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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한잡록 1(遣閑雜錄) - 沈守慶隨筆集

야촌(1) 2011. 3. 26. 12:11

■ 견한잡록 1(遣閑雜錄 )

 

   심수경(沈守慶) 지음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6명이나 되고, 적어도 2, 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 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 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詩)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

 

●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容齋 이행(李荇)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洛西 이항(李沆)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松齋 이우(李堣)의 시이다.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 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찬立玉壇

하였다.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 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가정(嘉靖 : 중국 명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명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 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顧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

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장원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 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루(文會樓)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 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명에 말미암는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옆에 장사지냈으며,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진실로 탄복할 일이다.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 명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

   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 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 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 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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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한잡록(遣閑雜錄)


조선 중기의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沈守慶)이 만년에 심심풀이로 쓴 자료로. 《청천견한록(聽天遣閑錄)》이라고도 한다.

필사본. 1책. 저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많고, 일반 정사(政事) 시화(詩話) 설화 등을 수록하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 13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상층(上層) 문화의 동향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저자 인물소개

 

●심수경(沈守慶)

   [문과]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합격연령 31歲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5위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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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중종 11)∼1599년(선조 3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풍산(豊山). 자는 희안(希安), 호는 청천당(聽天堂). 아버지는 사손(思遜)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52년 검상(檢詳-正五品)을 거쳐 직제학(直提學-從三品)을 지냈다.


1562년 정릉(靖陵: 中宗陵)을 이장할 때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從二品)로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 설치를 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뒤에 대사헌(大司憲-從二品)과 8도 관찰사觀察使-從二品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선조 23)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正一品)가 되었다가 1598년 치사(致仕)하였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저서로는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聽天堂遺閑錄)》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朝鮮書道菁華 ◇燃藜室記述 ◇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