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문집.고서.문헌 154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 사계 김장생선생 문인록(沙溪 金長生先生 文人錄) 송시열(宋時烈)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우암(尤庵)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은진(恩津)이다.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의 아들로서, 선생이 늘그막에 사문전수(師門傳授)의 서적을 주었으며, 관직은 유일(遺逸)로 좌상(左相)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기사년에 화를 당했다.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성무(聖廡)에 종사되었으며,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송준길(宋浚吉)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고, 병오생이며, 관향은 은진이다.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서, 관직은 유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이며, 성무에 종사되었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이유태(李惟泰) 자는 태지(泰之..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윤선거(尹宣擧)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이고, 경술생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로서, 생원이며, 관직은 유일로 집의(執義)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봉향되었으며, 문집을 남겼다. 유 계(兪 棨)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기계(杞溪)이다. 문과로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정축년에 척화(斥和)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천(林川)의 칠산서원(七山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집을 남겼다. 이 선(李 選)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이고, 관향은 전주(全州)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아들이다. 문과로 이조 ..

내가 우는 닭을 죽이려고 하나...

■ 이원(李黿) 익재(益齊)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나주(羅州)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공은 기상이 당당하여 절개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니,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 하였다. 《사우명행록》 ●공의 아버지 공린(公麟) 벼슬은 현령이다. 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 명이 절하면서 청하기를,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는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공린이 놀라서 일어나 보니, 음식 만드는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로 국을 끓이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옥산시고 서(玉山詩稿書)

■ 옥산시고 서(玉山詩稿書) 창작연대 : 1680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옥산(玉山) 이공(李公,1542~1609)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노선생(老先生)의 막내 아우[季弟]로 휘(諱)는 우(瑀)이고 자는 계헌(季獻)이다. 율곡 선생이 예(禮)로 집안을 다스림으로써 공(公)이 그의 영향을 받아 어른들을 받들어 아랫사람을 어솔(御率)하는 데 있어 매우 화락하여 집안을 평온하게 잘 다스렸는데, 문(文)과 질(質)이 다 갖추어져서 장공예(張公藝)와 양춘(楊椿)ㆍ양진(楊津)의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율곡 선생은 매양 한가할 때마다 위로 서모(庶母) 및 백씨(伯氏 큰형)와 중씨(仲氏 둘째 형)를 모시고 자질(子姪)들이 빙 둘러 시좌(侍坐)하고 있는 가운데 반드시 공에게 거문고를 타면서 영가(詠歌)하도..

송자대전(宋子大全)

송자대전(宋子大全) 형태서지 | 저자 | 가계도 | 행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宋子大全 판심제 宋子大全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87年刊 권책 卷首, 目錄 2권, 原集 215권, 附錄 19권 합 10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5×17.8(㎝) 어미 無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569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08~116 ●저자 성명 송시열(宋時烈) 생년 1607년(선조 40) 몰년 1689년(숙종 15) 아명 聖賚 자 英甫 호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본관 恩津 시호 文正 특기사항 金長生, 金集의 門人. 老論의 영수 ●초록 215권 102책. 목판본. 최초의 판본은 그의 사후에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100여 권으로 편집한 것인데, 간..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 / 시호 교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수적으로는 『필재당후일기(畢齋堂後日記)』가 있다. 이 책은 김종직이 1482년(성종 13) 11월 1일부터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기록한 승정원 일기로 44장의 행초로 되어 있다. 문서로는 교지류·서찰·분재기·명문·호구단자·점련문기가 있다. 교지류 로는 교·첩지 28장, 녹패(祿牌) 1장, 증직·증시(贈諡)교지 2장, 김종직의 부인·할머니·증조할머니 증직교지(贈職敎旨) 63장, 김종직 후손교지 83장이다. 서찰로는 1468년(세조 14) 김종직의 어머니, 1470년(성종 1) 김종직의 중형, 1483년 김종직의 전(前) 부인의 것이 있다. 분재기는 1509년(중종 4) 김종직의 계배 남평문씨가 친정 부모로부터 받..

급량잡단(及梁雜端) - 성호 이익(星湖 李瀷)

■ 급량잡단(及梁雜端) 성호 이익(星湖 李瀷) - 여주인(驪州人)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 우리나라 사람은 문헌이 부족한 관계로 상고하는 데에 그릇된 점이 많아 사기의 득실은 논할 것도 없고, 자기네 시조의 보록(譜錄)에 까지도 그 착오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경주이씨는 혁혁한 문벌인데도 지금 백사(白沙) 이상공(李相公)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매양, 우리의 시조는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라."고 했으니, 사량은 곧 진한 육부(六部)의 하나이다. 신라 혁거세 9년에, 급량부(及梁部)에는 이씨의 성을, 사량부(沙梁部)에는 최씨의 성을 하사했으니, 지금 경주 최씨는 곧 사량부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최치원은 사량부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씨의 선조는 곧 급량부인데 후..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 전례

■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 전례 1.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처음 고려로 들어온 것은 서기 1298년 8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과 유학 제거(儒學提擧)를 지내고 첨의참리(僉議參理)였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 연경에서 주자 전서(朱子全書)를 구입. 필사하여 1299년에 돌아온 경우와, 충선왕을 같이 호종한 권부「權溥, 1262년(원종 3)~1346년(충목왕 2)」의 아들 준「準, 1280년(충렬왕 6)~1352년(공민왕 1)」이 주희 사서 집주(朱熹 四書集註)를 구입하여 돌아와 권부「權溥 : 이제현의 스승이요, 장인」가 간행하기를 건의한 것이 최초의 일이다,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 1247년(고종 34)..

삼국유사 발문(跋文) /慶州府尹 李繼福 撰

삼국유사 발문(三國遺事跋文) 慶州府尹 李繼福 撰[全義人] (1512년 11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재간행) 우리 동방 삼국(三國)의 본사(本史)나 유사(遺事) 두 책이 딴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本府)에만 있었다. 세월이오래 되매 완결(完缺)되어 한 줄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겨우 4, 5 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여러 역사책을 두루 보고 천하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 그리고 모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오히려 그 견식을 넓히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이 책을 다시 간행하려 하여 완본(完本)을 널리 구하기를 몇 해가 되어도 이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찍이 이 책이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 ..

黃僉知慶壽宴序(황첨지 경수연 서)

[柏谷先祖文集冊五] ※황첨지(黃僉知)는 선산(善山)의 덕산황씨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1521(중종 15)~1575(선조 8)」 서예가를 말함. ■ 黃僉知慶壽宴序 黃僉知長督震龍氏與余同庚。歲丁巳。黃僉知携震龍氏翊洛中。爲震龍觀司馬會科也。震龍氏善楷隷草聖。名動縉紳間。爲冠冕一代。歲在癸丑。先君爲嶺南均田使。往善州見震龍氏草聖奇。揚厲其名。是以震龍氏之入洛也。不之他所。直到吾家仍留着。其時余齒雖同而筆不能成字樣。文不解丁字。然震龍氏不以不才棄。乃與之交。以之情密。其後有便自嶺南至。輒必寄書以訊。丙子。㺚兵大猘。余避地善州。震龍氏已作泉下人。訪黃僉知。則黃僉知見余敍舊時事。蔌蔌泣下。以余與震龍氏同庚交密故也。乃今聖后用其優老之典。黃僉知年旣八袠。蒙通政之賜。此門闌大慶。季胤元龍氏榮其主恩。是年季冬。爲設慶席。獻以壽杯。旁近邑及鄕黨之長者小者咸集其家慶之。隆懽娛之極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