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제50권
■ 이목구심서 3(耳目口心書三)
사람이 재리(財利)에 급급해하는 것은 자신의 성명(性命)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용렬한 사람은 도리어 성명을 가볍게 여기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우리 집이 삼포(三浦)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허리에 돈 10민(緡)을 차고서 얼음이 풀리려는 곳을 건너다가 미처 반도 건너지 못해서 드디어 빠지고 말아 그의 상반신이 얼음 위에 걸렸다. 마침 강가에 있던 사람이 급히 외치기를,
“당신 허리에 찬 돈을 풀어 버리면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 말을 듣기는커녕 두 손으로 돈을 움켜쥐고 잃어버릴 것만을 걱정하다가 그대로 빠지고 말았다.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절로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은 성인(聖人)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면 결코 측은지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일찍이 삼전도(三田渡) 얼음판을 건널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소에 곡식을 잔뜩 싣고 가는데 소가 뒤뚱거리며 미끄러져 빠지려 하므로, 그 사람은 고삐를 잡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소리쳐 몰다가 거의 둘 다 물에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마침 강가에 있던 사람이 멀리서 외치기를,
“내가 건네 줄 테니 내게 돈을 주겠소?”
하였다.
그가 ‘좋다’고 하자, 대가로 얼마를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이에 소는 드디어 빠지고 말았다.
마땅히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여 그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우리집 행랑채에 소년 하나가 기거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비둘기 길들이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잠시도 비둘기 얘기를 하지 않는 적이 없었고 거의 옷 입고 밥 먹는 일조차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개가 그의 비둘기 한 마리를 물어 갔다.
소년이 쫓아가 비둘기를 뺏고는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소년은 곧 비둘기 털을 뽑고 그것을 구워 먹을 때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둘기 고기는 꽤 맛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인자함인가, 아니면 욕심인가. 어리석을 따름이다.
권도(權道)를 잘 행하는 것은 글을 읽은 자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아랫백성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 가운데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함께 아버지의 시체를 모시고 지극히 애통해하며 가다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아버지 시체를 한길에 내려 놓고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그 형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 두 형제는 어버이를 잃은 슬픔을 당하여 아버지 시체를 메고 먼 길을 떠나 오느라 밥을 굶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아우는 수척해지고 기진맥진하였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개고기를 사다가 칼로 저미면서 그 형은 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우마저 죽게 되면 누가 아버지 시체를 모시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은 제발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리고서 그 아우에게 먹기를 권하였으나, 아우는 통곡할 뿐 차마먹지 못하였다. 형도 통곡하면서,
“내가 너를 위해 먼저 먹겠다.”
하고 드디어 저민 고기 한 조각을 먹자 아우도 먹기 시작하였고,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나니 행인들 중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리석은 사람도 죽음이 두려운 줄은 잘 안다. 그러나 재화만 보면 죽음의 길을 취하는 짓을 범하고 만다.
이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지극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장마진 후에는 은을 채굴하는 구덩이에 물이 가득 괴어 그 물을 퍼내기 어려우므로 돈을 후하게 주고 사람을 부리곤 하였는데, 그들을 개롱장(開壟匠)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은 구덩이 옆에 지하도를 파고 들어가다가은 구덩이에 비교적 가까워진 것을 알면 그 지하도 곁에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또 하나의 구덩이를 파고 은 구덩이와 지하도를 막고 있는 흙을 힘껏 파낸다.
이때 옆의 구덩이를 자꾸 곁눈질해 가면서 파다가 물꼭지가 터져나올 듯하면 곧 재빨리 옆의 구덩이로 뛰어들어간다.
마침내 물이 터져 세차게 며칠을 쉬지 않고 나오다가 그친다. 그러는 동안 개롱장은 굶주린 채 구덩이에 앉아 있게 되고, 지하도 입구에서는 그의 처자가 마음을 태우며 개롱장의 시체라도 흘러나오길 기다린다.
다행히 물에 휩쓸리지 않고 물이 준 다음에 나올 수 있게 되면, 그 개롱장은 득의양양해서 자기가 지하도를 요령껏 잘 팠기 때문이라고 과장하여 자랑한다. 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요행이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분수를 알지 못한다.
의롭지 못한 사람 가운데에서도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 있지만 편안하게 자기 집에서 늙어 죽는 사람은 만에 하나나 있을까 말까 하다. 어떤 장사꾼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저울대를 뚫고 그 빈 곳에 둥근 납덩이를 넣되 그 납덩이는 매끄러워 굴러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
자기 물건을 팔 때는 그 납을 몰래 굴려서 저울대의 머리 쪽에 오게 해 무겁게 하여 무게를 속이고, 자기가 남의 물건을 살 경우에는 그 반대로 하여 싼 값을 주었다. 늙을 때까지 배불리 지냈으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속임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병들어 죽을 즈음에 그의 아들을 불러 경계하기를,
“내가 치부할 수 있었던 것은 연환(鉛丸) 든 저울대를 잘 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익을 취하지 않고 알맞게 하였으므로 이득을 취한 것이 들통나지 않고, 속임수가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너는 나를 계승하되 실패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아들은 남의 물건을 두 배나 속여 취했으므로 부정한 방법으로 물건을 취득했다는 죄를 받아 죽었다.
횡재 또한 운수이나 함부로 마구 취해서는 안 된다.
포목장수 한 사람이 죽어 여러 동료 상인들이 그 장례를 치러주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어떤 장사꾼 하나만이 나무 있는 데서 쉬고 있었다.
그는 땅에다 아무 생각 없이 낙서하다가 구덩이에 은이 가득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매와 바지 속에 주워 넣었다.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고 동료들에게는 간다고 고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온 몸이 가려운 것을 참지 못해 흥인문(興仁門) 길가에 있는 집에 들어가 손으로 품을 더듬었다.
그러자 청개구리가 살아 튀어나오므로 그것을 땅에 냅다 던지니 죽어 버렸다.
이렇게 품에서 청개구리를 찾아낼 때마다 땅에 던지니 품속은 텅 비어 은이 한 전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청개구리가 없어진 것으로만 여기고 의아해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어떤 집 과부가 문틈으로 보니 한 남자가 품에서 은을 꺼내어 땅에 버리고 가버리기에 그 은을 모두 주워 감추었다.
다음날 은이 모두 없어진 것을 알고 그 상인은 상심하여 그 개구리 던졌던 곳으로 다시 와 봤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조그만 은 두 개가 보여 더욱 후회하며 찾으니, 그 집 과부가,
“무슨 미친 소리예요. 은이라곤 없었어요.”
하며 딱 잡아떼었다.
그래서 상인은 실망하여 나와 버렸다. 은 두 개는 2백 냥의 값이 나갔다.
그런데 상법에 동료 상인의 장례를 같이 치르지 않은 사람은 벌금 2백 냥을 물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이 2백 냥으로 그 돈을 내었다.
흉한 것을 피하고 길한 것으로 옮겨감에는 점을 치지 않아도 그 길흉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으면 된다.
어떤 사람이 무과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에 여관에 머물게 되어 그의 화살을 벽에 기대어 놓았다.
그때 어떤 거지 아이가 뜰에 서서 그 방을 엿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화살의 수효를 암기(暗記)하는 듯하였다.
이에 그 무인(武人)은 마음속으로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곧 감탕나무를 깎아 그 화살의 크기와 수효가 똑같게 만들었다.
그 화살을 먼저 화살 놓아 두었던 곳에 기대어 놓고 원래 화살은 감추어 놓고 기다렸다.
밤중이 되어 그 도적이 여관으로 쳐들어오자 그는 용마루로 올라가 감탕나무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도적이 물러서서 외치기를 ‘벌이야’ 하였다. 이는 벌이란 사람을 쏘는 것이므로 화살을 쏘라는 은어이다.
그가 연달아 쏘자 도적이,
“화살이 이미 다 떨어졌으니 진공(進攻)해도 좋다.”
하였다.
그때서야 무인은 원래의 대나무 화살을 꺼내 쏘기 시작하니 도적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위기에 처해서 장구(長久)하기를 생각하는 것은 오직 지극히 민첩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무 일 없이 한가로이 지낼 때는 머릿속에 변고에 처할 경우를 미리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
경강(京江)의 어선은 폭이 좁고 노를 많이 갖추고 있어 빨리 달릴 수가 있으므로 어떤 때는 상선(商船)을 약탈하고 멀리 도망가곤 한다. 재화를 많이 실은 상선에 도적이 올라가 도적질을 하는데 그 방법은 상선에 있는 밥숟갈을 거두어 그 수효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어떤 상선의 화장(火長 배에서 밥짓는 일을 맡은 사람)은 무식하면서도 지혜가 있었으므로 얼른 선창 밑으로 가서 수저 하나를 집어다 물 속에 버리고, 헤엄쳐 가서 도적배의 키 옆에 숨어서 도적 배의 밑부분 널판 밑에다 칼을 치올려 꽂아 표시를 해 두었다.
잠시 후 도적들은 숟갈 수효대로 사람을 죽이고, 전부 약탈해 갖고 도망갔다. 그 소년은 드디어 강화부(江華府)에 사실을 고하고 경강(京江)의 모든 어선을 집합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모든 어선이 포구에 정박하자, 그는 옷을 벗고 헤엄을 쳐서 물 속에 들어가 여러 배 가운데서 칼 꽂힌 배를 찾아내니, 그 도적들은 모두 법에 걸려 사형되었다.
정조사(正朝使)가 북경에서 돌아올 때 상인이 어미 원숭이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원숭이는 마침 새끼를 배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자, 어미 원숭이는 슬퍼하며 머뭇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그 상인은 원숭이를 위로하였다.
도중에 새끼를 낳자 그 사람은 소매 속에 새끼를 넣고 가면서 때로는 꺼내어 젖을 먹게 했다.
하루는 원숭이가 새끼를 빨리 꺼내 달라 하여 머리 위에 새끼를 이고 사람마냥 걸어가는데 소리개가 새끼를 채가버렸다.
이에 어미 원숭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니 그 사람은 또 위로하기를,
“네가 비록 슬퍼한다 하더라도 어찌 하겠는가. 원숭아, 너의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라.”
하였다.
여관에 이르자 원숭이는 문득 닭을 잡아 털을 뽑아 머리에 이고 소리개가 채갔던 곳에서 빙빙 돌아다녔다.
소리개가 또 내려와 움켜쥘 때에 어미 원숭이는 재빨리 소리개를 잡아 찢어 죽였다.
그리고 그 원숭이는 상인이 낮잠 잘 때를 기다렸다가 고삐를 풀어 목을 매어 자살했다.
아! 슬프다. 이것은 진실로 짐승이지만 사람이나 다름없고, 또 장사꾼은 사람이면서 오히려 짐승이나 다름없다 할 수 있으니, 어찌 사람이 귀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원숭이는 사람에게 잡힌 데다가 또 새끼마저 잃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어떤 사람이 은장도(銀裝刀)를 차고 있었다. 좌중에 한 사람이 그 은장도를 차고 싶어하니, 그 사람은 큰 고기 덩어리를 주면서 농담삼아,
“자네가 이 고기를 씹지 않고 곧장 삼킬 수 있다면 이 은장도를 주겠네.”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쾌히 승낙하고 그 고기를 삼켰는데 목구멍에 가로 걸리고 말아 두 눈이 튀어나오고 손으로는 가슴을 문질렀다. 곁에 있던 사람이 놀라,
“자네가 그 고기를 토해 내면 공짜로 은장도를 주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손을 휘저어 그 말을 듣지 않겠다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한참 만에 고기 덩이가 내려갔다. 그 사람은 곧 그 은장도를 취하고서 말하기를,
“고기를 토해 내면 좋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처음에 이미 내기한 것이 있으니, 토해 낸 후 도리어 딴소리를 할지 어찌 알랴.”
하였다.
아, 슬프다. 이익을 보고 탐이 나서 몸까지 망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마도 은장도를 보고 고기를 삼키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군도감(軍盜監)에, 장마비가 깨끗하게 개자 큰 구렁이가 창고 옆의 족제비 구멍으로 들어가 그 새끼를 삼키고는 배가 불러서 뜰에 나와 있었다. 잠시 후 족제비 암수가 급히 나와서 구렁이 앞에다 번갈아 땅을 파는데 그 길이가 매우 길어 대 홈통 같았다. 또 그 양 끝에다 수직으로 구멍을 파되 깊이는 암수가 각각 꼬리로부터 주둥이까지의 길이와 같게 하였다.
구렁이가 드디어 구불구불 기어서 땅 판 곳으로 들어갔는데, 머리로부터 몸 끝까지 꼭 끼어 빈틈이 없이 들어맞았다.
잠시 후에 구렁이는 몸 양 끝을 움직이지 못하고 배를 뒤집으려 하나 뒤집지도 못하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아마도 두 마리 족제비가 몰래 깨물었기 때문에 죽은 것 같다. 족제비들이 나와 구렁이의 배를 가르니 네 마리 새끼 족제비가 죽어 있었는데, 몸에는 다친 데가 없었다. 꺼내어 깨끗한 땅에 누이고, 암수가 번갈아 콩잎과 계장초(鷄腸草)를 물고 왔다.
먼저 콩잎을 펴서 새끼들 밑에 깔고 계장초를 꽤 두껍게 덮었다.
그리고 나서 암수는 각기 양쪽에서 주둥이를 잎사귀 속에 묻고 입김을 부니 새끼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아, 얼마나 지혜롭고 의롭고 자애로운가! 사람으로서 이 세 가지를 갖추었다면 선인(善人)이라 할 만하다.
전에 나는, 족제비를 잡아다 때릴 적에 여러 족제비들이 사방에서 모여 힘을 다해 그 위급함을 구해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의리는 가히 경탄할 만하다.
조리 정연하게 말하지 못하고, 남의 입을 따라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사람은 거칠고 엉성하지 않다면 어리석고 약한 자이다.
정도를 따르면 길하고, 역(逆)을 따르면 흉하다고 하였으니 자평(子平 서거이(徐居易)를 말한다) 전에 이미 이와 같은 좋은 술수가 있었다.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찌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도남(圖南 진단(陳摶)의 호) 전에 이미 이와 같이 사람을 잘 감별하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선인(善人)을 따라다니다 보면 날이 갈수록 날마다 얻는 바가 있을 것이고, 악인(惡人)을 따라 노닐면 날마다 잃는 것이 있게 된다. 인정상(人情上)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한다. 보물을 자물쇠로 잠가 놓고 도둑을 막느라고 겨를이 없다가, 도둑이 자기 눈앞에 나타나도 모른 채 자신의 목숨까지도 함께 잃으니 슬프다.
사특한 눈으로 추파를 보내는 것은 바곳보다 더하고, 미소지으며 은어(隱語)를 쓰는 것은 고(蠱)보다 심하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오관(五官) 중에 눈구멍과 혀끝을 단단히 봉해야 할 것이다.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올바른 말만 하는 것을 나는 경외하는 바이다.
혹 조용히 앉아 바르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제2등급으로 떨어진다.
또 남을 따라서 웃기나 하는 사람은 제3등급으로 떨어진다.
제3등급의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제1등급의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며 일생 동안 남을 속이는 사람이 있어 비록 꾸미는 데 익숙하여 스스로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가려진 것이 매우 얇으므로 가리면 가릴수록 나타나니, 고생스럽기만 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선(善)을 드러내는 일은 한없이 좋은 일이다. 그 선을 한 사람은 이름이 인멸(湮滅)되지 않고 더욱 힘쓰게 되며, 듣는 사람은 본받아 준칙을 삼으며, 그 일을 말하는 나 자신은 또한 그를 본받은 것이다.
하류(下流)에 처하기를 달게 여기는 것과 말을 빨리 하고 얼굴빛을 갑자기 변한다면, 위의(威儀)를 잃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송지문(宋之問)은 옛날의 간사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시(詩)는 평온(平溫)하니, 과연 성정(性情)의 바른 데서 나온 것인가.
채경(蔡京)은 옛날의 간휼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글씨는 굳세고 단아하니 과연 마음에서 우러나와 쓴 것인가. 이는 혹시 별종(別種)인가. 시나 글씨는 기예(技藝)일 따름이다. 단지 그 대체가 어떠한가만 보면 거짓과 바름을 구분할 수 있다.
간찰(簡札)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이 내가 말할 때 알아 듣는 것처럼 하기 위한 것이니 말은 간략하고 글씨는 해정(楷正)하게 써야 한다.
어찌 사슴이나 돼지와 무리지어 살 수 있겠는가. 목석(木石)과 함께 살 수 있겠는가. 시정배(市井輩)와 함께 교유할 수 있겠는가. 만일 통투(通透)ㆍ길상(吉祥)ㆍ문아(文雅)ㆍ순담(純淡)하여 그 중 한 가지 선(善)만 있다면 모두 나의 사우(師友)이다.
다행히 그런 사람을 얻어 함께 따르면 바라는 바가 지극할 터이니 어느 겨를에 그를 꺼리며 모멸하겠는가.
너그러운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혹 이른바 관후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분명하지 못해서 검칙(檢飭)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너그러움이 되겠는가.
기(氣)가 성한 동자(童子)로 하여금 마음껏 유희(遊戲)하며 지껄이게 하면 장차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는가. 아비가 되어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면 이는 자기가 저지른 것보다 더 심하다 할 수 있다. 책만 많이 읽고 생각을 적게 하며, 말이 간결하나 취미(趣味)가 없는 자는 헛된 이름이 다(多) 자와 간(簡) 자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천만 가지 흔단(釁端)이 섞이어 일어나는 것은, 단지 내가 천만 사람의 뜻과 원만하게 하고자 하나 되지 않고 반대로 천만 사람도 나와 원만하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한 사람이 하는 일에 있어서도 뜻이 같은 점도 있고 같지 않는 점도 있으니,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 가운데서 각기 뜻이 같은 점만 취할 뿐이라면, 함정은 설시하지 않아도 되고 적대하는 칼날은 거두어도 된다.
마음가짐을 온화하고 화평하게 가져 거역함이 없이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큰 복이다.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평안하며 조용해야 한다.
추위도 더위도 그런 마음 상태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옛사람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몸이 젖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상서롭지 못한 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남을 함부로 헐뜯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근거 없는 비방은 결국 탄로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에 비방을 받는 사람이 만약 요란하게 자신의 결백함을 변명하게 되면 또한 시끄럽게 되니, 비방하는 말의 경중(輕重)을 더욱 조심스럽게 살필 일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분노를 참고 욕심을 억제하라.”
했고, 또,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다.
대저 이 네 가지는 인생의 큰 방축(防築)이요 심학(心學)의 대업(大業)이다.
수신(修身)과 섭생(攝生)이 어찌 두 가지 길이겠는가. 마음의 불은 타기 쉬우니, 그것을 끄는 것은 분노를 참는 것이요,
정수(精水)는 새기 쉬우니 그것을 새지 않게 하려면 욕정을 억제해야 된다. 비장(脾腸)은 기(氣)를 기르는 곳이다.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을 삼가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또 기가 체하지 않고 아래로 새나가게 하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을 자제하는 것은 반드시 분명해야 하지만, 남을 대하는 데는 포용을 요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서 남이 꺼리는 바를 끄집어내는 것은 성실하고 순후함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이니 내가 징계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정을 오래 지속시키려면 먼저 작은 일이나 조그만 이유로 해서 생겨나는 미워하고 의심하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
대체로 남의 재주와 학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령 순간이라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의심하며, 겉으로는 조소하고 꾸짖기를 일삼는다면 어찌 보통 일이겠는가.
크게 보면 살기(殺氣)가 있는 것이니, 그 마음속을 궁구해 보면 이미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싹튼 것과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매일 처신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마땅히 ‘애연(藹然)’ 두 글자가 있어야 한다.
애연 두 글자는 행위하는 동안에 찾을 수 있는데, 애연은 자애(慈愛)와 휼혜(恤惠)에만 적용될 뿐 아니라,
비록 엄맹(嚴猛)하게 결단하는 일에도 이런 뜻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나면서부터 뜻이 없고 스승이 없어 고루(固陋)하고 과문(寡聞)한 사람이다.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는 중에 더욱 무능한 것이 넷이 있다.
곧 바둑을 둘 줄 모르고, 소설을 볼 줄 모르며, 여색을 말할 줄 모르고, 담배를 피울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비록 종신토록 할 수 없다 해도 해롭지 않다. 만약 내가 자제들을 가르친다면 마땅히 먼저 이 네 가지를 못 하도록 지도하겠다.
나는 혹독한 추위와 무더운 더위를 당해서도 종일토록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오똑이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가령 그의 학식이 우주를 포괄하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태하고 경망스러운 것보다는 백 배나 낫다. 그러므로 일찍이 기뻐하여 배우려 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무릇 사람이 영리하게 세상을 살아가려면 마치 곡례(曲禮)에 이른바,
“방에 들어가려 할 때는 문 앞에서 반드시 기침을 하고, 문 밖에 두 켤레 신이 있을 때 말이 들리면 들어가고 말이 들리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으며, 문이 열려 있으면 열린 채로 두고 문이 닫혀 있으면 닫고, 뒤에 들어올 사람이 있으면 닫되 다 닫지 말라.”
한 말이 진정 좋은 행세(行世)이다. 그 영리한 체하는 자가 혹 이런 행위를 하지 않고 반대로 행동하여 창피를 당하니, 이른바 행세라는 것을 알 만하다.
미친 듯이 외치고 큰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복종시킬 수 없고, 거칠게 책을 읽고 잡스럽게 낭송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로울 바가 없다. 정신은 소모되기 쉬우며, 세월은 빨리 지나가 버리니, 천지간에 가장 애석한 일은 아마도 오직 이 두 가지이리라.
향원(鄕愿 군자인 체하는 위선자)이 되기는 쉬우나, 광견(狂狷 광은 지나치게 진취적인 사람이고 견은 지나치게 자수적(自守的)인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다. 꿈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꿈을 해몽해서 일일이 징험해 보려 함은 성품이 조급한 것이다. 나는 늘 꿈을 꾸어도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대장부가 비록 궁한 집에서 살며 형편없는 음식이나마 끼니를 잇지 못한다 하더라도, 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궁핍함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취해서 복어국 같은 것이나 먹고, 지관(地官)에게 미혹되어서 조상의 묘까지 파 옮기거나, 혹은 자제로 하여금 부화하고 형식만이 정연한 문장에 탐닉케 하여 결과적으로 경서(經書)를 멀리하도록 만드는 사람은 나로서는 의혹스러워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다.
나이 어린 자제가 누워 잠자기나 좋아하고, 어른의 가르침은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무절제하게 멋대로 놀기만을 좋아하면 성품이 해이해진다. 이 경우 용렬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해끼치는 바는 없다. 그러나 만약 경박하고 재능이 있으며 구변이 좋은 사람이라면 교묘히 잘 꾸며낸 말로 남을 속이는데 힘쓸 것이니 장차 무슨 짓인들 하지 않으랴. 이런 까닭에 어린이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상대방을 노예나 시정의 장사치를 대하듯이 심하게 책망하면 노여워하나, 상대방을 덕이 있는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 기뻐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스스로 처신하는 바를 보면 스스로 자기가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시정배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명실(名實)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경학(經學)을 싫어하는 사람은 전체적인 커다란 근본을 매몰(埋沒)하기 위하여 미소한 불찰이나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늘리어 부연(敷衍)하고, 점쟁이에게 현혹된 사람은 그 세상과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엄폐하려고 약간 아는 일이라도 끝없이 과장하기를 마지않는다. 이런 습관은 더욱더 반성해야 할 점이다.
덤벙덤벙하는 관후(寬厚)와 각박한 상명(詳明)은 행하지 말 것이요, 또 느린 관후와 어물쩍한 상명도 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는 예악(禮樂)을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하지 않았는데 후세에 와서는 악(樂)은 없어져 논할 바가 없다.
그러나 예(禮)는 오히려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고 빠져 없어진 것도 있기는 하나 전부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행하려 들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심지어는,
“고금(古今)의 시의(時宜)가 다르고, 풍속은 변화시키기 어려우며, 빈부(貧富)도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니,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고금은 진실로 작량(酌量)할 수 없거니와 풍속은 때에 따라 따를 수가 있고, 빈부도 있고 없음에 따라 맞도록 하면 된다. 원기(元氣)에 병이 나면 인삼과 부자(附子)라야 고칠 수 있으나 구하기가 쉽지 않으며, 한 손가락이 갑자기 자유스럽지 않을 때는 약쑥으로 뜸질하면 고칠 수 있으며 따라서 구하기도 쉬운데 한탄하기를,
“큰 것은 다스릴 수 없고, 작은 것은 하찮다.”
하니, 어찌 사람의 본정이겠는가?
선비나 군자가 처신하고 거동하는 데 있어 첫째도《소학(小學)》이고, 둘째도《소학》이다.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이 경전을 주해(注解)한 그 공은 더할 수 없고,《소학》을 편집하였으니 이는 큰 공이다. 자제에게《소학》으로 가르치지 않고 그 경솔하고 거짓된 것만 꾸짖음은 눈금 없는 저울과 같다.
남의 혼사(婚事)에 문벌이나 따져 그 지체가 높은 이는 부추기고 낮은 이는 억제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도 사군자(士君子)들이 해야 할 행동 중의 하나이다. 문장에다 자신의 성명(性命)을 바쳐 고금(古今)의 일에 두루 박학(博學)하다 할지라도, 만약 이런 지식 외에 다른 한 종류의 진실된 취미가 없다면 그의 마음이 좁고 도량이 작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나의 몸은 지극히 작다. 호흡(呼吸)ㆍ순식(瞹息)ㆍ굴신(屈伸)ㆍ동정(動靜)은 내 뜻대로 하기가 아주 쉽다.
그러나 내 몸 이외의 허다한 만물 중에는 그 다과(多寡)와 강약(强弱)이 같지 아니하여 비록 그것들로 하여금 모두 내 명을 따르게 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 몸으로부터 처신하기를 각각 마땅하게 하여 후일에 해가 없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의 마음이 악에 빠져 만회할 수 없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정위(丁謂)는 조마(曺馬)를 성인(聖人)으로 여겼고, 하송(夏竦)은 이임보(李林甫)를 재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여겼다.
또 안산농(顔山農)은 욕(慾) 자로 학문을 삼았고, 허균(許筠)은 남녀가 어지럽게 놀아나는 것을 천명(天命)이라 여겼으며, 김성탄(金聖嘆)은 《수호전(水滸傳)》을 그의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르쳐 초학(初學)의 입문서(入門書)로 삼았다.
이것들은 진실로 표출(表出)한 것이라 놀랄 만하다. 그러니 마음씨가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이런 술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과연 정확하게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대부분이 우물쭈물하며 감히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위험스럽고도 슬픈 일이다.
행실은 항상 상층을 밟을 것을 생각해야 되고, 생활하는 데는 항상 하층에 처할 것을 생각해야 된다.
만일 내가 이미 평범한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 되기를 생각해야 하고 착한 사람이면 군자(君子)와 대현(大賢)이 되어 성인(聖人)이 되기를 생각해야 하니, 이는 꾸준히 노력하는 데 달렸다.
만약 큰 집에 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먹고 지낸다면,
“내가 장차 초가집에 살면서 거친 음식을 먹고 지내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야 하고 또 초가집에 살며 나물밥을 먹고 살면서,
“내가 장차 토담집에 살면서 굶주려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이는 겸손한 것이다. 대저 이와 같다면 어디 간들 편안하고 태평하지 않겠는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 이후로 수천 년 동안 도(道)를 해치는 자가 날로 일어나고 있다.
구류백가(九流百家)의 그 시끄러움은 견디지 못할 지경이고, 또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기예(技藝)나 오락(娛樂) 같은 잡다한 것들도 해를 끼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원(元)ㆍ명(明)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설(小說)ㆍ연의(演義)의 기풍이 과거(科擧)의 학풍과 해를 끼치는 바가 적지 않다.
미목이 수려한 남자가 소설과 과거학(科擧學)에 빠져서 육경(六經)의 문장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물리치고 과업(科業)에 종사하면서도 자신의 성명(性命)을 다 쏟지 않는 사람은 역시 성경(聖經)을 부호(扶護)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말이 비록 오활하기는 하나 마음을 깨우치는 데는 매우 절실하다.
말이 많은 것은 마음에 안정이 없기 때문이다. 신중함[愼]과 간결함[簡] 이 두 가지가 바로 언론의 요점이다.
사우(師友)는 현재의 경서(經書)요, 경서는 과거의 사우이다. 오직 나의 마음과 생명이 함께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에 의지하면 그 본심을 회복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와 친근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소홀히 여겨 금수와 같은 자가 되고 만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금치 못한다.
천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말과 행동이 꺼리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그 비천함을 익히 알면서도 점점 그 테두리 속에 들어가게 되고 만다.
이는 그 천한 사람이 나에게 붙좇으므로 내가 조금도 경계함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직하고 단엄한 사람과 가까이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방종하게 행동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그의 말이 나의 병통에 알맞는 교훈이 되지만 다만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자연히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경계하는 말이 자주 있게 되면 싫어하다가 끝내는 참지 못해 도리어 공격하게 되니 이것은 보통 이하의 사람들로서는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무릇 말을 함에 있어 진심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와 해야지, 단지 목구멍과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말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음흉한 사람이 안 된다.
생각을 항상 활발하고 관대한 데 두어서 나의 막힌 곳을 통하게 하는 데 오로지 힘써야 한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경사(經史)를 깊이 연구하다가 마음이 번거로우면 곧 그치고 때로 산에 오르거나 물가를 소요하다가 돌아오는 것도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된다.
사군자(士君子)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할 일도 없을 적에 독서조차 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하랴. 독서하지 않게 되면 작게는 정신 없이 잠이나 자거나 노름이나 하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는 일이나 돈벌이와 여색에 힘쓰게 된다.
슬프도다. 그러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독서할 따름이다.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자는 버린 백성이다. 그러나 힘과 계책이 서로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면 법을 범하지 않을 자가 적다. 이것은 잘하고자 하다가 졸렬해지는 것이니 천명을 따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는 하고, 남이 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행동을 하려 해서가 아니라 선(善)함을 택하였을 뿐이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나 역시 하는 것은 맹종하려 해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따랐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아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나는 시골 사람이라 무지몽매하고 안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근거 없는 비방이나 밝지 못한 의논으로 멋대로 남을 평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옛날의 진정한 영웅이나 수재들은 대부분 조용히 숙고한 후에 일을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무릇 민첩하고 정밀한 사람은 겉으로는 경박한 듯해도 남모르는 침착함이 있다. 만약 막히고 둔해서 안정해 있는 것이라면 어찌 귀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일을 해도 우물쭈물하다 못 하고 만다.
칭찬하는 것은 사실보다 지나치기 쉽고, 헐뜯는 것은 무정(無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보다 지나친 것은 진실로 옳아서가 아니요, 무정한 것은 진실로 글러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군자(士君子)는 가슴속에 참으로 옳음과 그름의 분별이 있어야 한다.
나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 진실로 조급하고 망령됨이 많다.
그러나 그 성벽(性癖)은 학문하는 사람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혹 한 가닥 떳떳하게 타고 난 천성이 아직 민멸되지 않았음인가. 유문(儒門)의 법으로 비추어본다면 알면서도 하지 못하고 좋아하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나약하고 타락하기 때문이니 비록 소인과는 조금의 간격이 있지만 한 번 잘못하면 소인(小人)이 되기란 곧 순식간의 일이다.
나도 스스로 이런 잘못이 있는 줄 분명히 안다. 그러나 입을 함부로 놀려 학문을 욕하거나 반목하여 경전을 얕보거나 앞뒤를 모르는 미친 자에게 비교하면 성학(聖學)을 보호하는 것이라 해도 혹 옳을 것 같다.
학문하는 사람을 친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나는 몸이 피곤하여 드러누워 낮잠잘 생각만 하나, 학문하는 사람은 힘써 바르게 앉아 조심스럽게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며, 나는 정신이 산란하여 경서(經書)를 읽는 것이 마치 귓가의 바람소리 같은데, 그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궁구한 후에라야 그만두며, 나는 남의 장단(長短)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말이 추잡하여 야비하게 되는데, 그는 말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말하고 또 그 말하는 것이 문란하지도 않다. 나를 그에게 견주어볼 때 백가지 행실이 백이면 백 모두 그만 같지 못하니 어찌 친애하지 않겠는가.
나쁜 소문은 배로 퍼지고, 좋은 소문은 반으로 줄어든다. 이는 양(陽)은 기수(奇數)이고 음(陰)은 우수(偶數)이기 때문이니, 군자는 반대로 하도록 힘써야 한다. 《주역(周易)》은 신명(神明)의 변화여서 진(秦) 나라 불로도 태우지 못하였다.
남에게 돈을 꿀 때의 마음과 남에게 돈을 갚을 때의 마음은 같지 않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시(詩)가 비록 소도(小道)이지만 정악(正樂)이 없어져버린 뒤에는 시가 일신의 낙(樂)이 되었다.
내가 이미 남을 해치지 않았으니, 남들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
남에게 근거 없는 비방을 한 사람은 반드시 까닭 없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
평상시엔 잘 양생(養生)하다가, 절개(節介)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기꺼이 생명을 버리는 것을 효(孝)라고 한다.
예(禮)를 아는 사람은 병법(兵法)을 잘 안다. 제재(制裁)하고 보집(補輯)하는 것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글로 남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도 성인(聖人)이 되는 기본이 된다.
길인(吉人)이 술에 취하면 착한 마음이 생기나, 어리석은 자가 술에 취하면 사나운 성질을 부린다.
먼저 성품을 본 뒤에 재질을 본다.
경(經)을 만일 취송(聚訟)하듯 다룬다면 경이 병통이 되고, 문장을 만일 출세의 수단으로 다룬다면 문장이 병통이 된다.
이러이러한 일이 생기면, 거기에 맞는 이러이러한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성질이 거친 사람일지라도 허심(虛心)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면 정(精)하게 되고, 고집부리고 자신(自信)하면 패(悖)하게 된다.
물의 이치에 반대되는 것이 재난이 되는 줄만 알고 일의 상도(常道)를 어기는 것이 재난이 되는 줄은 아직 모른다.
어린아이를 보고 가엾게 여기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함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고, 늙은이를 보고 가엾게 여기는 것은 씩씩한 기운이 지나갔음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천지의 정기(正氣)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서면 머리가 양(陽)이므로 하늘로 향하고, 누우면 등이 음(陰)이므로 땅에 붙인다. 몸은 부릴 수 있으나, 마음은 부릴 수 없다.
한 사람 거치고 두 사람 거쳐 전해지는 동안 와전됨이 더욱 심해지는데, 그걸 믿고 남을 의심한다면 그 때문에 자기가 암매해지는데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서(恕)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부자ㆍ형제ㆍ부부가 서로 외부 사람에게 참소하면, 대저 사람들은 그런 말을 조용히 듣지만 귀신이야 용서하겠는가.
사람이 굳세지 못하면 수립하는 것이 없고, 글이 굳세지 못하면 비루해지고, 글씨가 힘차지 못하면 글씨라 할 수 없다.
군자는 커다란 노여움이 있을 뿐이고 잗단 노여움은 없다 한다.
독서하여 얻는 것은 정신을 기쁘게 함이 최상이요, 그 다음은 수용(受用)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널리 아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울고 웃는 것은 천성이니, 어찌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랴. 어른들은 자신의 기쁨과 노여움을 속이니, 이 점은 어린이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술은 기혈을 순환시키고[導氣], 감정을 펴고[布情], 예를 행하는[行禮] 세 가지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마셔 정신이 혼미한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도리를 해친다.
할 수 있는데 구제해 주지 않는 사람은 비록 달리 크게 죄를 범한 것이 없더라도 육민(僇民 죄인)이라 부른다.
반나절 동안이라도 욕심을 줄일 수 있다면, 이는 만고(萬古) 중의 요순(堯舜) 시절과 같다.
기예(技藝)를 닦은 다음 천명을 기다리고 과거 때문에 속을 태우지 않는 사람은 9분의 바탕[田地]을 갖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논리에 맞는지를 생각하여 말해야 된다.
의서(醫書)를 읽으면 보신(保身)의 방법을 안다.
구름을 보고는 깨끗하고도 막힘이 없는 까닭을 생각하고, 물고기를 보면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잠겨 있는 까닭을 알아야 한다.
마을이 다 기뻐하고 노래할 때는 기쁜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된다.
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고상하고 장원(長遠)하게 하여 태도가 점잖게 된다 한다.
글을 많이만 읽는 것을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섭렵하라는 것은 아니다.
많이만 읽고 연구하지 않으면 막히고 고루해지는 병통이 있기 때문이다.
남을 깔보는 사람은 자신의 식견을 넓힐 수 없다.
둘러앉아 헛된 이야기만 하면 참다운 총명은 사라져버린다.
서민들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지 않는다고 책하는 것은 또한 관대하지 못한 것이다.
대저 안(安)이라는 것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글은 형용을 귀하게 여기고, 글씨는 아담함을 귀히 여긴다.
언어는 요점이 있을 따름이다.
귀하다 할 만한 것은 유아(儒雅)한 기운이다. 장수ㆍ부인ㆍ농민ㆍ상인에게 만약 이런 기운이 있다면 친애할 만하다.
만물이 모두 그렇다. 교활한 사람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곧 나를 공경해서이다.
서적을 교정함이 명(明) 나라에 이르러 갖추어졌으니 명 나라 유림(儒林)들의 공(功)은 한(漢)의 유가들의 전문적인 업적에 뒤지지 않는다. 도박에 마음을 쓰면 이로 인연하여 기가 거칠고 잡스러워져 고칠 수 없게 된다.
군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먼저 좁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마음이 좁으면 곧 남을 의심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는 병통은 암매해서 그렇고 멋대로 하는 병통은 경솔해서이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통하게 하는 것을 귀히 여기고, 독서하는 데 있어서는 활용을 중요시한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좋은 선비가 아니다. 일은 크고 작은 것에 관계 없이 앞뒤를 깊이 생각한 후에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집안에 용렬한 아들과 오활한 아들이 있으면 그들이 집안을 떨쳐 일으키지 못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활한 아들은 어버이를 욕되게 하니 어찌할 것인가.
슬프고 슬프도다!
친척 사이의 불화는 때로 명리(名利) 때문에 생긴다. 고광(古狂)이 친척과 떠난 까닭이 이 때문이었다.
간음(姦淫)과 탐람(貪濫)은 진실이 죽은 지 이미 오래고, 몸은 비록 없어지지 않았으나 마치 낡은 물건이 인광(燐光)을 빌려 행하는 것과 같다.
말이 유창하다고 어찌 중도에 맞는 것이겠는가. 일을 난삽하게 처리하는 것이 상도(常道)이겠는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먼저 그의 작은 허물을 살폈다가 그가 가기를 기다려 곧 비웃는 자를 물여우의 무리라고 한다.
번잡함을 없애고 진실을 북돋운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망과 비방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난다. 남이 나를 알아주면 진실로 즐겁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해로울 것이 또 무엇이 있으랴.
간사한 사람은 꾸짖을 필요조차 없다. 효과도 없이 나의 성색(聲色)만 수고롭게 할 뿐이다.
남의 문장에 대해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극히 미세한 일이지만 일찍이 큰 화(禍)가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너와 나라는 것을 잊는다면 어찌 다툼이 있겠는가.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가져야 한다 함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자하여진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남을 의심하지도 말고 남이 의심한다고 따지지도 말라.
좋은 일은 9분(分)까지 이루어지다가 모두 1분(分)에서 이지러지게 된다.
노여워할 일도 아닌 것에 반드시 크게 노하고, 별로 놀라워할 만한 것도 아닌 곳에서 크게 놀라니 아, 슬프다.
비루한 사람들이다. 속인(俗人)이 알지 못한다고 어찌하리. 다만 맡겨 둘 뿐이다.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는 호원(胡元)을 쫓고 열제(烈帝 의종(毅宗)는 사직(社稷)을 위해 죽었다.
이런 일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이래로 명(明) 나라뿐이다. 한(漢) 나라도 미치지 못한다.
불초한 자제로 하여금 궁지에 빠지게 하는 것은 부형(父兄)이 자주 무식한 탓이다.
집 안에 도박 기구를 들여 놓는 것은 자손들로 하여금 투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몸을 용납하지 못할 곳에 남을 처하게 하지 말라.
분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후회할 일이 있을까 근심하는 것은 사람됨의 기본이다.
콩팥 두 개는 마주 붙어 있는 형상인데 바깥쪽은 원형이고, 안쪽은 구부러졌고 오목하다.
그러므로 두 귀는 마주 붙어 있으면서 바퀴 모양의 뚫어진 구멍으로 되어 있다. 폐는 아래로 늘어져 있다.
그러므로 코는 매달려 있다. 심장의 끝은 조금 남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혀는 그 형상을 닮아서 세로로 누워 있고 또 그 혀 끝은 뾰족하다. 비장과 위장은 서로 부딪쳐 마찰하는 형세로 비장이 가로로 위를 감싸 주고 있으니, 이것은 입술의 모양과 마찬가지이다. 간(肝)에는 모서리가 있으니 이는 눈의 모양을 닮은 것이다.
심장은 하나인데 앞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위로 올려 붙었으니 불[火]에 해당한다.
콩팥 두 개는 뒤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내려 붙었으니 물[水]에 해당된다. 이는 음(陰)과 양(陽)이 마주 대한 위치가 분명하다.
허파와 심장이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혈(血)과 기(氣)가 서로 따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간(肝)과 콩팥이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것은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비장은 중앙에 위치하니 토(土)의 바른 위치이다.
부(腑)는 양(陽)이다. 위(胃)는 부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인두(咽頭)와 이어져서 앞에 위치해 있다. 장(臟)은 음(陰)이다.
폐는 장의 근본이므로 후두(喉頭)와 이어져서 뒤에 위치해 있다. 폐는 소리이고, 목구멍은 피리이며, 심장은 음악과 같다. 혀는 이것들을 조절하는 것이요, 말은 악(樂)을 이루는 것이다.
숨쉬고 먹고 침을 분비하는 이 세 구멍은 입과 관련이 있다. 배설과 정액(精液) 두 구멍은 외신(外腎)과 관련되어 있어 위아래의 관(管)이 각기 용도가 있다. 사람이 처음에 생길 때는 물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3개월 되면 장부(臟腑) 가운데에서 콩팥이 제일 먼저 생긴다. 이미 세상에 태어나서 젖을 먹은 지 32일이 지나면 한 번 변증(變蒸 변은 정지(情智)가 변하는 것이고 증은 혈맥에 열이 나는 것이다)하고, 먼저 콩팥이 생기니 물의 공용(功用)이 지극하다.
옛 장도(臟圖)에는 인(咽)이 후(喉)의 뒤에 있다. 그러나 서양의 장도를 보면 후가 인의 뒤에 있다. 이것이 의아스러운 단서이다. 그러나 손으로 목을 더듬어 헤아려보면, 위로 통하는 기관이 분명히 앞에 있으니, 서양의 장도가 맞는 것 같다.
목구멍이 앞에 있어 곡식의 맛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陽)의 도(道)이다. 항문(肛門)은 뒤에 있으면서 곡식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것은 음(陰)의 도이다. 폐는 기(氣)를 내고, 심장은 피를 만든다. 그러므로 장부(臟腑)의 힘살이 심장과 폐와 통하게 되어 있어 서로 운반되니, 이는 힘살이 아니고 그 기관의 가운데가 비어 대나무통과 같이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인가.
척추뼈는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요, 집의 대들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오장(五臟)이 모두 등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또 심장의 힘살과 콩팥의 힘살이 모두 척추에 부착되어 있으니, 어찌 중요하다 하지 않으랴.
단양(單驤)이 고설(古說)을 들어,
“왼쪽 콩팥은 부(腑) 가운데에서 방광(膀胱)이고 오른쪽 콩팥은 명문(命門)인데, 부 중에서 삼초(三焦)이다.
남자는 정액을 저장하고, 여자는 태(胎)에 매어 있어 이치로써 주재(主宰)한다. 삼초에는 당연히 방광과 같은 형태가 있다.”
했다.
왕숙화(王叔和)는 말하기를,
“삼초(三焦)에는 장이 있으나 형태가 없다.”
했으니, 역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른바 삼초(三焦)란 무엇인가. 인체 가운데에 상ㆍ중ㆍ하 세 다른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어, 사람의 마음이 맑고 고요하며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즉 정기(精氣)가 삼초에 흩어져 있어 온 몸이 영화로운데, 한 번 욕심이 일어나면 마음의 불이 맹렬히 타다가 삼초(三焦)의 정기(精氣)를 모아 명문으로 들어가 쏟아 버린다.
그러므로 이 부(腑)를 초(焦)라고 한다. 서둔(徐遁)이 굶어 죽은 사람의 장부를 살펴보니, 오른쪽 아래에 손같이 큰 지막(脂膜)이 있어, 바로 방광과 상대하여 있는데, 두 개의 하얀 맥이 그 속으로부터 나와 척추에 끼어 올라가서는 뇌를 관통하고 있었다.
생각건대 이것은 곧 도가(道家)들이 말하는 협척쌍관(夾脊雙關)이라는 것으로, 손 크기의 지막(脂膜)이 바로 삼초라는 것을 아마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황제서(黃帝書)》에는,
“상초(上焦)는 안개와 같고, 중초(中焦)는 거품과 같고, 하초(下焦)는 도랑과 같다.”
하였고, 편작(扁鵲)은,
“초(焦)는 근원으로 물과 음식의 통로가 되고, 호흡을 맡는 기관이다.
상초(上焦)는 심장 아래, 하격(下膈) 위(胃)의 입구 위에 있다.
중초(中焦)는 위(胃) 중간에 있어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다.
하초(下焦)는 배꼽 아래에 있는데 그 위치는 방광 위에 해당된다.”
하였다.
단양과 서둔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볼 때 모두 위치가 거의 맞는 듯하고, 황제(黃帝)가 말한 안개니 도랑이니 하는 삼초에 대한 그의 논리도 버릴 수는 없다. 생각해 보건대, 형체가 있어 방광과 마주한 삼초가 있으니 안개ㆍ거품ㆍ도랑 같다는 말에 구속될 필요가 없으며 또 안개ㆍ물거품 같은 무형(無形)의 삼초도 있으니 편작의 말대로 세 곳에 나누어져 있는 것일까.
삼초가 이미 장부의 대열에 끼어 있으니 곧 형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형의 삼초가 하나이고, 무형의 삼초가 셋인지 의심스럽다.
또한 정액을 저장하고, 태를 이어매는 것은 기관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
만약 삼초가 무형이라면 명문(命門)은 하나의 조그만 살덩어리로 어찌 모든 것을 저장해 포용해 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태에 맨다 하였으니, 또 하나의 방광과 같은 포(胞)가 명문에 매여서 이를 포문(胞門)이라 하는데 이른바 기항지부(奇恒之府)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삼초는 유형(有形)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맥경(脈經)에는 삼초로써 명문지부(命門之腑)로 여기지 않고 포문자호(胞門子戶 자궁(子宮))가 바로 그 부라 하였다.
오장(五臟)이 위치하고 있는 순서로 말하면 비장이 중앙에 있고, 복부의 내부로 말하면 콩팥은 중앙에 위치하여 있는데, 폐골(蔽骨)인 구미(鳩尾)에서부터 모제(毛際)에 있는 곡골(曲骨)에 이르기까지가 복부이다. 배꼽은 한가운데에 있는데 거기로부터 곧장 뒤에 위치해 있는 콩팥과 서로 대하여 있다.
사람이 맨 처음 형체를 이룰 때에는 대개 하거(河車 태반(胎盤))가 가장 먼저 응결한다. 그 가운데에는 한 개의 줄기가 돌출하여 생겨나는데 이것이 탯줄이고, 탯줄 가운데에 한 점의 정혈(精血)이 있는데 이것이 콩팥이 된다.
그 다음엔 비장(脾臟)이 되고 간(肝)이 된다. 이리하여 신장과 배꼽은 서로 겉과 속으로 상대가 된다.
이 탯줄 가운데에서 신장(腎臟)이 먼저 생겨나고, 이미 형체를 이룬 후에 태어나면 탯줄은 비로소 말라서 떨어진다.
비유컨대 과일이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꽃받침이 생겨 꽃잎이 갖추어지는데 꽃받침 뒤에 이미 조[粟]알만한 열매가 맺혀 있다가 열매가 성숙해진 후에 꽃받침이 비로소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 《갑을경(甲乙經)》에 이르기를,
“신(腎)이란 이끌어 들인다는 뜻으로 기(氣)를 이끌어다 골수(骨髓)에 통하게 한다.”
했다.
《좌전(左傳)》에 등(鄧) 나라의 삼생(三甥 추생(騅生)ㆍ염생(聃生)ㆍ양생(養生))이 등군(鄧君)에게 초 문왕(楚文王)을 죽이라고 권하여 말하면서,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당신은 후회막급[噬齊]일 것이다.”
하였는데, 주(註)에,“제(齊)는 제(臍)와 같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신장은 기운을 끌어다 골수로 통하게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배꼽을 끌어다 마주 위치하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배꼽은 콩팥과 가지런히 위치하고 있으므로 배꼽 제[臍] 자에 가지런할 제[齊]가 붙은 것이다.
장부(臟腑)는 모두 오행(五行)을 타고 생겼으므로 그 기관들의 발영(發榮)도 역시 각기 오행을 갖추고 있다.
폐(肺)는 피부 털에 속하는데 털은 마르고 날카로우므로 금(金)과 같고, 심장(心臟)은 혈맥(血脈)에 속하는데 피의 색이 불[火]과 같이 붉고, 비장(脾臟)은 토(土)를 주로 하므로 살덩어리가 그것과 같고, 간(肝)은 목(木)을 주로 하므로 근막(筋膜)이 그것과 같고, 신(腎)은 골수(骨髓)를 주로 하므로 골수의 모양이 물과 같으니 이는 정당한 품성(品性)이다.
그러나 또한 한 가지가 네 가지를 갖추고 있다. 마치 폐는 털이 마르고 날카로운 것과 같아 금(金)의 정품(正稟)을 받았으므로, 똑바로 선 것은 목(木)과 같고 그 빛이 검은 것은 수(水)와 같고 그 뾰족뾰족한 것은 화(火)와 같고 그 장양(長養)하는 것은 토(土)와 같으니, 이런 식으로 유추해 보면 다른 기능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타고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있으므로 콩팥에는 명문(命門)이 있고 운영의 묘(妙)가 있다.
따라서 배꼽이 정신의 집[神闕]이 된다. 봉산(鳳山)에서 농사를 짓는 어떤 백성이 있었는데 그는 글을 잘 알지 못하였고, 겨우 훈민정음을 약간 터득하고 있었다.
집에《소학언해(小學諺解)》가 한 권 있었는데, 그는 내심 매우 흡족해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행동거지와 언행을 《소학언해》에 준거하여 행하였다.
그의 아내와 약속하기를,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는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하였고 날마다 서로 마주보며 단정하게 꿇어앉아 언해본을 읽으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고 크게 놀라 그를 미친 병에 걸렸다고 지목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굶어죽기 십상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대저 봉산이란 곳은 바닷가의 구석진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풍속이 거칠고 강폭하여 사나운 성질을 지녔으며 농업이나 상업을 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 중에서도 더 건장한 사람들은 큰 활 당기는 법을 배워 무과(武科)에 응시할 뿐, 공부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이 백성도 평소 아무런 식견(識見)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그와 같이 거친 환경 중에서도 스스로 힘써 노력하였으니, 또한 탁월(卓越)하지 않은가. 강계(江界)의 백생(白生)은 은장(銀匠)이었다. 그는 비녀와 칼집을 만들었는데, 비교적 여러 공장(工匠)보다 솜씨가 정교하였다.
그가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갓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서 두드려 주조하였는데, 물건을 팔 때는 두 가격을 부르지 않았으며 생활할 수 있는 정도면 그만이었으므로 또한 돈 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두 손을 모으고 호탕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힘차고도 드높았다.
밤에는 반드시 글을 지으며, 때론 시를 읊어 책에다 적어 놓기도 했다. 급급하게 얻고자 하지도 않았고 처량하게 근심하지도 않았으니, 그는 공장으로 변장한 은자(隱者)가 아닌가. 여러 공장들도 매일 공장 일을 같이 하며 지내긴 했으나, 어찌 그 사람됨을 알 것인가.
광주(廣州) 옛 고을의 민생(閔生)이란 사람은 양생(養生)하는 사람이었는데 늙어서 뼈만 앙상하되 마른 학(鶴)처럼 훤칠하였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어렸을 때에는 밥을 잘 먹어 창자가 터질 지경인데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의원이 말하기를, 하루에 한 수저씩 줄이라고 하여 오랜 기간이 되니 나중엔 몇 수저만 먹어도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수련(修鍊)에 관한 서적을 읽었고 어떤 때는 아예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가 허하면 보통 사람보다 병이 더 심했다. 그러므로 늘 몇 수저씩 먹는 외에 때로 기운이 부족하면 대추나 감을 몇 개 먹거나, 또 술 몇 잔 먹으면 병이 들지 않았다. 또한 도가(道家)의 양생법대로 몸과 수족을 구부리고 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토해 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은 임맥(任脈)의 기운을 잘 조절하므로 한 번에 천리 길을 가도 배고픔을 못 느낀다. 나도 이것을 배웠다.”
하였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도 그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곽옥(郭玉)이란 자는 삼화(三和) 사람으로 맹인이다. 성품이 총명하고도 민감하였다. 날마다 서당에 가서 사람들에게 《소학》을 읽으라 하고 자신은 단정히 앉아 듣기만 하였는데,《소학》을 거침없이 다 외었다.
또한《소학》에서 배운 것을 실천했는데, 그의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정성과 효도가 갖추 지극하였다.
또 일찍이 점치는 것을 배우면서,
“역(易)은 점복(占卜)의 종(宗)이 되는 것이다.”
하고, 또한 듣고서 그 이치를 깨달아 그 내용을 외었다.
노래나 피리 소리가 떠들썩하게 울리면, 희색을 나타내어 손뼉치면서 통쾌하게 웃곤 하였다.
그러니 진실로 맹인 중에 호탕한 사람이 아닌가. 임희수(任希壽)는 옛날 승지(承旨)였던 임위(任瑋)의 아들인데 어렸을 적 자(字)는 불남(芾男)이었다. 미목이 수려하여 마치 여자 같았다. 일찍부터 문예에 능하였으며 그림에는 더욱 신묘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 겨우 17세에 죽었는데, 그의 전신첩(傳神帖) 세 권이 전한다.
그 신첩에는 모두 한때 명사(名士)였던 사람들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일찍이 많은 인사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상제가 되었을 때 높은 벼슬아치들이 찾아와 조문할 적에 임희수가 가만히 보고 그렸던 것이다. 또 길을 가다가 문득 문인(聞人)을 만나면 즉시 그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집이 가난하여 물감을 갖출 수 없었으므로 대부분 먹만을 가지고 그렸는데도 모두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였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여러 번 그렸지만 모두 만족하지 못하여 임희수에게 가지고 갔다.
임희수가 광대뼈 사이에 몇 번 가필(加筆)을 하니, 강세황의 실물과 아주 비슷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크게 탄복하였다.
세마(洗馬)인 원계손(元繼孫)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언진(李彦)의 시와 임희수의 그림은 근세 제일이다.”
하였다. 아, 이언진 역시 27세에 죽었으니, 재주란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김홍기(金洪器)는 수련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다. 나이는 50여 세인데 모습이 매우 맑고 말랐다. 평생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한 번 잠자리를 같이 하여 낳은 자식일 것이다.
성품이 산수(山水)에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 되었다. 하루에 수백 리를 돌아다녀도 신발은 새것 같았다. 더워도 땀 흘리지 않고, 추워도 떨지 않았다. 밥은 몇 숟갈만 먹고도 며칠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름ㆍ장ㆍ물고기ㆍ고기 등을 먹지 않았다.
일찍이 10문(文)의 돈을 가지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개 월 후에 돌아왔는데, 쓰고도 아직 몇 전이 남았었다. 그리고 야밤중에 일어나 앉아 골절(骨節)을 움직여서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나게 했다. 명승(名僧)과 함께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상승(上乘)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으로 수좌(首左)인 담화(曇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태백산(太白山)에 살다가 지금은 성주(星州)에서 사는데 본디 글은 모르지만 경을 강(講)할 때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맨발로 눈속을 걸어다녔다고 한다. 또 상안선사(尙顔禪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역시 지행(智行)을 겸비한 중의 우두머리로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김홍기는 금강산에 가서 그와 더불어 교유하고 싶었으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처자(妻子)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하였다 한다. 형조(刑曹) 서리(胥吏) 지수연(池受衍)이란 사람은 예학(禮學)을 익힌 사람이었다. 사집(士執) 성대중(成大中)이 그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사집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는 고례(古禮)를 담론하는 것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가례(家禮)》이후에 의문(儀文)에 잘못된 것이 많은 점에 대하여 개연히 일어나 탄식하니 뚜렷이 옛사람의 너그러운 풍도가 있다.”
하였다.
또 그는 항간에 묻혀 있는 기사(奇士)를 열거하여 이를 증명하였는데, 선비 김유성(金維城)은 시(詩)에 능하였으나 평생 성당(盛唐) 이후의 책은 보지 않았고, 윤유성(尹有城)은 가난을 견디고 글을 읽으며,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나오지 않았는데, 율곡(栗谷)의 책을 공경하기를 노재『魯齋 이희언(李希彦)의 호』가 《소학(小學)》을 대하듯 하였고, 최경섭(崔景燮)은 박학하여 문장에 능하였고, 쌍좌전(雙坐廛) 김씨(金氏)는 병서(兵書)에 통달하였고, 또 동네 입구에서 갓을 만드는 장인 아무개는 병으로 꼽추가 되었으나 시를 아주 잘했다고 하였다.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는 간신히 한 사람의 몸이 들어갈 만한 토굴이 있었는데, 그곳 중이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문까지 만들어 달아 놓았다. 조생(趙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늙으면서 기이한 데가 있었다. 늘 갈건(葛巾)을 쓰고 책을 짊어지고 와서 그 토굴 안에서 지냈으므로, 그곳 중이 때로 한 끼의 밥을 주곤 하였다.
그는 주야로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 그의 학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남들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책을 짊어지고 나와 가버리는데, 그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오므로 사람들이 그를 토굴(土屈)의 조생(趙生)이라고 불렀다.
아! 그는 은군자(隱君子)인가. 후에 중 증오(證旿)에게 들으니 조생은 사람을 잘 속인다고 하였다.
변필재(卞弼才)는 충주(忠州)의 광대이다. 변필재로부터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6대가 모두 효자(孝子)였다.
변필재의 아들도 나이가 어렸으나 천성이 도(道)에 가까워 규범 따르기를 노성(老成)한 사람처럼 하였으니 기이한 일이다.
충주에 사는 홍유보(洪有輔)에게 아들 쾌종(快宗)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지혜로워 책을 두루 읽고자 하였으나 웃어른들이 그것을 금하였다. 쾌종이 8세 되던 해에 어느 날 갑자기 쾌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이틀 후에야 장서루(藏書樓)에서 찾았다. 그는 실컷 책을 읽느라고 배고픈 줄도 잊고 있었다. 이로부터 그의 학문은 성숙해갔다.
어느 겨울날 아침 홀연 울타리 사이로 수척해진 중이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온 몸은 새벽 서리를 맞아 온통 하얀 모습이었다. 이에 그 중을 불러 방에 들어오게 하고 죽을 쑤어 주었다. 그 중의 말은 시원해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 쾌종과 더불어 의논이 부합되어 서로 얻는 바가 많았다.
이때 쾌종의 나이는 13세였다. 그 중은 하룻밤을 자고 난 뒤 종이 한 장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
그 종이엔 시가 적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바다로부터 단봉까지 팔천리 길인데 / 距海丹峯路八千
날고 또 날면 마땅히 채색 구름가로 향하리 / 飛飛應向彩雲邊
소승도 역시 인간이라 / 小僧亦是人間物
바야흐로 양양 땅에서 말 내릴 때에 만나리라 / 將見襄陽下馬年
이 시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그 아이의 장래를 말한 것인가 하나, 확실히 알지 못하겠다.
쾌종은 올해 16세라 한다. 신돈행(愼敦行)은 산음현『山陰縣 지금의 산청군(山淸郡)』 아전(衙前)의 아들이다.
어려서 산음의 신시직(愼侍直)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그는 문재(文才)가 숙성하고 학행(學行)이 또한 높았다.
이미 장성하여 사부(士夫)와 만날 적엔 반드시 대청 아래에서 절하여 사부들도 그를 공경스럽게 대했다.
일찍이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상경(上京)하여 회시(會試)에 나아가 바야흐로 이름을 기록할 때 담당자가 ‘유학(幼學) 신(臣) 신돈행(愼敦行)’이라고 적어 놓았더니, 신돈행이 그것을 보고 급히 ‘공생(貢生) 신(臣)’으로 고쳤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그의 고집을 힐책하자 신 돈행은 말하기를 ‘유학(幼學)이란 사부(士夫)의 명칭이오.
나는 시골의 백성이니, 어찌 그 이름을 옳지 않게 하여 우리 임금을 속이겠소.’ 하였다.
그의 다른 언행도 모두 이와 같았다.
서호(西湖)의 김씨 낭자(金氏娘子)는 어려서부터 지혜로웠고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촌가(村家)에서 품팔이를 하고 살며, 나이 23세나 되었지만 아직 시집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자는데, 정해년 봄에 강포한 자가 침입하였다.
낭자는 손가락을 깨물어 ‘쥐 이빨이 집을 뚫으니 등불 치는 나방의 운명이네.[鼠牙穿屋蛾命撲燈]’라고 8자의 혈서를 쓰고 물에 빠져 죽었다.
3일이 지난 후에 시체가 떠올랐는데, 안색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병술년 7월 일본으로 향하여 바다를 건너가던 배가 침몰하여 1백여 명이 죽은 일이 있었다.
오직 키잡이[梢工] 한 명만이 배가 쪼개지려는 것을 보고 급히 배 밑으로 들어가 조과(造果) 궤짝을 짊어지고 나와 어깨에 메었다.
조금 있다 배가 부서지자, 드디어 한 조각 널판을 타고 물에 떠 있었으므로 배가 침몰될 때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역관(譯官) 현모(玄某)가 그의 손자 한 명과 종 하나를 데리고 있고, 또 동행인 몇 명이 있어 한 널판지에 함께 동승하였다.
그런데 현모의 손자가 갑자기 물에 떨어져 죽었는데, 그때 나이 17세였다. 이에 현모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곧 기절하여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종은 머리를 풀고 발상(發喪)하여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그리고 그 종은 그의 상전인 현모의 시체를 널판지 위에 얽어 묶고, 그것이 가라앉을까봐 걱정하였다.
그러나 함께 탄 사람들은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맨 것을 끊고 시체를 바다에 밀어 넣어 버렸는데 그 종은 힘이 약하여 끌어당길 수가 없었다.
그 키잡이가 탄 널판이 바람에 밀려 순식간에 지나쳐 버렸으므로 마침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키잡이는 계속해서 조과를 먹으면서 며칠을 지낸 후에 동래(東萊)로 돌아와 정박하였다.
아! 현씨(玄氏)의 종은 충직하고도 예(禮)를 알았고, 키잡이 또한 지혜가 있었다.
박붕규(朴鵬逵)는 이조(吏曹) 서리(書吏)의 아들이다. 일찍 고아가 되었는데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일찍이 병약(病藥)의 설(說)을 인용하여 자신의 잠(箴)을 이렇게 지었다.
“나의 병통은, 마음은 좁아서 막힘이 많고, 기(氣)는 조급해서 견고하지 못하고, 양(陽)은 넘쳐 거만하고, 모습은 못생겨 일그러지고, 지혜는 혼미해서 가려짐이 있으며, 정신은 막혀서 졸렬함을 드러낸다.
혹 용기 있게 나아가다가도 끈기 있게 유지하기가 드물고, 혹은 놀이에 빠져 근본을 잃으며, 거듭 괴벽한 행동을 하여 위험한 데로 향하여 스스로 신기한 것에 현혹되고 만다. 점점 자라면서는 약간 빌미가 있었으나 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었다.
약관(弱冠)이 된 후에는 여러 증세가 점점 증가하여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얘기하거나 안 하거나 간에 때때로 발작하여 이미 고질이 되어 버려 지금에 이르러서도 고치지 못하였으니 앞으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라건대, 훌륭한 스승은 오묘한 비결을 특별히 발하시어 온량(溫涼)의 약을 조제하고, 평준(平峻)의 성품에 맞추어 군(君)ㆍ신(臣)ㆍ좌(佐)ㆍ사(使)ㆍ보(補)ㆍ사(瀉)로 빨리 병의 뿌리를 제거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또 스스로 그 약을 교기반성환(矯氣反性丸)이라 명명(命名)하였는데, 홍의(弘毅)ㆍ공화(恭和)ㆍ통련(通鍊)ㆍ돈박(敦樸)ㆍ평이(平易) 각 5냥으로 짓되, 위의 5가지 재료를 무극(無極) 가운데에서 채취하고, 여기다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조화시켜 방촌기(方寸器)에다 담고 대담(大膽) 일부(一部)를 넣어 달인 다음 강수(江水)ㆍ한수(漢水)에다 씻어 찌꺼기를 제거하고 짓이겨 큰 주먹만하게 환(丸)을 만들어 가을볕에 말린 뒤 청명탕(淸明湯)에 씹어먹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심계(心溪)에서 살 때 일찍이 궁촌(宮村) 김직재(金直齋) 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산방수필(山房隨筆)》에 실려 있는 설제기(薛制機)의 말에 장사(長沙)로부터 남창(南昌)으로 진(鎭)을 옮김을 축하하는 계(啓)에,
“밤엔 장사(長沙)에서 술 취하고 새벽에 상수(湘水)를 가니, 돛대에 제비를 머물게 하기 어렵고, 아침엔 남포(南浦)에서 떠나 저녁엔 서산(西山)으로 오니, 흔들리는 패란(佩鸞)의 소리를 듣는도다.”
했고, 삼짇날(上巳日)에 손님을 청하는 글에는,
“3월 3일 장안(長安)의 물가에 미인이 많이 모여, 한 잔의 술 마시고 한 수의 시 읊는 것은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서 계사(禊事)를 행한 일과 같네.”
하였고, 또,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 완상하는 마음, 즐거운 일, 이 네 가지는 겸하기가 어렵고, 높은 산 높은 고개, 우거진 숲 울창한 대나무 있는 곳에 여러 현인(賢人)이 모두 이르렀다는 것은 호랑이를 잡아 묶는 수법이라, 대체로 얻기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에 심제현(沈齊賢)의 걸주계(乞酒啓)에,
“달 밝고 바람 맑은 이 좋은 밤을 어떻게 보낼까. 좋은 날씨에 공기 맑으니 바로 이날이라.”
하였으니, 이것 역시 이런 방법을 쓴 것이니 매우 미묘하다.
장홍(萇弘)은 촉(蜀) 나라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3년 후에 피가 벽(碧)으로 변하였다 하는데 생각건대 피는 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니, 벽(碧)은 곧 보물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방사(方士)가 말하기를,
“익주(益州)에 금마벽계(金馬碧鷄)의 신이 있는데 제사지내고 기도하면 오게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가 주(註)를 달기를,
“금의 생김새는 말 같고, 벽의 모양은 닭과 같다.”
하였다.
대개 벽은 촉 지방의 산물이다. 우연히 벽을 얻는 것이지, 피가 벽으로 변한 것이겠는가?
송(宋)의 악가(岳珂)가《정사(桯史)》를 저술하였는데, 일찍이 정(桯)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정(桯)은 침대 앞의 책상이라 하였다.
수안(遂安) 남옥(南玉)이 계미년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일본인 우창정잠(牛窓井潛)이 백운율시(百韻律詩)를 가지고 와서 화답(和答)하여 주기를 요구하였는데 때는 마침 밤이었다. 시온(時鞰 남옥(南玉)의 자(字)은 이경(二更)쯤에 기초(起草)하여 붓을 멈추지 않고 한 편을 끝마치니, 아직 닭이 울지도 않은 때였다. 잠(潛)은 그 신속함에 놀랐다.
사신 일행이 강호(江戶)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미 시가 먼저 이르렀다. 강호의 송전 노인(松田老人)은 나이 80여 세였는데 스스로 빈회(儐會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모임)에 네 번이나 참석했었다고 하면서 신청천(申靑泉)의 안부를 물었다.
시온이 즉석에서 이렇게 화답하였다.
네 번이나 하늘 서쪽을 지나 멀리 바라보며 떠서 오니 / 四閱天西博望浮
영험한 빛이 바닷속 주에 어려 있네 / 靈光獨立海中州
백양나무 이미 청천의 무덤을 지키는데 / 白楊己宿靑泉墓
백발노인은 이 본원루에서 거듭 환영하네 / 霜髮重迎本願樓
이에 송전은 청천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시온이 또 화창하기를,
사십육 년 전 건너왔던 나그네가 / 四十六年前度客
화필을 다하여 선루에 기록하네 / 盡將花筆記仙樓
하니, 송전은 서글퍼하며 말을 멈추었다.
일본인 임신언(林信言)은 대대로 문관을 지냈는데, 미련하면서도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사신 일행의 빨리 가고 늦게 감이 모두 그의 회답에 달려 있었으므로 사신 일행은 깊이 그것을 우려하였다.
마침 임신언의 서기(書記)인 구보태형(久保泰亨)이 문사(文事)로써 시온을 만나니, 시온이 그 시에 화답하기를,
임군이 홀로 비심의 책임 맡았으니 / 林君獨掌裨諶命
일찍이 공의 문 향하여 채필을 들었네 / 早向公門彩筆橫
하였다.
태형이 편지 끝에 써서 보이기를,
“삼가 성의를 다하여 돌아가는 대로 태학두(太學頭)에게 전하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사신 일행은 급히 출발하라는 회답이 왔는데, 이는 시온의 힘이었다.
문장이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니 시온의 재주는 따를 수가 없다. 성사집(成士執)이 남옥(南玉)과 일본에 들어갔을 때 눈으로 그 일을 보고 나를 위해 이와 같이 말해 주었던 것이다. 시온은 남옥의 자(字)이고, 청천(靑泉)은 신유한(申維翰)의 호(號)이다.
서북쪽의 구석진 돌담은 내가 오줌을 누는 곳이다. 그 돌담에는 사향쥐의 구멍이 있어, 그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온다.
그래서 오줌 눌 때마다 쥐굴을 파내어 포를 만들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마다 살생(殺生)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날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을 쾌히 떨쳐버리지 못하였으나 계속 노력하니, 지금은 그런 생각이 끊어져 죽일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것은 하찮은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일에도 힘쓸 것인가, 아닌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호)이 한천(寒泉)에서 강학(講學)할 때, 매양 이른 아침에 여러 생도들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정원의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서로 읍례(揖禮)하고, 당(堂)을 향해 엄숙히 기다린다. 선생이 사당(祠堂)에 참배하고 나와 당에 앉아야 여러 학생들은 비로소 당에 오른다.
곧 높은 목청으로 ‘의리지심(義理之心)이 잠깐이라도 있지 않으면 인도(人道)가 멸식(滅息)된다.’는 구절을 세 번 외면 제생들은 공손하게 듣는다. 비로소 《소학(小學)》ㆍ《시경(詩經)》을 차례로 강의하여 마치면, 또 각기 일과(日課)로써, 《중용(中庸)》ㆍ《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나 염락(濂洛)의 여러 책을 강한다. 강학이 파하면, 또 각기 그날의 강설(講說) 내용을 정리하여 드린다. 그러면 선생은 손수 교정하고 정리하여 내려 주는데, 날마다 이와 같았다.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가 일찍이 육호룡(陸虎龍)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매번 호룡에게 말하기를,
“너의 이름은 부르기가 심히 불길하니 빨리 고쳐라.”
하였다.
그 후 호룡은 결국 죄를 입어 사형당하였다.
유하가 늙어 손수 시를 다듬고, 베갯속에 백은(白銀) 70냥을 저축해 두고서, 일찍이 여러 문하생들에게 자랑하며 보여 주면서,
“이것은 훗날 내 문집을 발간할 자본이니, 너희들은 알고 있으라.”
하였다.
아 ! 문인들이 명예를 좋아함이 예부터 이와 같았다. 지금 사람들이 비록 그의 시를 익숙하게 낭송하나, 유하는 죽어 그의 귀는 이미 썩었으니 어찌 그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미 죽은 후에는 비록 비단으로 꾸미거나 옥으로 장식해도 기뻐할 수가 없고, 또 비록 불로 사르거나 물에 빠뜨려도 성낼 줄 모른다.
적연히 지각이 없는데 어찌 그 희로(喜怒)를 논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살아 있을 적에 은전 70냥으로 돼지 고기와 좋은 술 등을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일생 동안 주린 창자나 채우지 않았는가.
그러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호』은 시를 지었다가는 곧 물에 던졌으며, 최근에 이언진(李彦瑱)은 생전에 자기의 원고의 반쯤을 태워버리고, 그가 죽은 후에 반쯤 남은 원고를 순장(殉葬)하였으니, 이 늙은 유하와는 다르다.
민멸(泯滅)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과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는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맡길 따름이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아름다운 옥이라고 칭찬하고 나쁜 옥[玦]이라고 헐뜯겠는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은 강릉(江陵)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수초본(手草本)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의 시에 이르기를,책상 선반에 《격몽요결》의 수초본이 아직 남아 있는데 / 几閣猶留要訣草 시험삼아 읽어보니 정신이 응결되어 있네 / 試看心畫摠精神
하였다.
나에겐 성급한 성격이 있으므로 매양 관대함과 여유를 가지려 애쓴다.
그러나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끈 성급함을 드러내고 나서 또 성급히 촉발한 것을 후회하곤 한다.
그래서 일의 실마리가 싹틀 때부터 관후(寬厚)ㆍ포함(包含) 등의 글자로써 곰곰이 마음을 진정시키면 잠시 후엔 무사하게 되므로, 수용(受用)이 매우 넓게 되었다. 그러나 미리 예방하기란 매우 어려우니, 이 때문에 내가 주야로 맹성(猛省)한다.
무릇 가래병을 고치려면, 시내의 잔 물고기를 한꺼번에 산 채로 20내지 30마리를 삼키는데, 날마다 두세 차례씩 먹는다.
이렇게 5~6일 동안 계속하면 가래가 없어진다고 한다. 급(伋)이란 글자에 대해 《설문(說文)》에는 다른 뜻은 없고, 단지 인명(人名)이라고만 하였다.
공급(孔伋)의 자(字)가 자사(子思)이니, 아마도 급 자에 사(思)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자의 제자인 연급(燕伋) 역시 자(字)가 사이니, 즉 급(伋)에 사(思)의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이후 자(字)의 뜻이 인멸된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옛사람의 이름엔 모두 뜻이 들어 있다. 공자(孔子)의 여러 제자들을 들어 얘기해 보겠다.
《설문(說文)》에 연(淵) 자는 물이 빙빙 돌아드는 모양이라고 하였으니, 안자(顔子)의 이름자는 아마도 여기에서 취한 것 같다.
점(蒧)은 점(點) 자와 같은 글자로 작은 점이란 뜻이다. 검으면 희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증점(曾點)과 해용점(奚容蒧)은 모두 자가 석(晳)이다. 적흑(狄黑)의 자 역시 석(晳)이다. 쾌(噲)는 곧 목구멍이란 뜻이므로 안쾌(顔噲)의 자는 자성(子聲)이요,
악해(樂欬)의 자도 자성이다. 치(哆)는 입을 벌린 모양이다. 입을 일단 벌린 후에는 다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칠조치(漆雕眵)의 자는 자렴(子斂)이다. 곤괘(坤卦)에 이르기를,
“입을 다물면 허물이 없다.”
하였다.
여기서 괄(括)이란 포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궁괄(南宮括)의 자는 자용(子容)이다. 길[路]은 경유할 수가 있으므로 계로(季路)의 이름이 유(由)이고, 안무요(顔無繇)의 자도 로(路)이다. 마을[里]은 거처할 수가 있는 곳이므로, 후처(后處)의 자는 자리(子里)이다. 이것이 그 대강의 예이다.
그 나머지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자가 자우(子羽)이고, 고시(高柴)의 자가 자고(子羔) 같은 것의 뜻은 오늘날 알 수가 없다. 그 대부분이 진 시황이 분서(焚書)할 때 없어졌기 때문이다.
근세에 무주(茂朱)의 백성 중에 산이 무너진 곳에서 석갑(石匣)을 얻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철퇴(鐵槌)가 들어 있었다. 그 철퇴에는 ‘한원범회(漢元梵回)’라고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용산(龍山)의 조모(趙某) 집에 있다.
비록 깎여지고 떨어지긴 했으나 그 조각한 것이 매우 정교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혹 한(漢) 나라 사람의 성명일 것이라고한다. 그러나 한대(漢代)에는 본디 범(梵) 자가 없었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이 어찌하여 갑에 담겨져 무주에 묻힐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술객(術客)들의 압승(壓勝)하는 유이거나, 또 부적(符籍)이나 주문(呪文)에도 원(元)ㆍ범(梵)ㆍ회(會)ㆍ막(莫) 등의 문자가 있으니, 이 글자 역시 그런 종류가 아닌가. 혹은 도선(道詵)이나 무학(無學) 같은 무리들의 소행인가.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도 매우 많다.
경(敬)은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운 처지일수록 소홀해지기 쉬우므로 가정에서 더욱 각별히 예를 지키게 하는 것이 백성을 지키는 큰 둑이 된다. 지금의 습속에는 부부 사이에 예절이 매우 없어 일단 흔례를 올린 후에는 도무지 절을 하지 않는다.
시동생과 형수가 서로 절할 때 시동생 처가 형수 옆에 있으면서도 거만하게 절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예절인가. 중국에도 이런 풍속이 있다. 심용강(沈龍江)의 《문아향약(文雅鄕約)》에 이르기를,
“향속(鄕俗)에서 예법의 문장이 번잡한 것이 병통인데, 오직 부부간의 예절에 대해서는 가장 간략해서 흑 일년쯤 지나도 서로 읍이나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친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니 어찌 친하다고 해서 예를 지키는 것에 더욱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살피건대 처음에 친영(親迎)하여 혼례를 치르기까지는 모든 예법을 다 갖추더니, 오래되었다고 드디어 예절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최근에 날마다 일과(日課)로 독서하면서 네 가지 유익한 점을 깨달았다.
광박(廣博)ㆍ정미(精微)하여 옛일에 통달하고 뜻과 재주에 도움이 되는 점은 관계하지 않는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배나 낭랑하여 그 이치(理致)와 취지(趣旨)를 잘 맛보게 되어서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둘째, 차츰 날씨가 추워질 때에 읽게 되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유전(流轉)하여 체내(體內)가 편하여 추위도 잊을 수가 있게 된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에 눈은 글자에, 마음은 이치에 집중시켜 읽으면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에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하여 부딪침이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쳐 버린다.
만약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고 마음이 화평하여 기쁘고 몸도 건강한데다가, 등불이 환하고 서질(書帙)이 정돈되어 있고 책상과 자리가 깨끗하면 독서할 마음이 절로 생긴다. 더구나 뜻이 높고 재주가 통달하고 나이가 젊고 건장한 기운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독서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랴. 무릇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은 힘쓸지어다.
날마다 동자(童子)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면 입이 둔하여 잘 읽지 못하지만 밥을 먹지 않고 읽으면 배로 빠르고 시원스레 읽을 수 있었는데 여러 번 시험해 보아도 그랬다. 생각건대 음식 기운은 막히지만 청명(淸明)한 기운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인가 싶다.
자석(磁石)이 쇠붙이와 서로 감응(感應)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르다.
내가 일찍이 자석을 가지고 나침반 위로 몇 자 거리에서 흔드니, 나침반 속의 쇠가 자석을 따라 돌아갔는데 매우 기이하였다.
나침반을 유리로 덮어 틈이 없게 해도 기운이 통할 수 있어 이와 같았다. 시험삼아 주먹 안에 꽉 쥐고 흔들어도 역시 그러했다.
또 자석을 나무궤 속에 깊이 감추고 시험해 보아도 역시 그러했다. 또 벼룻돌로 나침반을 막고 궤 속에 깊이 감추고 시험해 보아도 역시 감응이 매우 빨랐다. 여러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 이치를 알지 못하니 이상하다. 이것은 하나의 성(誠)자에 불과하다.
《사기(史記)》 혹리전(酷吏傳)에,
“두주(杜周)가 정위(廷尉)가 되니, 이천석(二千石)의 봉록(俸祿)을 받는 사람 중에도 계옥(繫獄)된 자가 신고(新古)를 합하여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군리(郡吏)ㆍ대부(大府)가 핵장(覈章)을 정위(廷尉)에게로 송부(送付)하는 것이 1년에 1천여 건이나 되었다.
사건이 큰 것일 경우에는 연좌된 증인이 수백 인이요 작은 사건에는 수십 인이며, 멀리서 오는 자는 수천 리요 가까운 데서 오는 자라도 수백 리를 와야 했다.” 하였다.
여기에서 수십(數十) 아래에는 인(人) 자를 쓰고, 수천(數千) 아래에는 리(里)자를 쓰지 않은 것은 좋은 문법이다.
성인(聖人)의 경서(經書)는 이미 공자(孔子)의 손을 거쳤으니 뒷사람들이 멋대로 그 내용을 보태거나 깎아서는 안 되고, 단지 편(篇)이나 권(卷)을 검사하고 교정하며, 글자의 뜻이나 정확하게 살펴서 공경스럽게 지키면서 잃지 않아야 성문(聖門)의 충신이 됨에 해롭지 않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경서를 모방해 지으니 이는 매우 마땅하지 못하다.
진(晉) 나라 광릉 군수(廣陵郡守)인 공연(孔衍)은 한(漢)ㆍ위(魏)의 여러 사서(史書) 가운데서 아름다운 말과 모범적인 귀절을 따다가《한위상서(漢魏尙書)》26권을 편찬하였다. 수(隋) 나라 비서감(祕書監) 왕소(王邵)는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ㆍ인수(仁壽) 연간의 일들을 기록하였는데, 모두《상서(尙書)》의 의례(義例)에 준하여 지었다. 왕중엄(王仲淹 중엄은 왕통(王通)의 자)의《속경(續經)》도 생각건대 이것을 모방하여 지은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왕중엄이 양한(兩漢) 이래의 문자ㆍ언어의 고루함과 공명(功名)ㆍ사업(事業)의 비천함을 주워 모아 육경(六經)을 모방해서 억지로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의 열(列)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기롱하였는데 이는 그 병통에 맞는 말이다.
대저 한(漢)이 비록 삼대(三代)에는 미치지 못하나 말할 것이 있거니와, 저 위(魏)ㆍ수(隋)의 찬탈(簒奪)이 전모서명(典謨誓名)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 왕중엄은 수식의 기교가 있어 비록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 산정(刪定)하여 기술했음은 오히려 말할 만하나, 저 공연(孔衍)과 왕소(王邵)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러나 내가 일찍이 세상의 평판을 살펴 보니, 이탁오(李卓吾)는 주자(朱子)가 중엄(仲淹)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감히 기롱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진(晉) 나라 저작랑(著作郞) 악자(樂資)는《전국책(戰國策)》과《사기(史記》에서 자료를 채집하여《춘추후전(春秋後傳)》을 찬하였는데, 이것은 주(周)의 정왕(貞王)에서 시작하여 전전(前傳)의 노 애공(魯哀公) 후부터 난왕(赧王)에 이르러 진(秦)으로 돌아가는 사적을 속작(續作)하고, 또 진 문왕(秦文王)이 주(周)를 계승하여 이세(二世)의 멸망에서 끝나는 내용을 이어붙여 합하여 30권을 이루었다.
이 책은 비록 경(經)은 알지 못하였으나 또한 모방하여 전(傳)을 만들었으니, 무엇이 해로운가. 비록 경에 입각했지만 그 필법이 어긋나면 또한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와 비슷하게 되었다.[畫虎類狗]’는 비난을 받을 뿐이다.
《주자강목(朱子綱目)》은 바로 경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매우 정대하여, 나경륜(羅景綸)이 기린이 마땅히 다시 나와야 한다고 여긴 것은 또한 헛된 말이 아니다. 후세 지론(持論)이 정직한 사람들은《강목(綱目)》을 이어 수찬(修撰)함이 좋다. 우리나라의 이현석(李玄錫)이 지은《皇明綱目》은 또한 박식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에 참된 선비가 있어 붓을 잡고서 명산(名山)에 비장되어 있던 것들을 거두워들이고, 천하의 패관(稗官)의 야록(野錄)과 명현(名賢)들의 문집을 채집하여, 편(編)은 시비(是非)를 헤아리고, 강(綱)은 경서의 목록에 견주어 전(傳)에 의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리라.
그런데 구석진 나라에 태어나 책의 여러 종류들을 계속해 수집하지 못하고, 단지 명기(明紀)ㆍ편년(編年)ㆍ통기(通紀)ㆍ기사본말(紀事本末) 등 몇몇 종류들로만 정사(正史)를 편성하였으니 소홀한 점이 많을까 싶다. 그러나 그 서법(書法)을 세움은 늠연하여 공경할 만하다.
진우폐(陳于陛)가 말하기를,
“오경(五經)은《주역(周易)》ㆍ《예기(禮記)》이외에《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춘추(春秋)》는 모두 속작(續作)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앞서 저술한 바를 그 자손이 할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계속해 부연하면 그 할아버지 된 자는 한없이 기뻐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성인(聖人)의 말만을 경(經)으로 여기므로, 시대에 있어 삼대(三代)가 아니거나 저작자가 공자(孔子)가 아닌 것은 모두 경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이듯이 예부터 지금까지 경서는 스스로 경서(經書)일 뿐 속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없이 일어나는 병통의 근원은 ‘속경(續經)’이란 두 자로부터 나온 것이다.《춘추(春秋)》는 역사에 속하므로 만약 현명한 사람이 있다면 대대로 그 법(法)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시는《시경(詩經)》의 채시(采詩)하는 방법이 이미 없어져 후세로 내려올수록 체재가 판이해졌고, 또 넓으면서도 정밀하지 못하여 모방할 수 없으니, 주자(朱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자가 공중지(鞏仲至)에게 회답한 편지에,
“예부터 시(詩)는 무릇 세 번이나 변하였다.
한위(漢魏) 이전이 한 등급이요, 진(晉)ㆍ송(宋) 간의 안연지(顔延之)와 사령운(謝靈運) 이후로 당초(唐初)에 이르기까지가 한 등급이며, 심전기(沈佺期)와 송지문(宋之問) 이후 율시(律詩)가 정착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또 한 등급이다.
그러나 당 나라 초기 이전에 이루어진 시에는 진실로 고하(高下)는 있되, 그 시법(詩法)은 오히려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율시(律詩)가 나온 이후에 비로소 시의 법이 모두 크게 변하여 고인들의 옛 시풍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경사(經史)에 있는 운어(韻語)나 아래로 《문선(文選)》이나 한위(漢魏) 시대의 고사(古詞)로부터 곽박(郭璞)ㆍ도연명(陶淵明)의 작품까지의 것 중에서 베껴서 스스로 한 편을 만들어,《시경(詩經》과 《초사(楚辭)》의 뒤에 붙여 시의 근본 준칙으로 삼고, 또 그 아래 두 등급 가운데에서 옛것에 근사한 것을 택하여 각기 한 편을 만들어 도움이 되게 하고, 여기에 적합치 않은 것은 모두 내버려 이것들을 보거나 듣거나 가슴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여 마음 가운데 세속적인 언어나 뜻이 한 자도 없게 하면, 그 시는 고원(高遠)한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원하게 된다.”
하였다.
예(禮)는 대대로 전장(典章)이 있어 각각 책이 되므로 삼례(三禮)를 모방할 수 없다. 그러니 훌륭한 임금과 밝은 신하라면 짐작하여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은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과 사마광(司馬光)의 《잠허(潛虛)》에서 각기 25조목의 명목(名目)을 세웠는데 이는 《주역》을 모방하여 지은 것 같다.
시(詩)는 비록 작은 기예이나 뜻을 취함은 매우 넓다. 3백 편의 시가 감발(感發)시키고 징계함은 말할 것도 없는데, 당대(唐代)에 이르러 율시(律詩)가 나타나자 뜻이 참담(慘憺)해져 변통성이 없어, 옛것을 숭상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못 우울해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양중홍(楊仲弘)은 이렇게 말하였다.“무릇 당률(唐律)을 지을 때는 기처(起處)에서는 평직(平直)해야 하고, 승처(承處)에서는 침착하고 조용해야 하며 전처(轉處)에서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결처(結處)에는 깊고 무궁한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위아래가 서로 연관되어야 하고, 처음과 끝이 상응해야 한다.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속의(俗意)ㆍ속자(俗字)ㆍ속어(俗語)ㆍ속운(俗韻)인데, 20년을 공부해야 비로소 체득할 수 있다.”
이것은 상앙(商鞅)의 법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인위적인 기교(技巧)가 지극하면 천기(天機)가 어찌 활발할 수 있겠는가. 네 가지 속됨을 기피해야 하는 것은 진실로 유익한 말이다. 그러나 20년간 정력을 소비함이 가련하니, 그 마음은 응당 진흙탄자를 쥐는 것 같았다.
양중홍의 시가 과연 어떠한가. 아마도 두보(杜甫)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아 ! 그러나 두보는 작시법(作詩法)에 얽매였던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몸이 쇠약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어쩌다 정도를 지나치면 식은땀을 흘리고 숨이 찬다.
그래서 친척이나 집안 어른들은 나를 사랑하여 혹 나의 문사(文思)가 지나치게 날카로우니 구원(久遠)하고 질박(質樸)ㆍ돈후(敦厚)한 용어를 힘써 지으라고 경계하며, 의원은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많이 복용하거나 혹 양생서(養生書)를 많이 읽어 도인 토납법(導引吐納法)을 배워 보라고 권했다.
윤성문(尹聖文)이 일찍이 말하기를,
“자네의, 골격이 맑고 글이 맑고 마음이 맑은 것이 자네를 위해 걱정이네.”
하였는데, 이제 내 골격을 보니 전보다 다소 건강해졌으므로 걱정도 다소 풀렸다.
나는 매양 이 세 가지 맑음[三淸]에 대하여 스스로 웃으면서 그것은 나의 본색이 아니니, 청(淸) 자 대신 약(弱) 자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성사집(成士執)이 일찍이 말하기를,
“뼈가 가늘고 살이 많은 사람은 명예는 없어도 복이 있고, 반대로 살은 적고 뼈가 굵은 사람은 명예는 있어도 복이 없으니, 자네는 이 점을 경계하게.”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이 이처럼 나를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때때로 이빨을 두드리고 눈을 감는 방법을 실천하였더니 아주 효과가 있었다. 또 책을 읽다가 뜻이 심오하여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등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가렵고 마음이 어지럽고 들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포기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밤에 책을 읽을 때는 삼경(三更)을 넘기지 않으며, 독서하다 글의 맛이 없으면 곧 그만두며, 천천히 산보하되 30~40리를 넘지 않는다.
또 식사할 때에는 곽란(霍亂)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또 옛사람들의 네 가지 하지 않을 것을 지켰다.
곧 바람 피하기를 마치 화살을 피하듯이 경계하고, 또 복어국과 이름 없는 버섯을 먹지 않고, 무너질 듯한 다리나 봄 얼음이 풀리는 곳은 지나가지 않고, 위험한 절벽과 가파른 골짜기엔 가지 않으며, 또 위험하고 패륜한 내용의 글은 짓지 않고, 또 술이나 여자에게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매양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 대강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은 어째서 마음을 경계하지 않을까. 나는 옛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을 사사하고 있다. 손담포(孫談圃)는 말하기를,
“임영(林英)은 나이가 70인데도 기운이나 모습이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가 무슨 비결이 있어 이와 같이 정정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임영이 대답하기를 ‘평생 동안 번뇌를 몰라 내일 먹을 식량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고, 일이 닥치면 처리하고 가슴속에 남겨 두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고, 또 석임연(石林燕)이 말하기를,
“문 노공(文潞公)은 벼슬을 그만둘 때 나이가 거의 80세였다. 신종(神宗)이 묻기를 ‘경(卿)은 섭생(攝生)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임의로 자적(自適)하며 밖의 일로 인해서 온화한 기운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지나친 일은 감히 하지 않고, 일이 닥치면 숙고한 끝에 가장 알맞은 정도에서 바로 그친다.’ 하였다.”
하였다.
한라산(漢拏山)에서 날이 맑게 갠 날 멀리 중국의 강남(江南)쪽을 바라다보면 신방(申方 서남방을 말한다) 하늘 밖에 산이 있는데 마치 그 모양이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것은 송강부(松江府)와 금산(金山)인데 절강(浙江)의 상인들이 전하는 말이다.
술방(戌方 서북방을 말한다)과 해방(亥方 북방) 산동계(山東界) 사이에도 섬이 있는데 알 수가 없다.
마(磨)ㆍ도(兜)ㆍ견(堅) 석 자는 《유양잡조(酉陽雜俎)》에 보인다. 주자(朱子)가 이것에 대해 논한 바 있는데, 송렴(宋濂)이 일찍이 명(銘)을 지으니, 대개 삼가서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는 마치 옛날의 금인삼함(金人三緘)과 같다. 내가 일찍이 그 아래에다 써 넣기를,
“사람의 명민함은 기뻐하고 나의 지혜는 자랑하지 마라.”
하여 벽에 걸어 두었다.
여러 책에 모두 견(堅)이라고 씌어 있는데《유양잡조》에만 건(鞬)이라 되어 있다.
애체(靉靆)란 지금의 안경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은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썼다가 늙어서는 도리어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대저 젊은 사람이 사용해야 할 것 같다.
하루는 서여오(徐汝五)와 비방을 막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오(汝五)가 말하기를,
“근거 없는 비방은 남을 손상시킬 수 없다. 흙으로 빚은 인형과 나무로 만든 인형에게 무슨 앎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얼굴을 가리키면서 ‘눈은 저렇고 입은 저렇다.’고 시끄럽게 이야기하나 나무 인형과 흙 인형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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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정위(丁謂) : 중국 송(宋) 나라 사람. 자(字)는 공언(公言). 담소(談笑)를 잘하고 시(詩)를 잘했다.
[주02]조마(曹馬) : 조조(曹操)와 사마염(司馬炎)을 말한다.
[주03]하송(夏竦) : 중국 송(宋) 나라 강주(江州) 덕안(德安) 사람. 자는 자교(子喬).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관직
(官職)에 있으면서 많은 정치적 업적을 쌓았다.
[주04]이임보(李林甫) : 당(唐)의 종실(宗室)로 성품이 교활하여 정권을 잡고 휘두르다가 얼마 후 적이 쳐들어오자
근심하다 죽었다.
[주05]《황제서(黃帝書)》 : 중국 최고의 의서(醫書). 자연 철학에 입각한 병리학설(病理學說)을 주로 하는데, 전
국시대로부터 한 대(漢代)까지의 의학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주06]《갑을경(甲乙經)》 :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의서(醫書)로 모두 8권. 자서(自序)에 의하면
《침경소문(針經素問)》ㆍ《명당공혈(明堂孔穴)》ㆍ《침구치요(針灸治要)》 외 세 가지 책에서 요점만
모아 만들었다 하는데, 침구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주07]군(君)……사(瀉) : 약을 조제하여 병을 치료하는 방법. 주된 병을 치료하는 성분을 군(君), 합병증을 치료하
는 성분을 신(臣), 기운을 보(補)하는 것을 좌(佐), 약의 성분을 병 부위까지 가게 하는 것을 사(使), 병기운을
씻어 내는 것을 사(瀉)라 한다.
[주08]《산방수필(山房隨筆)》 : 원(元) 나라 장자정(莊子正)이 송말(宋末)과 원초(元初)의 사적을 적은 책으로
1권이다.
[주09]장홍(萇弘) : 중국 주(周) 나라 때 사람.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 장숙(萇叔)이라고도 함. 진(晉) 나라
범중행(范中行)의 난에 관계되어 진인(晉人)의 항의로 죽음을 당했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그에게 가서
악(樂)을 물었다.
일설에는 주 나라 영왕(靈王) 때 사람으로 신기한 짓을 잘했다 한다. 그가 죽은 뒤 흐르는 피가 구슬[碧]이
되고,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한다.
[주10]금마벽계(金馬碧鷄) : 여기서는 두 신(神)의 이름인데, 지금은 이 두 신이 살았다는 산의 이름으로도 불
린다.
[주11]악가(岳珂) : 중국 송(宋) 나라 때 학자. 자(字)는 숙지(肅之), 호는 권옹(倦翁)ㆍ보진재(寶眞齋). 《정
사(桯史)》는 송나라때 일을 1백 40여 조(條)로 나누어 기술한 책이다.
[주12]비심(裨諶) : 중국 춘추시대 정(鄭) 나라 대부(大夫). 국가간의 문서 초안을 잘 만들었다.
[주13]염락(濂洛) : 중국 송 나라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염계(濂溪)에서 살았고,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에서 살았으므로 생긴 말. 곧 송 나라 성리학자를 대표하는 말이다.
[주14]이제(二帝)ㆍ삼왕(三王) : 이제는 중국 옛날 성군(聖君) 요(堯)ㆍ순(舜)을 말하며, 삼왕은 옛날 중국
하(夏)의 우왕(禹王),은(殷)의 탕왕(湯王)과 주(周)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말한다.
[주15]전모서명(典謨誓命)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ㆍ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
陶謨)ㆍ감서(甘誓)ㆍ탕서(湯誓)ㆍ열명(說命) 등을 말하는데 요순 시대를 일컫는다.
[주16]삼례(三禮) : 《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의례(儀禮)》
[주17]《유양잡조(酉陽雜俎)》 : 당(唐) 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수필집. 충지(忠志)ㆍ예이(禮異)
ㆍ천지(天咫) 등 30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신괴한 이야기가 많다.
[주18]금인삼함(金人三緘) : 쇠로 만든 인형의 입을 세 군데 봉했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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