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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령 이형 묘갈명 병서(掌令 李迥 墓碣銘 幷序)

야촌(1) 2012. 1. 21. 16:26

■ 장령 이형 묘갈명 병서(掌令 李迥 墓碣銘 幷序)

 

  송시열 찬(宋時烈 撰)

 

숭정(崇禎)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헌납(獻納) 이형(李迥) 자(字) 여근(汝近) 공이 언사(言事) 때문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내쳐졌는데, 경성은 서울에서 1천 7백 리나 떨어진 곳이다.

 

대신(大臣) 잠곡(潛谷) 김육(金堉)공과 판서(判書) 창주(滄州) 김익희(金益熙)공이 서로 연달아 말하여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그가 독자(獨子)로서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 늙은 아버지가 아들 생각에 병이 난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체직(遞職)을 허락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흠앙(欽仰)하고 또 “어진 두 분의 김공(金公)이 아니었다면 누가 임금의 이런 효리(孝理)를 도와 이루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모두 말하기를, “공 부자(父子)의 자효(慈孝)가 독실하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임금을 감동시켜 이렇게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에 세상을 떠나니, 춘추(春秋) 53세였다. 그때 그 아버지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이후재(李厚載))의 나이가 80세에 가까워서 듣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공이 사람들에게는 잘 보였지만 하늘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숙성(夙成)하여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반정(反正) 논의에 참여하여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인조(仁祖)가 즉위하여 제공(諸公)을 녹훈(錄勳)할 때에 공을 원종훈(原從勳) 1등에 두어 곧장 6품직(品職)을 제수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어 현(縣)에 도착하였는데 얼마 후 청(淸)나라 군사가 크게 침입해 와서 날뛰었다.

 

공은 신의(信義)로써 군민(軍民)을 격려하니, 졸오(卒伍)로 기한에 늦은 자들이 모두 뒤따라 이르렀으므로 현(縣)의 군사를 영장(營將)에게 교부(交付)하고 돌아왔다.

 

이때 근왕(勤王)하는 제군(諸軍)이 모두 패배하자 공은 다시 이들을 불러모아 단속(團束)해 전진해서 여산군(礪山郡)에 이르렀다. 하루 밤에는 군중(軍中)이 소란해지자 군중(郡中) 대소인원이 모두 산 위로 도망하였으나 공은 홀로 옷을 벗은 채 꿈쩍 않고 누워 있었다.

 

이튿날 도주했던 자들이 돌아와 모였는데 그중 관인(官人)들은 그런 공을 보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방백(方伯)이 그 일을 들어 고과(考課)하면서 상고(上考)에 두었다.

 

공은 신구(新舊)를 안정시키고 폐추(廢墜)된 것을 수거(修擧)하였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오게 되자 이민(吏民)이 수레 채를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였다. 두 관직을 거쳐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벗고 또 두 관직을 거쳐 승진해서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아버지가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대개 옛사람이 말한 ‘부모 하루 봉양을 삼공(三公)과도 바꾸지 않는다.’라는 뜻에서이다.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전관(銓官)에게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으라고 책임 지우니, 공을 김포 군수(金浦郡守)로 삼았는데, 일이 있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 증광 대과(增廣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제수되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한결같이 쟁론(爭論)하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네 번,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세 번 지냈으며, 그사이 사예(司藝)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다.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이르러 재차 헌납이 되어 임금의 뜻을 거스렸다.

 

공은 떠나면서 말하기를, “나는 직언(直言)으로 과감하게 간쟁하는 실제는 없고 한갓 어버이를 멀리 떠나 노니는 행실만 있어, 충(忠)ㆍ효(孝) 두 가지를 다 잃었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사(公事)에서와 상관(上官)에게 예(禮)를 다했기 때문에 윗사람을 보호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북쪽 사람들이 부모처럼 사랑하며 떠받들었다.

 

공은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9대손이다. 세종대왕의 별자(別子, 본 아내에게서 낳은 차남(次男) 이하의 아들) 이여(李璵)가 광평 대군(廣平大君)에 봉해졌는데, 공의 고조(高祖) 이한(李漢)에 이르러서는 더욱 소원(疎遠)해져서 음사(蔭仕)로 군수(郡守)가 되었다.

 

증조(曾祖) 이인건(李仁健)은 현감(縣監)이며, 할아버지 이욱(李郁)은 군수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첨추공(僉樞公) 이후재(李厚載)는 순후(醇厚)하여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

 

첨추공의 외조부 고(故)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공은 문장과 훈업(勳業)이 큰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며, 공의 외조부 고(故)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공은 우계(牛溪)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공의 고제(高弟)이다.

 

공의 모부인(母夫人)은 사녀(士女)의 풍도(風度)가 있어 공이 이미 승적(承籍)하니 내외가 크게 아름답게 되었다.

 

또 공의 숙부(叔父) 우재(迂齋) 상공(相公) 이후원(李厚源)과 외숙(外叔) 창강(滄江) 조속(趙涑)공은 비록 항렬(行列)은 높고 공보다 연세가 많았으나 거의 붕배(朋輩)로 보아서 출입(出入) 기거(起居)에 일찍이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으며 혹 벼슬하느라 멀리 떨어지면 연연(戀戀)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로 만나 배우는 도움이 있었다.

 

공은 또 인효(仁孝) 화순(和順)하고 기개가 있어 종족(宗族)에게 순후(淳厚)하고 붕우(朋友)에게 선(善)하였기 때문에 공의 집에 들어가면 훈풍(薰風)이 부는 듯 하여 술을 마시고 창화(唱和)하느라 종일 떠나지 못하였다.

 

공은 인망(人望)과 지망(地望)의 명성으로 벼슬길이 바야흐로 열리기 시작할 때 갑자기 죽어 원대(遠大)한 포부를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명운(命運)이 아니겠는가? 부인 윤씨(尹氏)는 생원(生員) 윤흥파(尹興坡)의 딸로, 어진 덕이 있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경성(京城)의 사대부집이 대부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부모 생각에 음식을 끊었다가 무양(無恙)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쳤다.

 

자녀 열 명을 낳았으니, 아들 이중휘(李重輝)와 이영휘(李永輝)는 다 군수(郡守)이고, 이익휘(李益輝)는 현감(縣監)이며, 이시휘(李時輝)는 진사(進士)이고, 이정휘(李廷輝)는 현감이며, 이만휘(李晩輝)는 무과(武科) 출신으로 병사(兵使)이고, 하나는 일찍 죽었다. 세 딸은 군수 이파(李坡), 오천군(鰲川君) 이세장(李世章), 찰방(察訪) 임세온(林世溫)에게 각각 시집갔다.

 

계실(繼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현령(縣令) 이경하(李擎厦)의 딸로, 자녀 셋을 낳았으니, 아들은 이우휘(李遇輝)이고, 아들 하나는 일찍 죽었으며, 딸은 별검(別檢) 송병원(宋炳遠)에게 시집갔다. 이성휘(李成輝)는 측실(側室) 소생이다.

 

손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금 감사(監司)로 있는 이유(李濡)와 이담(李湛)ㆍ이염(李濂)과 지평(持平) 권상하(權尙夏)에게 시집간 손녀는 큰아들 소생이요, 이택(李澤)ㆍ이제(李濟)ㆍ이준(李浚)과 홍수적(洪受績)에게 시집간 손녀는 둘째 아들 소생이며, 봉사(奉事) 이수(李洙)와 이기(李沂), 유희(柳禧)ㆍ안상석(安相奭)ㆍ안서구(安瑞九)ㆍ홍주화(洪胄華)에게 각각 시집간 네 손녀 및 시집가지 않은 한 손녀는 셋째 아들 소생이다.

 

생원 이홍(李泓)과 이정(李渟), 무과(武科)에 급제한 이용(李溶)은 넷째 아들 소생이요, 이필(李泌)ㆍ이숙(李潚)과 조정엄(趙廷淹)ㆍ오수현(吳遂顯)에게 시집간 손녀와 아직 시집가지 않은 두 손녀는 다섯째 아들 소생인데 이숙은 여섯째 아들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이심(李深)ㆍ이잠(李潛)과 이름을 짓지 않은 두 손자와 시집가지 않은 한 손녀는 막내 아들 소생이다.  생원 이지석(李志奭)과 이지윤(李志尹), 이문좌(李文佐)와 이명좌(李命佐), 윤부(尹扶)와 김제(金濟)는 사위인 이파ㆍ이세장ㆍ임세온의 아들과 사위이다. 내외 증손과 현손이 거의 1백 명에 이른다.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은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하 대대로의 묘소인데, 공의 무덤은 축좌(丑坐)이며 윤씨(尹氏)를 부장(祔葬)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년)에 병사(兵使) (이만휘(李晩輝)의) 추은(推恩)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추증되고 윤씨도 그에 따른 품계가 주어졌으며, 이씨(李氏)도 직첩[眞誥]을 받았다.

 

내가 우재(迂齋, 이후원(李厚源)) 상공(相公) 및 창강(滄江, 조속(趙涑)) 어른과 외람되이 붕우(朋友)여서, 공과 매우 오랫동안 잘 알고 지냈다고 하여 감사공(監司公) 형제가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혁혁하고 공 또한 뛰어나셨네. 사람들이 공과 함께 있으면 봄바람처럼 따뜻하였네. 큰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후손이 번창하고 복록(福祿)이 무궁하네. 근원이 깊으니 그 지류(支流) 빛이 나네. 공을 알고자 하거든 이 명(銘)을 보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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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掌令贈大司憲李公墓碣銘 幷序

 

崇禎癸巳。獻納李公迥字汝近。以言事黜爲鏡城判官。鏡去京城千七百里。大臣潛谷金公堉,判書滄洲金公益煕相繼有言。孝宗大王憐其以獨子遠離老父。其老父因思戀生病。特許遞還。人皆欽仰聖德。又以爲微二金公賢。誰能助成孝理哉。然而又皆 曰。微公父子慈孝之篤。又何能以妙感君相如此哉。越二年乙未歿。春秋五十三。時其父僉樞公年幾八十。聞者莫不悲之。歎公之能於人而不能於天也。公爲人夙成。未弱冠。與聞靖社議。癸亥。仁廟卽位。錄勳諸公。置公從勳一等。直授六品職。庚午。捷進士試。由司饔院主簿。歷司憲府監察,義禁府都事。丙子。爲同福縣監。到縣未幾。北虜大入搶攘。公以信義激勵軍民卒伍。後期者皆追至。旣交付縣兵于營將而歸。時勤王諸軍。無不敗潰。公又招集團束。進至礪山郡。一日軍中夜驚。郡中大小一皆跳走上山。公獨解 衣堅臥。翌日。跳走者還集。其中官人見公有慙色。難已。方伯擧其事置上考。公撫綏新舊。修擧廢墜。及瓜遞歸。吏民攀轅不忍捨。歷二官。以忠勳都事。丁內艱。服闋。又歷二官。陞爲金山郡守。以親老辭不赴。蓋古人所謂一日養。不以三公換之意也。孝廟卽位。責銓官愼簡守令。以公爲金浦郡守。以事罷歸。庚寅。闡增廣大科。除成均司藝。移拜司諫院正言。遇事一切爭論。四爲司憲府掌令。三爲侍講院弼善。間爲司藝司諫院獻納。以至癸巳。再爲獻納而忤旨。公臨行顧言曰。吾無直言敢諫之實。徒有離親遠遊之行。忠 孝可謂兩失矣。公事上官盡禮。故能獲乎上以治其民。北人愛戴之如父母焉。公世宗大王九世孫。其別子璵封廣平大君。至高祖諱漢。屬益疏。蔭仕爲郡守。曾祖諱仁健。縣監。祖諱郁。郡守。贈領議政。僉樞公諱厚載。醇厚有古人風。僉樞公外王考故長溪府院君黃公廷彧。文章勳業。大爲宣廟朝名臣。公外翁故風玉軒趙公守倫。寔牛溪成文簡高弟。公母夫人有士女난01稱。公旣承藉。內外洪休。又公叔父迂齋相公諱厚源。表叔滄江趙公諱涑。屬雖尊。與公年歲相長大。視之幾於朋輩。出入起居。未嘗相離。或遊宦遠 去。牽連不忍違。以故克有相觀之益。公又仁孝和順。氣厖以淳。厚於宗族。善於朋友。故入公之室者。薰然飮和。終日不能去。公以人地聲望。進塗方闢。而遽屈遠圖。豈非命耶。配尹氏。生員興坡之女。有賢德。丙子。聞京城士夫家多陷敗。念及尊章。廢食遑遑。及聞無恙然後乃已。生十子。男重輝,永輝皆郡守。益輝縣監。時輝進士。廷輝縣監。晩輝武科兵使。其一夭。三女適郡守李坡,鰲川君李世章,察訪林世溫。繼室慶州李氏。縣令擎廈之女。生男遇輝。一男夭。女適別檢宋炳遠。曰成輝側出也。孫曰濡文科。今爲監司。曰湛,曰濂 長房出。女適持平權尙夏。曰澤,濟,浚次房出。女適洪受績。曰洙奉事。曰沂。三房出。四女適柳禧,安相奭,安瑞九,洪胄華。一未行。曰泓生員。曰渟,曰溶武科。四房出。曰泌,潚五房出。女適趙廷淹,吳遂顯。二女未行。出爲六房後者潚也。曰深,潛及未名二男。未行一女。季房出也。曰生員李志奭,李志尹。曰李文佐,李命佐。曰尹扶,金濟。三壻李若林之子若壻也。內外曾玄殆百人,廣州光秀山。自廣平以下。世以族位焉。公葬在丑坐之兆。尹氏祔焉。甲子。以兵使推恩。贈司憲府大司憲。尹氏視其品。李氏受眞誥。余於迂齋相公洎滄 江丈。猥忝朋友之後。因與公服習甚久。監司公兄弟故請墓銘云。銘曰。

 

公世焜赫。公又秀出。人與之處。如春噓物。飛不盡翰。斂焉以沒。後承蕃昌。福祿逾長。源旣深矣。其流之光。有欲知公。視此銘章。

 

[난-01]士女 : 士女恐乙

 

출처>宋子大全卷一百七十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