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戶曹判書 坡谷 李誠中 墓碣/墓誌銘。

■ 이성중묘표(李誠中墓表) [세계] 세종의 아들 계양군 증(桂陽君 璔)의 현손. [생졸년] 이성중『李誠中, 1539(중종 34) ~ 1593년(선조 26)』 [개요] 1654년(효종 5)에 세워진 이성중(李誠中)의 묘표(墓表)이다. 찬자는 조경(趙絅, 1586~1669)이고, 서자는 허목(許穆, 1595~1682)이다. 이성중『李誠中, 1539(중종 34) ~ 1593년(선조 26)』의 본관은 전주로 자는 공저(公著)이고, 호는 파곡(坡谷)으로. 세종의 아들 계양군 증(桂陽君 璔)의 현손이다. 그는 이중호(李仲虎)·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호조· 예조· 병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의 벼슬을 거쳤다. 1575년(선조 8) 동인..

領議政 荷屋 金左根 墓表。

■ 영의정 충익공 하옥 김공 좌근 묘표 (領議政 忠翼公 荷屋 金公 左根 墓表) [생몰년] 1797년(정조 21)~1869년(고종 6) [지은이] 영의정 심암 조두순 찬((領議政心菴趙斗淳撰) [글씨]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오호라! 공의 묘도가 이뤄지고 신도도 차차 정리가 되었으니 그 행적을 기술하여 돌에 새겨 지석은 묻고 비갈은 세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헤아리지 못할 바는 나처럼 위태위태하게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일이다. 공의 휘는 좌근이고, 자는 경은이다. 김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지는 오래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상헌은 좌의정을 지냈고, 명나라 편에 서서 대의를 천하에 드러냈으니 시호는 문정이며 학자들이 청음 또는 석실대로라 칭하였다. 휘 수항의 시호는 문충이..

이천 부사 노대하 묘표/신도비명。

■이천 부사(利川府使) 노공(盧公)의 묘표(墓表) [생졸년] 노대하『盧大河, 1546년(명종 1) ~ 1610년(광해 2)』 미수 허목 찬(眉叟 許穆 撰) 삼한(三韓)의 노씨(盧氏)에 두 종족(宗族)이 있는데 다 잘되었다. 하나는 본관(本貫)이 교하(交河)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光州)인데, 오늘날 광주 노씨가 더욱 번성하다. 공(公)은 광주의 세계(世系)로 휘는 대하(大河)요, 자는 수오(受吾)이니, 조선 초기의 정승 노숭(盧嵩)의 후예로, 창수(倉守)로 찬성(贊成)에 추증된 노후(盧珝)의 증손이요, 활인서 별제로 영의정에 추증된 노홍(盧鴻)의 손자요, 돈녕부 첨정으로 좌승지에 추증된 노극신(盧克愼)의 아들이며, 모(母)는 덕산 이씨(德山李氏)로,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증영(李增榮)의 딸이다. 가정(..

윤후 묘갈명 병서(尹侯墓碣銘幷序)/남원윤씨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군자감 판관 윤후 묘갈명 병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이사균 찬. 급모 김노 서. 군(君)의 휘(諱)는 은(訔)이요. 자는 화중(和仲)이니 남원 대성이다.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로청백(淸白)함으로써 이름을 나타낸 이는 휘(諱) 임(臨)이니 선공감지득(繕工監之得)을 낳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곧 군(君)의 아버지다. 공조전서(工曹典書) 기면(奇勉)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니 기(奇)씨 또한 이름난 씨족이다. 부인은 집안을 다스림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가훈(家訓)을 잘 지켜 그러 했던 것이다. 군(君)이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장성 하매 능히 스승에게 취학하여 경전(經傳)을 통달하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달아 뜻을 얻지 못하다가 만년(晩年)에 음사(蔭..

정익린 묘갈명 병서(鄭翼麟墓碣銘 幷序) - 정기룡 장군 장자

정익린『鄭翼麟, 1596년(선조 29) ~ 1649년(인조 27)』 僉樞鄭公墓碣銘 幷序 - 李萬敷 三道水軍統制使鄭公起龍。籍晉陽。以忠勇致功業。嗣曰翼麟。字聖瑞。戊午武科出身。以軍功。陞階折衝。辛酉。拜僉知中樞府事。己丑四月二十八日。終于家。得年五十有四。葬于沙伐午向之原。初配花山權氏。不字。繼室順天金氏。男夏韺,善韺,舜韺,美韺,禹韺,元韺。女金世鼎,權志妻。孫純,緡,縉,全世耈,張彩明,金億齡,金華鍵妻。夏韺出。綸,糾,緝,李聖一,朴奎亨妻。善韺出。維,緯,尹商佐妻。舜韺出。安命天妻。禹韺出。績,紝,紀,縵。元韺出。內外孫曾五十餘人。權氏葬在咸昌栗谷丙向之原。祔公墓右金氏之葬。是也。綸以其伯父夏韺命。來曰。公旣銘吾祖墓石矣。吾父葬次祖兆。不可以無表。幸卒以惠。夫以不得辭於前。奚重辭焉。葢公器度恢偉。武藝竗絶。丙子。赴國難。在元帥票下。能以弓劍殲賊頗多。至創傷而無懼焉。講..

同春堂 宋浚吉 先生 墓表/墓誌銘

■ 동춘당 송선생 준길 묘표 (同春堂 宋先生浚吉之墓表) [생졸년]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외손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민진후 근술 (外孫 崇政大夫 行 兵曹判書 閔鎭厚 謹述)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찬선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 문정공 동춘당 송선생 묘표 음기 선생의 이름은 준길이요, 자는 명보이다. 선계는 은진에서 나왔다. 고려 판원사 대원의 후손이다. 명의라는 분은 사헌부 집단이었고 그 손자 유는 호가 쌍청당이다. 쌍청당의 증손은 이름이 여즙인데 이가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세영이며 조부는 응서인데 군수이다. 아버지는 이창인데 또한 군수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행첨추 은휘의 따님..

孤山處士德山黃耆老墓碣銘

고산처사 덕산 황공 기로지 묘갈명 (孤山處士 德山 黃公 耆老之 墓碣銘) ◇생졸년 :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자(字)는 태수(台叟)인데, 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 광적(光迪)의 12세손이다. 선고(先考)는 이름이 이옥(李沃)으로 별좌(別坐)를 지냈고, 조부는 이름이 필(㻶)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귀수(龜壽)로 참판을 추증받았고, 고조부는 이름이 정문(正文)으로 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은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그 초서(草書)는 더욱 기이하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완호(玩好)하여 보물로 여기면서 이르기를 “왕희지(王羲之) 이후의 제 일인자이다.”라고 한다. 그 필적(筆跡)을 얻고자 비단을 싣고 문전에 이르는 자가 매일 천백..

각진국사 비명(覺眞國師碑銘)/제정집

제정집 제3권 / 묘지명(墓誌銘) 고려 왕사(高麗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선사(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 각엄존자(覺儼尊者) 증 시 각진국사(贈諡覺眞國師) 비명(碑銘)과 서(序) 지원(至元) 14년(1355, 공민왕4) 을미년에 왕사(王師) 각엄 존자(覺儼尊者)가 열반에 들었다. 5년이 지난 뒤에 그의 무리 원규(元珪)가 전하께 아뢰기를, “우리 왕사의 행적이 묻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원컨대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주상께서 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신이 명령을 받은 후에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에 달관한 사람은 일생을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으로 여기고, 명예와 지위를 헌신짝같이 보았다. 더욱이..

각진국사 비명(覺眞國師 碑銘)/동문선

동문선(東文選) 제118권 / 비명 왕사 대조계종사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선사 각엄존자 증 시 각진국사 비명[병서] 王師、大曹溪宗師 一邛正令 雷音辯海 弘眞廣濟 都大禪師 覺儼尊者 贈 諡 覺眞國師 碑銘[幷序] 이달충(李達衷) 찬(撰) 지원 14년 을미년에, 왕사(王師) 각엄존자(覺儼尊者)가 적멸하였다. 5년이 지난 뒤에 그의 무리 원규(元珪)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 스승님의 행실이 묻히어 없어지게 버려둘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비석을 세워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신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고 가만히 생각하니, 옛날에 달관한 사람들은 몸 담은 세상을 여관으로 생각하고, 명예와 지위를 헌 신짝 같이 본다고 하였다. 더구나 부도씨(浮屠氏)는 유..

玉山 李瑀先生墓碣文/玉山傳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군자감정 옥산선생 이공 묘갈문 (有明朝鮮國 通訓大夫 軍資監正 玉山先生 李公 墓碣文) 송시열 지음(宋時烈 述) 율곡선생께 아우님이 계시니 이름은 우(瑀)요. 자(字)를 계헌(季獻) 호(號)를 옥산(玉山)이라 하며, 일찍이 영남의 선산(善山)에 사셨는데, 선산(善山) 사람들이 사절(四絶)이라 칭찬했다. 거문고와 글씨와 시(詩)와 그림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서법(書法)이 더욱 묘하여 참께에다 거북구(龜)자를 쓰신적이 있었고, 또 콩을 두쪽으로 쪼개어 오언절구(五言絶句)를 그 한쪽에다 쓰셨는데, 그 결구(結構)와 적륵(趯勒)의 법(法)을 잃지 않았었다. 선조대왕(宣祖大王) 께서 사랑 하시어 상(賞)으로 초결(草結 : 초서 쓰는 비결), 백운(百韻)을 손수 쓰신 책액(冊額)을 내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