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간이당 최립 묘갈문(簡易堂崔岦墓碣文)

야촌(1) 2014. 1. 2. 00:29

■ 간이당 묘갈문(墓碣文)

 

지은이>허목(許穆)

 

공의 휘는 입(岦), 자는 입지(立之), 성은 최씨이며 아버지는 자양(自陽)으로 국자감 진사이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말이 늦어서 태어난 지 10년이 되어서야 글을 읽었는데, 15세 어린 나이에 태학에 들어가 문장이 날로 세상에 유명해졌다.

 

23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니, 때는 공헌왕(恭憲王-명종) 16년(1561)이었다. 전후로 일곱 고을을 다스렸고, 소경왕(昭敬王-선조) 25년(1592)에는 견성 윤을 지냈다. 그 뒤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크게 혼란할 때를 당하여 명나라 천자에게 대대적으로 군사를 내어 왜병을 정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임금께서 늘 공에게 직책에 구애받지 말고 승문원의 일까지 겸하여 외교문서를 관장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올린 크고 작은 자문과 주문이 모두 44건이고, 전후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들어가서 글을 올린 것이 33건이었는데, 그중 4건은 《대명회전》을 반포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에 관련된 급박한 것이었으므로, 그 글이 구정이나 대려보다도 중시되었다.

 

그 뒤 공은 외직으로 나아가 간성태수로 있으면서 《주역구결》 4권을 지어 임금께 올리고, 〈홍범학기〉 500여 자를 지었다. 공은 평소에 반고와 한유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그 문장의 규모가 크고 깊으며 간결하고 장엄하며 예스럽고 우아하여 법이 될 만하였으니, 동방의 문학에 있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었다.

 

공이 73세에 별세하자, 고양의 오리섬에 안장하였다. 처음에는 공의 별호가 동고였는데, 뒤에 간이라고 바꾸었다 한다. 

아들 동망 역시 문학으로 진출하여 용강현령으로 생을 마쳤는데 후사가 없고, 서자로는 동문과 동관 두 사람이 있다.

 

인조 때 사신 이정귀가 임금께 아뢰기를 “최립이 문장으로서 세상에 이름났으나, 그 글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니 청컨대 그 유집을 간행하소서.” 하여 공이 별세한 지 40년 만에 비로소 그 글이 간행되었으니, 《간이당유문(簡易堂遺文》 29권이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고려 중엽 이후로 문학이 매우 성하여 이 상국(李相國 이규보(李奎報))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가장 드러났는데, 이 상국이 특히나 웅장하였다. 본조 제가의 작품 또한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간이의 작품들은 특히 웅건하고 간결하여 유독 뛰어났으니, 천년에 한 번 나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주01]공이 별세한 지 40년 :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최립이 죽은지 20년 뒤인 인조 9년(1631)에 이정귀(李廷龜)와 교서관(校書館) 관원들의 주청에 의해 《간이집》 9책을 목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40년은 20년의 잘못이 아닌가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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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簡易堂碣

 

公諱岦字立之姓崔氏父自陽國子進士公少孤不慧於言生十年始讀書甫成童陞太學文章日有名於世二十三擢上第當恭憲王十六前後領邑七昭敬王二十五守甄城尹後爲司寇亞卿當壬辰兵革國大亂日請救於天子大發兵征倭上常令公毋拘以分職兼管承文院事掌詞命咨奏書大小四十四前後三入京師上書三十三其四頒行會典事也餘皆存國亡國之急也於是其文重於九鼎大呂後出爲杆城太守上周易口訣四卷作洪範學記五百餘言公平生好讀班固韓愈書其文閎深簡奧古雅可法東方文學千載一人公七十三沒葬高陽之鳧嶼公別號東皐後易之以簡易云子東望亦以文學進終龍岡縣令無子又有庶出子東聞東觀二人仁祖世有詞臣李廷龜白上曰岦以文章名世沒而無傳請刊行其書公沒四十年其文始行簡易堂遺文二十九卷

其贊曰。自高麗中世以後。文學甚盛。李相國,牧隱最著聞。李相國特雄偉。本朝諸名家作者。亦不爲不盛。而簡易諸作。特瑰健簡奧。獨傑然。可爲千載一人云。

 

기언 > 記言卷之十八○中篇 / 丘墓[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