡言。立意雖殊。大要不見一語出格非誠正之外者。文章爾雅。事理俱該。豐而不餘一言。約而不失一辭。眞得告君之體云。李命俊疏言金,趙二奚曲逕媒進。 仁祖盛怒。三司政院爭之不得。及公一上箚。 天意氷釋。擧朝相慶。傳誦其箚。 仁祖嘗敎曰。賴卿輔導。懲窒遷改多矣。嗚呼。此可以觀君臣矣。或疑公遭所賢之主。不能陶鑄至治。秖以侍講鳴。不佞曰。是難言也。賈生,董生當后元,建武時。治安策,天人對而已。兩程朱夫子亦不能有爲於慶曆,淳煕之朝。公獨奈何。是固難言也。雖然。使吾君崇儒重道。不雜以伯。雖備嘗險阻艱難。而終始典學不衰者。誰之力也。公於己巳乞退疏曰。立乎人之本朝。道不行恥也。臣雖無狀。非全然無恥之人。恐一朝溘然旅邸。使後之持淸議者操筆而評之曰。某也竊位明時。生來死歸云爾。則臣之一生講禮。九泉蒙羞。寧不冤哉。道之不行。公故已知之矣。公爲人長身廣顙。神采爽朗。雙目炯炯。聲如洪鍾。聰明絶倫。涵養積厚。不爲崖岸嶃截之行驚俗取名。不爲和光同塵之事。嶷嶷自立。平居議論渾厚平鋪。雖素不識公者。一見公。知其爲長德君子也。養生送死。盡無違之道。事上臨民。積誠敬之實。其他群行之卓卓。難以殫記。蒼石公嘗稱曰。愚伏聰明絶人。識處極微。見處極高。雖五賢如退溪先生。或有所讓處矣。人以爲知言。無論性理學。災異軍旅。公故不屑。而遇災進言。後無不合。臨危劈畫。效於蓍龜。公可謂博大眞儒哉。雅性愛泉石。就愚伏山中。臨溪結數間屋。左右圖書。爲積年計。讀書之餘。相羊水石間。自得之趣。往往發於吟詠。其爲詩。不用力而天機自動。然公嘗曰。詩是小技。豈可費用吾心力於無用處也。字法遒媚逼古。亦未嘗以是語於人。不喜著書。見人好立異論。背於先儒之說者。必正色責之曰。新學後生。惟當篤信師說。假竊形似。簸弄筆舌。不幾於譏佛罵祖耶。臨事愼重。若千匀之弩。謙挹退讓。絶無矜伐之色。常戒子弟曰。人須有無所知無所能之心。然後終可至於無所不知無所不能也。公於晩年。選朱子大全中封事序記碑銘祭文爲十冊。名曰朱文酌海。蓋與節要表裏云。鄭故晉陽望族。公九世祖諱澤。麗末牧尙州。留一子于州。遂居焉。曰諱繼咸。於公爲曾祖。曰諱銀成。曰諱汝寬。於公祖若考也。皆以行義世其家。鄕黨師之。妣陜川李氏。江陽君瑤之后。學生公軻之女。以公貴推 恩三代。妣亦封貞敬夫人。公凡再娶。前夫人李氏。籍全義。祖縣監時敏。父部將海。後夫人李氏。系出眞寶。戶曹參判堣之曾孫。祖壽苓。黃山察訪。父潔。忠順衛。丁亥。歸于公。天性柔嘉慈良。事舅姑孝而敬。配君子無違行。工於女紅。好讀內訓,烈女傳等書。財利之說。未嘗出諸口。撫庶出御女僕。皆有恩意。公寢疾。語夫人曰。男子不絶於婦人之手。婦人不絶於男子之手。夫人應曰。曾已聞而知之矣。公常以強輔稱。夫人后公卒二年而終。距其生丙寅。得年若干。葬與公同原。生二男二女。長杺。弱冠決科。珥筆史苑。人以爲有父風。不幸蚤卒。娶郡守李宜活女。男道應。以遺逸徵。拜 侍講院咨議。女。奉事趙漢叟。次㰒。宣敎郞。娶縣監姜?女。亦蚤歿無后。女。盧碩命生員。宋浚吉承旨。方以賢良進講 胄筵。側室子櫟。萬戶。咨議娶持平柳袗女。二男三女皆幼。奉事生三男。幼。思永,全翼耇,李松來妻。生員出也。參奉光栻,羅明佐,修撰閔維重妻。承旨出也。道徵。櫟出也。銘曰。
百家烽湧。吾道浸孤。道一于東。煕朝盛儒。粤惟陶山。嫡傳晦朱。懿哉愚伏。陶軌夙趨。婆娑黨塾。委已盤盂。發而摛辭。鑿精祛莩。學成而進。賢路不嶇。簪筆史苑。上下董狐。盛之玉堂。香按恩紆。艱危進說。亦咎之謨。或荒或理。遭昏道癯。尸土忘勩。出疆忘軀。隨其所遇。誠節卓殊。 聖人中興。訪落須臾。佩玉長裾。陳必唐虞。南宮禮樂。選曹錘爐。文鼎輕重。舍公誰須。公旣知遇。珷珉必區。彼論禮者。削稜謂柧。柱公何害。公不聖誣。顧瞻漢庭。申商交途。疇不我誕。疇不我愚。死不詭遇。確乎夫夫。有墓于咸。面勢檢湖。湖水濔濔。公名與俱。九京難作。蛾子長吁。正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趙絅。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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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 > 愚伏先生別集卷之九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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