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80

영의정 하연 신도비명(領議政河演神道碑銘)

[생졸년] 하연『河演, 1376년(태조 9) ~ 1453년(단종 1)』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422 '영의정시문효경재하선생신도비(領議政謚文孝敬齋河先生神道碑) 좌의정 의령 남지 찬(左議政宜寧南智 撰) 비서원승 김교덕(秘書院丞 金敎悳)이 서병전(書倂篆) 우러러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세종대왕께서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고 더욱이 모든 옥사(獄事)에 치중하여 조정 신하 중에 크게 쓸만한 자를 마음속에 골라 두고 반드시 지방장관을 삼아 늘 시험해 보았다. 영남 경상도는 옛 신라의 강토로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다. 바다의 섬이 남으로 일본에 닿고 서북으로는 전라도에 접속되며, 빙돌아 관동 강원도에 이르러 지방이 크다. 한 감사 밑에 명령을 듣는 고을이 대소를 합해 칠십 여 고을이 되어 정치하기 어렵..

서문유 신도비명(徐文裕神道碑銘)

서문유신도비명(徐文裕神道碑銘) 예조판서증의정부좌찬성시정간서공신도비명 (禮曹判書贈議政府左贊成諡貞簡徐公神道碑銘) 조선국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지경연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시정간서공신도비명 병서(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成均館事世子佐副賓客諡貞簡徐公神道碑銘幷序).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이덕수지음(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德壽 撰) 숭정대부 행 공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

이손신도비명 병서(李蓀神道碑銘幷序)-廣州人

■증시 호간공 이손신도비명(贈諡胡簡公李蓀神道碑銘幷序) 유명조선국병충분의정국공신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한산군증시호간공 신도비명 병서 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이행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희수가 글씨를 쓰다. 공의 휘는 손(孫)이요 자는 자방(子芳)이며 성은 이씨이고 광릉인이다. 증조의 휘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에서 형조 좌참의이고, 조선조의 혁명이 있은 후 태조와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부의 휘는 우생(遇生)이니, 사온주부이며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았고, 선고의 휘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절도사로서 의정부좌찬성의 증직을 받았다. 모친은 양성이씨이니 관찰사 맹상(孟常)의 딸이다. 부인은 익재(益齋)..

권철 신도비명(權轍 神道碑銘)

영의정시강정권공신도비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증 시 강정 권공 신도비명 병서 오호라! 옛날 명종, 선조 때에 세상은 태평하고 치화는 두루 미쳤는데 그때의 정승 권공은 참다운 종신으로 4번이나 영상을 지내면서 묵운의 공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아 치사할 때가 되었어도 상께서는 굳이 공을 만류하여 궤장까지 내렸으나 공이 더욱 힘써 물러나려하니 어비를 내려 돈유하기를, “경의 덕량은 족히 물론을 진압하고 재주와 지혜는 족히 나라를 경륜할만하니 당금의 현상으로는 경보다 낳은 사람이 없다.”하였고 또 “노성한 사람은 국가의 시구다.”하였으며 또 “고굉과 태보는 임우와 주집과 같은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인신으로서 사직의 중책을 짊어지고 임금의..

변양걸 신도비명 병서(邊良傑神道碑銘 幷序)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변공 양걸(邊公良傑)의 신도비명 병서. 지은이 청음 김상헌 지중추부사 변공(邊公)이 졸하고서 15년이 지난 뒤인 갑자년(1624, 인조 2)에 공의 큰아들인 흡(潝)이 황해 절도사(黃海節度使)로서 두 원수(元帥)를 따라 역적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였다. 얼마 뒤에 상께서 명을 내려 힘써 싸운 여러 장수들을 모두 공신(功臣)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에 진무 공신(振武功臣)이라는 공신호를 하사하고는 절도사를 봉하여 원흥군(原興君)으로 삼은 다음, 은혜를 미루어 공을 영의정에 자급을 뛰어넘어 추증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다. 절도사가 임금의 총애하는 명을 공손하게 받고는 영광스럽게 여기고 감격스러워하였으며, 이어 가르침을 받고 복을 받게 된 사유를 드러내기를 도모..

연령군 이훤 신도비(延齡君 李昍 神道碑)/숙종의 여섯째 왕자

유명조선국 왕자 연령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효헌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신 이이명 봉교 찬. 숭정대부 원임 행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신 조태구 봉교 서. 정헌대부 원임의정부우참찬 겸 지 의금부춘추관사동지성균관오위도총부도총관 신 민진원 봉교 전. 의와 윤기를 밝히고 큰 덕과 용맹스러움을 지니신 주상전하가 45년(1719) 되던 기해 10월 2일에 왕자 연령군이 병환으로 가회방(嘉會坊) 별제에서 세상을 뜨니, 나이는 겨우 21세였고 자식도 없었다. 임금은 그 때 병으로 요양하고 있었는데, 크게 놀라고 슬퍼한 나머지 여러 번 반함과 염습을 지켜보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애써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임금이 슬픈 눈..

송암 김면 장군 신도비명 - 채제공(蔡濟恭)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절충장군 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송암 김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휘는 면(沔)이요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다. 김씨는 본래 신라왕 후예인지라 신라가 망하니 자손이 흩어져서 국내의 각처에 살았는데 고령에 사는 이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였다. 휘 남득(南得)이 있었는데 고려조 말기에 드러나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책훈되었는데, 공의 7세조이다. 증조는 감찰을 지내고서 증 참판인 휘 장생(莊生)이요. 조(祖)는 도승지 휘 탁(鐸)이요. 고(考)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증 좌찬성(左贊成)인 휘 세문(世文)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김해김씨로 판관 중손(仲孫)의 따님이다. 공은 기량이 높고 강개(慷慨)하여 큰 절의(節義)가 있었다. 글을 읽음에 문장에만 힘쓰지..

한산군 이손 신도비명 병서(漢山君 李蓀 神道碑銘 幷序)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한산군(漢山君) 증시(贈諡) 호간공(胡簡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용재(容齋) 이행(李荇) 찬(撰) 공의 휘(諱)는 손(蓀)이고 자는 자방(子芳)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관향은 광릉(廣陵=오늘날의 廣州)이다. 증조 휘 양중(養中)은 고려 때 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로서 본조(本朝)가 혁명한 후 태조(太祖)와 태종(太宗)께서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부 휘 우생(遇生)은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 증 이조판서이다. 부친 휘 수철(守哲)은 평안도 절도사 증 의정부좌찬성이며, 모친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따님이다. 부인은 익재(益齋) 이 문충공(李文忠公)의 6세손으로, ..

충정공 홍응신도비명(忠貞公洪應神道碑銘)

충정홍공신도비명(忠貞洪公神道碑銘) [전제(篆題)] 유명조선국 추충정난 익대순성명량좌리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익성부원군 증시충정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 益城府院君 贈諡忠貞公 神道碑銘 幷序) 통정대부 예조참의 지제교 이숙함 찬(通政大夫 禮曹參議 知製敎 李淑瑊 撰) 사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홍흥 서병전액(舍弟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洪興 書幷篆額) 대저 하늘이 위인(偉人)을 이 세상에 낼 때, 반드시 불세출의 재주를 주고 불세출의 지우(知遇)를 열어, 불세출의 공훈을 세우게 하여 불세출의 재상의 공업을 이루게 한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에서 전혀 없으나 겨우 있다면, 바로 우리 익성(益城)..

남명 조선생신도비명 병서(南冥曺先生神道碑銘 幷序)

▲남명선생 묘의 뒤에서 바라본 전경 ⓒ申祺承의 伸天之路 ▲남명선생신도비/우암 송시열 찬 남명 조선생신도비명 병서(南冥曺先生神道碑銘 幷序) 남명 선생이 간 뒤로 선비는 더욱 구차해지고 풍속은 더욱 야박해져, 식견 있는 이는 선생을 더욱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의(義)를 귀하게 여기고 이(利)를 천하게 여기어, 염퇴(恬退>명예나 이권(利權)에 뜻이 없는 것)가 가상스럽고 탐모(貪冒>명예나 이권을 탐하는 것)가 수치스럽다는 것만은 알게 되었으니, 선생의 공로는 참으로 크다. 선생은 천품이 아주 뛰어나, 난 지 3세에 위중한 병에 걸리자 대뜸 모부인(母夫人)에게, “소자(小子)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난 것은 하늘이 반드시 중책을 맡기기 위해서이니, 오늘 어찌 소자가 요사(夭死)할까 걱정할 나위가 있겠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