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강맹경 묘비명 병서(姜孟卿碑碑銘幷序)

강맹경『姜孟卿, 1410年(太宗 10)∼1461年(世祖 7)』 ------------------------------------------------------------------- 문경공 강맹경 묘비명 병서( 文景公姜孟卿墓碑銘 幷序) 신숙주(申叔舟) 찬(撰)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대대로 명덕(名德)이 있고 높은 벼슬이 서로 잇닿았는데, 강시(姜蓍)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문하찬성(門下贊成)이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공목(恭穆)이다. 강시가 강회백(姜淮伯)을 낳으니 아조(我朝)에 들어와 벼슬하여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되었으며, 강회백이 강우덕(姜友德)을 낳으니 공(公)에게 고(考)가 되는데, 벼슬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지창녕현사(知昌寧縣..

추탄 이경동 묘갈명 병서(楸灘李瓊仝墓碣銘 幷序).

병조참판 추탄 이공 묘갈명 병서 (兵曹參判 楸灘 李公 墓碣銘 幷序) 경주 최익현 찬(崔益鉉 撰) 우리 동방 성족(盛族)은 이씨가 가장 우수한데 국조(國朝) 오백년 동안 명경현사(命卿顯士)가 족보에 끊이지 아니한 것은 오직 전주이씨가 바로 이분들이다. 옛날 성종대왕 세대에 기조시랑(騎曹侍郞; 병조참판) 휘 경동(瓊仝), 자 옥여(玉如), 호 추탄공(楸灘公)이 그중 한 분이다. 고조 정당문학 문정, 호 황강은 소를 올려 불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폐지하며 상기(喪期)를 단축한 잘못을 배척하여 고려조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증조는 검교중추부사 몽(蒙)이요,조부는 하동감무 증 이조참의 중유(仲由)요,고(考)는 판관으로 증 이조참판 달성(達誠)이며,현감 경주 이종미(李種彌)는 외조이다. 공은 정통 무오생(세종20 ..

전두환대통령 부모 묘비

■ 춘산거사완산전공묘표(春山居士完山全公墓表) 초계안천(草溪安川)에 사는 전(全)씨에게 오형제가 있어 모두 빼어나고 효도와 우애의 가풍으로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휘(諱)는 상우(相祐). 자(字)는 국언(國彦)이요 스스로 춘산(春山)이라 호(號)를 삼은 사람은 그의 넷째 아들이다. 고종(高宗) 무술년(戊戌, 1898)에 태어나 향년 70세(1967)로 정미(丁未 陰2월 21일에 타계하여 합천 북쪽 봉대(烽坮) 아래 도리현 건원(道理峴乾原)에 안장하였고 그 후 12년이 지나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 할 적에 조카 맹환(孟煥)이 그의 사적을 적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全)씨의 선조는 환성군(歡城君) 섭(聶)에게서 나왔고 완산군(完山君) 충정공(忠貞公) 준(準)에 이르러 처음으로 완산(完..

간이당 최립 묘갈문(簡易堂崔岦墓碣文)

■ 간이당 묘갈문(墓碣文) 지은이>허목(許穆) 공의 휘는 입(岦), 자는 입지(立之), 성은 최씨이며 아버지는 자양(自陽)으로 국자감 진사이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말이 늦어서 태어난 지 10년이 되어서야 글을 읽었는데, 15세 어린 나이에 태학에 들어가 문장이 날로 세상에 유명해졌다. 23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니, 때는 공헌왕(恭憲王-명종) 16년(1561)이었다. 전후로 일곱 고을을 다스렸고, 소경왕(昭敬王-선조) 25년(1592)에는 견성 윤을 지냈다. 그 뒤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크게 혼란할 때를 당하여 명나라 천자에게 대대적으로 군사를 내어 왜병을 정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임금께서 늘 공에게 직책에 구애받지 말고 승문원의 일까지 겸하여 외교문서를 관장하게..

육신묘비(六臣墓碑)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藥泉 南九萬 撰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 씨 지 묘(朴氏之墓), 유 씨 지 묘(兪氏之墓), 이 씨 지 묘(李氏之墓), 성 씨 지 묘(成氏之墓), 성 씨 지 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

예조참판 이해 묘갈명(禮曹參判李瀣墓碣銘)

〇퇴계 이황의 넷째 형임.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이공 묘갈명 병서 (嘉善大夫 禮曹參判 兼 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公 墓碣銘 幷序) 제(第) 이황(李滉) 찬(撰) 공의 이름은 해(瀣)요, 자는 경명(景明)이며, 그 선조는 진보(眞寶) 고을 사람인데, 중간에 안동으로 옮겼다가 또 예안(禮安)으로 옮겼다. 6세조는 휘가 석(碩)이니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은 휘가 자수(子脩)이니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섬겼고, 홍두적(紅頭賊)을 치는 데 참여해서 송안군(松安君)에 책봉되었다. 고조는 휘가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이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증조는 휘가 정(禎)이니 선산 부사(善山府使)요..

지례현감 이녕 묘갈명(知禮縣監 李寗 墓碣銘 )

〇퇴계 이황의 조카임 ■통훈대부 행 지례현감 이공 묘갈명 (通訓大夫 行 知禮縣監 李公 墓碣銘)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이씨(李氏)는 진보(眞寶)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그 처음에 현리(縣吏)인 석(碩)이 아들 수(脩)를 낳았는데, 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그 후 이대(二代)를 전하여 휘 계양(繼陽)에 이르러서는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아서 고사전(高士傳)에 우뚝이 드러나 있는데, 이분이 예안현(禮安縣)으로 옮겨가 살았고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식(埴)을 낳았는데, 식은 진사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식(埴)이 휘 해(瀣)를 낳았는데, 해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졸관하였다. 해(瀣)는 일찍이 이기(李芑..

충렬공 김방경 묘비문/이시발

고려 선충협모 정란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충렬공김방경묘지 (高麗 宣忠協謀 靖難定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이시발 찬 안동김씨의 가계는 신라 경순왕에서 나왔다. 공은 15세손인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종, 원종, 충렬왕조에 벼슬하여 공훈(功勳)이 무성하게 드러나고 고금에 크게 떨쳤음이 국사(國史)와 행장(行狀)에 실려 있어 뚜렷하게 살필 수 있다. 잠시 그 뚜렷이 드러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충직(忠直)하고 신후(信厚)함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행동을 절제하였고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전투에 나아가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했으니, 진도 싸움과 일본 정벌 등이 그 대략이다. 그 뒤로 내 ․외손들의 종..

광산김씨 김효로선생 묘갈명/안동입향조

■광산김씨 김효로선생 묘갈명 광산김씨 예안파(光山金氏 禮安派) 파조로 안동 입향조이다. 증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휘 효로 묘갈명. (贈 嘉善大夫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諱 孝盧 墓碣銘)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제교(知制敎) 이황(李滉) 찬(撰) 공(公)의 휘(諱)는 효로(孝盧)요. 자(字)는 순경(舜卿)이니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高麗)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광존(光存)의 후손(後孫)인데 지성공(知省公) 이하로 대대로 현달(顯達)하였다. 조(祖)의 휘(諱)는 숭지(崇之)니 목청전(穆淸殿) 직(直)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追贈) 받았고, 고(考)의 휘(諱)는 회(淮)니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 받았다. 공(公)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

서계 박세당 묘갈명

■문정공 서계 박세당 묘갈명 (文貞公 西溪 朴世堂 墓碣銘) 학문은 심오한 말을 밝힐 만하고, 지조는 퇴폐한 풍속을 격려할 만하며, 문장은 옛사람을 능가할 만한 경우,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뛰어났다 하는데 하물며 이를 모두 겸하고 있는 사람임에랴! 근세 이래로 구이지학(口耳之學)만 성해서 문기(文氣)는 날로 천박하고 유약한 데로 빠졌다. 또한 선비들은 벼슬자리만을 급급하게 생각해서 속된 무리를 초월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선생은 이러한 때에 홀로 관작의 영광을 사양하고 산림에 은거하였는데, 남긴 저술은 모두 옛 성인이 남기신 뜻을 연구한 것이고, 지은 문장은 또한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었으니, 아아! 호걸의 자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성(姓)은 박씨(朴氏)고, 휘(諱)는 세당(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