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삼처사 묘갈명 병서(三處士墓碣銘幷序)

■삼처사 묘갈명 병서(三處士墓碣銘幷序) /光山李氏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삼처사(三處士)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숭정(崇禎) 병자후(丙子後) 무신년(현종 9, 1668년) 10월 일 우리 공헌(恭憲) 소경(昭敬) 치세(治世) 연간에 성주(星州)에 세 명의 처사(處士)가 있었으니 이홍기(李弘器) 백용(伯容), 이홍량(李弘量) 중용(仲容), 이홍우(李弘宇) 계용(季容)이라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남쪽 지방에서 선행(善行)을 한 삼용(三容)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씨(李氏)의 계보는 무진(武珍)에서 출발한다. 고려 때 이순(李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판도사(版圖司)의 판도(版圖)를 지냈다. 그 이상은 보첩(譜牒)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에 동정(同正)인 항(恒), 판관(判官)인 임(林), 진사(進士..

탁영 김일손/묘갈명/사실기록/묘표/신도비명/행장/시장

■탁영 김일손 선생 묘갈명 병서 (濯纓 金馹孫 先生 墓碣銘 竝書) [생졸년] 김일손『金馹孫, 1464년(세조 10) 2월 13일(음력 1월 7일) ~ 1498년(연산 4) 8월 14일(음력 7월 27일)』 연산조의 무오사화를 지금 말하면 반드시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탁영 김 선생이 시초이다. 선생은 하늘이 내신 사람이나 내면서 문득 죽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선생의 문장과 절개 있는 도리는 우주라도 좁으니, 동쪽의 좁은 곳(조선)이 선생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깝다.。 선생이 사관이 되어 일찍이 그 스승 점필재 김공의 조의제문을 취하여 국사에 실었고, 또 역사기록에 이극돈의 추행을 있는 그대로 썼더니, 극돈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장악하여 이를 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불쾌감을 느끼는 사..

領議政 柳尙運 墓碣銘 幷書 - 南九萬 撰[1709年]

■영의정 약재 류상운 묘갈명 병서(領議政 約齋 柳尙運 墓碣銘 幷書) 南九萬 撰[己丑 1709年 肅宗 35年] [묘의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3리 산30-2 --------------------------------------------------------------------------------------------------------------------------------------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약재 류공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約齋 柳公墓碣銘 幷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치사 봉조하 ..

삼봉 정도전선생 제단비문/팔계 정봉시 찬

[생졸년] 정도전『鄭道傳, 1342년(충혜왕 3) ~ 1398년(태조 7)』 ■조선개국원훈 봉화백 문헌공 삼봉 정선생 제단 (朝鮮開國元勳奉化伯文憲公三峯鄭先生祭壇) 배 경숙택주 경주최씨(配 慶淑宅主 慶州崔氏) 공의 이름은 도전(道傳)이고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다. 봉화정씨(奉化鄭氏)는 고려조부터 대대로 공경을 배출하여 왔는데 공에 이르러 더욱 크게 현달하였다. 증조인 영찬(英粲)은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인 균(均)은 봉익대부 검교 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에 추증되었다. 부친인 운경(云敬)은 봉익대부 검교 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 숭록대부 형부상서(崇祿大夫刑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염의(廉義)이며,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영천 우씨(榮川禹氏)는 사족..

우복 정경세 비음기 - 이현일 찬

갈암집 제23권 / 비(碑) [생졸년] 정경세『鄭經世, 1563년(명종 18) ~ 1633년(인조 11)』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비음기(碑陰記) 근세의 명신(名臣)으로 그 도학과 덕행이 가장 드러난 분은 우복(愚伏) 선생 정 문숙공(鄭文肅公)이시다. 공(公)은 조정에서 벼슬한 40년 동안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지위가 경재(卿宰)에까지 이르렀다. 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하여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했고, 대각(臺閣)의 직임을 맡아 임금의 잘못을 바루었으며,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정(彝鼎)에 새기고 책서(策書)에 기록해서 후세에 드리우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은 증직된 벼슬이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고 품질(品秩)이 종1품이며 시호는 문숙공(..

처사 권숙 묘갈명 병서(處士 權璹 墓碣銘 幷序)

화산 권 선생 묘갈명 병서 (華山 權先生 墓碣銘 幷序) [생졸년] 1665(현종 6)~1716, 숙종 42) 성호 이익 찬(星湖 李瀷 撰) [생졸년] 168(숙종 7)1~1763(영조 39) 선생의 휘는 숙(璹)이요 자는 수옥(壽玉)이다. 나중에 집()으로 이름을 고쳤다. 호남 남원(南原)의 화산(華山)에 거주하였으므로 학자들이 화산(華山)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은 도학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 명성이 더욱 알려졌다. 호남의 선비들이 모여서 서원에 향사(享祀)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당시 국법에 걸려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천리 길을 달려와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는데, 묘소의 비석에다 글을 새겨 공의 행적을 반드시 후세에 알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가 평소..

정무공 최진립 묘갈명 병서 - 조경(趙絅)

■공조참판 정무 최공 묘갈명 병서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幷序) [생졸년] 1568(선조 1)∼1636(인조 14). 용주 조경 찬(龍洲 趙絅 撰) [생졸년] 1586(선조 19)∼1669(현종10).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 12월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전 참판 최진립(崔震立) 공은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서 용인(龍仁) 험천(險川)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듬해 정축년(1637)에 판중추부사 김시양(金時讓)이 건의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전장에 나아갈 때 최 진립이 몹시 늙어 전선에 내보낼 수 없다고 여겨 다른 장수로 대체하였습니다. 이때 최진립은 즉시 채비를 차려 칼과 활을 차고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전장..

이대기 묘갈명(李大期墓碣銘) - 정온(鄭蘊)

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1934년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출생인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1551년(명종 6)~1628년(인조 6)』 묘갈명이다. 묘는 경남 합천군 청덕면 대부리 소부마을에 있다. -------------------------------------------------------------------------------------------------------------------------------------- 형조정랑 이공 묘갈명 병서 (刑曹正郞 李公 墓碣銘 幷序) 동계 정온(鄭蘊,1569~1641) 찬(撰) 내가 공의 얼굴을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일찍이 자리를 함께하여 절차탁마(切磋啄磨)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사람 됨됨이를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1608..

광개토대왕 비(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비(높이 6.39m, 무게 37톤) ↑1903년 사진 [연합뉴스 2004.08.22 10:08:20] 조선 문화유적 소개 일본 화보집에 실려(대구=연합뉴스) 이재혁 기자 =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100여년 전 한 조선인이 광개토대왕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 연구가 정성길(60.경기도 화성평화공원 박물관장)씨가 22일 공개한 사진속의 주인공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한복 차림의 조선인으로, 팔짱을 낀 채 눈 내린산야를 배경으로 광개토대왕비 옆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 조선인은 추운 겨울임에도 가벼운 한복차림이어서 당시 비석 주변에 거주하던 화전민이 일본인 사진작가의 요청에 따라 촬영에 응했을 것으로 정 관장은 추정했다. 정..

강맹경 묘비명 병서(姜孟卿墓碑銘幷序)

◈생졸년 : 9世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시대 : 조선(朝鮮) ◈건립 연대 : 1462년(세조 8) 5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154호 ◈크기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통이마을 ◈탁본문소장처 : 일본)경도대학(京都大學)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신숙주(申叔舟) / 강희안(姜希顔) / 미상 [개관] 1462년(세조 8, 임오년) 5월 아들 강윤범(姜允範)에 의해 세워진 강맹경(姜孟卿)의 묘비명(墓碑銘)이다. 이 묘비명이 실린 신도비는 묘소의 좌측에 있으며 팔각지붕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보호 각이 마련되어 있다. 찬자(撰者)는 신숙주(1417∼1475), 서자(書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