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김우옹 신도비명 병서 - 이현일 찬

야촌(1) 2017. 12. 18. 00:28

[생졸년] 김우옹『金宇顒, 1540년(중종 35) ~ 1603년(선조 36)』

 

갈암집 제23권>비(碑) / 葛庵 李玄逸 著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시(諡)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

 

갈암 이현일 찬

 

동강(東岡) 선생 김 문정공(金文貞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90여 년이 지났다. 선생의 5세손 남수(南粹)가, 선생이 이미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품질(品秩)이 정2품인 데다 금상(今上=肅宗) 때에 또 경연 신하의 말에 따라 시호(諡號)를 내렸기 때문에, 장차 법식을 상고하여 비를 세워 공의 덕행을 드러내 칭송하고 이로써 무궁한 후세에 전하고자 하여, 이에 한강(寒岡=鄭逑, 1543~1620)이 지은 행장 및 여헌(旅軒=張顯光, 1554~1637)이 지은 행장후서(行狀後序)와 연보(年譜) 등의 글을 가지고 와서 현일(玄逸)에게 신도비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소경왕(昭敬王=宣祖) 시대에는 큰 학자들이 즐비하게 조정에 늘어서서 임금을 보필하여 빛나는 중흥을 이루었고, 그 훌륭한 정치의 영향이 오늘날까지 아름답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정공 같이 시종 변함없이 바른 학문에 종사하고 진퇴를 예법에 맞게 하여 도덕과 풍절(風節)이 우뚝이 백세(百世)의 사표가 되는 이는 그리 많이 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양 그분의 글을 읽고 그분의 풍도를 상상해 볼 때면, 그분의 마부(馬夫)가 되어서라도 한번 모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흠모하는 마음이 뭉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지금 글을 짓고 사적을 열거하여 이 일을 돕는 것이 어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랴.

 

그러나 후생 말학이 식견은 얕고 말 주변도 없으니 그 성대한 덕행을 기술하여 무궁히 후세에 전하는 일을 또 무슨 힘으로 감당할 수 있으랴 싶어서 감히 사양하였더니, 김 군은 갈수록 더욱 간절히 부탁해 마지않았다. 그 뜻을 보건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작정인 듯싶었다. 이에 감히 행장과 연보를 살펴 그중 큰 사항만 추려서 다음과 같이 차례대로 서술한다.

 

선생의 휘는 우옹(宇顒)이고 자는 숙부(肅夫)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선계(先系)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왔다. 고려 때에 휘 용비(龍庇)라는 분이 있어 태자 첨사(太子詹事)였었고, 그 뒤 휘 종사(宗師)라는 분이 비로소 성주(星州)에 살면서 휘 계손(季孫)이라는 분을 낳았는데 이분이 선생에게는 4대조이시다.

 

증조 휘 종혁(從革)은 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되었고, 조 휘 치정(致精)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황고(皇考) 휘 희삼(希參)은 통정대부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일찍이 진락당(眞樂堂) 김공 취성(金公就成)에게 성리학(性理學)의 요체를 배웠으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현직에 올랐다. 세상에서 칠봉선생(七峯先生)이라고 부른다. 청주 곽씨(淸州郭氏)와 혼인하여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명망이 있었다. 선생이 그 막내아들이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수려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으며, 구두(句讀)를 배우자 곧바로 문장의 뜻을 깨달았다. 조금 자라 글을 지으니 의사가 범상하지 않았다. 19세에 상사(上舍)에 들어가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가정(嘉靖) 경신년(1560, 명종 15)에 부친 칠봉선생의 초상을 당했다. 복상을 마친 뒤 창원김씨(昌原金氏)와 혼인하니, 바로 남명(南冥=曺植) 조 선생(曺先生)의 외손녀이다. 선생은 이에 남명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이미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았으며, 얼마 뒤 서울에서 퇴도(退陶 =李滉) 이 선생(李先生)을 뵙고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고 배워 학문에 많은 보탬이 있었다.

 

융경(隆慶) 2년(1568, 선조 1)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모친상을 당해 복상을 마친 뒤 홍문관정자로 소명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만력 원년 계유(1573)에 다시 소명을 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이에 직무에 나갔다. 인하여 경연에 입시하여 임금의 진학(進學)과 거경(居敬)의 요체를 극진히 진달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겨울에 부수찬(副修撰-종6품)에 승진하였는데, 갑작스런 승진이라 하여 사직하고, 또 과분한 가자(加資)를 개정해 주기를 청하여, 네 차례나 상소하고서야 비로소 윤허 받았다. 일찍이 연석에서 어떤 대신(大臣)이 면직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대신은 모름지기 ‘몸을 굽혀 힘을 다하여 목숨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겠다.’라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아 머뭇거리며 일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인재를 널리 찾아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저 고식적인 일만 오로지 힘쓴다면 비록 현자(賢者)가 있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뜻을 세움은 반드시 높고 원대하게 해야 하나, 실제 다스림에 있어서는 일에 합당하게 하기를 힘써 변통해야 할 곳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 지 말아야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러하다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그대는 조식에게 배웠고 또 그대의 공부가 독실하니, 나를 위해 학문하는 절차를 말해 주겠는가?” 하니, 선생이 사양하는 예를 갖추고 인하여 대답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없고, ‘놓쳐 버린 마음[방심(放心)]’을 되찾는 것일 뿐입니다.

 

선유(先儒)는 지경(持敬)을 마음을 되찾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참으로 엄숙하고 겸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한가하고 안일하게 지내지 않는다면 이 마음[차심(此心)]이 항상 보존되어 학문이 향상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필부가 산림에 고요히 거처할 때에 한 가닥 미미한 마음을 제어하기 쉬울 것 같아도 잠시만 놓아 버리면 놓쳐 버리게 됩니다.

 

더구나 임금은 부귀한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외물이 마음을 흔드는 곳이 매우 많으니, 단단히 잡고서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아니하면, 아마 마음이 흩어져서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방종하여 욕심을 따르기를 편안히 여기는 것과 밖으로 마음을 쓰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 할 바로 삼아서 아뢰기를, “진덕수업(進德修業)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합니다. 어찌 그럭저럭 날만 보내며 시문(詩文) 같은 말단의 학문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상이 가뭄 때문에 구언(求言)을 했는데,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정치를 하는 방도는 무엇보다도 심지(心志)를 안정(安定)시키는 것이 급선무이고 현능한 이에게 직임을 맡기는 것이 급선무인데, 그 근본은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히는 데에 있습니다.”라고 하여, 그 차자의 말이 수천 마디였는데, 상이 매우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선생이 매양 진강(進講)을 하거나 혹 논사(論事)를 할 때에 의리(義理)에 대해 부연해서 진달한 것이 참으로 적실하고 타당한 말들이었으며, 공경(恭敬)과 방자(放恣), 의리(義理)와 사욕(私欲)의 나뉨에 대해 더욱 신중하여 말이 매우 간곡하고 의미가 깊었다.

 

상이 일찍이 대면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매양 학문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겼으니, 나를 위해 잠(箴)을 지어 학문을 하는 요체를 진달해 주겠느냐?” 하였다. 선생이 물러나 육잠(六箴)을 지어 바치니, 정지(定志), 강학(講學), 경신(敬身), 극기(克己), 친군자(親君子), 원소인(遠小人)에 대한 것이었는데, 상이 보고 감탄하시고 그대로 그 잠을 홍문관에 내렸다. 상이 선생을 대우하신 것이 이러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추앙하여, 최고의 강관이라고들 하였다.

 

일찍이 영중추부사 노공 수신(盧公 守愼)과 함께 시강(侍講)할 때에 노공(盧公)이 상께 아뢰기를, “마음은 온갖 조화의 주체입니다. 나의 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뒤에라야 이치를 궁구할 수 있고 일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니,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곧 본원의 일입니다.” 하자, 선생이 즉시 나아가 아뢰기를, “마음은 저절로 맑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생각마다 성찰해서 사욕(私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보존해야 하니, 그런 뒤에 자연히 맑아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마음이 발동하는 곳에 쉬이 흔들리고 어수선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걱정하니, 노공이 또 아뢰기를,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였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마음의 기미를 잘 살피고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서 천리가 항상 보존되도록 해야만 마음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사물(事物)을 물리쳐 끊어 버리고서 마음을 맑게 하려 한다면 이단의 학문에 빠지게 됩니다.” 하였다.

 

2년(1574, 선조 7) 겨울에 격례에 따라 수찬(修撰-正六品)에 승진하였고, 얼마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으로 옮겨졌다. 이듬해 여름에 다시 수찬에 제수되어,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명소를 받아 입대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불러들였다.” 하였다.

 

선생이 삼가 사은하고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다면 반드시 그만한 인재를 얻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두 대신(大臣)들은 임금이, 하늘이 부여한 직무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을 섭리할 책무가 있으니, 반드시 당대 제일의 인재라야 한 시대의 일을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직은 굳이 숫자를 다 갖출 것 없다. 오직 합당한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4년(1576, 선조 9) 봄에 부교리가 되었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으로 옮겨졌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正五品)을 거쳐 사인(舍人-正四品)에 승진되었다. 얼마 뒤 다시 수찬이 되었다. 차자를 올려 안빈(安嬪)의 봉사(奉祀)에 대해 논하기를, “후사(後嗣)가 된 자가 바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흥녕군(興寧君)이 안빈의 제사를 모셔야 합니다. 이제 하원군(河源君)을 친손(親孫)이라 하여 그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은 종법(宗法)을 중시하고 통서(統緖)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얼마 뒤 또 경연에 입시하여, 조심하고 삼가며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함을 극력 진달하고, 조정에서 관료들이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며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전후로 아뢴 말들이 초년에 비해서 더욱 강개하고 간절하였다.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왔다.

 

6년(1578, 선조 11) 봄에 소명을 받고 길을 나섰다가 신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또 수찬으로 소명을 받았는데, 이듬해 봄에 비로소 조정에 돌아왔다. 당시에 상이 《춘추(春秋)》를 강론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적신(賊臣) 이기(李芑)는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현저히 품고 효릉(孝陵 =仁宗)을 폄박(貶薄) 하였습니다.

 

단지 역심을 품은 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 응당 난적(亂賊)을 다스리는 법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일에 간관(諫官)은 처음에 금고(禁錮)하기를 청하였다가 곧바로 정계(停啓)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처자(妻子)를 모두 노비로 삼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하물며 금고 하는 것쯤이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자(王者)는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백성들을 아들로 삼습니다. 아들이 부모에 대해서 그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부모가 아들에 대해서 그 고통을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천지 만물이 본디 나와 한 몸임을 안다면, 하늘의 재앙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몸속에 가득한 것이 모두 측은지심이니. 마치 바늘로 찔러 보아도 아프고 칼로 베어 보아도 아픈 것과 같다.’라는 것이니, 그 형세가 그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한몸인 이치를 임금이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또 일찍이 백성들이 곤궁해지는 것과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에 대해 극론하고, 수령과 변장들이 자기 자신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음을 언급하며 아뢰기를, “본원(本源)이 맑아지고 기강이 닦이면,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할 줄 알고 백성 사랑하는 일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여름에 부응교((副應敎-從四品)에 승진하였다. 강론을 인하여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은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격치성정(格致誠正)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리(表裏)가 빛나고 시종(始終)이 한결같습니다. 패자(覇者)는 전혀 이런 근본은 없이 단지 지력(智力)만으로 버텨 나가는 것이니, 어찌 게을러지고 피폐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뒤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는데, 거듭 사양하여 윤허를 받았다. 겨울에 차자를 올려,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진하(陳賀)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논하였다. 8년(1580, 선조 13)에 선위사(宣慰使)에 차임되어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영접하였고, 복명한 뒤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오면 여악(女樂)을 쓰는 전례가 있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공자께서 노(魯)나라에서 정치를 하실 때에 제(齊)나라에서 여악(女樂)을 보내오자 다음 날에 벼슬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전(法殿)에서 여악을 쓰는 것도 조종조의 법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정전(正殿)에 상께서 임어하여 먼 외국 사람을 접대하는 일은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멀리는 옛 성인을 본받고 가까이는 조종조의 법도를 준수하여, 신료들로 하여금 그 위의를 우러러보게 하고 일본 사신으로 하여금 보고 감화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사인(舍人-正四品)으로 옮겨졌다.

 

10년(1582, 선조 15)에 응교가 되었다가 직제학(直提學-從三品)에 승진하였다. 당시에 조정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선생이 ‘제후(諸侯)는 재취(再娶)할 수 없으며 계실(繼室)은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의리를 들어 예(禮)를 근거로 상소하여 결국 부묘하자는 의견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정릉(貞陵)의 의제(儀制)에 대해서 동료들과 의견이 같지 아니하자, 인혐하여 체차를 청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正三品)에 승진하였다. 학제(學制) 여러 조항을 만들어, 학교 제도를 닦아 밝혀 교화를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는 일로 근본을 삼았는데, 시행하지 못하였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正三品)으로 옮겨졌다.

 

상이 당시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이의 언행이 자못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자 삼사(三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 상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이에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전한 허봉(許篈)이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 갔다.

 

선생이 그들을 위해, 그렇게 편중되게 이쪽을 내치고 저쪽을 허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힘껏 변론하였고, 인하여 당인(黨人)이 간교한 마음을 품고 화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선비들을 온통 모함한 일을 논핵하여, 근본을 따져 가며 극언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2년(1584, 선조 17) 여름에 부제학(副提學-正三品)으로 소명을 받았다. 당시에 북쪽 오랑캐가 변방에 일을 일으키고 가뭄의 재앙이 닥쳤는데도 조정에 있는 신료들은 파당을 나누어 서로 공격하며, 다시 나랏일과 백성들의 고통은 근심하지 않았다. 선생이 사직을 청하는 상소에 그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다.

 

겨울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從二品)에 제수되어, 학교를 높이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일로 급선무를 삼았다. 이듬해 봄에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입시하여 진강을 마치고 아뢰기를, “상께서 ‘존심양성(存心養性)’ 넉 자를 손수 써서 내려 주시며 신들에게 잠(箴)을 지어 올리라 하셨으니, 매우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다만, 존심과 양성은 본디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양성을 하는 방도는 존심에 있으며 존심의 요체는 ‘경(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을 지키는 방법은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또 부제학으로 소명을 받았는데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곧이어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올린 자급을 개정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4년(1586, 선조 19) 여름에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이 되었다. 얼마 뒤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공사(公事)를 잘 받들며 백성을 사랑하고 학교를 흥기시키는 일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17년(1589, 선조 22)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로 복주되고,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로들 끌어다 댔다. 이에 선생은 영북(嶺北)의 회령부(會寧府)에 유배되었는데, 태연히 귀양을 가면서 조금도 말이나 얼굴에 불평을 나타내지 않았다.

 

길에서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만나니, 조헌이 말하기를, “숙부(肅夫)가 이렇게 되었으니 회한이 없는가?” 하자, 선생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뒷날의 공론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적소(謫所)에 이른 뒤 작은 서재를 짓고 ‘우암(寓庵)’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또 ‘성건당(省諐堂)’이라고 이름붙였다.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이 손수 쓰신 ‘사무사 무불경(思無邪毋不敬)’ 등 12자를 자리 오른쪽에 걸어놓고 날마다 그 안에서 글을 읽었고, 《속강목(續綱目)》 등의 책을 찬술하였다. 당시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격렬해져서 인심이 두려워하였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급히 고하기를, “금오랑(金吾郞)이 올 것입니다. 관부(官府)에 나가 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였는데, 선생은 안색이 변치 않았으며 처신이 태연하였다. 얼마 뒤 금오랑이 과연 이르러 부(府)의 관원을 붙잡아 갔는데, 선생은 또한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20년(1592, 선조 25) 4월에 일본이 난을 일으켜,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을 갔다. 선생은 사면하는 교서를 받고 곧바로 의주(義州)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다가 11월에 비로소 행조(行朝)에 도착하여, 부호군(副護軍-從四品)에 제수되었다.

 

적을 방비하는 기무(機務) 7조를 조목을 갖추어 아뢰니, 상이 매우 칭찬하며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방책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다.” 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직임을 바꾸어 서경(西京)에 가서 찬획사(贊畫使) 원황(袁黃)을 접반(接伴)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세자를 모시고 공주(公州)에 가 있던 중에 대사성이 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22년(1594, 선조 27) 여름에 조정에 돌아와 사직하였으나 윤허 받지 못했다. 마침 호남 안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사신을 적중에 보내 화친을 맺고 군대를 물러가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선생이 옳지 못하다고 쟁론하였다.

 

또 중흥(中興)의 정무(政務)에 궐실이 많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7조목을 진달하였는데,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말 것[개과불인(改過不吝)], 사욕을 버리고 백성들을 보호할 것[극기보민(克己保民)], 자주 경연에 나아갈 것[빈어경연(頻御經筵)], 대신들에게 일을 위임할 것[위임대신(委任大臣)], 인재를 불러 모을 것[연람인재(延攬人才)], 장수를 선발하여 군병을 훈련시킬 것[선장련병(選將鍊兵)], 감사와 수령을 잘 가려 임명할 것[택감사수령(擇監司守令)] 이었다.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당시 묘당의 의논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려 하면서, 정성으로 대해서 적절히 관계를 유지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선생이 또 대의(大義)로써 쟁론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당인(黨人)이,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말을 꾸며 내어 무함으로 큰 옥사를 일으켜 어진 선비들을 얽어 죽이니, 비록 조정(祖珽)의 백승(百升)의 노래와 남곤(南袞)의 주초(走肖)의 참언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간신(奸臣)을 영구(營救)한 일로 정엽(鄭曄)을 논핵하여 파직을 청하였는데, 윤허 받았다. 선생이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 보듯이 하고 일에 따라 말을 다하여, 한때의 화복(禍福)이 두려워 몸을 사리지 아니함이 이러하였다.

 

이어서 시무(時務) 8조항을 진달하였는데, 대신을 선임할 것[선임대신(選任大臣)], 동궁을 보양할 것[보양동궁(保養東宮)], 억울함을 풀어 줄 것[신원왕(伸冤枉)], 왕법을 바로잡을 것[정왕법(正王法)], 인재를 널리 거두어들일 것[광수인재(廣收人才)], 유민을 보호하여 모을 것[보합유민(保合遺民)], 군정을 닦아 밝힐 것[수명군정(修明軍政)] 등의 일곱 가지 일로 급선무를 삼고, 뜻을 세우는 것[립지(立志)]으로 그 근본을 삼았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 의견을 올린 것이 무려 수십백 편이었는데, 모두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지극한 의논과 군국의 기무에 관한 요체로, 실제로 조처하여 쓸 수 있는 내용들이었고, 상 또한 그 충심과 정성을 잘 알고 매번 칭찬하며 받아들였다.

 

이듬해 봄에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김 문충공(金文忠公)이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었다.’라는 내용으로, 그 집안에 휼전(恤典)을 베풀어 신하들에게 충의(忠義)가 권면되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대사헌을 거쳐 부제학에 제수된 것이 두 번이었고, 대사간, 대사성, 이조와 예조의 참판에 제수된 것이 한 번씩이었다. 한번은, 속히 대신(大臣)을 보내 명(明)나라에 위급함을 고하게 하고 친정(親征)을 하겠다는 교서를 내려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의 사기를 고무시킬 것을 청하였다.

 

또 나라를 중흥시킬 중요한 일 8조목〔中興要務八事〕을 올렸는데, 또한 모두가 당세의 급선무에 아주 잘 맞는 내용들이었다.

26년(1598, 선조 31) 봄에 안동(安東)에 가서 도독(都督) 마귀(麻貴)를 접반하고 돌아왔다. 상소하여, 자신을 북로(北路)의 수령에 차임시켜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게 해서 위급할 때를 대비할 것을 청하였으나, 채납되지 않았다.

 

겨울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서애(西厓 =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음험한 소인들에게 무함을 당하여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온 조정 사람들이 다들 입을 다물고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억울함을 밝혀 성상의 마음을 돌렸다.

 

이듬해 봄에 병으로 면직되어 인천(仁川)으로 돌아왔다. 그 뒤 얼마간은 청주(淸州)와 충주(忠州) 등지를 오가며 지냈고, 누차 소명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30년(1602, 선조 35) 7월에 역옥(逆獄 =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성상을 문안하러 달려갔는데, 서울에 이르기 전에 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 및 동지경연사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대궐에 나가 사은하고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부제학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31년(1603, 선조 36)에 글을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치사(致仕)할 나이도 아니니 참으로 직무를 다해야 마땅하다. 어찌 물러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얼마 뒤 체차되어 대호군이 되었다가, 신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청주로 돌아와, 11월 모일에 우사(寓舍)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매우 슬퍼하였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의식대로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듬해 2월 모일에 성주(星州) 서쪽 파곡(巴谷) 만리(蔓里) 오향(午向)의 언덕에 귀장(歸葬)하였으니, 선영(先塋)에 묻힌 것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선생보다 8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합장(合葬)하였다.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효가(孝可)로 후사를 삼았는데, 강음현감(江陰縣監)을 지냈다. 효가는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욱(頊)으로 지평(持平)이고, 딸들은 하산(夏山) 성초벽(成楚璧), 서하(西河) 노형필(盧亨弼), 사인(士人) 노사영(盧思永)에게 시집갔다.

 

지평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정석(庭碩)으로 진사이고, 차남은 정혁(庭奕)이고, 삼남은 정익(庭翊)으로 참봉이다. 진사 정석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세신(世臣)이고, 정혁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세빈(世贇)과 세현(世賢)이고, 참봉 정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세선(世選), 세일(世逸), 세운(世運), 세적(世迪)이다. 세신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가 바로 남수(南粹)로, 지금 학업을 닦고 있다.

 

선생이 일찍이 주자의 《강목(綱目)》을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옛 기록을 상고했던 전례에 따라 편차한 것이 있었는데 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하였고, 다만 시문(詩文), 잡저(雜著), 소차(疏箚), 경연강의(經筵講義)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회령(會寧)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과 병향(並享)되었다. 선생은 정 선생과는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지기(知己)의 벗이었으니, 지금 그 행장과 선생에 대한 제문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아, 정맥(正脈)에 한결 같이 뜻을 두어 말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으니 학문이 곧은 것이고, 평온하고 욕심이 적어 마음이 물욕에 젖지 않았으니 몸을 잘 닦은 것이고, 좋은 일과 바른말을 아뢰어 임금의 마음을 인도하였으니 임금을 바른 길로 가게 한 것이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벽함을 제거하여 조정 반열을 엄숙하게 하였으니 간관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것이었다.

 

시대의 급선무를 진달하고 나라의 예법을 바룬 것은 충성을 다함이었고, 화친하자는 의논을 배척하고 착한 선비들을 보호해 준 것은 강직하게 의리를 지키되 도량이 넉넉한 것이었다. 평탄하거나 험하거나를 한가지로 보고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구차하게 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일은 또 평소에 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것들 가운데 한 가지만 있어도 참으로 드러내 기록하여 그 이름을 민멸되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이제 이런 덕목들을 겸비하고 있음이랴. 참으로 백대 후세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천추에 우뚝 뛰어난 분이라 할 만하다.

 

그 아름다운 덕을 찬술하여 후세에 밝게 드러내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쉽게 생각하고 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혹 학문에 뜻을 두어도 / 士或志學
도를 듣는 이는 흔치 않으니 / 而鮮聞道
정신을 다 쏟고 재능을 다 써도 / 焦神極能
낮은 자는 막히고 높은 자는 허황되네 / 卑滯高悟


부질없고 이치에도 어긋난 학문 / 誕罔乖離
쓰임을 당해서는 우활하기 그지없으니 / 當用而迂
세상 사람들이 그런 선비를 보고 / 世見其然
드디어 유학을 헐뜯게 되네 / 遂以訾儒


아, 오직 우리 선생께서는 / 於惟先生
일찍부터 바른 학통을 흠모하여 / 夙艶正脈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아서 / 沿流泝源
참으로 알고 실제로 체득했네 / 眞知實得


학문의 공을 쌓고 또 쌓아서 / 旣停旣積
아름답게 겉으로 피어났으며 / 鬱爲華英
선대의 아름다움 그대로 잘 이어서 / 趾美紹休
우리 조정에서 모범을 보였지 / 羽儀王庭


옥 같고 눈 같은 깨끗한 정신과 / 玉雪精神
온갖 풍상 견디는 늠름한 기상으로 / 風霜標致
이십 년을 맑은 흉금 고이 지니고 / 卄年淸禁
나라에 바친 충성 간절하였네 / 忠誠懇摯


온화하게 경연에서 말씀을 올리면 / 從容細旃
임금이 그 좋은 말에 절을 하였네 / 王拜其昌
사특한 관리들 규탄했으니 / 糺逖官邪
긴밀히 글 올린 게 몇 번이던가 / 幾皁其囊


임금의 은총이 날로 두터워져 / 恩顧日洽
군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분이었는데 / 君子所恃
저 간악한 소인배들이 / 彼訾翕者
때를 틈타 그 뜻을 한번 풀었네 / 乘時快意


선생은 태연히 변방에 귀양 가서 / 拱手投荒
삼 년을 관북 지방에서 지내다가 / 三載關山
피난가신 임금을 따르기 위해 / 追陪日馭
천리 길 의주로 달려갔다네 / 千里龍灣


허연 머리 듬성듬성 늙어 갈수록 / 素髮星鮮
임금 향한 마음은 더욱 굳었지 / 丹心愈厲
일마다 있는 생각 모두 아뢰니 / 隨遇盡言
항상 시기적절한 대책이었네 / 動中機會


전후로 선생이 올린 건의는 / 前後獻替
무릇 수천 마디였는데 / 凡幾千言
큰 간흉을 가리켜 배척하고 / 指斥巨姦
지극한 원통함을 풀어 주었네 / 昭洗至冤


말이 엄하고 의리가 곧았으니 / 辭嚴義正
어찌 아첨을 위해 올린 말이었으랴 / 豈媚而謁
바른 뭇 선비들은 기운이 솟았고 / 衆正神旺
간사한 무리들은 기세가 꺾였네 / 群壬氣奪


백성들이 선생께 희망을 걸었고 / 蒼生繫望
나라의 안위가 선생께 매여 있었지 / 邦國安危
나가고 물러남이 어찌 불변인 것이리 / 進退何常
세도에 따라 진퇴를 결정했네 / 樂行憂違


저 멀리 호서 지방을 바라보니 / 眷彼湖西
내가 쉴 곳이 거기에 있었네 / 爰得我所
자취를 감추고 그곳에 은둔하니 / 卷懷栖息
이미 늙은 만년의 세월이었네 / 歲月遲暮


마침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으니 / 竟以壽終
이를 일러 순녕이라 하네 / 是謂順寧
선생의 평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 循始迄終
오직 도를 따라 걸어온 길이었네 / 惟道是程


세상엔 덕을 알아보는 이 드무니 / 世罕知德
누가 선생의 조예를 헤아릴 수 있으랴 / 疇測其詣
이에 묘도에 비명을 새겨 / 刻銘墓隧
이로써 후인들을 깨우치노라 / 以覺來裔

 

[주기]

 

[주01] 안빈(安嬪)의 봉사(奉祀) : 안빈은 중종(中宗)의 빈(嬪)이며 선조(宣祖)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昌嬪安氏)를 말한다.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1499년(연산군5)에 태어나 1549년(명종4)에 세상을 떠났다. 1507년(중종2)에 궁궐에 들어가 1518년에 중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영양군(永陽君)이고, 다음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안씨는 1577년(선조10)에 창빈(昌嬪)에 추봉(追封)되었다. 덕흥대원군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하원군(河源君)이고, 차남이 하릉군(河陵君)이며, 삼남이 선조(宣祖)이다.

 

안빈의 장자(長子)인 영양군이 아들이 없어서 족후손 흥녕군(興寧君)을 후사(後嗣)로 삼아 안빈의 제사를 모셔왔는데, 선조가 안빈의 사당을 덕흥대원군의 묘정(廟庭)으로 옮기고 하원군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려 하였다. 《藥泉集 卷14 昌嬪墓誌銘》

 

[주02] 신덕왕후(神德王后) :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이며,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의 어머니이다. 당시에 조정에는 신덕왕후를 복위시키고 태묘(太廟)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선조는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15년에 직제학 김우옹이, 태묘에 배향하는 것을 반대하고 별묘(別廟)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를 청하였다가, 동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였다. 신덕왕후의 능호(陵號)가 정릉(貞陵)이다.

 

[주03] 조정(祖珽)의 백승(百升)의 노래 : 북제(北齊) 때에 조정이 곡률광(斛律光)을 참소하기 위해 인용한 동요이다. 당시 주(周)의 장군 위효관(韋孝寬)이 곡률광의 무용(武勇)을 시기하여 요언(謠言)을 만들어 퍼뜨렸는데, 그 내용에 “백승비상천(百升飛上天) 명월조장안(明月照長安)”이라고 하였다.

 

백승(百升)은 곡(斛)이고 명월(明月)은 곡률광의 자(字)이니, 곡률광이 역모를 할 것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조정이 정사를 전횡하다가 곡률광의 비판을 받게 되자, 위의 노래를 인용하여 참소하였고, 이 참소로 인하여 곡률광의 집안이 멸족당하였다. 《北齊書 卷17 斛律光列傳》

 

[주04] 남곤(南袞)의 주초(走肖)의 참언 :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에,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개혁 세력인 조광조(趙光祖) 일파를 모함하기 위하여, 궁중의 나뭇잎에다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흔적을 왕에게 보인 일을 말한다.

 

[주05] 임금이 …… 하였네 :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는 내용이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당시 선조(宣祖) 임금이 김우옹의 말을 공경히 예우하며 받아들였음을 비유한 말로 인용해 쓴 것이다.

 

[주06] 순녕(順寧) : 송(宋)나라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순리대로 섬길 것이고 죽어서는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했는데, 웅강대(熊剛大)의 주석에 “효자는 살아서는 어버이를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잘 섬기고, 죽으면 편안하여 부모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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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諡文貞公東岡金先生神道碑銘。幷序

 

東岡先生金文貞公卒九十有餘年。先生之五世孫南粹以先生旣 贈官太宰。秩正二品。今 上朝又以筵臣言。有節惠之典。將稽式立碑。顯誦公德。於以傳之無窮。乃以寒岡所撰狀及旅軒狀後序若年譜等書。來徵銘于玄逸。竊惟我 昭敬王時。鴻儒碩輔比肩立。賁飾皇猷。以遂中興之烈。以克至于今日休。然求其能終始正學。進退以禮。道德風節。卓然爲百世師。如吾文貞公者。指不可以屢屈。每讀其書想其風。未嘗不津津致執鞭之慕。今若屬辭比事。以相茲役。豈不與有榮焉。顧以晩生末學。識膚語綿。其於狀盛德傳無已。又何力之可任。敢辭。金君之請。愈往愈懇。反復不置。觀其意不得請不已。乃敢卽狀按譜。摭其大者而序次之如左。先生諱宇顒。字肅夫。義城人。系出新羅敬順王。高麗時有諱龍庇。爲太子詹事。其後有諱宗師。始居星州。生諱季孫。於先生間四世。曾祖諱從革。 贈通禮院左通禮。祖諱致精。 贈承政院左承旨。皇考諱希參。通政大夫三陟府使。 贈資憲大夫吏曹判書。嘗從眞樂堂金公就成。聞性理之要。擢文科躋淸顯。世號爲七峯先生。娶淸州郭氏。有子四人。皆有聲。先生其季也。幼端秀異凡兒。比受句讀。便曉文義。稍長綴文。思致不凡。十九。補上舍生。華聞彌彰。嘉靖庚申。丁七峯憂。服闋。受室以昌原金氏。卽南冥曹先生外孫女也。先生仍受業其門。已知有君子爲己之學。旣而見退陶李先生于京師。質疑請問。大有開益。登隆慶二年第。選承文院權知副正字。明年夏。丁內艱。旣卒喪。以弘文館正字 召。不就。萬曆元年癸酉。再 召。辭不許。乃就職。因入侍 經筵。極陳人主進學居敬之要。 上嘉納焉。冬。陞副修撰。以驟躋辭。又請改濫加。四疏始許。嘗於 筵中。有大臣乞免事先生進言曰。大臣須當以鞠躬盡力。死而後已,爲心。不可只顧一身利害。逡巡避事也。又曰。今日之務。莫先廣求人才。然若專務因循。雖有賢者。亦無如之何矣。立志須是高遠。爲治務要恰當。事有合變通處。不憚更張。乃可爲也。 上曰然。因問爾受業曹植。且爾工夫篤實其爲子陳爲學節度。先生辭謝。因對曰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先儒以持敬爲求放心之要。誠能嚴恭寅畏。不敢暇逸。則此心常存而學可進矣。又曰。匹夫靜居山林。一心之微。似易制伏斯須放過。已覺間斷。況人主崇高富貴。事物搖奪處極多。若非密切操持。常存敬畏。竊恐流放難收拾也。又嘗以安於縱欲外用其心爲至戒而曰。進德修業。當及時爲之。豈可悠悠度日。只從事於詩文末流之學耶。時 上以天旱求言。先生與同僚聯名上箚以爲治道莫先定志。莫急任賢。而本之講學明理累數千言。 上深嘉納焉。先生每進講。或論事敷陳義理親切的當。而尤謹於敬肆義欲之分。亹亹乎其言之有味也。 上嘗面諭曰。爾每言學。予甚嘉之。其爲予作箴。開陳爲學之要。先生退而獻六箴。曰定志,曰講學,曰敬身,曰克己,曰親君子,曰遠小人。 上覽之嘉歎。仍下其箴玉署。 上之所以嚮先生者如此。而一時推以爲講官第一。嘗與領府事盧公守愼同侍講。盧公言於 上曰。心者萬化之主也。一心澄明然後理可窮事可做。澄心乃本原事也。先生卽進曰。心不能自澄。必日用之間。念念省察。克己存理。然後自然澄淸矣。 上嘗患動處多易致擾亂。盧公又進言以爲淸心最要。先生曰。淸心固要。然須審幾愼獨。使天理常存。心乃淸也。若要屛絶事物而使心淸靜。則流於異學也。二年冬。例陞修撰。俄遷成均館典籍。明年夏。復拜修撰。辭不允。 命召入對。 上曰。久不相見。故召入矣。先生拜謝。因對曰天下事不爲則已。爲之必得其人乃可。且一二大臣者。人主所與共天職也。有論道經邦燮理陰陽之責。必須當世第一人。始可了得一世事。故曰官不必備。惟其人。四年春。拜副校理。遷吏曹佐郞。轉議政府檢詳。陞舍人。尋復爲修撰。上箚論安嬪祀。以爲爲人後者爲之子。興寧君固宜奉安嬪祀。今以河源君爲親孫而使之祀。非所以重宗法明統緖也。旣又入侍 經筵。極陳兢業敬畏之意。而以朝廷之上不見百僚敬讓盡心國事爲憂。前後 啓告。比之初年。益剴切矣。未幾辭還。六年春。被 召登道。引疾不就。夏。又以修撰 召。明年春。始還朝。時 上方講春秋。先生臨文 啓曰。賊臣李芑顯有無君之心。貶薄 孝陵。不特無將而已。當斷以亂賊之律。前日諫官初請禁錮。旋卽停 啓。臣以爲籍產收孥。亦不爲過。況禁錮乎。又 啓曰。王者父天子民。子之於父母。父母之於子。可不懼其怒而隱其痛耶。認得天地萬物本吾一體。則天災自不得不懼。民隱自不得不恤。所謂滿腔子。皆惻隱之心。針箚亦痛。刀割亦痛。其勢自不得不爾。人君可不明天人一體之理歟。又嘗極論民生困窮天災流行。以及守令邊將榮身肥己。無意愛民之實。以爲本源澄澈。紀綱修擧。則人知畏法而以愛民爲事矣。夏。陞副應敎。因講 啓曰。帝王之學。自精一執中格致誠正上做出來。故表裏輝光。終始如一。伯者都無此根本。只以智力把持。安得不至於怠廢乎。尋被選湖堂。再辭蒙 允。冬。上箚論禫後陳賀之非。八年。差宣慰使。延接日本使玄蘇。旣復 命。復拜應敎。時日使入京。舊例用女樂。先生上箚略曰。孔子爲政於魯。齊人歸女樂。明日遂行。我國用女樂於法殿。又非 祖宗常法。而況嚴臨正殿。引接遠人。尤不可不愼。宜遠法前聖。近遵 先典。使臣僚聳觀。遠夷觀化。冬。遷舍人。十年。轉應敎陞直提學。時朝議有請以 神德王后祔廟者。先生以諸侯不再娶。繼室不得入廟之義。据禮陳疏。議竟不行。已又以 貞陵儀制僚議不同。引嫌乞遞。明年夏。陞成均館大司成。草學制數條。以修明學敎興化育才爲本而不果行。遷司諫院大司諫。時 上方嚮李文成珥。珥所爲頗不厭衆心。三司交章忤 上意。於是大司諫宋應漑,都承旨朴謹元,典翰許篈皆竄極邊。先生爲論救甚力。以爲黜此與彼。不宜偏重。因劾黨人懷奸樂禍。傾陷士類。推本而極言之。 上皆不聽。辭職還鄕。十二年夏。以副提學 召。時北虜搆釁。亢旱爲災。在朝諸臣。分黨相攻。不復以國事民隱爲憂。先生於丐章。力陳其弊。冬。受觀察湖南之 命。以崇學敎尙節義爲先務。明年春。還授副提學。入侍講訖。 啓曰。御書存心養性四字。令臣等製箴以進。甚盛意也。但存養本非二事。養性之道在存心。存心之要。不過曰敬而已。持敬之方。朱子敬齋箴備矣。未幾棄官歸。又以副提學 召。辭遞。旋授吏曹參判。不就乞改陞資。不 允。十四年夏。轉刑曹參判。尋出知安東府事。以約己奉公愛民興學。爲爲政之本。十七年冬。鄭汝立以逆誅。有飛語相牽及。於是先生配嶺北之會寧府。怡然就道。略無幾微見言面。道遇趙重峯憲。憲謂曰。肅夫到此。能無悔乎。先生正色曰。當俟後日公論。旣到謫所。築小齋。名曰寓庵。又曰省愆堂。揭退陶先生所手書思無邪毋不敬等十二字于座右。日讀書其中。撰續綱目等書。時朝論益激。人心聳懼。一日府使急告曰。金吾郞且至。宜詣官府待命。先生不色變。處之從容。有頃金吾郞果至。逮半刺而去。先生亦無喜色。二十年四月。日本發難。 大駕西狩。先生祇奉赦書。直向龍灣。道梗不得進。十一月。始達 行朝。授副護軍。條禦敵機務七事以進。 上深加奬歎曰。破敵恢復之策。盡在其中。改兵曹參判。接伴贊畫使袁黃于西京。旣歸。扈 駕還都。遷漢城左尹。陪鶴駕住公州。而移大司成。轉大司憲。二十二年夏。還朝辭。不 允。會湖南按使李廷馣請遣使賊中。約和退師。先生爭之以爲不可。又以中興政務多闕。箚陳七條。曰改過不吝。曰克己保民。曰頻御經筵。曰委任大臣。曰延攬人才。曰選將鍊兵。曰擇監司守令。 上嘉納焉。時 廟議將遣陳奏使。有縻之以款之語。先生又以大義爭之。因言黨人造吉三峯之說。誣起大獄。構殺賢士。雖祖珽百升之謠。南衮走肖之讖。亦無以過此。及論鄭曄營救奸臣。請罷職蒙 允。蓋先生疾惡如讎。隨事盡言。不以一時禍福。有所避就者如此。繼陳時務八條。以選任大臣。保養 東宮。伸冤枉。正王法。廣收人才。保合遺民。修明軍政七者爲急務。而以立志爲之本。蓋自兵興以來。前後獻言。無慮數十百篇。率皆格君至論。軍國機要。措之可底於用。而 上亦諒其忠誠。輒加奬納。明年春。復拜副提學。以鶴峯金文忠公盡忠報國死而後已。請追卹其家。以爲人臣忠義之勸。自是數年之間。由大司憲爲副提學者再。爲大司諫,大司成,吏禮曹參判者一。嘗請亟遣大臣。告急 天朝。下敎親征。鼓作忠臣義士之氣。又上中興要務八事。亦皆切中當世之務云。二十六年春。接伴麻都督貴于安東而還。乞補北路守宰。招收簡閱。以待緩急之用。不報。冬。除漢城左尹。時西厓柳文忠公爲一時憸小所構捏。事且不測。擧朝齰舌無敢言者。先生爲抗章訟冤。以回 天聽。明年春。病免歸仁川。旣而往來僑寓于淸忠二州間。累 召不起。三十年七月。聞有逆獄。亟起奔問。未至。被校正廳堂上及同知經筵之 命。詣闕謝 恩。乞遞不許。又由副提學。遷大司成。三十一年。上章乞骸。 上報曰。卿不是懸車之年。誠宜盡職。豈可言退。尋遞付大護軍。移疾還淸州以十一月某甲。疾終于寓舍。壽六十四。訃聞。 上震悼。 贈官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遣禮官弔祭如儀。明年二月某甲。歸葬于州西巴谷蔓里午向之原。從先兆也。夫人金氏。後先生八年沒。葬同穴。無子。以兄子孝可後。江陰縣監。有一男三女。男曰頊持平。女適夏山成楚璧。次適西河盧亨弼。次適士人盧思永。持平有三子。庭碩進士。庭奕,庭翊參奉。進士有一子。曰世臣。庭奕有二子。曰世贇,世賢。參奉有四子。曰世選,世逸,世運,世迪。世臣有一子。卽南粹,方業儒。先生嘗就朱子綱目。倣溫公稽古錄例。有所編次。書未及成。獨其詩文雜著疏箚講義凡若干卷藏于家。會寧人爲立祠祀之。星之檜淵書院。與寒岡鄭先生並享云。蓋先生與鄭先生生並一鄕。志同道合。相許爲知己。今觀其狀及祭先生文。可知已。於乎。一意正脈。言皆當理。學之正也。恬靜寡欲。心不漬物。身之修也。陳善納誨。沃于 宸衷。格君之業也。弼違釋回。震于周行。諫臣之職也。陳時務訂邦禮。盡忠而不沽也。斥和議扶善類。直義而有容也。若其夷險一致。進退不苟。又其平生日可見者也。有一于此。固宜稱述。不沒其名。矧茲兼而有之。眞可謂奮百代而超千祀矣。所以論譔其德媺。明著之後世者。其可已乎。亦豈易而爲之哉。銘曰。

士或志學。而鮮聞道。焦神極能。卑滯高悟。誕罔乖離。當用而迂。世見其然。遂以訾儒。於惟先生。夙艶正脈。沿流泝源。眞知實得。旣停旣積。鬱爲華英。趾美紹休。羽儀王庭。玉雪精神。風霜標致。廿年淸禁。忠誠懇摯。從容細旃。 王拜其昌。糾逖官邪。幾皁其囊。恩顧日洽。君子所恃。彼訾翕者。乘時快意。拱手投荒。三載關山。追陪 日馭。千里龍灣。素髮星鮮。丹心愈厲。隨遇盡言。動中機會。前後獻替。凡幾千言。指斥巨姦。昭洗至冤。辭嚴義正。豈媚而謁。衆正神旺。群壬氣奪。蒼生繫望。邦國安危。進退何常。樂行憂違。眷彼湖西。爰得我所。卷懷棲息。歲月遲暮。竟以壽終。是謂順寧。循始迄終。惟道是程。世罕知德。疇測其詣。刻銘墓隧。以覺來裔。<끝>

 

동강집 > 東岡先生文集附錄卷之二 / 神道碑銘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산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