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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현선생 묘갈명(權龍鉉先生墓碣銘)

야촌(1) 2013. 3. 22. 01:06

■추연선생 권공 묘갈명(秋淵先生權公墓碣銘)

 

우리나라 선비의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는 간혹 품격에 차등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모두 갖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故추연선생(秋淵先生) 권공(權公)이다.  공의 휘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 추연(秋淵)은 호이다. 권씨(權氏)는 안동(安東)이 본관이며,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의 태사(太師) 휘 행(幸)이다. 

 

그 뒤로 문탄공(文坦公) 일재(一齋) 휘 한공(漢功)과 충헌공(忠憲公) 유암(柳菴) 휘 중달(仲達)이 고려조에서 가장 저명(著名)하였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휘 준(濬)은 문과(文科)로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문인으로 세상에서는 그를 상암선생(霜嵒先生)이라고 일컫는다.

 

3대를 전하여 휘 우형(宇亨)은 문과로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호는 양각(凉閣)으로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의 문인이다. 3대를 전하여 휘 필중(佖中)은 호를 납신재(納新齋)라 하며 병계(屛溪) 윤선생(尹先生)의 문인으로 공에게는 6세조이다.

 

고조(高祖) 영하(永夏)는 통덕랑(通德郞)으로 호가 매헌(梅軒)인데 처음으로 초계(草溪)의 유하리(柳下里)로 이사를 하였다. 증조(曾祖)는 병준(秉準)이며, 조(祖)는 도희(度熙)이며, 고(考)는 재직(載直)인데 호를 만송(晩松)이라 하고 유고(遺稿)가 있다. 

 

비(妣)는 초계 정씨(草溪鄭氏) 방윤(邦潤)의 딸로 고종(高宗) 기해년(己亥年)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영리한데다 장엄하고 정중하여 말하는 태도가 경망스럽지 않았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 천자문(千字文)을 외웠고 처음 글방 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학업을 열심히 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10여 세에 사서(史書)와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시문(詩文)도 잘 지었다.

 

시암(是菴) 이공(李公)에게 글을 보내 가르침을 청하니, 시암이 자주 말하기를, “10여 세 난 어린 나이에 사(邪)와 정(正)에 대한 구분이 엄격하고 하는 말도 도리에 가까우니 어느 곳에서 얻어 왔느냐?”고 하였다. 

 

족형(族兄)인 각재공(覺齋公)이 공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여 붕산산방(鵬山山房)으로 함께 가 거처하면서 거친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역경을 견디게 하니, 견해가 더욱 진전되었다.

 

14~15세에 조부와 조모의 상을 잇따라 당하였는데 대인공(大人公)을 여차(廬次)에서 모시면서 예를 행하고 응대하는 일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대인공이 예서(禮書)를 읽을 때를 인하여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책을 참고하고 연구하여 따라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하고 행해야 할 것을 밝혀서 터득하는 것마다 기록하여 책 이름을 상례쇄록(喪禮?錄)이라고 하였다.

 

심의(深衣)에 옷깃을 붙이고 변폭을 대는 뜻을 서로 시비하여 옳다고 주장하는 자를 위하여 학설을 내세워 명칭을 억해(臆解)라 하였으니, 독창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보는 자들이 감동하는 기색을 나타내는 자가 많았다.

 

일찍이 화도(華島)로 간재(艮齋) 전선생(田先生)을 찾아가서 뵙고 심성(心性)의 뜻에 대하여 질문과 강론을 벌였다. 그 속뜻에 대하여 잘 듣고 잠시도 잊지 않아 실천에 옮겼으며 이때 그 사실을 기록한 기문록(記聞錄)이 있다.

 

또 지산(志山) 김선생(金先生)을 뵈니 지산옹(志山翁)이 한번 보고 평소에 가졌던 뜻과 처세하는 시의(時議)를 거듭거듭 말해 주었다. 또 오석농(吳石農), 최흠재(崔欽齋), 성덕천(成悳泉), 김행해(金杏海) 제현들과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연마하여 도움된 바가 많았다.

 

그 뒤로 항상 산방(山房)에서 조용히 거처하면서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으로 목표로 삼고 다른 길은 아예 단절하였다.  사자육경(四子六經)과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전서(全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에 주력하고 여력이 있을 때에 제가(諸家)의 글을 두루 보았으며, 만년에는 오로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주력하였다.

 

그 속에 들어가서 심력(心力)을 다하여 선유(先儒)가 논의했던 이기(理氣)의 선후와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심성이기(心性理氣)에 관한 학설을 절충하여 변론과 해석을 더하였고, 옛날과 오늘날의 전례(典禮)도 고증하여 학설을 세움으로써 후학으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의 정확성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본래 두 갈래 길이 아니다. 

마땅히 주자(朱子)가 언급한 ‘글과 도는 함께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한 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하였다.

 

공이 글을 지을 때는 오직 도리가 우세하고 문사(文辭)가 활달하며, 기운은 장대하고 필법은 엄정하기를 힘썼다. 

넓고 커서 문장이 활달한 것은 주자의 문장 솜씨를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을 뵙고 이끌어 주는 꿈을 꾸었다. 그 뒤로 더욱 분발하여 힘썼으며, 특히 종모(宗慕)하는 마음을 가졌다. 존주양이(尊周攘夷)하는 의리에 더욱 엄격하여 나라가 망하고 왜수(倭讐)가 들어와서 엄청난 재앙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성씨를 바꾸고 머리를 깎는 변고에 이르러서는 공이 낱낱이 엄격하게 배척하고서 예전 제도를 지켰다. 그러나 분개하여 한숨지으며 은둔할 뜻을 갖고 운현산(雲峴山) 아래에다 운화당(雲華堂)을 짓고 운곡(雲谷)과 화양(華陽)을 존숭하여 추앙하였고, 또 ‘이윤을 지향하고 안자의 학문을 추구하며 운곡을 조술하고 화양을 높인다.’라는 여덟 글자를 벽에다 걸어두고 더욱 학문에 힘썼다.

 

수업한 문인들이 또 한 채의 집을 유하리(柳下里) 앞에 짓고 선생께서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장소로 삼았는데 편액을 태동서사(泰東書舍)라 하였다. 이는 대개 그 곳 산 이름을 인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도술(道術)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멀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찾아와 글을 배우려는 자가 많아 서사(書舍)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경서(經書)나 제자서(諸子書)에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면 공은 부지런히 이끌어주고 자상스럽게 식견을 열어 주어서 깊이 깨달아 각각 성취되는 바가 있기를 기약하였다.

 

성격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한결같이 뜻을 받들었다. 대인공이 만년에 눈병이 있었는데 공의 좌우에서 수발을 들면서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였고 병을 간호할 때에 미쳐서는 오물을 씻거나 제거하기를 반드시 몸소 하였으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한 지가 수십 일이었으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어 해 이내에 부모의 상을 잇따라 당하여 지극히 슬퍼하였고 집상(執喪)하기를 예(禮)와 같이 하여 전후 상(喪)을 한결같이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묘소를 찾아 곡을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묘소에 참배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노년(老年)에 이르러도 그만두지 않았다.

 

선친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 아래에다 축대를 쌓고 비를 세운 뒤에 아침저녁으로 거닐면서 사모하는 뜻을 보였다.  모부인(母夫人)이 시집올 때에 가져온 장롱이 오래되어 버려두었던 것을 종이를 붙여서 궤를 만든 다음 자리 곁에다 두고 명(銘)을 적어 기록해 두어서 종신(終身)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보였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슬퍼하였다.

 

아우와 우애하여 있고 없는 것을 같이 하였다. 종족(宗族)들에게는 돈목(敦睦)으로 대하고, 자손들에게는 근검(勤儉)하기를 가르쳤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예절은 성의를 바탕으로 하여 절도에 어긋나지 않았고, 몸가짐과 행동에는 법규를 매우 엄격하게 하여 반드시 예전 도리에 준하고 세속을 따르는 태도는 전혀 갖지 않았다.

 

손님이나 벗을 접대할 때에는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정성과 신뢰를 보이며 매번 스스로 겸손하고 처신하기를 어리석은 듯이 하다가도 이치를 논하고 일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확하게 분변하고 정밀하게 따져서 한번 고집한 바가 있으면 확고해서 바꿀 수가 없었다.

 

논리를 주장할 때에는 항상 너그럽고 화평한 것을 위주로 하여 정직하지 못하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의(義)와 이(利), 사(邪)와 정(正)을 변론할 때에 이르면 언행에 매우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구차하게 책임이나 모면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간혹 당파의 습성에 젖어 선현(先賢)을 헐뜯거나 명의(名義)를 저촉하면서 강변을 늘어놓아 잘못을 꾸며대는 자가 있으면 따져서 배척하기를 매우 엄격하게 하였다. 공은 천수를 누리고 정묘년 11월19일에 졸하여 행정(杏亭) 뒷산 임좌(壬坐)에 장례를 치렀다. 

 

장례에 모인 사람이 1천 수백 명이었고 가마(加麻)한 자도 수십 명이었다.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종경(鍾璟)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졸하였으며, 묘는 남산(南山)의 해좌(亥坐)에 별도로 장사하였다. 4남은 순도(淳道), 순의(淳義), 순표(淳杓), 순정(淳正)이며, 두 사위는 이양섭(李陽燮), 김종후(金鍾厚)이다. 

 

후실(後室) 진양 하씨(晉陽河氏)가 낳은 1남은 순태(淳兌)이며, 사위는 강병찬(姜秉贊), 임석원(林碩元)이다.  큰아들의 손자는 증상(曾相), 기상(圻相)이며, 둘째 아들의 손자는 욱상(旭相), 택상(澤相), 학상(學相), 국상(國相)이며, 셋째 아들의 손자는 인상(麟相), 유상(攸相), 갑상(甲相), 동상(東相), 문상(汶相)이며, 넷째 아들의 손자는 두상(杜相), 옥상(沃相), 길상(吉相), 구상(玖相)이며, 막내아들의 손자는 우상(佑相), 무상(武相)이다. 

 

외손자는 이찬규(李粲圭), 철규(哲圭), 성규(聖圭)와 김관영(金寬永), 복영(福永), 근영(謹永)과 강남규(姜南圭), 상규(相圭)와 임창수(林昌洙)이다. 증손(曾孫)은 수록하지 않는다. 삼가 생각건대, 공이 수립한 것은 진실로 근세에 없는 바였다. 

 

왕을 보필할 수 있는 커다란 포부를 가졌으니 마땅히 그 직책을 나누어 맡았어야 할 것인데, 망극한 시기를 당하여 세화(世禍)로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였으나 모두 음지가 된 속에서 한 가닥의 양(陽)을 부지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진실로 아쉽다. 

 

그러나 훌륭한 문집(文集)을 장차 배포하게 됨으로써 아름답고 은혜로운 공(功)이 후세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니, 공을 오늘날 학계에 탄생시킨 하늘의 뜻을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문인 권옥현(權玉鉉)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비석에 쓸 글을 청한다. 

 

나는 일찍이 공의 사랑을 받고서 스승으로 섬겼던 자이니, 지금 이 역사에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형편없는 글 솜씨로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행장을 읽어봄에 미쳐서 사실(事實)을 잘 기록하여 공의 모습을 어렴풋이 다시 뵙는 듯 하였다. 

 

그래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참람하고 망녕스러움을 고려하지 않고 행장을 간추려서 적기를 위와 같이 하고 명(銘)을 이었다.

 

그 명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여 중후한 우리 공을 낳으셨다.

어릴 적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공부하기를 부지런히 하시니.

 

원대한 사업으로 기대하여 훌륭하신 석학들을 찾아 뵙고

경서와 예문을 강론 질정하여 분명히 알지 못한 것이 없었네.

 

송나라 정주학(程朱學)에다 몸을 맡겨 스승과 법으로 삼고

성리서와 전례 등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였다.

 

율곡선생을 꿈속에서 뵙고는 친절히 이끌어 주심을 받아

더욱 분발하여 공부하였으며 사모하는 마음 정성을 다하였네.

 

도학의 경지는 높고도 깊으며 문장은 넘실대는 물결 같아라.

천지가 온통 순음인 세상이건만 한 가닥 양기를 부지해 내었어라.

 

장엄으로 몸가짐에 법을 삼았고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후학을 가르쳐 이끌 적에는 조금도 어긋나고 잘못됨 없었다.

 

사문의 동량이요 사람의 종장이라

온 나라의 인사들은 누군들 우러르지 않으리.

 

기유년(己酉年?확인 요망) 대한절(大寒節)에 밀양(密陽) 박효수(朴孝秀)는 삼가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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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秋淵先生權公墓碣銘

 

維我國朝之士의 道學文章엔 或有品差하고 而其兼有而不偏者는 自昔無幾人矣러니 而至于近世兼此二者者하니 卽故秋淵先生權公이 是已라 公의 諱는 龍鉉이요 字는 文見이며 秋淵은 號也라。權氏는 安東人으로 肇自高麗太師 諱 幸이러니 而後에 有文坦公一齋諱漢功과 忠憲公柳菴諱仲達이 最著于麗朝라 入我朝하여 諱 濬은 文弼善이며 寒岡鄭先生門人으로 世稱霜嵒先生이라。

 

三傳하여 諱宇亨은 文牧使이며 號凉閣으로 尤菴宋先生의 門人이다 三傳하여 諱佖中은 號納新齋라 하며 屛溪尹先生門人으로 於公에 六世라 高祖曰 永夏는 通德郞으로 號梅軒이며 始徙草溪之柳下里하다 曾祖曰 秉準이며 祖曰 度熙오 考曰 載直은 號晩松이라 하고 有遺稿하다 妣曰 草溪鄭氏는 邦潤의 女로 高宗己亥에 生公하다。

 

自幼岐嶷莊重하야 不妄言笑라 甫學語에 誦習千字文하고 始學塾師에 勤於課業이라 十餘歲에 遍讀通史及子書하며 善屬詩文이라 致書請敎於是菴李公하니 是翁이 亟稱호되 以舞勺妙齡에 嚴於邪正之分하고 發言近道하니 何處得來云이러라 其族兄覺齋公이 見公甚奇愛之하야 携與同處於鵬山山房하야 使食淡攻苦하니 見解益進하다。

 

十四五歲에 連遭祖考妣喪호되 侍大人公于廬次에 執禮應對를 夙夜甚謹이라 因大人公讀禮하야 考究家禮增解와 及備要等書하야 而定其從違하고 明其可行하야 隨得隨錄하야 而名曰 喪禮ꝯ錄이라 至於深衣續鉤之義하여는 則爲世之聚訟者하야 而遽立說하야 名曰 臆解라 하니 盖出於創見也어늘 見者多動色이러라

 

嘗往謁艮齋田先生于華島하고 講質心性之義하야 備聞旨訣하고 服膺從事하니 有記聞錄이라 又謁志山金先生하니 志翁이 一見에 期許之하야 以平日之志事及處世之時義로 申申告語之러라 又從遊于吳石農 崔欽齋 成悳泉 金杏海諸賢과 講磨道義하야 多有資益이러라。

 

自此로 常靜居山房하야 以聖賢爲師的而斷絶衆歧러라 致力於四子六經程朱全書性理大全諸書하고 其有餘力이면 則泛覽諸家하야 博極無餘하며 晩年所主는 全在朱子語類니 入其中而盡其精力하야 先儒所論理氣先後와 四端七情과 心性理氣之說을 折衷而辨釋之하고 古今典禮도 亦有考證而立說하야 使後學不失趨向之正하다 嘗曰 道與文은 本非二途니 當以朱子之文與道俱至者로 爲準이 可也라。

 

其爲文也엔 惟務理勝而辭達하며 氣大而法正하니 汪洋紆餘는 深有得於紫陽步趨라 一夜에 夢見栗谷先生而得承其接引이어늘 則益加奮勵而特致宗慕하고 尤嚴於尊攘之義러니 當國社屋에 倭讎入國하야 洋禍滔天하고 至於易姓削髮之變하야 公이 一一嚴斥之하고 而固守舊制라 慨然有隱遁之志하야 搆雲華堂于雲峴山下하고 以寓宗仰雲谷華陽하며 又以志伊學顔祖雲宗華八字를 揭壁而加勉焉하다。

 

受業門人이 又搆一屋于柳下里前하고 爲先生藏修之所호되 則扁曰 泰東書舍라 하니 盖因其山名이나 而實寓保守東方道術者也라 遠近來學者를 舍不能容이나 而質問經子疑義를 公亦孜孜引接하고 諄諄啓發하야 期深透悟하야 使各有成就焉하니라。

 

性又至孝하야 事親에 一以承順이러니 大人公이 晩有眼眚이어늘 則公이 左右承奉하야 保如嬰兒하고 及其侍病에 而除穢滌汙를 必以躬親하야 夜不交睫者數旬이나 而不少懈라 數歲之內에 連遭內外艱하야 哀毁頓絶하고 執制如禮하야 前後如一하며 逐日哭墓하고 朔望展墓호대 至老不廢러라。

 

大人公의 手植杏樹下에 築壇建碑하고 朝夕盤桓而寓慕하다 母夫人嫁時之籠을 歲久廢置러니 則爲糊塗作櫃하야 置之座側而銘以識之하야 以寓終慕하고 及夫日哀如袒括이러라。

 

友愛一弟하야 有無相同이라 處宗族以敦睦하고 敎子孫以勤儉이라 至於奉先之節은 誠意交孚而節度不差하고 持身制行은 規度甚嚴하야 必以古道而絶流循之態라 其接賓友에 溫恭誠信하며 每自謙退하야 處之以愚라가 而於論理論事에 必明辨精覈하야 一有所執則確乎不拔이라。

 

持論에 常主寬厚和平하야 不爲偏邪乘激하다 而至於義利邪正之辨하면 則如斬釘截鐵而不爲苟循이라 故或有痼於黨習而侮毁先賢이나 干犯名義而强辯飾非者하면 則辨斥之甚嚴이라。公은 以天年으로 卒于丁卯至月十九日하야 葬于杏亭山壬坐하다 會葬者千數百人으로 加麻者數十人이러라 配는 驪州李氏鍾璟女로 先公歿하니 墓別葬南山亥坐하다。

 

四男은 淳道 淳義 淳杓 淳正이며 二女는 李陽燮 金鍾厚이며 後晉陽河氏의 一男은 淳兌이며 二女는 姜秉贊 林碩元이다 長房男은 曾相 圻相이며 二房男은 旭相 澤相 學相 國相이며 三房男은 麟相 攸相 甲相 東相 汶相이며 四房男은 杜相 沃相 吉相 玖相이며 季房男은 佑相 武相이다 外孫은 李粲圭와 哲圭, 聖圭며 金寬永과 福永, 謹永이며 姜南圭, 相圭와 林昌洙이며 曾孫은 不錄이라。

 

竊念公之樹立은 洵近世所無也라 輔弼皇猷하니 宜爲分職而遭値罔極하야 惟與世禍血戰이나 止扶一線於窮陰하니 是固可憾이라 然大集將布矣라 嘉惠之功이 可及來人하니 則公之降於今日學界者가 天意豈偶然哉아。門人權玉鉉君이 手述行將하야 請余以爲牲石之文하니 余嘗蒙公眷愛而師事之者也니 今於此役也에 豈敢自外哉아 然以拙文으로 不足以形容萬一이라 故固辭也나 及讀其狀文에 善記事實而公之儀範을 怳然如復見하니 尤切景慕之心하야 不顧僭妄하고 就狀檼括如右라 系之以銘하노라 銘曰。

 

天眷我東하여 篤生我公이라 自幼好學하여 勤孜用功이라 期以遠大하여 遍謁名碩하고 講質經禮하여 靡不通格이라 濂洛關閩에 委身師則하고 性理典禮에도 殫心究刻이라 夢見栗翁하고 承其接引하여 益加奮勵하며 宗慕誠盡이라 道學은 崇深하고 文章은 汪洋이라 天地純陰이나 克扶線陽이라 律己莊嚴하고 事親至孝라 敎誨後進에 罔或骫骳라 斯文棟樑이요 士林宗匠이라 通國人士는 孰不宗仰이리오 屠維大荒落 大寒節에 密陽 朴孝秀는 謹撰하다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 묘 ㅣ 소재지 : 경남 합천군 초계면 유하리 행정(杏亭) 뒷산 임좌(壬坐)

    資料 : 泰東書院 ㅣ 글쓴이 : 權甲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