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80

이순신 어제 신도비명(李舜臣神道碑銘) - 정조(正祖)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忠을 숭상하고 武를 기리는 비) *덕수이씨 12世 ◈ 시대 : 조선 ◈ 연대 : 1794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233Cm, 너비 106Cm, 두께 47Cm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정조(正祖) / 미상 / 미상 ------------------------------------------------------------------------------------------------------------------------------------- ◈ 개관 이 비는 1794년(정조 18년) 충청남도 아산에 건립된 이순신신도비(李舜臣神道碑)로, 정조(正祖)가 비문을..

한강 정구선생 신도비명 병서-상촌 신흠 찬

한강 정구선생 신도비명 병서 (寒岡 鄭逑先生 神道碑銘 幷序) 상촌 신흠 찬(象村 申欽 撰)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17년에 재주가 뛰어난 자를 친애하고 어진이에게 몸을 굽혀 태평성대의 치화를 이루어 보려고 시도하였는데, 이 당시에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나와서 초빙의 명을 받자, 거기에 쏠린 중외의 흠모와 기대는 경성(景星)과 경운(慶雲)이 세상에 상서를 보인 정도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벼슬을 계속하지 않고 초야에 많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재주를 다 펴보지 못했으며, 폐조(廢朝)의 초년에 이르러 동기간을 주륙하며 자전(慈殿)을 폐위할 것을 꾀하고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부추겨 온 세상이 금수의 지역으로 빠져들자, 선생은 봉사(封事)를 수차 올렸다. 그 말씀..

포은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圃隱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 포은 정 선생 신도비명 병서 (圃隱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런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농암 이현보 신도비명(聾巖李賢輔神道碑銘)

지중추부사 이현보 신도비명 병서 知中樞府事 李賢輔 神道碑銘 幷序 ◈시 대 : 조선 ◈ 연 대 : 1566년(명종 21) ◈유형/재질 : 비문/돌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문화재자료 제64호 ◈ 크 기 : 높이 200cm, 너비 84cm, 두께 23cm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신남리 ◈찬자/서자/각자 : 홍섬(洪暹) / 송인(宋寅) / 미상 농암 이현보 신도비(聾巖 李賢輔 神道碑)는 원래 주진다리를 건너 예안면 정산리·인계리·삼계리를 지나 신남 리(정자골) 383번지 농암 이현보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2006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가송리 612번지) 농암 종택 경내로 이전하였다. -------------------------------------------------..

점필재 김종직선생 신도비명 병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 신도비명 병서 (佔畢齋 金宗直 先生 神道碑銘 幷序) 홍귀달(洪貴達) 찬(撰) 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선산인(善山人)으로 호는 점필재(佔..

목은 이색 신도비명(牧隱 李穡 神道碑銘)

■ 목은 이색 신도비명(牧隱 李穡神道碑銘) ◈ 시 대 : 조선 ◈ 연 대 : 1433년(세종 15)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문화재자료 제127호 ◈ 크 기 : ◈ 소재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 서 체 : 해서(楷書), 제액(題額) : 전서(篆書) ◈ 찬자/서자/각자 : 하륜(河崙) .이수경(李壽慶), 전액(篆額) 김수항(金壽恒) .미상 -------------------------------------------------------------------------------------------------------------------------------------- ◈ 개 관 이 비석은 문헌 서원 부근에 있다. 처음 비석은 세종 15년(1433년..

우암 송시열 선생 신도비(尤庵 宋時烈 先生 碑)-정조대왕

송시열 신도비(宋時烈 神道碑) [시 대] 조선 [연 대] 1779년(정조 3)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 기] 높이>238Cm, /너비>108Cm, /두 께>53Cm [서 체] 해서 [찬자/서자/각자] 정조(正祖)/집자>안진경(安眞卿) . 미상 [개 관] 이 비는 1779년(정조 3년) 충청북도 괴산에 건립된 송시열비(宋時烈碑)로 당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직접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安眞卿)의 글자를 집자 하였다. 송시열(1607년~1689년)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

권율장군 신도비 명(權慄 將軍 神道碑 銘)

권율장군 신도비명(權慄 將軍神道碑銘) ◈ 시대 : 조선 ◈ 연대 : 1861년(철종12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2호 ◈ 크기 : 높이 186Cm, 너비 82cm, 두께 40cm ◈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석현리 산 168-1번지(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흠(申欽) / 이유원(李裕元) / 미상 -------------------------------------------------------------------------------------------------------------------------------------- ■ 권율 신도비(權慄 神道碑) 조선국 팔도도원수 증 영의정..

망우당 곽재우장군 신도비명

■ 망우당 곽공 신도비명 (忘憂堂 郭公 神道碑銘) 공의 휘는 재우(再祐)이고, 자는 계유(季綏)이다. 성은 곽씨(郭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다.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인데,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공이 출생하였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부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문과 을과(文科乙科)에 발탁되었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전부 파방(罷榜)되었다. 다음해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

白頣正先生神道碑銘 幷序 - 익재의 스승이고, 사돈지간임

高麗國三重大匡上黨君文憲公彛齋白先生神道碑銘 幷序 고려국삼중대광상당군문헌공이재백선생신도비명 병서 ※익재공의 둘째아들 운와공 달존의 장인. 輔國崇祿大夫兼吏曹判書致仕奉 朝賀安東 金履陽 撰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全城 李翊會 書 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世孫右賓客 徐俊輔 篆 我東僻在海隅人文開塞之運宜若不並中華 觀於箕聖東來仲尼欲居文明之兆已㫼焉由 是安文成公當麗代佛敎之漫 葺聖廟宗孔氏門人彛齋白公入中原 購得程朱全書 與李益齋朴耻庵諸公講誦討論揚 厲發揮環海數千里章甫之士 殆庶乎一變至道逮夫 我朝眞儒繼緖雲興霞蔚斐然成章 先輩所云自朱子歿吾道東來者儘非夸毗之言也 揚子雲曰聖人者天之譯也盖言 天道無爲故惟聖代其工而明其道也 推此而論之程朱孔氏之譯 白公又程朱之譯也 原原本本厥功誠不在文成之下矣然而世之等前世者往往知文成而不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