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고령신씨 시조 묘표음기(高靈申氏始祖墓表陰記)

성재유고(醒齋遺稿)冊九 [記] 신익상(申翼相) : 1634(인조12)~1697(숙종23) ------------------------------------------------------- ■ 高靈萬代山申氏始祖墓表陰記 신익상(申翼相) 撰 惟我始祖諱成用。高靈人也。始登文科。官至檢校軍器監。生諱康升。正順大夫左右衛上護軍。生諱仁材。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生諱思敬。中順大夫監門衛大護軍。生諱德隣。禮儀判書。生諱包翅。始入我朝。爲大司諫。生諱檣。工曹參判。生諱叔舟。領議政府院君。皆由文科進。判書以下。各葬在他道。具在地誌。而惟大護軍以上墓。不知所在。俗傳縣治甘草田。卽故申氏世居地。竹田乃其族葬。而久遠無徵。其在萬代山者。人皆知爲我始祖墓焉。萬曆丙午間。縣人有偸葬墓傍者。平封土。埋石物。適後孫守沂,景沂迭宰是縣。按治掘出。封墓如故。而未究石物埋處。崇禎壬午。先君宰..

민광민(閔光旻) 묘갈명(墓碣銘)

■ 민광민 묘갈명(閔光旻墓碣銘) [생졸년] 1622년(광해군 14) ~ 1701년(숙종 27) 회덕현(懷德縣) 북쪽 삼정동(三政洞)은 여흥(餘興) 민씨(閔氏)가 대대로 조상들의 산소를 모신 곳이고 그곳의 유좌(酉坐)의 언덕은 현감(縣監) 민광민(閔光旻)의 산소이다. 6대조 이조정랑(吏曹正郞) 민수(閔粹)의 산소는 그 위에 있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증판서(贈判書) 민여검(閔汝儉)이고 아버지는 증정랑(贈正郞) 민평(閔枰)으로 산소는 동쪽에 있다. 나의 문정(文正) 선조인 우암(尤庵) 선조께서 2대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판서공(判書公)의 묘갈 문에는 “판서공의 손자와 증손들이 모두 효도와 의리가 있고 질박하고 정직하다”라는 말이 있고 정랑공(正郞公)의 묘갈문에는 “정랑공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민..

우암 선생 묘표/묘지문(尤菴先生墓表/墓誌文)

■ 우암선생 묘표(尤菴先生墓表) [생졸년] 1607년(선조 40) ~ 1689년(숙종 15)/ 壽82歲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撰 공자(孔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제후(諸侯)들이 방자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가 두려워할 줄을 몰랐으므로 《춘추(春秋)》를 써서 만세토록 신자(臣子)가 지켜야 할 바를 엄히 하였다. 주자(朱子)는 송(宋)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오랑캐들이 중국을 어지럽혀 두 황제(휘종(徽宗)과 흠종(欽宗))가 북으로 옮겨 감을 당했으므로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대의를 밝혔다. 그런데 선생의 생애는 또 대명(大明) 말기를 당하여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온 천지에 비린내가 가득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서 성모(聖謨)를 곁에..

점필재 김종직 묘갈명/신도비명。

■ 점필재 김선생 묘갈명 (佔畢齋 金先生墓碣銘) [생졸년] 金宗直,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撰 아, 이 밀양부(密陽府)의 서쪽 대동(大洞) 경좌(庚坐)의 산에 바로 점필재 김 선생(佔畢齋金先生)의 묘소가 있다. 선생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사숙한 것인데, 한 번 전수하여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이 되었고, 다시 전수하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이 되었으며, 정암 뒤에는 진유(眞儒)들이 배출되어 도학이 크게 떨쳐져, 삼한(三韓)의 한 구역이 훌륭하게 문헌(文獻)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공(功)을 살펴보면 이는 실로 선생에게서 연유하였으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성조(聖朝)에서 선생을 존숭함과 사림들이 존모함..

寒暄堂金宏弼先生墓表/神道碑銘/行狀。

■ 寒暄堂 金先生 墓表 김굉필『金宏弼, 1454년(단종 2) ~ 1504년(연산 10)』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 찬(撰) 1593년(선조 26) ~ 1646년(인조 24) 中廟朝。特贈寒暄金先生議政府右議政。宣祖 朝賜諡文敬。光海時始用中外儒生疏。從祀文廟。以書院之在墓下者。賜額道東。蓋吾東數千百載無眞 儒。至先生闡發大原。日星吾道。故國家之所以表尊。 於斯爲盛。先生諱宏弼。字大猷。本瑞興人。鼻祖諱寶。位至中郞。始顯麗代。高祖諱善保。判書雲觀事。曾祖 諱沖坤。禮曹參議。祖諱士亨。義盈庫使。考諱紉。司勇。 妣韓氏。淸城君承舜女。以景泰甲戌。生先生于漢陽 之貞陵洞。先生少豪逸不羈。稍長發憤力學。讀小學 書不輟。三十後始讀他書。探賾經典。硏究義理。靜坐 一室。雖家人子弟。莫敢窺其所爲。學者坌集。塡溢閭 巷。誨誘不倦。各因其材而成就之。初以行義薦授南 部參奉。旋換典牲..

이훈묘갈명(李薰墓碣銘) - 효령대군의 손자[청호공 외손자]

■ 이훈 묘갈명(李薰墓碣銘) - 효령대군의 손자[청호공의 외손자] [생졸년] 이훈『李薰, 1447년(세종 30) ~ 1462년(세조 8)』/향년 15歲 선조(先祖)의 휘(諱)는 훈(薰)이고, 자(字)는 형지(馨之)이니,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증손(曾孫)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손자이고, 서원군(瑞原君)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인 친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군부인(宜寧郡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감사(監司) 희(嘻)의 따님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 30)에 태어나 세조 임오년(1462 세조 8) 9월 2일에 돌아가니, 시흥 금불암리(始興金佛菴里)의 동북방 언덕 서원군(瑞原君) 묘소 밑에 장례하였다. 처음에는 고림정(高林正)을 제수 받았으나, 증손인 직언(直彥)으로 인하여 군(君..

知禮縣監李寗墓碣銘 - 퇴계(退溪)의 조카

■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지례현감(知禮縣監) 이공(李公) 묘갈명 ◇1527년(중종 27)~1588년(선조 21) ◇지례현감(知禮縣監) 이영(李寗)선생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넷째 형님이신 온계(溫溪) 이해(李瀣)선생의 둘째 아들로, 배위(配位)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선생의 종조부(從祖父)이신 첨정(僉正) 이정(李侹)공 의 따님이다 이항복 찬(李恒福 撰) 이씨(李氏)는 진보(眞寶)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현리(縣吏)인 석(碩)이 아들 수(脩)를 낳았는데,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 후 이대(二代)를 전하여 휘 계양(繼陽)에 이르러서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아서 고사전(高士傳)에 우뚝이 드러나 있는데, 이분이..

묘비 쓰는 법

■ 묘비 쓰는 법 1. 비의 정의(인터넷 검색글) 돌에 새겨서 세운 돌, 이것을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석에 새긴 글자는 금석문의 하나로, 또는 역사적인 자료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나라 이전에는 자연형의 돌에 새긴 각석(刻石)이 있었으나 정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새긴 정식의 비는 한 나라 시대 묘비에서 발달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退溪 先生 墓碣銘/墓誌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생졸년] 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 / 壽70歲 ● 퇴계 선생 자찬 묘갈명(退溪 先生 自撰 墓碣銘) 자찬(自撰) - 이황(李滉)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 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

■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 [시대] 조선 [연대] 1641년(인조19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사적 제363호(1991년 10월 25일) (55,742㎡)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개관 이비는1641년에 남양주에 건립된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이다. 광해군의 휘는 혼(琿)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어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고, 소북(小北)의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 하였다. 그러나 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