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자부님이 제 고향분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문의 사항은 오문의 1748년(영조 24)에 간행된 무진보에 수록된 관찰사 최청의 배위 정경부인께서 정확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17世 천(蒨) 국당공파 파조(菊堂公派派祖)
ㅣ
18世 경중(敬中)-배중(培中)-달충(達衷)-성중(誠中)
문정공 판서공 제정공 정순공
(文貞公) (判書公) (霽亭公) (靖順公)
ㅣ ┌──┘ ┌──────┘
ㅣ ㅣ ┌──┘ (1346~1409)
ㅣ ㅣ 원(援)─부(扶)─휴(携)─여(女)──여(女)──여(女)──여(女) 19世
ㅣ ㅣ 府使公 府使公 判尹公 南仲文 崔寔 崔淸 吳溥
ㅣ ㅣ ㅣ ㅣ ㅣ 남중문 최식 최청 오보[부]
ㅣ ㅣ ㅣ ㅣ ㅣ (宜寧人) (慶州人) (慶州人) (海州人)
觀稼亭公
(1344~1414)
┌───────────┘
崔淵止─崔信止─崔檢止─崔漢止─여(女)─여(女)
최연지 최신지 최검지 최한지 金子견 劉信老
郡守 司直 (金+堅)
고려 검교정승 관가정 최청선생 묘(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번지)
▲최청선생 묘 전경 / 사진ⓒ한국자생풍수>이규관
▲최청선생 묘 후경 / 사진ⓒ한국자생풍수>이규관
사진출처 : 초희선생
사진출처 : 초희선생
관가정 최청선생 신도비
관가정 최청 선생 영정
[인물요약]
[이름] 최청(崔淸)
[본관] 경주(慶州)
[자(字) 직재(直哉)
[호(號) 송음거사(松蔭居士)
[호(號) 관가정(觀稼亭)
[생졸년] 1344년(충혜왕 5) ~ 1414년(태종 14) / 수(壽) 71세(歲)
1344년(충혜왕 5)∼1414년(태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재(直哉), 호는 송음거사(松蔭居士)‧관가정(觀稼亭). 부친은 고려 후기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최자운(崔子雲)이고, 모친은 풍양조씨(豊壤趙氏)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출하였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제현이 “후일 반드시 대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여 위태롭게 되자, 공민왕은 수도를 버리고 안동(安洞)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도 왕을 호종하여 보필한 공으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정당문학(政堂文學) 시랑(侍郞)에 올랐다.
1365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권력자 신돈(辛旽)이 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였다. 이 때 신돈의 폐해를 지적한 탄핵 상소를 올려 신돈의 미움을 받았고, 공민왕의 냉대로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으나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신돈이 귀양간 후인 1375년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1378년(우왕 4)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나갔고, 1384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명(明)에 파견되었다가 홍무제(洪武帝)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1384년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의 혼란에 실망하여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여러 현인(賢人)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산야에 멀리 숨어 맹세코 세상에 나가지 않고 나무나 하고 밭을 갈면 아는 자 그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양주(楊州)의 풍양(豊壤)에서 여생을 보냈다.
1394년(태조 3) 태조가 좌찬성(左贊成)으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거절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태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은거하고 있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정자에 관가정(觀稼亭)이란 편액을 내렸다.
그는 이를 보고 탄식하면서 “산의 이름에 임금이 왔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곳에 거처하겠는가!”하고 조견(趙狷)과 함께 송산(松山)으로 옮겨가 살았다. 임종 시에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써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개갈(改碣) 시에 잘못하여 조선 태조가 내린 좌찬성의 관직을 적어 넣었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전해진다. 묘는 남양주 진건면 용정리에 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成宗實錄
◇南楊州市誌
집필 :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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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검교정승 관가정 최 선생 신도비명 병서
조정에 들어가서는 비록 왕의 뜻을 범하더라도 직간하고, 난에 임하여서는 절개를 세워 의를 지킨 자는 그 배운 바가 바르고 의지의 밝음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가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사첩을 상고하여도 그러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내 겨우 관가정 최선생에게서 이러한 행동을 보았으니 경모하지 않을 수 없도다. 삼가 살펴 보건데 공의 이름은 청(淸)이요 자는 직재이며 성은 최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신라 때 고운선생 최치원은 도학을 창명하여 세상에서 천유라 칭한다.
당조에 선입되어 갑과에 합격하였고 관은 시어사에 이르니 성명이 천하에 떨쳐 실로 경주최씨의 시조가 되었고 후에 성묘에 종사되었다. 승노는 정승으로 고려 성종 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여 청하후에 봉함을 받았으며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또 제안은 시호가 공순이며 현배는 시중대제학에 이르렀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습은 찬성사이며 조부 유경은 도순찰사이다. 부친 자운은 판봉상시사이며 비는 풍양조씨로 공민왕 갑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다르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익재 이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이 독실하고 학문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에 선생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일세의 대유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종손을 처로 삼게 하였다.
공민왕 신축년 문과에 등제하여 보문각 학사를 제수받고 다음해 10월에는 홍건적이 해서를 침입하여 그 세태가 매우 급박하여짐에 왕이 수도를 버리고 남행하게 됨에 공은 왕을 호가하여 복주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해 적이 평정되자 왕은 청주로 옮겼으며 다음해 봄에 비로소 환도하게 되었다. 이때 공은 왕의 좌우에서 말고삐를 잡고 몸소 힘을 다함에 병이 들게 되었다. 이에 훈적이 더욱 많아져 그 공으로써 정당문학에 올랐다.
을사년에는 중서시랑을 배수받았는데 이때는 신돈이 전권을 쥐고 있을 때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 권세에 아첨하였다. 이에 공은 상소를 올려 이를 논박하고 매양 왕의 앞에서 신돈을 질책함에 신돈은 이를 미워하고 꺼리게 되었다.
왕 또한 즐거이 여기지 않아 신돈이 척폄하는 바에 따라 신주감무로 강등되었으나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치화가 크게 떨치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로동귀로 일찍부터 신돈에 대한 항소를 올림에 하늘 또한 감화되어 드디어 신돈은 귀향가게 되었다.
을묘년 첨의중찬으로 소배 되었으며 무오년에는 염직함으로써 남로선유사로 나아갔다. 계해년에는 명에 사신으로 감에 황제가 자금어대를 하사하였으며 갑자년에 돌아와 검교정승을 배수 받았다. 그러나 이때 군소배들이 뜻을 얻음에 개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시정에 관계하지 않았다.
태조가 나라를 세움에 공은 삼은 등 여러 현인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궤서를 조정에 올리고 이 세상을 살아감에 햇빛을 삿갓으로 가리고 등조하지 않았다. 이에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는바 공이 말하기를, “산야로 멀리 숨어 맹세코 세상에 나가지 않고 나무나 하고 밭이나 갈면 아는 자 그 누구이겠는가?”라고 하며 드디어 양주의 풍양으로 숨어버렸다.
태조 3년에는 좌찬성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가가 세 번씩이나 왔으나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태조가 그 불굴의 절개를 알고 은거하고 있는 산의 이름으로 봉작을 내리고 친히 그 문에 글을 쓰기를, ‘관가정’이라 하는 한편 ‘동국청풍서산고절’이라 표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태조가 왔다는 뜻이니 내 어찌 이곳에 거처하겠는가?”라고 하며 이내 송산 조공 견과 더불어 그 거처를 송산으로 옮기고 서로 비분강개하며 「송은거사」라고 자호하였으니 이것은 송악을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일찍이 화석정에 이르러 보리가 패는 것을 보고 스스로 마음이 상함을 노래하며 슬퍼하기도 하였다. 태종 갑오년 9월 28일 돌아가니 양주 풍양현 독정 요골 축좌의 언덕에 장례지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최정승의 묘동이라고 부른다.
배 경주이씨는 좌의정 정순공 성중의 딸『생졸년 : 1346년(충목왕 2)~1409년(태종 9)』이며 국당 월성군 천의 손녀이다. 현덕이 있어 시부모를 봉양함에는 효로써 하였고 군자를 공경함에는 예로써 하였으며 척리간에는 화목함으로 하였다.
또 경사에도 박통하여 여사풍이 있었다. 공민왕 병술년에 태어나서 태종 기축년 4월 27일에 돌아가니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4남 2녀를 낳으니 장남은 연지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이며, 둘째 신지는 좌승지이고 셋째 검지는 판도전서이며 넷째 한지는 사직이다. 동중추 김자견 사직 유신노는 그 사위이다.
연지의 아들 경동은 군수이고 경충은 참봉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경의는 진사 · 경성은 부사직이다. 신지의 아들 지윤은 봉상부정이며 경호는 현감이다. 점지의 아들 철이는 호가 삼락이며 인부는 장사랑 · 덕성은 전교령이다. 한지의 아들 철중은 첨정이며 그 나머지 내외의 손자들은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오호라! 공은 통련의 재질로써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왕정에 의우함을 크게 하려고 하였으나 간흉들이 전권을 전횡하는 때를 만나 면전에서 그 예봉이 꺾이었다. 천하를 떨치어 장차 세상과 뜻을 같이하려는 것도 말살되어 베풀지 못하고 고려가 망함에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자취가 사라져 인간세상에서 품은 포부 통한이 되어 돌아가니 슬프도다!
그러나 비록 공의 돌아가심은 그러하나 그 의성은 열열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밝히어주어 지사로 하여금 감탄하고 흠모하게 하여 공경함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이것으로써 공을 논함에 공이 일시를 굽혀 백세가 잘된다는 뜻을 어찌 근심하였겠는가?
묘에는 구비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글자가 깎이고 또 격식에 맞지 않아 후손인 학기 면회 용기 덕기 찬해 등 제현들이 공의 성덕과 대의가 오래되어 혹 민멸됨을 두려워하여 돌을 다듬어 장차 묘도에 이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나에게 글을 부탁함에 일찍이 나 또한 공의 의로움을 흠모하여 왔기 때문에 공의 비문을 쓴다는 것은 영광스러움이 될 것이기에 마침내 명을 하게 되었다. 명하기를, 커다란 재앙을 피하지 않는 것이 충이요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 것이 절의로다. 공은 능히 이 두 가지를 다하였으니 이것은 인륜의 지극함이로다.
지금에 이르러 저 독정을 바라봄에 묘가 있고 사당이 있어 영령이 어둡지 않고 빛을 발하는 도다.
유풍이 숙연함에 어리석은 자들도 서서 슬퍼하니 이와 같이 행한다면 어디인들 들어가지 못하겠는가.
숙인 군자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 천년 후에 내가 그 역을 명하노라.
가선대부 행 강원도 관찰사 안동 권익상은 삼가 글을 짓다.
[原文]
崔淸神道碑
高麗檢校政丞觀稼亭崔先生神道碑銘并序
立朝而犯顏直諫臨亂而仗節守義者非其所學之正見理之明烏可能也歷稽史牒盖絶無而僅有余於觀稼亭崔先生不勝景慕焉謹按公諱淸字直哉姓崔氏貫慶州新羅時孤雲先生諱致遠倡明道學稱爲天儒選入唐朝擢甲科官至侍御史聲名聞天下實爲鼻祖後從祀 聖廟有諱承老相高麗成宗斥佛崇儒封淸河候諡文貞諱齊顏諡恭順諱玄培侍中大提學於公爲高祖也曾祖諱隰賛成事祖諱有慶都巡察使考諱子雲判奉常寺事妣豊壤趙氏以恭愍王甲申生公公生有異質聦明過人未弱冠受業於益齊李先生門篤志力學先生亟稱曰必爲一世大儒以其從孫妻之恭愍王辛丑登文科調寶文閣學士明年十月紅賊階海西勢甚急王去邠南幸公扈駕而行至福州翌年賊平陪王在淸州翌年春始還都公執靮左右鞠躬盡瘁勳績尤多以功陞政堂文學乙巳拜中書侍郎時辛旽擅權擧朝靡然趨附公上疏駁之每至上前輒叱旽旽嚴憚之王亦不悅爲旽所斥貶信州監務蒞政三月治化大行男女異路因早抗疏亨辛旽矢乃兩遂投紱歸鄕乙卯以僉議中賛召戊午出爲南路宣諭使以廉直聞癸亥聘于大明 皇帝賜紫金魚袋甲子還拜檢校政丞見群小得志慨然退隱不聞時政及我 太祖鼎革與來隱因公貴生等諸賢入杜門洞掛朝天冠戴蔽陽笠登不朝峴各言其志公曰遠遁山野誓不出世樵之耕之知者其誰遂隱於楊州之豊壤 太祖三年徵以左賛成不起 御駕三枉閉戶不出 太祖知其不屈封其所居山名曰御來親題其門曰觀稼亭標以東國淸風西小高節公歎曰山名御來吾何居焉乃與松山趙公狷移家松山相對輒慷慨泣下自號松隱居士盖不忘松嶽也嘗至花石亭歌麥穗而自傷聞者悲之 太宗甲午九月二十八日卒葬于楊州豊壤讀亭堯谷丑坐之原至今稱崔政丞墓洞配慶州李氏左議政靖順公諱誠中女菊堂月城君蒨孫有賢德奉舅姑以孝敬君子以禮處妯娌以睦博涉經史有女士風以恭愍王丙戌生 太宗巳丑四月二十七日卒葬祔公墓有四男二女男長淵止文科郡守次信止左承旨次儉止版圖典書次漢止司直同中樞金自鏗司直劉信老二婿也淵止男敬仝文郡守敬忠叅奉 贈左承旨敬義進士敬誠副司直信止男智潤奉常副正敬浩縣監儉止男澈邇號三樂仁溥將仕郎德成典敎令漢止男澈仲僉正其餘內外孫不錄嗚呼公以通鍊之才早登文科羽儀王庭將大有爲値奸凶擅權面折其鋒直聲振天下將與世抹摋不能有所施措麗杜旋屋鏟跡人世抱至慚而卒惜哉雖然公歿而其義聲烈烈照人耳目使有志之士感慕而起敬由是論之公屈於一時而伸於百世於公何慽焉墓舊有碑年久字刓且不中式其後孫鶴基冕熙龍基德基賛海諸賢懼夫公之盛德大義久而或泯伐石將樹之隧道謁文於不侫窃嘗慕公之義以執役爲榮遂爲之銘銘曰。
不避强孽忠也不貳其節義也能盡於此二者人倫之至也睠彼讀亭有墓若堂英靈不眛曄曄有光遺風肅然懦者以立嗚呼由此而行何所而不入淑人君子其儀不忒千載在後我銘其德疆圍單閼仲春上浣。
嘉善大夫行江原道觀察使安東權益相 謹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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