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전주류씨 시조 습 묘갈문(全州柳氏始祖濕墓碣文)

야촌(1) 2012. 5. 19. 05:24

■ 장령공 전주류씨 시조 묘갈문(掌令公全州柳氏始祖濕墓碣文)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습(濕)이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평생을 근신하며 살아 고을 주민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같은 고을의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아 5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 극강(克剛)은 판사(判事)요, 다음 극서(克恕)는 직제학(直提學-正三品)이요, 3남 극수(克修)는 고부군수(古阜郡守-從四品)요, 4남 극제(克濟)는 판관(判官-從五品)이며, 막내 극성(克成)은 극거(克渠)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강(克剛), 극서(克恕), 극제(克濟)는 문과에 급제하고, 또한 극수(克修), 극거(克渠) 모두 글을 배워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딸은 대제학 심효생(大提學 沈孝生)에게 시집갔다. 나라 법에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부모에게 벼슬을 주는데 그 때 공은 이미 작고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正四品)에 추증되었다.

 

그 후손들이 어질고 덕이 있어 벼슬아치가 요직에 포진하여 대대로 더욱 성하니 세상에서는 덕을 널리 폈기 때문이라고 탄복하더라. 

 

묘는 고산(高山=완주군 고산면)의 서쪽 율곡리(栗谷里)에 있으며, 부인의 묘는 전주부(全州府=전주시)의 북쪽 건지산(乾止山)기슭에 있는데,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아 잡초가 우거져 덮여 사람들이 거의 알아 볼 수 없게 되였다.

 

중종(中宗) 25년(1530) 가을에 후손 곡(轂)이 고산의 수령(守令)으로 부임하니 그는 직제학 류극서(直提學 柳克恕) 현손. 즉, 공의 5대손이다. 

 

수레에서 내리는 즉시 나아가 성묘하고 분하여 눈물을 흘리며 장래 묘를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각기 작은 비석을 세워 영구히 보존토록 하였으니 과연 공은 후손이 있다 할 만하고 곡()은 그 선조를 받드렀다고, 할 수 있다.

 

삼가 비석에 글을 새겨 이르나니 착함을 쌓아 남은 경사 선조께서 이룬 것이오. 근본을 보답하여 선조의 덕을 추모하여 공양함은 후손의 정성일세. 이제 봉분을 높이 쌓고 묘역을 정비하여 다시 빛나게 되니,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듣는다면 누군들 그 덕을 흠모하지 않으리요.

 

중종 25년(1530) 5대손 고산현감 류곡(高山縣監 柳轂)이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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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全州柳氏始祖濕墓碣文

 전주류씨시조습묘갈문 

 

公姓柳諱濕 完山人也 平生謹愼 一鄕稱美 配同府崔氏 生五男一女 長曰克剛判事 次曰克恕直提學 三男曰克修古阜郡守

공성류휘습 완산인야 평생근신 일향칭미 배동부최씨 생오남일녀 장왈극강판사 차왈극서직제학 삼남왈극수고부군수

 

克濟 判官 五男曰克成改名渠 剛恕濟中文科 修渠亦皆業文中生員 女歸大提學沈孝生 國法三子登科 爵厥父母時男曰公

사극제 판관 오남왈극성개명거 강서제중문과 수거역개업문중생원 여귀대제학심효생 국법삼자등과  작궐부모시남왈공

 

 追贈司憲府掌令 後嗣振振 布列顯要 愈久愈盛 世服種德深也 墓在高山治西栗谷里 而夫人之塋 在全州府北乾止山麓歲

추증사헌부장령 후사진진 포열현요 유구유성 세복종덕심야 묘재고산치서율곡리 이부인지영 재전주부북건지산록세

 

麓歲 久蕪沒幾乎人莫知之嘉 靖庚寅秋 柳侯轂 出守于高山 是直提學之玄孫 卽公之五代孫也 甫下車便就展拜 慨然泣下

록세 구무몰기호인막지지가 정경인추 류후곡 출수우고산 시직제학지현손 즉공지오대손야 보하차편취전배 개연읍하

 

懼將無傳 各竪短碣用圖永久 公可謂有後 而侯可謂能奉 其先歟 謹爲銘曰.

구장무전 각수단갈용도영구 공가위유후 이후가위능봉 기선여 근위명왈.

 

積善餘慶 先祖之成 報本追遠 後嗣之誠 嵬嵬馬鬣 令復煥爀 遠近聞之 就不先歟欽德

적선여경 선조지성 보본추원 후사지성 외외마렵 영복환혁 원근문지 취불선여흠덕

 

嘉靖九年庚寅 中宗二十五年 五代孫 高山縣監 柳轂  立碑

가정구년경인 중종이십오년 오대손 고산현감 류곡  입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