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노공필신도비명(盧公弼神道碑銘) - 신용개(申用漑)

야촌(1) 2020. 12. 18. 12:10

■ 교성군 국일재 노공필(交城君菊逸齋盧公弼)

 

노공필『盧公弼, 1445年(世宗 27) ∼1516年(中宗 11)』은 朝鮮中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交河. 字는 希亮, 號는 菊逸齋이다.

 

三重大匡輔理功臣으로 昌城君에 封해진 齊孝公 노진(盧禛)의 後孫으로, 高祖는 保功將軍大護軍을 歷任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追贈된 大理卿 노균(盧鈞)이며, 曾祖는 議政府右議政을 歷任한 恭肅公 노한(盧閈)이며, 할아버지는 同知敦寧府事를 歷任하고 議政府領議政에 贈職된 盧物載이다,

 

아버지는 翊戴佐理功臣에 策勳되고 議政府領議政을 歷任한 文匡公 眞齋 盧思愼이며, 어머니는 僉知中樞府使를 歷任한 慶由謹의 딸이고, 夫人은 中訓大夫通禮院相禮 이숙(李塾)의 딸 韓山李氏이다.

京畿道交河縣(只今의 坡州) 出身이다.

 

1462年(世祖 8年) 司馬試에 合格하여 義盈庫直長, 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年(世祖 12年) 春試文科에 2等으로 及第, 成均館直講이 되고 弘文館典翰, 副提學을 거쳐 兵曹, 吏曹, 禮曹의 參議와 都承旨를 歷任하였으며, 1483年(成宗 14年) 大司憲이 되었다.

 

그 뒤 1489年(成宗 20年)에 工曹判書가 된 데 이어 六曹의 判書를 두루 歷任하였으며, 外職으로는 京畿道觀察使를 지냈다. 1498年(燕山君 4年) 議政府右參贊이 되고, 1500年(燕山君 6年) 交城君에 封해졌다.

1503年(燕山君 9年) 右贊成에 올랐으나, 이듬해 일어난 甲子士禍에 連坐되어 茂長으로 장배(杖配: 장형을 가한 후 유배한 형벌)되었다.

 

그 뒤 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右贊成이 되었다가 1507年(中宗 2年) 領敦寧府事로 昇進하였다. 이때 明나라에 가서 中宗卽位의 經緯를 說明하고 明나라 王으로부터 權署國事의 勅旨를 받아 歸國하였다.

그 功勞로 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고 領中樞府事에 올랐다.

 

1514年(中宗 9年) 領中樞府事로 벼슬을 그만둔 뒤 궤장(几杖)이 下賜되었다.

忠誠心과 孝心이 至極하고 一家親戚의 冠婚喪祭를 두루 살폈으나, 自身은 儉素한 生活에 滿足하였다.

 

盧公弼의 墓域은 衿川北面高寺里인 서울特別市銅雀區大方洞과 上道洞境界에 位置해 있었으나 日帝强占期인 1934年 6月 20日總督府令第18號朝鮮市街地計劃令에 의하여 1940年京畿道坡州市坡州邑白石里 山 54-3番地(略圖參照)로 移葬했다.

 

墓所에는 配位韓山李氏와 圓形의 單墳合葬墓로 造成되어 있다. 封墳周圍에는 莎城과 활개를 갖추었다.

封墳 앞에는 長方形臺石위에 碑身과 이수(螭首)를 갖춘 비좌이수형(碑座螭首形)의 墓表가 建立되어 있다.

 

墓表前面에는 『領中樞府事贈盧公之墓貞夫人韓山李氏之墓』라 記錄되어 있고, 後面에는 左議政을 歷任한 文景公二樂亭申用漑가 撰述한 碑文이 새겨져 있다. 封墳 앞에는 魂遊石, 床石, 香爐石, 樽石, 長臺石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文人石이 建立되어 있다.

-------------------------------------------------------------------------------------------------------------------------------------

 

■ 노공필 신도비명(盧公弼神道碑銘)

 

영중추부사교성군노공신도비명(領中樞府事交城君盧公神道碑銘)

 

신용개(申用漑) 지음.

 

공의 휘(諱)는 공필(公弼)이요. 자(字)는 희량(希亮)이며 스스로 호를 국일재(菊逸齋)라 하니 교하(交河) 사람이다. 원조(遠祖) 휘 강필(康弼)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휘 균(鈞)에 이르러 천우위 대호군(千牛衛大護軍)이 되었으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증직(贈職)되니, 공의 고조이다.

 

대호군이 휘 한(閈)을 낳으매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숙(恭肅)이며 공의증조이다. 조의 휘 물재(物載)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며, 고(考)의 휘 사신(思愼)은 익대 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으며, 비(妣) 경씨(慶氏)는 첨지(僉知) 휘 유근(由謹)의 소생이다.

 

정통「正統, 명 영종(明 英宗)의 연호」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에 공을 낳으니 공은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자라면서 굳은 마음으로 힘써 배워 천순「天順, 명 영종의 연호」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8년)의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에 보임되었다가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전임하였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 憲宗)의 연호」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를 역임하고, 응교(應敎)에 승진하여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에 전임되었으며, 병조, 이조, 예조 3조(曹)의 참의(參議)를 지내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차례로 옮기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에 품계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곧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이조, 호조 3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 20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진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어 이로부터 육조(六曹)의 장을 역임하고, 경기감사(京畿監司)로 나아가니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드러났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는데, 이해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고, 복(服)을 마치자 교성군(交城君)에 봉해지니, 고(考)의 공훈을 승습(承襲)한 것이다.

 

계해년(癸亥年, 1503년 연산군 9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특진되어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고, 다음 해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을 맞아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니 그의 죄는 아니었다.

 

가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는데, 이때 단상제(短喪制)가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비록 사대부(士大夫)라 하더라도 죄가 두렵고 화가 겁이 나 고례(古禮)를 지키는 이가 적었지만, 공은 배소(配所)에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을 하며 아침저녁의 전(奠)을 올리면서 고례와 같이 3년을 마치었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성주(聖主)가 천운(天運)에 응하여 유배된 이들을 거두어 기용하였는데, 다시 교성군(交城君)에 임명하고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라 하여 원종 2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하라 특명한 다음, 곧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다음 해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특진하여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겸 영경연(領經筵)이 되니, 조정의 인망(人望)이 무거워서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 승습(承襲)을 청하였으나 승인하는 조서(詔書)를 받지 못하자 조정에서 공을 추천하여 다시 파견하였는데, 예부(禮部)에서 앞서의 주장을 고집하므로 공이 정성스럽고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권서국사(權署國事)’라는 칙서(勅書)를 받아 갖고 돌아오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으로 몸소 나와 맞이하여 특별히 원종 1등(原從一等)에 녹훈하고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내렸으며, 가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14년 중종 9년)에 나이 70세였음으로 해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允許)치 아니하고 궤장(?杖)을 내렸다.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에 병이 들어 11월 28일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향년은 72세이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정의 정무(政務)를 정지하고 시장의 문을 닫게 하는 한편 내신(內臣)을 특별히 보내 조문(弔問)하고 관에서 장사[喪事]를 돕게 하였으며, 증부(贈賻)를 예보다 더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 모월 일(某月日)에 모현 모리(某縣某里) 모좌 모향(某坐某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에 따라서였다.

 

공의 성품은 곧고 풍모가 단정하였다. 학문에 근본을 두어 인연해서 이무(吏務)를 다스렸다.

문장(文章)은 우아하면서도 높아 세속의 취향(趣向)에 흐르지 않았다.

 

성효(誠孝)로 어버이를 섬겨 늙어가면서 더욱 돈독하여 날마다 관대(冠帶)를 갖추고 아침저녁으로 어버이를 보살폈으며,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몸소 전(奠)을 올렸고 늘 절일(節日)을 맞을 때마다 친히 선영에 나아가 청소하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자제를 가르치되 삼가고 신칙하여 방종(放縱)이 없도록 하였으며, 친척을 도와주되 멀고 가까움이 없었고 혼사(婚事)와 상사(喪事)를 돕되 모두 성의에서 나왔다. 검소를 숭상하여 분화(紛華)를 좋아하지 않았고 해진 옷과 거친 음식에도 마음 편한 모습이었다.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마침내는 중임(重任)을 맡김에 이르렀는데, 치체(治體)에 숙달하고 전장(典章)에 익숙하였으며, 대정(大政)에 치밀하여 자그마한 것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의 기댐이 무거웠는데, 불행히 늦게 병에 걸리어 재상(宰相)의 업(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상례(相禮) 이숙(李塾)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으니, 아들 노섭(盧燮)은 지금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요, 딸 맏이는 종실(宗室) 청안군(淸安君) 영(嶸)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군기시 별제(軍器寺別提) 정홍선(鄭洪先)에게 출가하였다.

 

노섭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찬(韓儧)의 딸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낳으니, 아들은 노전(盧全), 노임(盧任), 노첨(盧僉)이요, 딸 맏이는 충의위(忠義衛) 박심(朴深)에게, 다음은 충의위 정수래(鄭壽萊)에게, 다음은 종실 주진수(朱陳守) 이원(李瑗)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인망(人望) 이미 높았고 설시(設施) 또한 컸다네.

치적(治績)은 곧 성대하여 국가의 의지하는 바라네.

몸은 우화(羽化)되어 올라갔고 유택(幽宅)을 이에 정하였다네.

후세에 명성 드리우니 귀신은 보호하여 유지할 것이라네.

<끝>

------------------------------------------------------------------------------------------------------------------------------------

 

[原文]

 

領中樞府事交城君盧公神道碑銘

 

申用漑 撰

 

公諱公弼。字希亮。自號菊逸齋。交河人。遠祖諱康弼。仕新羅。官至太子太師。傳世至諱鈞。千牛衛大護軍。贈領議政府事。於公高祖。是生諱閈。議政府右議政。諡恭肅。於公曾祖。祖諱物載。同知敦寧府事。贈議政府領議政。考諱思愼。策翊戴佐理勳。爲議政府領議政。妣慶氏。僉知諱由謹之出。以正統乙丑生公。公少英敏穎達。長篤志力學。中天順壬午司馬試。任補義盈庫直長。轉社稷署令。登成化丙戌文科。歷成均館直講,藝文館校理。轉陞應敎,典翰,直提學,副提學。歷兵,吏,禮三曹參議。拜承政院同副承旨。次轉爲都承旨。癸卯。階超嘉靖。爲同知中樞府事。尋拜司憲府大司憲。歷兵,吏,戶三曹參判。弘治己酉。特陞資憲。工曹判書。自是歷長六曹。出按京畿。所履著績。戊午。拜議政府右參贊。是年。丁內憂。服闋。封交城君。襲考勳也。癸亥。特陞崇政。議政府右贊成。甲子。遭燕山昏虐。杖配茂長。非其罪。秋。丁外憂。時方短喪制。雖士大夫。畏罪怵禍。鮮守古禮。公於配所設神位。哭行朝夕奠。服終三年如禮。正德丙寅。聖主膺運。收擧竄謫。還拜交城君。以先朝耆舊。特命錄原從二等功。尋拜右贊成。丁卯。特陞輔國崇祿。領敦寧府事。兼領經筵。重朝望也。上之卽位。遣使皇朝請承襲。未蒙允詔。朝廷擧公更遣。禮部猶執前議。公陳請誠切。竟得受權署國事勑而還。上親迎于慕華館。特錄功原從一等。賜土田臧獲。秋。拜領中樞府事。甲戌。以年七十致仕。不允。賜几杖。丙子。患疾。十一月二十八日。卒于正寢。享年七十三。訃聞。輟朝巿。別遣內臣弔孤。官庀喪事。贈賻特加。越明年丁丑某月日。窆于某縣某里某坐某向之原。從先塋也。公性稟貞亮。風儀端方。本之學問。緣飾吏治。爲文章雅峭。不流俗尙。事親誠孝。老而彌篤。日冠帶定省。凡祭祀。必齋沐親奠。每遇節日。躬詣先塋掃祭。敎子弟謹飭毋縱。收恤宗戚。無間親疏。周救婚喪。皆出於誠。雅尙儉素。不喜紛華。弊衣惡食。晏如。早世宦達。終至大受。練達治體。諳習典章。樞機綜密。不遺纖毫。朝廷倚重。不幸晩罹疾疚。未建相業。惜哉。聘相禮李塾女。生一男二女。男曰燮。今爲司僕寺僉正。女長歸宗室淸安君嶸。次歸軍器寺別提鄭洪先。燮娶同知中樞府事韓儹女。生三男四女。男曰全。曰任。曰僉。女長適忠義衛朴深。次適忠義衛鄭壽萊。次適宗室朱陳守瑗。餘幼。銘曰。

 

望旣隆。施更大。績乃懋。國所賴。身乘化。宅于茲。名垂後。神保持。

 

이요정짐 > 二樂亭集卷之十四 / 碑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