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낙랑후 지백호 신도비명 역문(譯文)

야촌(1) 2018. 7. 4. 01:10

낙랑후 지백호 신도비명 역문(譯文) 

 

영가 김철현 찬

 

 경주정씨 시조의 이름은 지백호요. 자는 인세(仁世)로 처음에 진한의 자산 진지촌에 강림(降臨) 하시니 오늘의 경주시 동남쪽이 된다。

 

영특한 재목과 큰 덕이 여러 사람들의 사모함을 받아 자산 진지촌의 촌장이 되니 알천 양산, 돌산 고허, 무산 대수, 금산 가리, 명활산 고야, 등의 모든 촌장들과 같은 때에 섰고 서로 닿은 이웃이 되어 살으니 이분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신라의 육촌장으로 경주의 사적을 적은 동경지에 기재되어 있는 「육부대인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혹자는 사실이 아님을 의심하나 왕검의 단하에 내려옴과 삼을라의 지중에서 솟아 나옴은 옛부터 그러한 말이 전하고 또 하물며 대인의 태어남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없겠는가?

 

소순(蘇洵)은 강원(姜嫄)이 대인의 거적을 보고 후직(后稷)을 잉태하여 낳았다는 고사에 대해「신인(神人)의 태어남은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있다」 고 말하였으니 육부대인의 태어남 같은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를 되살려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한선재 지절(地節=선제의年號) 원년 임자 三월에 공이 다섯명의 촌장과 더불어 양산록 라정에서 모였다가 숲 사이에 백마(白馬)가 꾸부려 절하는 모양을 발견하고 공이 가까이 가보니 백마는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박 같이 생긴 것이 있는지라 알을 쪼개어 보니 어린 아이가 있어 거두어 기르니 그 아이가 바로 혁거세이다。

 

그로부터 十三년 뒤인 갑자 四월에 공이 다섯 촌장과 더불어 혁거세의 태어남이 신이하고 자라남에 인품이 우뚝함을 기이하게 여겨 혁거세를 세워 임금을 삼고 나라를 창건함과 동시에 기설(夔柯=순임금 때 현신)처럼 도와 희호(熙券=성왕의정치)의 정치를 이룩하니 혁거세는 드디어 조토(喩土=공신에게주는토지)를 주어 좌명 개국공신을 삼아 낙랑후를 봉하니 세인들이 소하(蕭何=한조의 개국공신)의 찬후(調侯=암양현명)에 봉함과 같다고 하였다。

 

그 뒤 유리왕 九년 임진(壬辰=서기三二)에 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성을 줄 때에 진지촌은 본피부로 변경되고 성을 정씨로 하사 받으니 이때는 공의 현손인 동충(東態)의 때였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정씨의 시초이다。

 

혹자는 「모든 정씨가 다 여기에서 시작 되었는데 근원이 멀어 지면서 파가 나뉘어 관향을 달리 하였고 그런 중에서도 유독 경주정씨가 옛날의 본관을 끝내 지킨 것은 경주정씨가 서열로 볼때 장파(長派)이기 때문이다」 고 말한다。

 

 그로부터 四百四十四년 뒤인 병신(丙申=서기五一六)에 법흥왕이 말하기를 「공의 공훈으로 보나 관작으로 보나 마땅히 역명(易名=시호를말함)이 있어야 된다」 하여 드디어 문화(文和)로 시호를 하사 하였고 또 그로부터 百三十八년 뒤인 병진(丙辰=서기六五六)에 태종 무렬왕이 말하기를 「공의 후호가 공이 세운공에 못 미친다」 하여 봉호를 올려 감문왕을 추증 하였다。

 

대개 위에서 말한 문화의 시호와 감문왕의 봉호를 혹자는 이점이 사기에 나타나지 않는것을 들어 말하는 이가 있으나 이점은 육촌장 후손들의 가적(家籍)에 모두 기록이 있고 또 오늘에 와서 정씨들이 이미 묘비에 입각 하였으니 내가 공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어쩌 사기(史記)에 나타나지 않는 점을 들어 범공의 맥주처럼 빼 놓을 수 있으랴! 

 

또 그로부터 千三百十五년 뒤인 신해(辛亥=서기一九七一)  十월에 이고장 사람들이 육촌장에 대해 아직까지도 「구덕을 생각해 잊지못한다」는 여론이 있어 사림(士林)들이 마음을 합하고 정부에서 재력을 담당하여 나정 옆에 터를 정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祭祀=음력八월十七일 신라 대제일)를 올리니 그 이름이 입덕묘(立德廟=신라 건국의 공을기리는 육촌장 사당)로 공은 제三위에 모셔졌다。 

 

이것이 대개「성덕은 민몰되지 않아 사전(祀典=제사 예전)으로 갚는다」는 것으로 저 세인들의 어제 아침에 죽고 오늘 저녁에 사적이 없어져 아무 사전의 보답도 없는것에 비교해 볼때 어찌 천연(天淵=하늘과 땅의 연못)의 높고 얕은 차이 뿐이겠는가? 

 

또 더군다나 고려와 조선을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二千여 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이 신라국을 말하면 나이에 노소 차이 없이 모두 육촌장의 건국임을 알고 낙랑후를 말하면 지식의 우열 차이가 없이 모두 경주정씨의 시조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공이 촌장으로 있을 때에 베푼 덕정(德政)과 건국에 참여하여 세운 훈업(勳業)은 당당하고 요요하여 가히 기록 할만하고 가히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신라는 우리 동방에 있어서 세대가 멀고도 아득하여 문화의 고요함이 모두 당우 이전의 상고하기 어려움을 면치 못하니 사기에 입전이 없는것이 너무도 당연함과 동시에 문헌이 부족한 기나라와 송나라의 탄식이 간절할 뿐이다。

 

공의 산소가 옛부터 「경주 남쪽 三十리쯤 되는 백운대에 있다」고 전해오니 이곳은 오늘에 월성군 내남면 노곡동이다。 백운대 위의 고분이 좌우로 널려 있어 어느 산소가 공의 산소임을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 때문에 자손들이 단비만을 세우고 시제를 올린지가 수백년이 되었지만 종인들의 의논이 끝내 만족치 못한 점이 있어 작년 봄에 모든 후손들이 협의하여 드디어 여러 산소 중에 위치로 볼때 가장 위에 있고 시기로 볼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치에 근사한 산소를 공의 산소로 정하여 수축하고 정리하여 크게 산소 주위를 화하고 또 묘비를 세워 공의 아름다운 사적 중에 만분의 일분을 새기니 이것이 진실로 전봉의 일우에 지나지 않으나 자손으로서 급급히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로 볼 때에는 또한 부득이한 지정(至情=가까운 정분)에서 나온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돌아 보건대 재앙과 화난이 하늘에 닿고 예의가 땅에 떨어져 세상에서 말하는 명가와 우족들도 교목에서 내려와 그윽한 깊은 산골로 들어가 요모복추(燒毛覆墜=쉽게 망하는 것) 하는 일이 많은데 정씨의 많은 불들이 선조를 추모함이 돈독하여 이같은 성대한 일이 있으니 여겨(餘慶=선조들이 착한 일을 많이한 보람을 자손들이 누리게 되는 경사)의 발함이 어찌 조상을 빛내고 후손을 번창하게 하지 않으랴。

 

공의 후손이 국중에 가득할 정도로 물의 근원이 멀수록 흐름이 길고 나무의 뿌리가 튼튼 할수록 가지가 무성함과 같으니 여기에서도 공의 잠덕유광(潛德幽光=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덕자의 숨은 빛)이 백세가 지나도 불멸하는 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공의 유택여음(遺澤餘蔭=후세 까지 남아 있는 은혜와 선조가 끼친 공적을 자손이 받는 복)이 후손에게 전해져 명공과 석보(碩輔=어질고 착한 보좌의 신하)들이 앞뒤로 계속되어 덕학이 훌륭한 분 문장이 훌륭한 분 공렬이 훌륭한 분 절의가 훌륭한 분 의행이 훌륭한 분 등등의 빛나는 묘모(廟謨=조정의 계획)와 위대한 사적이 국사와 야승에 계속해 나오고 또는 간간이 들어나 글의 수식과 내용이 서로 알맞게 갖추어져 있는 문헌이 성대하게 동방의 거대한 씨족이 되었으니 누가 영지(靈芝=고목에서 나는 버섯의 하나) 가 뿌리가 없고 예천(醴泉=맛이 좋은 물이 솟는 샘)이 근원이 없다」고 말하랴!  

 

어느날 후손 성균(性均) 봉균(捧均) 등이 더위를 무릎쓰고 나를 서울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문헌공파의 보사가 멀지 않아 끝나는데 六만여명의 단자에 약간의 재정이 남게 되어 파내의 노소 종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묘비가 이미 세워졌으니 당연히 신도비를 갖추어 산소 앞을 빛내야 된다 함으로 감히 당신의 일언을 빌고져 왔으니 사양치 말라」하니 내 스스로 돌아 보건대 묘말(蝶末=자기의 겸양)의 후생으로 학문이 짧고 지식이 얕아 금석의 글에 탁명하기 어려워 굳게 사양 하였으나 그들의 청이 더욱 더 간절 하였다。

 

또 내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 지산옹(志山翁=성균관대사성 김복한(金福漢)이 봉균의 선조 옥계공의 신도비명을 지은 일을 생각함에 그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감히 묘비문에 의하여 약간의 은괄(賞括=바로 잡고 바르게 하는 일。즉 수윤(修潤= 가필 또는 윤색)을 가해 서를 위와 같이 하고 또 명사(銘辭=새기는 말)를 지어 이르기를 「훌륭한 대인은 자산에 처음으로 강림하사 임금을 세우고 나라를 창건한 당당한 공신이 되시었도다。

 

덕은 크고 업은 넓어 후손에게 복을 전하니 번창한 자손의 수는 만이요 천이로다。 정씨의 시조 이시니 누가 그 근원을 잊으랴。 삼가 백운대에 나아가 정성껏 봉축하여 우뚝한 묘비는 묘역을 빛내니 삼한(三韓)의 구족은 그 명이 새롭도다。  내 그 위적을 간추려 후인들에게 보이노니 빛나는 비의 새김은 길이 후세에 전하리。<끝>

 

 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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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후 지백호 묘비명역문(譯文)

 

후손 동휘 찬

 

경주시의 남쪽 三十里 되는 곳에 아늑한 동리가 있으니 이름이 노곡동이다.동리 북쪽에 한 개의 웅장한 산줄기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와서 앉은 호랑이 웅크린 용처럼 생겨 남쪽을 향하여 대를 이룬 곳이 있으니 이곳이 백운대(白雲臺)이다.

 

백운대 위에 十여기의 큰 산소가 있는데 봉분의 높이나 묘역의 넓이가 왕릉 못지 않아 세대가 오래된 오늘날에도 이지방 사람들이 「경주정씨시조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아!슬프다.  오늘날에서 신라 초까지 二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비와 바람의 재앙이 많았고 난리의 화가 한 두번이 아니어서 언덕과 산골 짜기까지도 여러 번 모양을 바꿀 정도였다.  또 하물며 잊기 쉬운 것이 사람의 일이고 보전(保全)하기 어려운 것이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오직 이곳 백운대는 아무탈 없이 산소가 그대로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간의 꾀로 만 될 수 있는 일이랴!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분명치 못한 점은 일이 너무 오래되어 근거가 확실치 못하고 또 더군다나 위와 아래에 많은 산소가 있어 어느 산소가 시조(始祖) 산소가 됨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단비(壇碑) 만을 세우고 시제(時祭)를 올린지가 또한 수 백년이 되었지만 끝내 마음에 만족치  못한 점이 있었다.

 

정묘(丁卯=서기一九八七)년 봄에 모든 일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산소를 대대적으로 정화(淨化)할 것을 정하고 겸하여 전날  마음에 만족치 못한 점을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산세로 볼 때 제일 위에 있는 산소가 가장 오래된 산소인 듯 하고 족위(族位=족장법 즉 겨례붙이의 장사법)로 살펴볼 때 가장 오래된 산소가 분명히 시조의 산소인 듯하다.

 

사실로 그러하다면 당연히 가장 오래되고 또 분명한 산소를 시조 낙랑후의 산소로 하여야 될것이다」 하니 오늘날에 와서  수백년동안 만족치 못하던점이 만족하게 되었고 수십대 동안 갖추지 못하였던 석물을 갖추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전날 만족치 못하였던 점을 다시 되풀이 하겠는가  이와  함께 정씨가 뿌리를 존중하고 시조를 공경하는 도리에 좀 더 가까이 가게될것이다.

 

회의가 끝난 뒤에 동성,성균,기호,관섭,경호,채환,희곤 등이 종인들의 뜻으로 부족한 나에게 「시조 사적 중에 가히 후세에 전 할 만한 것을 글로적으라」 부탁하니 돌아 보건대 부족한 내가 사실로 감당치 못 할 일이나 후손의 한  사람으로 끝내 사양 할 수 없어 이에 옷깃을 여미고 글을 적노라.

 

시조의 이름은 지백호(知伯虎) 처음 진한 땅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에 강림하시니 재목 됨이 무리에 뛰어나고 덕이 모든사람의 으뜸이 되어 진지촌의 장이 되었다.  이에 알천,돌산,무산,금산,명활 등의 모든 촌장과 더불어 같은 때에 섯고 또 지역을 접하여 살으니 이분들이 바로 뒷 날 신라의 육촌장(六村長)이 되었다.

 

동경지(東京誌=경주읍지)에 있는 「육부대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어느 사람은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으나 왕검(王儉)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降臨=고귀한 사람이 하계에 내려옴)하였다는 것과 삼을라(三乙那)가 땅속에서 솟아 나왔다는 것이 전에도 그러한 류의 말 이 있었고 더군다나 대인(大人)의 태어남이 어찌 보통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없겠는가!.

 

한선제 시절 원년 임자(壬子BC六九) 三월에 시조께서 다섯명의 촌장과 더불어 혁거세(赫居世)를 얻어 기른지 十三년 만인 갑자(甲子BC五七) 四월에 혁거세를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임금을 도와 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어진 신하가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으시니 이 때문에 낙랑후(樂浪侯)로 봉하게 되었다.

 

유리왕(儒理王) 九년 임진(壬辰=서기三二)에 임금이 六部를 고치고 성을 하사 할 때에 진지촌을 본피부(本彼部)로 바꾸고 성을 정씨로 하사(下賜=임금이 내림)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정씨가 있게 된 시초이다.

 

혹자는 「모든 정씨가 다 여기에서 시작 되었는데 근원(根源)이 멀어지면서 파가 나뉘어 본관을 각 각 다르게 썼다. 유독 경주정씨가 끝내 옛 경주의 본관을 그대로 쓴 것은 경주정씨가 모든 정씨 중에 장파(長派=종가를 일컬음)가 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또 그 뒤 四百八十四년이 지난 병신(丙申=서기五一六)에 법흥왕(法興王)이 문화(文和)로 시호를 주었고 또 그뒤 百三十八년이 지난 병진(丙辰=서기六五六)에 태종무열왕이 「낙랑후의 후작(侯爵=낙락후의 작위)이 그가 세운 공에 미치지 못한다」하여 봉호(封號)를 올려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 하였다.

 

대개 문화의 시호와 감문왕의 추봉을 놓고 어느 사람은 삼국사(三國史)에 없다는 점을 들어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옛날 범공(范公=중국의 명신 범충엄)의 맥주(麥舟=석만경의 상에 보리를 보내 도움)를 세상에서 이 사실이 범공의 행상에 없다고 해서 의심하는 이는 없다.   

 

더군다나 후손으로서 조상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 아무리 사적(私的)인 기록이지만 이미 증거 할만한 것이 있는 것을 어찌 그 기록이 사적(私的)인 것을 흠잡아 빼놓음을 범공의 맥주처럼 할 수 있겠는가.

 

또 그 뒤 千三百十五년이 지난 신해(辛亥=서기一九七一)년에 시조의 덕을 생각하는 이 있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니 그 사당의 이름은 입덕묘(立德廟)로 옛말의 「성대한 덕은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아 제사를 올린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이 대개 시조께서 생전에 공을 세우시고 사후에 국가로부터 받은 예우(禮遇)의 대강인데 시조의 높은공 큰 이름에 비교할 때 태산 호망에 불가하다.   그러나 물건을 잘보는 사람은 한 개의 깃털에서도 봉의 전체를 볼 수 있고 한점의 고기에서도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신라, 고려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멀어 질수록 시조를 사모 함은 더욱 더 간절하고 사적이 오래 될수록 시조를 경모함은 더욱 더 돈독하여 마침내는 사람들이 신라를 말하면 노인 어린아이 구별 없이 모두 신라는 육대인이 세운것임을 알고 경주지방에서 백운대를 말하면 멀고 가까움의 차이 없이 백운대는 낙랑후의 산소가 있는 곳임을 알 정도가 되었다.

 

설령 시조의 위대한 업적(業績=일의 성과)과 큰 사적이 하나 하나 모두 기록이 있고 일과 얼이 유실됨이 없어 봉의 전체맛의 전정과 같이 되었더라도 시조의 이름이 당시에 혁혁하고 후세에 빛남을 누가 꼭 오늘날 이것 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또 이보다도 큰 점은 시조께서 인(仁)을 쌓고 덕(德)을 닦아 여경이 후손에게 미쳐 큰벼슬을 역임하고 높은 공을 세운 인물이 앞 뒤에 계속되었고 큰 덕과 깊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 안과 밖에 가득하여 나무의 뿌리가 굳건 함에 가지가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음에 흐름이 긴 것과 같으니, 연일정씨의 파조 길모(佶模)와 동래 정씨의 파조 교림(僑林)은 모두 시조의 三十二세손이 되고 온양정씨의 파조 보천(普天)은 시조의 三十四세손 이되며 초계 정씨의 파조 배걸(倍傑)은 시조의 三十六세손이 되고 하동 정씨의 파조 손위(遜位)는 시조의 四十세손이 되는 등 등나무의 성대한 잎과 그늘이 팔도에 가득할 정도 임과 동시에 시조에게 있어서는 모두 멀고 빛나는 후손이 되니 마치 물의 천파 만파가 같은 근원에서 시작 되었고 나무의 남쪽 가지 북쪽 가지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것과 같아 나무로 말하면 직간, 물로 말하면 원파와 같은 우리 경주정씨만이 영구히 시조의 선휴(先休)를 받을 뿐 아니라 나무로 말하면 방지, 물로 말하면 지류와 같은 모든 정씨들도 또한 함께 시조의 유은(遺恩)을 받을 것이다.

 

이점으로 볼 때 천지가 없어 지지 않는 한 백운대의 산소가 천지와 함께 안전 할 것이고 일월이 항상 밝은 한 시조의 위대한 사적이 일월(日月)과 함께 빛날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하여 삼가 명사를 지어 이르기를 「우리나라 모든 씨족 중에 오직 정씨가 가장 거대하도다.

 

우리 자산에 대인이 강림하시었도다.   

임금이 일을 홀로 이루지 못하니 반드시 신하의 도움을 기다리도다. 

참으로 훌륭한 낙랑후께서 이에 임금을 도우시도다.

그 공은 주무왕의 十난 신에 비교 할 만 하고 그 혜택은 먼 백대에 까지 흐르리로다.  

 

여경이 뻗히는 것은 대대로 정승 판서가 배출 되도다.  

이것이 어찌 신라 千년만 그러했으랴!

고려, 조선조에서도 그러 하였도다.  

또 어찌 고려 조선 두 나라에서 만 그러하였으랴!

무궁한 뒷 세상 까지 그러하리로다.

비록 오래된 씨족이지만 그 명만은 오직 새롭도다.  

저 백운대를 바라볼 때 시조의 산소가 안전하도다.  

이것은 사람의 꾀로 만 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음이로다.  

우리 많은 후손들이 시조의 덕을 어찌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이에 좋은 빗돌을 다듬어 글을 크게 새기도다.

높고 높은 꽃다운 이름은 길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으리!

 

출처:  경주정씨 족보

 

경주정씨 시조 지백호 영정

 

지산 진지촌장 신라 개국공신 시조 낙랑후 지백호(경주정씨 시조) 묘소 입구 표지석

 

경주정씨 시조 낙랑후 지백호 묘/소재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백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