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92

조말생 묘비명(趙末生墓碑銘)

■조말생 묘비명(趙末生墓碑銘) [생졸년] 1370년(공민왕 19) ~ 1447년(세종 29)/壽77歲 영중추문강조공묘비명(領中樞文岡趙公墓碑銘) 유명조선국 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 보문각 대제학 증시문강 조공 묘비문 (有明朝鮮國 崇祿大夫 領中樞院事 兼 兵曹判書 寶文閣 大提學 贈諡文剛 趙公 墓碑文) 우리 10대조 문강공(文剛公) 부군(府君)의 휘는 말생(末生)이며, 자는 평중(平仲)이다. 대개 공은 우리 태종과 세종조에 세상 다스리는 일을 도와 세상을 융성하고 편안하게 하였으며, 덕업과 문장이 한 세대의 으뜸으로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신이라 일컬었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사적이 남아 있는 것이 적으니, 슬프도다. 무릇 세상에 전하기로는 옛날에 아름다운 돌에 새긴 비문이 있어 자 뭇 자세한 내용을 살필..

윤민신 선생 묘표(尹民新先生墓表)

■贈參判尹公墓表。 [생졸년] 윤민신『尹民新, 1538년(중종 33) ~ 1610년(광해 2)』 公諱民新字士修。姓尹氏。高麗按廉使威。因平賊功遂以南原爲貫。南原之尹自此始。子孫世多賢。入本朝有觀察使世臨。其曾孫時英文科司諫。是生內資寺判官淸。治邑著績。有去後思。配東萊鄭氏。文貞公昌孫之孫。縣監錙之女。以嘉靖戊戌某月某日生公。天資醇篤。才氣超邁。少與從兄龍源君自新。俱有能詩聲。而經學則過之。大肆力於博士業。矻矻窮年。厲志不衰。至與諸子共赴公車而不以爲嫌。旣不利於上舍之選。辛卯經科。竟以一字之誤。蹉跌自廢。豈非命也。公於子弟。敎訓甚嚴。別構一屋。聚諸子其中。只置一衣履。以限其出入。勸飭敎誨。日有程督。必期於業成而後已。及公之世。五子果能後先擢第於數年之間。朝家遵古典。歲賜米十斛。仍授廚院。參奉。但謝恩命而不就。庚戌十月。終于家。以子承旨從勳。追贈吏曹參判。夫人李氏太宗大王之後。忠..

흘봉 이빈망 묘갈명/행장 - 재령이씨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一 / 墓碣銘 흘봉 이빈망 묘갈명(屹峯李贇望墓碣銘) 이빈망『李贇望, 1694년(숙종 20) ~ 1773년(영조 49)』 性齋集 허전(許傳:1797~1886) 撰 李氏出月城。在新羅有諱謁平。是爲上祖。麗朝有諱偊儞封載寧君。因以載寧爲貫。後至進士諱午。當麗季避居咸安茅谷。遂號茅隱。杜門自靖。節義與洪晩隱載幷稱。享三嘉雲衢書院。生諱介智贈戶曹參判。生諱仲賢弘文館副提學。錄淸白。我宣陵名臣也。生諱珷虞侯。中廟朝參勳錄。生諱景成。以孝薦授司憲府監察。贈兵曹參判。生諱㴐。掌樂院主簿。生諱而柏承仕郞。生諱炯號德翁。以文章行誼聞。於公爲高祖。曾祖洪鍾贈軍資監正。祖載祺。考慶培。有孝行儒術。妣八溪鄭氏。榮胄女。配碧珍李氏。毅然女。寒泉公洓之孫。生三男二女。能復,能益,能咸。壻姜潤,李忱。繼配晉陽姜氏昌佐女。殷烈公民瞻之後。生三男三女。男能恒,能宅,能節。壻李翰益,..

佔畢齋金先生神道碑陰識/墓碣/神道碑銘。

여헌선생속집 제8권 / 비(碑) 갈(碣) 지명(誌銘) ■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神道碑) 음지(陰識) [생졸년]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장현광(張顯光) 찬(撰) 위의 명문(銘文)과 서(序)는 바로 상공(相公)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한 것이다. 선생의 사업(事業)과 문장에 대한 대략이 모두 이 가운데 실려 있으니, 어찌 후인(後人)이 문자(文字)로 번거롭게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본부(本府)의 사람들이 선생의 덕업(德業)을 흠모하여 옛 마을 앞에 비석을 새겨 세웠는데, 임진년 병란(兵亂)에 보전되지 못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고을 사람들은 모두 다시 세울 것을 생각하였으나 여가가 없었는데, 이제 부백(府伯)인 사문(斯文) 이유달(李惟達)..

만은 이상보 묘갈명(晩隱 李尙輔 墓碣銘 ) - 陜川人

■ 晩隱 李公 墓碣銘 癸丑(1913) -합천이씨 [생졸년] 1827년(순조 27) ~ 1903년(광무 7)』 공의 휘는 상보(尙輔), 자는 승언(承彦)이다. 이씨(李氏)는 옛날 월성(月城)의 대족(大族)이었다. 상조(上祖) 알평(謁平)은 신라의 원훈(元勳)이다. 그 뒤 휘 개(開)는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져서 자손들은 그로 인해 따로 강양(江陽=陜川)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 때 경분(景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伏射)이고, 운호(云皓)는 판도 판서(版圖判書)이다. 이조에 들어와서 휘 양근(壤根)은 군수(郡守)이고, 휘 동재(棟材)는 관찰사(觀察使)이니, 모두 문과(文科)를 거쳤다. 휘 광우(光友)에 와서 산해(山海)의 문하에서 배워 학행(學行)으로 드러나서 세상에서 죽각(竹閣) 선생이라고 일컬으니, 공에게..

김종필 전 국무총리 자찬 묘비명.

■운정 김종필 전 국무총리 묘비명 (雲庭 金鍾泌 前 國務總理 墓碑銘) 121 자(字) 「사무사(思無邪)」를 인생(人生)의 도리(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을 치국(治國)의 근본(根本)으로 삼아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具現)하기 위하여 헌신진력(獻身盡力) 하였거늘 만년(晩年)에 이르러 「년구십인지 팔십구비(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한 물음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하던 자(者) - 내조(內助)의 덕(德)을 베풀어준 영세반려(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명 운정 자찬(銘 雲庭 自撰) 서 청암 고강(書 靑菴 高崗) ◇묘비명 풀이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

洪翼漢墓碣銘/墓表/墓誌/行狀。

■홍익한 묘갈명(洪翼漢墓碣銘)。 [생졸년] 1586년(선조 19) ~ 1637년(인조 15)』 송시열 찬(宋時烈 撰)。 명(明)나라 숭정(崇禎) 9년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금(金)나라 오랑캐가 (‘청(淸)’이라) 참호(僭號)하고는 몽고(蒙古)를 끼고 와서 우리나라에게 함께 황제로 받들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자(字)가 백승(伯升)인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공이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상소하기를, “금한(金汗, 청 태종(淸太宗)이 황제를 일컫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준(李浚)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다’면서 물리쳤으니, 신은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뛰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대명 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어왔으니, 오랑캐가 칭제(稱帝)한 후에야 어..

황보인 묘갈문/묘표(皇甫仁 墓碣文/墓表)。

[개요] 황보인『皇甫仁, 1392년(태조 1) ~ 1453년(단종 1)』 황보인 묘갈(皇甫仁墓碣) 비는 1765년(영조 41) 경기도 파주에 건립된 황보인묘갈(皇甫仁墓碣)로 김종후(金鍾后)가 비문을 짓고, 김상숙(金相肅)이 글씨를 썼다. 황보인(皇甫仁, 1387년 우왕 13~ 1453년 단종 1)의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사겸(四兼), 호는 지봉(芝峯)이다.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해서 세종 조에 강원도관찰사, 병조판서를 거쳐 10년 동안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하였다. 1452년(문종 2) 영의정이 되어 문종의 명을 받아 단종을 보좌하다가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1676년(숙종 2)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비문에 따르면 복관된 이..

한석봉 묘갈명 병서(韓石峯 墓碣銘 幷序)

◇석봉 한호(石峯 韓濩) 생졸년 : 1543년(중종 38)∼1605년(선조 38).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생졸년 : 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 ■ 한석봉 묘갈명 병서(韓石峯 墓碣銘 幷序) 월사 이정구 찬(月沙 李廷龜 撰) 내가 폐축(廢逐)되어 택반(澤畔)에 살고부터 늘 칭병(稱病)하여 손님을 사절하였다. 그런데 한 손님이 문 앞에서 몸을 굽힌 채 만나기를 청하기에 보니 한석봉(韓石峯)의 아들 민정(敏政)이었다. 내가 석봉의 묘도문자(墓道文字)..

이경창 묘갈명(李慶昌墓碣銘) - 文義李氏

이경창(李慶昌) ◇문의이씨(文義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이 관향이다. ◇생졸년 : 1554년(명종 9) ~ 1627년(인조 5) ------------------------------------------------------------------------------------------------------------------------------------- ■이경창(李慶昌)의 묘갈명(墓碣銘) 엄집(嚴緝) 찬(撰) 송도(松都)에 고(故) 처사(處士) 이씨(李氏)로 휘(諱) 경창(慶昌)이란 분이 있었는데, 자(字)는 언급(彦及)이고, 호(號)는 서촌(西村)이니, 그 선대는 문의현(文義縣) 사람이다. 증조 휘 세남(世柟)이 억울한 죄를 입고 개성부로 귀양을 와서 자손들이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