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통진현감 류공열 묘갈문.

야촌(1) 2012. 5. 28. 16:28

■전원군 증 영의정 행 통훈대부 통진현감 류공 열 묘갈문.

   (全原君 贈 領議政 行 通訓大夫 通津縣監 柳公 悅 墓碣文)

 

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관상감사 세자사 전원군 행 통훈대부 통진현감 류 공 묘갈문

(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 世子師 全原君 行 通訓大夫 通津縣監 柳公 墓碣文)

 

아! 여기가 나의 조부 증 영의정 전원군의 묘소이다. 손자 류심이 태어난 지 한 달 지나서 선조 41년(1608)의 변고(變故)를 만나고 다섯 살 때 광해군 4년(1612) 임자(壬子)의 화(禍)를 만났으니 슬프나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그 후 16년 지난 인조 1년(1623)에 인조반정을 만나 간신의 무리가 목 베임을 당하니 해와 달이 다시 밝았다. 

 

임금께서 조정에 명하여 원통함과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고 귀양 갈 사람의 명단을 적으니 증조부 영의정공의 옛 관작을 회복시키고, 조부도 또한 부친의 귀(貴)와 증조부의 훈공을 세습과 같은 예로 하니 슬픔과 영화가 미치는바 천도(天道)가 의심되지 않았다.

 

효종 4년(1653)에 부친께서 상처(喪妻)를 당하여 조부의 묘표를 본인(류심)에게 부탁하면서 이르기를 “나의 아버님의 아름다운 행의와 덕을 마땅히 글을 새겨 숨김없이 알려지도록 하는 비석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못하였다.

 

어찌 더디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모두 기다림이 있음이다. 이제 돌을 세우니 네가 공경히 그 표(表)를 하라”고 하시니 류심은 가르침을 받들고 공경하고 조심하며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살펴보건대 조부의 이름은 열(悅)이고 자는 형부(亨夫)이며, 전주류씨(全州柳氏)이다.

 

고려 때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류극서(柳克恕)는 그 8대조이며 몇 대를 건너 대사간인 류헌[柳軒:1462년(세조 8)∼1506년(중종 1)]에 이르러서는 연산군 때 직간(直諫)을 하여 귀양을 갔다가 중종반정으로 공을 먼저 불렀으나 오는 도중에 별세하시니 중종 임금이 크게 슬퍼하여 작위(爵位)를 추증하고 청백리에 오르게 하였으니 조부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는 이조참판 류세린(柳世麟), 7世)인데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류의(柳儀)는 문소전 참봉인데 영의정 전능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류영경(柳永慶)인데 의정부 영의정 전양부원군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창원황씨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從二品) 황응규(黃應奎)의 따님인데 선조 4년(1571) 6월 무신(戊申) 일에 조부를 낳으니, 어려서부터 남과 달리 큰 사람의 뜻이 있더니 자라서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있으나 집안사람의 살림살이에는 담담히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셨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졌는데 선조 38년(1605)에 비로소 사마(司馬)가 되었다. 이에 앞서 선조 33년(1600)에 영의정공이 세마(洗馬-東宮에 소속된 관원으로 從五品) 관직을 주었으나 나이가 젊고 배움도 넉넉지 못하다며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니 대개 증조부의 가르침이 그러하였다.

 

후에 선공감 감역과 사복시 주부 관직을 주었고 선조 38년(1605)에는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從五品)에 올랐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통진현감(通津縣監-오늘날 김포시 통진읍)을 하니 정사는 간편하고 엄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여 한 고을의 칭송이 지금도 쇠하지 않았다.

 

선조 41년(1608)에 하늘이 우리 왕실에 재앙을 주어 선조 임금이 붕어(崩御)하니 적신들이 영의정공을 미워하여 처음에는 경흥으로 내 쫓기었다가 몇 달 아니 되어 참화를 입었으니 아!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조부는 관(棺)을 붙들고 돌아와 제제(制除)를 두고서 모친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와 교유(交遊)를 끊고 말을 삼가니 향리에서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광해군 4년(1612)을 넘기고도 간신의 무리가 더욱 사악(邪惡)하여 영의정공의 화가 또 광해군 원년(1608)보다 참혹하여 합문(閤門)의 해를 입어 바로 7월 18일이 바로 조부의 제삿날이니 아! 차마 어찌 말하겠는가? 향년 42세였다.

 

다음해 4월에 양주 도봉산 북쪽 동북향의 산기슭에 장사를 지냈으니 영의정공의 새로운 묘소를 따른 것이다. 배필인 정경부인 전의이씨는 증 참판 이위(李韡)의 따님으로 선조 3년(1570) 9월 기사(己巳)일에 태어나 19세 때 조부에게 시집을 왔는데, 성품이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정숙하여 엄숙하게 집안을 다스렸다.

 

조부보다 41년 후인 효종 3년(1652) 4월 24일 병환으로 별세하니 수(壽) 83세이다. 그 해 6월 2일에 조부 묘소에 합장하였는데 같은 묘소이나 혈(穴)이 다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부친인 류정량(柳廷亮)이며 선조 임금의 따님 정휘옹주(貞徽翁主)를 맞이하여 처음에 전창위를 제수 받았고 맏아들로서 봉군을 세습하여 품계가 1품이 되었다.

 

맏딸은 학생 양립에게, 다음은 현감 배명전에게 시집을 갔다.부친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류심(柳淰)은 문과에 승지(丞旨)이고 다음은 류흡(柳潝)은 진사로서 현령이며, 맏딸은 진사 이중규(李重揆)에게, 다음은 진사 정화제(鄭華齊, 東萊人, 府使)에게 시집을 갔다.

 

재취는 7남 7녀인데 류회, 류령, 류창, 류조, 류익, 류급, 류담이며, 류회는 무과로 주부이다. 딸은 진사 김익남의 처이고 좌랑 이태운의 측실이며, 이창유의 처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양립은 4남을 두었는데 양응한, 양응섭, 양응면, 양응순이고 배명전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배상유, 배상완이고 딸은 학생 이석길, 김천수,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류심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류이태, 류이겸, 류이승, 류이정이며, 딸은 학생 강만석에게, 진사 박순에게, 진사 심단에게 시집을 갔고 막내는 어리다.재취의 아들은 류이전, 류이면이고 류흡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류이진, 류이정이며, 모두 어리고 서출(庶出)은 류이박이다. 두 딸은 모두 어리다.

 

이중규는 2남을 두었는데 이현상과 이현하이다. 정화제는 3남3녀인데 정채이고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학생 김문원에게 시집을 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류회는 6남을 두었는데 류이화, 류이발, 류이춘, 류이만, 류이영, 류이번이며 외동딸은 어리다. 류창은 2녀이며 류척은 1녀인데 모두 어리다. 전익남의 외아들은 전시하이고 이태운과 이창유도 1남이다. 

 

양은한은 2남3녀인데 양전과 양집이고 딸은 학생 이지안, 정필주에게 시집을 갔고 막내는 어리다. 양응순의 4남은 어리고 딸은 학생 정수기에게 시집을 갔다.

 

배상유는 1남2녀이고 배상완은 2녀이고 이석길의 외아들은 이우이고 외동딸은 학생 민조에게 시집을 갔다. 김천수는 1남2녀이다. 류이태는 1남1녀이고 류이겸은 2남이며, 강만석은 2남3녀이고 박순은 1남이며 이현상은 1남1녀이다.

 

김문원은 1녀이고 이지안은 1남1녀이다. 아! 참화(慘禍)의 나머지로 손증현손이 백하고도 수가 남으니 조부가 덕을 쌓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성할 수 있겠는가. 복(福)과 선(善)의 이치가 과연 상쾌하지 않은가. 앞으로 천백년 자손이 이 묘소에 절하며 이 표(表)를 보는 자는 조부의 공덕을 알고 거기에 감히 공경하며 조부의 관대한 덕을 생각하지 않으리요.

 

손자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 지제교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류심이 삼가 표(表)를 병서(竝書)하고 효종 4년(1653) 7월  일에 세우다.

 

참고문헌 [전주류씨 낙봉현조추사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