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권용현선생 묘갈명(權龍鉉先生墓碣銘)

■추연선생 권공 묘갈명(秋淵先生權公墓碣銘) 우리나라 선비의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는 간혹 품격에 차등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모두 갖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故추연선생(秋淵先生) 권공(權公)이다. 공의 휘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 추연(秋淵)은 호이다. 권씨(權氏)는 안동(安東)이 본관이며,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의 태사(太師) 휘 행(幸)이다. 그 뒤로 문탄공(文坦公) 일재(一齋) 휘 한공(漢功)과 충헌공(忠憲公) 유암(柳菴) 휘 중달(仲達)이 고려조에서 가장 저명(著名)하였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휘 준(濬)은 문과(文科)로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한강(寒岡) ..

통진현감 류공열 묘갈문.

■전원군 증 영의정 행 통훈대부 통진현감 류공 열 묘갈문. (全原君 贈 領議政 行 通訓大夫 通津縣監 柳公 悅 墓碣文) 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관상감사 세자사 전원군 행 통훈대부 통진현감 류 공 묘갈문 (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 世子師 全原君 行 通訓大夫 通津縣監 柳公 墓碣文) 아! 여기가 나의 조부 증 영의정 전원군의 묘소이다. 손자 류심이 태어난 지 한 달 지나서 선조 41년(1608)의 변고(變故)를 만나고 다섯 살 때 광해군 4년(1612) 임자(壬子)의 화(禍)를 만났으니 슬프나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그 후 16년 지난 인조 1년(1623)에 인조반정을 만나 간신의 무리가 목 베임을 당하니 해와 달이 다시 밝았다. 임금께서 조정에 명하여 원통함과 가슴에..

전주류씨 시조 습 묘갈문(全州柳氏始祖濕墓碣文)

■ 장령공 전주류씨 시조 묘갈문(掌令公全州柳氏始祖濕墓碣文)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습(濕)이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평생을 근신하며 살아 고을 주민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같은 고을의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아 5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 극강(克剛)은 판사(判事)요, 다음 극서(克恕)는 직제학(直提學-正三品)이요, 3남 극수(克修)는 고부군수(古阜郡守-從四品)요, 4남 극제(克濟)는 판관(判官-從五品)이며, 막내 극성(克成)은 극거(克渠)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강(克剛), 극서(克恕), 극제(克濟)는 문과에 급제하고, 또한 극수(克修), 극거(克渠) 모두 글을 배워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딸은 대제학 심효생(大提學 沈孝生)에게 시집갔다. 나라 법에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부모에게 ..

장령 이형 묘갈명 병서(掌令 李迥 墓碣銘 幷序)

■ 장령 이형 묘갈명 병서(掌令 李迥 墓碣銘 幷序) 송시열 찬(宋時烈 撰) 숭정(崇禎)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헌납(獻納) 이형(李迥) 자(字) 여근(汝近) 공이 언사(言事) 때문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내쳐졌는데, 경성은 서울에서 1천 7백 리나 떨어진 곳이다. 대신(大臣) 잠곡(潛谷) 김육(金堉)공과 판서(判書) 창주(滄州) 김익희(金益熙)공이 서로 연달아 말하여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그가 독자(獨子)로서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 늙은 아버지가 아들 생각에 병이 난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체직(遞職)을 허락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흠앙(欽仰)하고 또 “어진 두 분의 김공(金公)이 아니었다면 누가 임금의 이런 효리(孝理)를 도와 이루었겠는가?..

권람 묘표(權擥墓表)

■권람 묘표(權擥墓表)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춘추관감사를 지낸 길창부원군으로 시호가 익평공(翼平公)인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 선생 정경의 묘 성화(成化) 을유년(1465, 세조 11) 2월 6일에 사망하여 4월 21일에 장사지내다. 공은 안동 사람으로, 지재선생(止齋先生)인 문경공(文景公) 제(踶)의 아들이다.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의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정난공신(靖難功臣)과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모두 1등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걸(傑)과 보(保)는 공(功)을 논상(論賞)하여 호군(護軍)에 제수되었고, 건(健)은 어리다. 딸들 중 첫째는 정난공신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인 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절충장군(..

兵曹參議 徐文尙 墓表 陰記

先考贈領議政行兵曹參議府君墓表陰記 公諱文尙。字國益。姓徐氏。達城人。我徐自麗朝襲顯宦。爲世家。有諱彌性。始入本朝。魁司馬。官牧使贈達川府院君。子諱居廣。縣監。其季居正。卽四佳文忠公。縣監生諱彭召。掌令贈吏曹參判。子諱固。禮曹參議贈吏曹判書。子諱嶰。有學行蚤歿。贈領議政。寔公高祖。曾祖諱渻。判中樞贈領議政謚忠肅公。宣祖,仁祖兩朝名臣。祖諱景霌。達城尉。考諱貞履。南原府使贈左贊成。妣贈貞敬夫人慶州李氏。判書贈領議政忠翼公諱時發之女。公生於崇禎三年庚午六月十八日戊戌。戊子。成進士。己亥。丁貞敬夫人憂。癸卯。拜內侍敎官。甲辰。遭外艱。丙午。制除。拜洗馬。轉副率。戊申。賜柑泮試居第一。賜第直赴。前後三魁泮試。人以爲難。計仕。陞六品。冬。付別試。參丙科。己酉。始拜衛率。以公內舅李公慶徽長政曹也。尋拜兵曹佐郞。因事罷。明年。因大臣言始敍。屢擬臺司。除命久靳。辛亥。復拜兵曹。遷文學。壬子。改正言。自..

남원부사 서정리 선생 묘표 음기/묘갈명/행장

祖考贈左贊成行南原府使府君墓表陰記 - 孫子 宗泰 撰 府君姓徐。諱貞履。字勉中。系出達城。徐自麗而顯。爲世家。高祖諱固。參議贈吏判。曾祖諱嶰。贈領議政。祖諱渻。判中樞贈領議政謚忠肅。考諱景霌。達城尉。妣貞愼翁主。卽宣祖大王第一女。府君其冢子也。生萬曆己亥八月十八日。癸亥夏。拜宗廟署奉事。不仕。甲子。中司馬。丙寅。復授前職。丁卯。移廣興倉。遷平市直長。戊辰。陞豐儲倉主簿。歷掌隷院司評,工曹佐郞。己巳。拜永春縣監。階大夫。考滿。以治最。留一年。丙子。以翊衛司司禦。扈隨南漢。丁丑。守靑陽。居五年。陞義城縣令。旋又陞淸風郡守。蓋仁廟在潛邸。府君受眷知甚深。二遷皆特命。爲其便養也。癸未。丁外憂。制畢。拜刑曹正郞。遷司僕寺僉正。出爲忠原縣監。忠俗悍。多土豪。府君剸治之不少饒。居三年。竟以評罷。己丑。自軍器寺僉正。拜富平府使。癸巳。遭內艱服闋。復由軍器。拜南原府使。明年。解歸。丁酉。拜工曹正郞。戊..

墓碑銘에 대한 考察

墓碑銘에 대한 考察 1.묘지명(墓誌銘) 지(誌)는 기록한다는 뜻이고 명(銘)은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만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 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한(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

이계손 비명 병서(李繼孫 碑銘 幷書).

■ 유명조선국 경헌 이공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敬憲 李公 碑銘 幷序) 일찍 일어나서 일에 공손함[夙興恭事]이 경(敬)이요, 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 재능이 많은 것[博聞多能]이 헌(憲)이다. 전(前)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은 비문(碑文)을 짓고, 아울러 비문의 글씨를 쓰다. 성화(成化) 19년(1483, 성종 14) 9월 기해일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사망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다. 한해 지나서 근신(近臣)이 영안도(永安道)에 왕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 도(道)의 유생이 바친 사부(詞賦)를 올리고, 이어서 이공(李公)이 교화를 일으킨 연유에 대해 말하였다. 성상(聖上)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공을 장려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의논하라고 명하여 특별히 정헌대..

懼菴 禹伏龍 墓碑銘/墓表陰記。

■조선국 통정대부 수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구암 우복룡 묘비병 병서 [생졸년] 우복룡『禹伏龍, 1547년(명종 2) ~ 1613년(광해 5)』 서문을 병기함.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시고 한가한 때면, 문득 동네의 친구 중에 현명한 사람을 들어 칭찬하시면서 꼭 "우 아무개는 대범하고 뛰어난 자질에 예악으로 문체를 꾸몄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 집안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말이었다. 공의 이름은 우복룡(禹伏龍)이고 자는 견길(見吉)이며 호는 구암(懼菴) 이다. 우씨는 세대수가 멀리서부터 내려온다. 고려에서 시중으로 영달한 우중대로부터 5, 6대에 걸쳐 관직이 이어져 무성했다. 공의 증조 우효친은 현령을 지내고 좌통례를 증직받았다. 우효친이 우순좌를 낳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