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이증 신도비명. 시장(李增神道碑銘. 諡狀) - 한산인(韓山人)

야촌(1) 2020. 3. 6. 15:49

[생졸년] 이증『李增,1525년(중종 20) ~ 1600년(선조 33)』

[배 위] 정부인 경주이씨, 1422년(세종 4) ~ 1509년(중종 4)/

 

이증 신도비명 병서(李增神道碑銘幷序) - 정두경(鄭斗卿) 찬(撰)

 

1715년(숙종 41)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건립된 이증(李增)의 신도비이다.

이 비의 제액(題額)은 5대 외손 윤덕준(尹德駿)이 썼고, 비문의 앞면과 음기는 5대 외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비문의 찬자는 정두경(鄭斗卿)이며 추기(追記)는 현손(玄孫) 이집(李潗)이 지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다. 묘소는 정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 이수의 묘표가 있다.

 

이증「1525(李增, 중종 20)~1600(선조 33)」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색(穡)의 7세손이다. 1549년(명종 4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보임된 후 계속 증직하여 1591(선조 24)년에는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어 형조·예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헌신하였고, 죽은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아천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鵝川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간(懿簡)이고, 저서로는『북애집(北崖集)』1권이 있다.

 

이증은 기축옥사 시 정여립(鄭汝立)을 국문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7년 전부터 조헌(趙憲) 등과 왜구를 막아낼 방도를 진언하는 등 선조 때의 정치적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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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조판서 아천군 증 영의정 시 의간 이공 신도비명 병서

(禮曹判書 鵝川君 曾 領議政 諡 懿簡 李公 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아천 부원군(鵝川府院君) 시(諡) 의간공(懿簡公) 행(行)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아천군(鵝川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兵曹參判兼弘文館提學) 정두경(鄭斗卿)은 글을 짓고,

외(外) 5대손(代孫) 가의대부(嘉義大夫) 예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이진휴(李震休)는 삼가 글씨를 쓰고,

 

외 5대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동지경연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빈객(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右賓客) 윤덕준(尹德駿)은 삼가 전액(篆額)을 하다.

 

한산(韓山) 사람인 수부(水部) 원외랑(員外郎) 이선(李䆄)이 그 조부의 묘비명(墓碑銘)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의 이름은 증(增)이요, 자(字)는 가겸(可謙)이며, 호(號)는 북애(北厓)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년 중종 20)에 태어나서 25세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36세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補任) 되었다가 뒤에 홍문관 정자(弘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공의 이력(履歷)을 살펴보면, 육조(六曹)에서는 호조, 병조, 형조, 예조, 이조의 낭관(郎官)을 역임(歷任)하였고, 옥당(王堂)에서는 정자(正字), 박사(博士),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였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을 역임하였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외직(外職)으로 나아가서는 함경도 북평사(咸鏡道北評事)와 경기도사(京畿都事)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왕명(王命)을 받든 것으로는 무진년(선조 1, 1568년) 명(明)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고, 경진년(선조 13, 1580)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갔었다.

 

계유년(선조 5, 1572)에는 하루 동안에 관직(官職)을 여섯 차례나 옮겨 이조 정랑(吏曹正郎)으로부터 검상(檢詳), 사인(舍人), 집의(執義),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승지(承旨)에 이르렀으며, 품계(品階)가 뛰어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공은 통정대부에 있을 때, 내직(內職)으로는 병조, 호조, 형조의 참의(參議)와 판결사(判決事),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는데, 경상도관찰사의 경우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을유년(선조 18, 1585)에는 품계가 뛰어올라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뒤에 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陞級)하였다. 가선대부와 가의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 예조, 이조의 참판과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기축년(선조 22, 1589)에는 간장(諫長)으로서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의 국문(鞠問)에 참여하여 오로지 평번(平反)을 힘썼으므로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칭찬하였다.

 

경인년(선조 23, 1590)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等)에 책훈(策勳)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신묘년 겨울에는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품계가 뛰어올라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으며, 뒤에 또 품계가 뛰어올라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자헌대부와 정헌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 예조, 공조의 판서와 의정부 좌참찬(左參贊)과 우참찬(右參贊)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는 큰 난(亂)을 갓 겪어 국사(國事)가 초창기를 맞고 있을 때 공은 종백(宗伯)의 직위를 맡았는데, 헌장(憲章)과 예의(禮儀)가 찬란하여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경자년(선조 33, 1600) 10월에 작고(作故)하니, 춘추(春秋)가 76세였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선조(先祖) 임금은 몹시 애도하는 동시에 조회(朝會) 보는 일을 중지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병란(兵亂) 이전에 행했던 예장(禮葬)의 은전(恩典)을 회복하라는 명을 내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아천부원군(鵝川府院君)에 추증(追贈)하였다.

 

신축년(선조 34, 1601년) 2월에 광주(廣州) 돌마리(突馬里)에 장사지냈는데, 이것은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의 원훈(元勳)인 알평(▨平)의 후손이자 사직(司直) 몽원(夢黿)의 딸이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친척을 대하였으며, 자손들을 훈계하는 데에는 엄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늙어서는 여러 아들들을 따라 군현(郡縣)으로 내려갔는데, 간소하려고 힘써서 비용을 줄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 덕(德)을 칭송하였다. 공보다 13년 뒤에 작고하니, 춘추는 82세였다.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의 사람됨은 정직하고 남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홍문관 정자로 있을 때에는 권간(權奸)의 비위를 거슬러 미움을 사서 북막(北幕)으로 좌천(左遷)을 당하였다. 성품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여 가산(家産)을 경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에 이르렀지만 자신을 보양(保養)하는 데에 있어서는 가난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은 천성(天性)에서 나왔던 것이다. 신유년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을 때와 병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을 때에는 몹시 슬퍼하고 예제(禮制)를 다하였고, 모두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3년 동안 시묘(侍墓) 살 이를 하였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또한 생일에도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 새로 난 곡물(穀物)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백씨(伯氏)인 전부공(典簿公)이 먹기를 기다려서 또한 먹었다. 그리고 아우와 누이들 중에 궁핍한 자들은 모두 공에게 의탁(依託)하였다.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면 비록 아득한 조상이라 할지라도 소식(素食)을 하였고, 친구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일은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임명되어서는 반드시 지세교(知製敎)의 직함(職銜)을 겸하였다.

 

명나라 사신(使臣)이 올 때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때에 문사(文士)들이 매우 많았으나 종사관의 명망(名望)이 모두 공에게 돌아왔는데, 공은 한번도 이것을 가지고 뽐내지 않았다. 

 

그리고 3번이나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국자감(國子監)의 사유(師儒)는 얕은 학문을 가진 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은 공의 겸손한 태도를 매우 대단하게 여겼다. 

 

갑오년(선조 27, 1594년)에 동류(同流)들이 무고(誣告)를 당했을 때, 이를 구제(救濟)하는 자까지도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비록 마음속으로는 그의 원통함을 알면서도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공의 아들 경함(慶涵)이 장령(掌令)으로 있었는데, 공에게 거취(去就)를 여쭈어서 힘써 숨김없이 직언(直言)을 하니 화기(禍機)가 조금 누그러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6 · 7년 전 왜구(倭寇)의 기세가 매우 종횡무진(縱橫無盡)하자, 조헌(趙憲)은 상소하여 왜구를 제어할 책략(策略)을 진언(陳言)하면서 성혼(成渾), 박순(朴淳), 홍성민(洪聖民), 이준민(李俊民) 그리고 기타 몇몇 분들을 불러서 미리 주획(籌畵)을 강구시켜 후환(後患)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의 이름 또한 거기에 참여하였으니, 한 세상에서 추중(推重)을 받고 국가의 안위(安危)가 공에게 매인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목은 선생(牧隱先生)의 7세손(世孫)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지숙(之菽)인데,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는 이름이 질(秩)인데,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증조부(曾祖父)는 이름이 장윤(長潤)인데,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조부(高祖父)는 이름이 ▨로, 대사성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등은 모두 공의 책훈(策勳)을 힘입어서 증직(贈職)된 것이다.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金氏)인데, 진사(進士) 필신(弼臣)의 딸이다. 

 

공은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경홍(慶洪)은 생원(生員)으로 사인(士人) 안렴(安濂)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둘째 아들 경함(慶涵)은 참판(參判)을 지냈는데 찰방(察訪) 권오(權悟)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셋째 아들 경심(慶深)은 통제사(統制使)를 지냈는데 현령(縣令)을 지낸 이윤(李潤)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넷째 아들 경류(慶流)는 병조좌랑(兵曹佐郎)을 지냈는데 첨지(僉知)를 지낸 조린(趙遴)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섯째 아들 경황(慶滉)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서득운(徐得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딸은 판관(判官)을 지낸 유인(柳諲)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둘째 딸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현감(縣監)을 지낸 이계(李繼)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 경하(慶河)는 전의감 참봉(典醫監參奉)을 지냈다.

 

경홍은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확(穫)은 현감이며, 맏딸은 생원 박유부(朴由孚)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진사 송희득(宋希得)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좌윤(左尹) 김수현(金守玄)에게 출가하였다. 경함은 아들이 없어서 동생의 아들인 선(䆄)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다.

 

경심은 딸 하나를 낳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통정대부의 품계로 부사(府使)를 지낸 이지정(李志定)에게 출가시켰고, 측실에서 낳은 화(和)는 만호(萬戶)를 지냈다. 그리고 경류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제(穧)는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의 품계로 부사를 지냈다. 맏딸은 별좌(別坐)를 지낸 권영(權偀)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통정대부의 품계로 목사(牧使)를 지낸 김효성(金孝誠)에게 출가하였다.

 

경황은 3남 6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은 사인이고, 둘째 아들 선(䆄)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에 이르렀는데, 이가 바로 참판의 후사가 된 사람이다. 셋째 아들 ▨은 사인이다. 맏딸은 진사 신대업(申大業)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생원 이시형(李時烱)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현감 유득증(兪得曾)에게 출가하였고, 넷째 딸은 통정대부의 품계로 현령(縣令)에 이른 안응창(安應昌)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섯째 딸은 사인 신유(辛柔)에게 출가하였고, 여섯 째 딸은 진사 조문형(趙文馨)에게 출가하였다.

 

유인은 3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경찬(景纘)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이 되었고, 둘째 아들 경집(景緝)은 관찰사가 되었으며, 셋째 아들 경소(景紹)는 부사가 되었다. 이계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효백(孝伯)은 통정대부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숙(孝叔)은 사인이며, 딸은 가선대부의 품계로 부사가 된 이종일(李宗一)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또 확은 아들이 없어 업의 아들 윤우(潤雨)로 후사를 삼았다. 제는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정기(廷虁)는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정룡(廷龍)은 사인이다.

 

업은 3남을 두었는데, 시우(時雨)는 사인이고, 상우(商雨)는 진사이며, 윤우(潤雨)는 사인인데 확의 후사로 갔다. 선의 하나 뿐인 아들 서우(瑞雨)는 사인이고, 환의 하나 뿐인 아들 행우(行雨)도 사인이다. 안팎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3백 20여 명이나 되니, 또한 번성한 가문(家門)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당시 좌랑공은 조방장(助防將)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상주(尙州)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이때에 대가(大駕)가 급작스럽게 서쪽으로 피난길을 떠났으므로 여러 관료들 중에는 뒤떨어진 자가 많았다. 공이 대가를 따라가려고 달려가다가 고양(高陽)에 이르렀을 때 아들의 부음(訃音)을 듣고 너무도 놀라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 그래서 공도 뒤에 처지게 된 것이었다.

 

공은 매일 뒤에 떨어지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가을에 공은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여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지금 정기의 벼슬길이 매우 현달(顯達)한데, 아마 하늘이 공의 충렬(忠烈)을 허여(許與)해서 이런 보답을 한 것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목은(牧隱) 이후, 대대로 아름다운 이름 남겼네.

7대(代)를 내려와서, 북애(北厓)가 훌륭하게 태어났다.

 

아! 북애는, 실로 국가의 기둥이었도다.

조정에서 사표(師表)가 되었으니, 지극히 현달(顯達)하고 지극히 영화로웠다.

 

세 번이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대사성(大司成)의 직위라네.

그 사양(辭讓)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겸양(謙讓)의 칭송(稱頌)을 들었도다.

 

큰 내를 잘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겸양의 덕(德) 때문이라네.

이 때문에 76세의 나이로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도다.

 

헌칠한 5명의 아들들, 매우 번성하였네.

그 다복(多福)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귀신들이 가득 찬 걸 방해했기 때문이리라.

 

돌마(突馬)의 언덕은, 바로 공의 선영(先塋)이라네.

이 묘비명(墓碑銘)을 새기어, 영원히 그 명성(名聲) 전하리라.

 

기해년에 동명(東溟) 정공(鄭公)이 이상과 같은 묘비명을 지었는데, 판교(判校) 족조(族祖)가 백부(伯父)와 함께 이 묘비명을 돌에 새길 것을 도모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후손(後孫)들의 한이 되었다.

 

다섯째 형인 속(涑)이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소종계(小宗稧)를 조직하여 약간의 돈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이 돈을 가지고 석물(石物)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마침 중형(仲兄)인 택(澤)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해 와서 비로소 석물에 관한 일을 시작하니, 숭정(崇禎) 후 두 번째로 돌아온 을미년 10월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정공이 묘비명을 지은 뒤에 태어난 자손들은 많이 기록되지 못하였고, 또 혹은 관직이 오른 자도 있으니, 이것들을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확의 딸은 홍수원(洪晬元)에게 출가하였다. 선은 판교(判校)가 되었고, 그의 딸은 신창(申▨)에게 출가하였다. 제의 딸은 사평(司評) 박승후(朴承後), 김광(金桄), 참봉(參奉) 변박(卞搏), 심약호(沈若湖)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업의 딸은 이시윤(李時胤)과 정발(鄭勃)에게 출가하였다. 윤우의 아들 부(溥)는 참봉이 되었고, 서우의 아들로는 현령이 된 형(泂)과 염(濂)이 있다. 정기는 이조 참판이 되었고, 아들로는 봉사(奉事)가 된 자(澬)와 군수가 된 행(涬) 그리고 항(沆)이 있으며, 딸들은 진사 윤개(尹揩), 감사 윤반(尹攀), 서문제(徐文濟), 부제학 김만길(金萬吉), 생원 서종보(徐宗普)에게 출가하였다.

 

정룡은 군수가 되었고, 아들로는 현감이 된 오(澳),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이 된 택(澤), 진사가 된 협(浹), 부사가 된 집(潗)이 있으며, 딸은 박태정(朴泰正)에게 출가하였다. 시우의 아들로는 무과에 급제한 헌(瀗)과 흡(潝), 식(湜)이 있으며, 딸은 참봉 심하(沈榎), 김석좌(金碩佐)에게 출가하였다.

 

상우는 군수가 되었는데, 공의 재종제(再從弟)인 명곡공(鳴谷公) 산보(山甫)의 뒤를 이었으며, 아들로는 봉사가 된 정(濎)과 군수가 된 속(涑)이 있다. 행우의 아들로는 념(淰)이 있고, 딸은 박성진(朴成進)에게 출가하였다.

 

부의 아들로는 병일(秉一)이 있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리다. 형의 아들로는 병적(秉迪), 병덕(秉德), 병직(秉直), 병복(秉福)이 있으며, 염의 아들로는 병덕(秉德)이 있다. 자의 아들로는 병원(秉元)과 병익(秉益)이 있고, 행의 아들로는 참봉이 된 병철(秉哲)이 있으며, 항의 아들로는 이조 정랑이 된 병상(秉常)이 있고, 오의 아들로는 참봉이 된 병정(秉鼎)과 병관(秉觀)이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아직 어리다.

 

택의 아들로는 병겸(秉謙)이 있고, 협의 아들로는 생원이 된 병태(秉泰)와 병항(秉恒)이 있다. 집의 아들로는 병건(秉健)이 있고, 헌의 아들로는 양자(養子)를 들인 병문(秉文)이 있다. 정의 아들로는 병천(秉天)이 있고, 속의 아들로는 현감이 된 병연(秉淵)과 좌랑이 된 병성(秉成)이 있으며, 념의 아들로는 병언(秉彦)이 있다.

 

그리고 세중(世重), 도중(道重)과 아직 어린 한 명은 병원의 소생이고, 태중(泰重)은 병익의 소생이다. 화중(華重), 태중(台重), 기중(箕重)과 아직 어린 두 명은 병철의 소생이고, 찬중(纘重)은 병천의 소생이며, 항중(恒重)과 아직 어린 한 명은 병연의 소생이다.

 

그리고 또 병일은 3남을 두었고, 병정은 2남을 두었다. 병덕, 병상, 병겸, 병항, 병문, 병성은 각각 1남씩을 두었고, 태중, 찬중은 각각 1남씩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서파(庶派)인 경하(慶河)의 경우는 후사가 없다. 확의 소실 소생인 정지(廷芝)는 하(河), 섭(涉), 담(澹)을 낳았고, 정무(廷茂)는 척(滌), 영(泳), 수(洙)를 낳았으며, 선의 소실 소생인 은우(殷雨)는 철(澈)과 즙(湒)을 낳았다.

 

화의 아들 정방(廷芳)은 연(演)을 낳았으며, 선고(先考)의 소실 소생은 필(泌)을 낳았다. 외손(外孫)의 경우는 너무도 번다해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서(序)와 명(銘)을 쓴 사람은 이지정(李志定)의 증손(曾孫)이고, 전액(篆額)을 하고 지문(誌文)을 쓴 사람은 윤반(尹攀)의 아들이며, 현손(玄孫) 집(潗)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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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禮曹判書 鵝川君 曾 領議政 諡 懿簡 李公 神道碑銘 幷序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監事 世子師鵝川府院君諡懿簡公行推忠奮義平難功臣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鵝川君李公神道碑銘幷序

 

嘉 善 大 夫 兵 曹 叅 判 兼 弘 文 館 提 學 鄭斗卿 撰

外 五 代 孫 嘉 義 大 夫 禮 曹 叅 判 兼 同 知 義 禁 府 事 李震休 謹書

外五代孫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 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 尹德駿 謹篆

 

韓山人水部員外郎李䆄託王父墓銘按公諱增字可謙號北厓生于嘉靖乙酉二十五擧司馬三十六登第補承文正字後除弘文正字考履歷六曹則歷戶兵刑禮吏郎王堂則歷正字博士修撰校理憲府則歷持平諫院則歷正言獻納外任則拜咸鏡道北評事及京畿都事奉 命則戊辰天使時拜遠接從事庚辰 聖節使赴京癸酉一日六遷自吏曹正郎歷檢詳舍人執義典翰直提學至承旨超自爲通政大夫在通政內歷兵戶刑三曹叅議判決事都承旨外歷黃海忠淸全羅慶尙四道觀察使慶尙則病不赴乙酉超資爲嘉善大夫後又超嘉義大夫在嘉善嘉義歷刑禮吏三曹參判漢城左右尹副提學大司憲同義禁府事己丑以諫長叅鞫汝立獄專務平反人多稱之庚寅策勳平難三等封鵝川君辛卯冬拜刑曹判書超爲資憲大夫後又超正憲大夫在資憲正憲歷刑禮工三曹判書議政府左右叅賛癸巳新經大亂國事草創公職宗伯憲章禮儀燦然有可觀者庚子十月卒春秋七十六訃聞 上震悼輟朝遣官致祭 命復亂前禮葬之典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鵝川府院君辛丑二月葬于廣州突馬里從先塋也配貞敬夫人慶州李氏新羅元勳平之後司直夢黿之女也事舅姑以孝遇親戚以恩訓子孫嚴而有法晚從諸子于郡縣務簡省費邑人皆頌其德後公十三年壬子卒春秋八十二祔 公墓左公爲人正直不阿在弘文正字忤權奸左遷北幕性又淸儉不治家産位致宰列自奉如寒士孝友出天辛酉外艱丙子內艱哀毁盡禮皆廬墓三季其孺慕終身不衰生日不設宴食新必待伯氏典簿公食亦食弟妹窮之者皆依歸焉遇 國忌雖遠代輒食素朋友喪亦不肉至老不已少負文名登第除拜必帶知製 敎天使至從事儐相時文士甚衆望皆屬公未甞以此自多三拜大司成皆不仕曰國子師儒非淺學可堪識者多其謙退甲午儕流見誣救者被斥雖心知寃者畏莫敢言時公子慶㴠爲掌令禀公去就勉直言不諱禍機少止前壬辰六七歲倭勢甚橫趙憲上疏陳制倭之策請召成渾朴淳洪聖民李俊民及他數公預講籌畵以備後患公名亦與其見重一世繫國家安危如此公牧隱七世孫也考諱之菽 宗廟署令 贈吏曹判書祖諱秩韓城君曾祖諱長潤奉化縣監 贈吏曹判書高祖諱堣大司成 贈叅判皆公策勳贈也妣善山金氏進士弼臣之女也公生五男二女男曰慶洪生員娶士人安濂女曰慶㴠叅判娶察訪權悟女曰慶深統制使娶縣令李潤女曰慶流兵曹佐郎娶僉知趙遴女曰慶滉嘉善郡守娶節度使徐得運女女長適判官柳諲次適通政縣監李繼側室子慶河典醫監叅奉慶洪生一男穫縣監三女適生員朴由孚進士宋希得左尹金守玄慶㴠無子子弟之子䆄慶深生一女適文科通政府使李志定側室子和萬戶慶流生一男穧文科通政府使二女適別坐權偀通政牧使金孝誠慶滉生三男長士人次䆄文科正郞即後於叅判者也次士人六女適進士申大業生員李時烱縣監兪得曾通政縣令安應昌士人辛柔進士趙文馨柳諲三男景纉武判官景緝觀察使景紹府使李繼 二男孝伯通政孝叔士人女適嘉善府使李宗一穫無子以子潤雨後穧二男廷虁魁科大司諫廷龍士人三男時雨士人商雨進士潤雨士人即繼於穫子也䆄一男瑞雨士人一男行雨士人內外曾玄孫三百二十餘人亦盛矣壬辰變佐郎公爲助防將從事戰死尙州 大駕卒西幸百僚多後者公馳 到高陽聞子訃驚慟氣絶亦後每恨後從西向必痛哭苦流涕秋間詣 行在拜大司憲今廷虁仕路甚顯豈天與忠烈有此報耶銘曰 牧隱之 後世有令名逮于七葉北厓挺出 猗歟北崖實邦之楨 羽儀 王庭極顯極榮 三讓不受職大司成 讓出中心得謙之鳴 利涉大川實惟謙享壽七十六位在正卿 子五丈夫盛莫與京 不其多福鬼神害盈 突馬之原是公先塋 刻此墓銘永垂厥聲歲己亥東溟鄭公撰是銘判校族祖與伯父謀刻未就爲後孫恨五兄涑與諸兄弟修小宗稧略有錢財用此具石會仲兄澤尹玆土始經理以崇禎後再乙未十月立銘後子孫多未錄又或陞職玆並職于後穫女洪晬元䆄判校女申穧女司評朴承後金桄叅奉卞搏沈若湖女李時胤鄭勃潤雨男溥叅奉瑞雨男泂縣令濂廷虁吏曹叅判男澬奉事涬郡守沆女進士尹揩監司尹攀徐文濟副提學金萬吉生員徐宗普廷龍郡守男澳縣監澤文科府尹浹進士潗府使女朴泰正時雨男瀗武科潝湜女叅奉沈榎金碩佐商雨郡守後公再從弟鳴谷公山甫男濎奉事涑郡守行雨男淰女朴成進溥男秉一二幼泂男秉迪秉德秉直秉福濂子秉德澬男秉元秉益涬男秉哲叅奉沆男秉常吏曹正郎澳男秉鼎叅奉秉觀一幼澤男秉謙浹男秉泰生員秉恒潗男秉健瀗繼子秉文濎男秉天涑男秉淵縣監秉成佐郎淰男秉彥世重道重秉元出一幼泰重秉益出華重台重箕重秉哲出二幼纉重秉天出恒重秉淵出一幼秉一三男秉鼎二男秉德秉常秉謙秉恒秉文秉成各一男泰重纉重各一男皆幼若庶派慶河無後穫側出廷芝生河涉澹廷茂生滌泳洙䆄側殷雨生澈湒和男廷芳生演先考側出泌若外裔繁不盡載寫序銘者李志定曾孫也寫篆及職者尹攀男也玄孫潗謹職.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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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參贊鵝川君贈領議政李公諡狀 - 白軒 李景奭

 

公諱。字可謙。自號北崖。韓山之李素稱大族。上世有曰自成。井邑監務。贈祕書監丞。追秩都僉議贊成事。八代祖曰。都僉議贊成事。號稼亭。稼亭之子曰。韓山伯。號牧隱。是生種善。知中樞。贈領議政。是生季甸。韓城府院君。贈領議政。高祖諱。大司成。贈參判。曾祖諱長潤。奉化縣監。贈吏曹判書。祖諱。韓城君。考諱之菽。宗廟署令。贈吏曹判書,韓平君。三代追榮。以公策勳也。妣善山金氏。贈貞夫人。進士弼臣之女。公以嘉靖乙酉生。幼少。已嶷然有成器度。文藝爲儕流所推。中己酉司馬。擢庚申文科。分隷槐院。辛酉秋。遭外艱。廬墓終三年。甲子。盛玉堂爲正字。忤權姦出爲北道評事。淸議惜之。丙寅遞歸。歷戶兵禮三曹佐郞司諫院正言刑曹正郞司憲府持平,弘文館修撰。戊辰。以遠接使從事官。迎送詔行。歸佐畿幕。己巳。爲吏曹佐郞。辛未。轉弘文館校理兵曹正郞,司諫院獻納禮曹正郞。壬申。改吏曹正郞。癸酉。由吏曹。一日屢遷檢詳舍人執義典翰直提學。陞同副承旨。一世榮之。甲戌。以左副承旨。坐言事罷。尋敍拜兵曹參知,成均館大司成。乙亥。觀察海西。丙子。丁內艱。廬墓致毀。如前喪。以不得終養。爲終身之痛。服已。除戶曹參議左承旨兵曹參議。庚辰。賀聖節如京師。還授刑曹參議。辛巳。按湖南。壬午。入爲判決事都承旨。凡拜內職。皆帶知製敎。是年。又出按湖西。癸未。特除嶺南伯。病不赴。授大司成都承旨。乙酉。加嘉善階爲漢城右尹轉左尹。遷刑禮二曹參判。丙戌。兼同知義禁府事。己丑。鄭汝立之獄。以諫長參鞫。議獄平反。務辨玉石。庚寅。拜副提學大司憲吏曹參判。賜平難三等勳號。封鵝川君。辛卯。以禮曹參判。因微事罷。未幾。特授刑曹判書。壬辰寇深。車駕西狩。公進至高陽。會公第四子以巡邊使從事官。戰沒於尙州。聞訃驚病。未克扈駕。秋始間行趨灣上行朝。除大司憲。公以病未從衛辭遞。癸巳夏。宣陵有改葬之禮。公爲提調。先入京城。周旋之際。誠愼兼盡。仍判禮曹。丙申。以社稷提調。奉位版之海西。丁酉。判工曹。自戊戌至己亥。歷左右參贊。庚子年七十六。十月感疾。卒于正寢。上爲之悼惜輟朝。賻贈有加。遣禮官弔祭。又命有司禮葬。蓋經亂後始行之也。其終始禮遇之異如此。以功例贈議政府領議政鵝川府院君。用明年二月日。葬于廣州突馬里。從先塋也。公性孝友德厚。其事親也。必備甘薌。雖未釋褐。不以家貧而有所缺。其孺慕也。終身不衰。遇降日益篤。不許開酌。輒就伯氏典簿公第。相與悲傷。節日展墓。非有病故。未嘗不躬。愛敬伯氏。老而愈至。如得珍味。必先供伯氏。不先不御。弟妹仰之。忘其衣食之憂。遇國忌。雖遠代輒食素。不以衰替。凡得朋舊訃必不肉。律己淸簡。致位卿宰。而其儉約與布衣時同。進退不苟。奉公惟恪。三爲祭酒。而皆不拜。蓋謙不欲當之也。其爲宗伯也。正當鋒燹之餘。章程蕩失。經籍散逸。公私無所考究。於是公講定祭式。搜集亡書。識者多之。公仲子參判公嘗爲掌令時。言路誣一故相。申辨者輒斥之。咸卷舌莫敢言。參判公以事關機穽。須稟家庭。乃白諸公。公方食遽棄七著。毅然諭之以立朝事君之大義。辭甚嚴正。參判公於是直陳是非以明之。上意開悟。士林頗有賴。寔公之力云。貞夫人慶州李氏。視公贈封貞敬夫人。司直夢黿之女。府使仁臣之孫。持家以法。事尊章以禮。遇親黨以仁。訓子孫以義。閨庭之間肅如也。晩從諸子于郡縣。務簡省費。邑人皆稱其德。卒于季子之邑金溝衙。壬子五月也。年八十二。以七月日祔葬于公墓左。有丈夫子五。慶洪。成均生員。娶士人安濂女。慶涵。文科兵曹參判。娶察訪權悟女。慶深。武科統制使。娶縣令李潤女。慶流。文科兵曹佐郞。娶僉知趙遴女。慶滉。槐山郡守。娶節度使徐得運女。女二。長適漢城府判官柳訒。次適松禾縣監李繼。側室子慶河。典醫監參奉。娶訓鍊奉事李世傑女。生員一男穫。縣監。三女。適生員朴由孚,進士宋希得,文科右尹金守玄。參判無子。子弟之子䆄。統制使一女。適文科通政府使李志定。側室一子和。萬戶。佐郞一男穧。文科通政府使。二女。適別坐權偀,通政牧使金孝誠。郡守三男。穙士人。䆄文科正郞。卽後於參判者也。?士人。六女。適進士申大業,生員李時炯,縣監兪得曾,縣令安應昌,士人申柔,進士趙文馨。柳判官三男。景纘判官。景緝文科守觀察使。景紹府使。李縣監二男。孝伯通政。孝叔士人。一女適嘉善府使李宗一。穫無子。以穙子德雨後。穧二男。廷夔文科吏曹正郞。廷龍士人。穙三男。時雨業文。商雨進士。德雨業文。䆄一男。瑞雨業文。?一男。行雨業文。內外曾玄孫摠三百二十餘人。公行義文章。足以精神廟朝。潤色王猷。而位不滿德。用未克究。蓋亦多爲謙遜所掩云。賜祭之文。有曰。人稱國器。世美家行。聞者以爲紀實也。子孫之蕃衍。若是其盛。豈所謂積善之餘慶也歟。謹摭其家狀而次比如右。以請易名之典。

 

백헌집 >白軒先生集卷之四十○文稿 / 諡狀

 

 

 

이증 선생 묘(李增 先生 墓)

 

이증 신도비와 한산이씨삼세유사비각(韓山李氏三世遺事碑閣)

 

[소재지] 분당구 수내동 산1-2(분당 중앙공원)

[시   대 ] 조선시대

 

내 용

 

이증(1525∼1600)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韓山(한산) . 자는 可謙(가겸) . 호는 北崖(북애) . 李穡(이색) 의 7대손. 李之菽(이지숙) 의 아들이나 1549년(명종 4) 司馬試(사마시) 에 합격, 1560년(명종 15) 別試文科(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正字(정자) 에 이어 다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73년 이후 吏曹正郞(이조정랑) 을 거쳐 檢詳(검상) , 舍人(사인) , 執義(집의) , 直提學(직제학) , 承旨(승지) 그리고 通政大夫(통정대부) 에 이르렀다. 내직으로는 호·병·형 3조의 참의, 判決事(판결사) , 도승지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황해, 충청, 전라, 경상의 4도 觀察使(관찰사) 가 되었는 바 경상도의 경우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568년(선조 1) 遠接使從事官(원접사종사관) 이 되었고, 1580년 예조참판으로 聖節使(성절사) 가 되어 明(명)에 다녀왔다. 1585년 가선대부, 이후 가의대부로 승진했는데, 이때 형·예·이조의 참판, 한성좌, 우윤, 부제학, 대사헌, 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 를 지냈다.

 

1589년 대사간으로 있을 적에 鄭汝立정여립) 의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다음해에 平難功臣(평난공신) 3등이 되고 鵝川君(아천군) 에 봉해졌다. 1591년 형조판서, 자헌대부에 이르렀으며, 정헌대부로 있을 적에는 예·형·공조판서와 의정부의 左右參贊(좌우참찬) 을 역임하였다.

 

1593년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예조판서로 憲章(헌장) 과 禮儀(예의) 가 뛰어났다. 임진왜란 6∼7년 전 趙憲·洪聖民·李俊民 (조헌·홍성민·이준민) 등과 함께 왜적을 경계해서 후환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懿簡(의간) 이다. 유고로는 『北崖詩稿(북애시고) 』가 있다.

 

묘역은 분당 중앙공원 내에 나지막한 구릉 상부에 南西向(남서향) 하여 있다. 봉분 중앙에는 흑색의 상석·6각 향로석과 좌측에 묘표 및 봉분 좌우로 8각 망주석·문인석 2기 등의 석물이 있다. 망주석은 간주석에 석수가 양각되어 있으며 크기는 좌 148㎝, 우 156㎝이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으로 좌 194㎝, 우 2m로 얼굴부분이 62㎝이다.

 

墓表(묘표)는 백색화강암의 비좌와 一石(일석)인 대리석제의 비신 및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신은 표면이 반들거릴 정도로 매끄러우며 비문은 前面(전면)에만 있으며 종3열로 ‘朝鮮正憲大夫禮曹判書鵝川君韓山李公增之墓 配貞夫人慶州李氏?左(조선정헌대부예조판서아천군한산이공증지묘 배정부인경주이씨부좌) ’로 되어 있다.

 

이수는 발가락이 두 개인 雙龍(쌍용) 이 연꽃 속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 양각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직경 2.8㎝인 작은 원 속에 太極紋(태극문) 이 조식되어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18㎝·너비 98㎝·두께 60㎝, 비신 높이 114㎝·너비 48㎝·두께 18㎝, 이수 높이 42㎝·너비 61㎝·두께 28㎝이며 總高(총고) 174㎝이다.

 

 神道碑(신도비)는 분당 중앙공원 내 탄천을 바라보고 南西向(남서향)하여 있다. 현재 비각(1997.5∼1999.8) 내에 韓山李氏三世遺事碑(한산이씨삼세유사비) 와 같이 보호되고 있다. 碑(비) 는 무늬 없는 백색화강암의 비좌 및 비신과 平屋蓋石(평옥개석) 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前後 2面(전후 2면) 에 있으며, 상단에는 前後 2面(전후 2면) 에 걸쳐 篆書(전서) 로 ‘禮曹判書鵝川君贈領議政謚懿簡李公神道碑銘(예조판서아천군증영의정익의간이공신도비명) ’이라 되어 있다.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鵝川府院君謚懿簡公行推忠奮義平難功臣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鵝川君李公神道碑銘 幷序(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아천부원군익의간공행추충분의평난공신정헌대부예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아천군이공신도비명 병서) ’이다.

 

비문은 嘉善大夫兵曹參判兼弘文館提學 鄭斗卿(가선대부병조참판겸홍문관제학 정두경) (1597∼1673)이 찬하고, 外 5代孫 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李震休(외 5대손 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이진휴) (1657∼1710)가 쓰고, 外5代孫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右賓客 尹德駿(외5대손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의금부사동지경연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우빈객 윤덕준) 이 전액을 했다.

 

撰者(찬자) 정두경은 글씨에 뛰어나 城南市(성남시) 여수동의 李淸臣墓碣(이청신묘갈) 외에 廣州郡(광주군 )남종면의 呂爾徵(여이징) 과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姜弘重(강홍중) 의 神道碑文(신도비문) 을 찬하기도 하였다.

 

書字(서자) 이진휴는 숙종대의 문신·서예가로 글씨에 뛰어나 南楊州(남양주) 평내동의 호조참판 睦長欽神道碑(목장흠신도비) 및 順天 仙岩寺重修碑(순천 선암사중수비) 등 여러 곳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건립연대는 崇禎再乙亥(숭정재을해) (1695, 숙종 21)로 1659년(효종 10)에 鄭斗卿(정두경) 이 이미 비문을 지었으나 건립하지 못하였다.

 

玄孫 李速(현손 이속) 이 여러 형제들과 小宗契(소종계) 를 조직하여 돈과 財用(재용) 을 마련하여 石物(석물) 을 갖추었으며, 이때 비로소 형제 중 李澤(이택) 이 고향의 수령으로 내려와 일을 시작하여 건립하게 되었다.

 

옥개석은 평옥개석형으로 일체의 장식성을 배제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비신보호의 목적 외에 경제적 여건으로 인한 규모의 최소화에 기인한 듯 하다. 성남 지역에서 이러한 평옥개석형태는 율동 韓潚(한숙) 의 묘표에서 찾을 수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63㎝·너비 141㎝·두께 93㎝, 비신 높이 220㎝·너비 86㎝·두께 33㎝, 옥개석 높이 33㎝·너비 144㎝·두께 91㎝이며 總高(총고) 316㎝ 이다.

 

[참고문헌]

 

京畿道(경기도), 『京畿金石文大觀(경기금석문대관) 』6,1992.

경기도, 『경기문화재대관』,1998.

기전문화재연구원,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총서 제1집), 2000.

한양대학교박물관, 『분당지구 문화유적 종합학술조사보고서』,1991.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3집),1999.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남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5집),1999.  

비 고 : 경기도기념물 제116호

 

성남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