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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탄 이경동 묘갈명 병서(楸灘李瓊仝墓碣銘 幷序).

야촌(1) 2014. 1. 9. 02:34

  병조참판 추탄 이공 묘갈명 병서

(兵曹參判 楸灘 李公 墓碣銘 幷序)

 

경주 최익현 찬(崔益鉉 撰)

 

우리 동방 성족(盛族)은 이씨가 가장 우수한데 국조(國朝) 오백년 동안 명경현사(命卿顯士)가 족보에 끊이지 아니한 것은 오직 전주이씨가 바로 이분들이다. 옛날 성종대왕 세대에 기조시랑(騎曹侍郞; 병조참판) 휘 경동(瓊仝), 자 옥여(玉如), 호 추탄공(楸灘公)이 그중 한 분이다.

 

고조 정당문학 문정, 호 황강은 소를 올려 불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폐지하며 상기(喪期)를 단축한 잘못을 배척하여 고려조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증조는 검교중추부사 몽(蒙)이요,조부는 하동감무 증 이조참의 중유(仲由)요,고(考)는 판관으로 증 이조참판 달성(達誠)이며,현감 경주 이종미(李種彌)는 외조이다.

 

공은 정통 무오생(세종20 1438)으로 천순 임오년(1462)에 문과에 발탁되고 숙당(淑堂)에 선발되어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했고, 성화 경인년(1470)에 중시에 발탁되어 응교로 제수되어 경연 시강관을 겸하였다. 을미년(1475)에 또 중중시에 발탁되어 품계가 가선에 올라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제수되었고 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말년에 전주 추천에 물러가 쉬면서 낚시로 고기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것으로 종로계(終老計, 늙어 세상을 마칠 계획)를 하였는데,마침내 홍치 갑인(1494) 2월 22일에 졸하니 향년 겨우 57이다. 성종대왕께서 친히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하셨으니,아! 성주(聖主)의 권념(眷念)하심이 도타우신 것은 어찌 소이연(所以然)이 없겠는가?

 

공의 재예(才藝)가 초월한데다 박학을 더하였고 문장이 세상을 울렸는데 독행(篤行)을 겸하였으며,한번 스승에 나간 뒤로부터 화문(華聞)이 크게 전파되었고 선비의 옷을 벗게 되어서는 개연히 징청지지(澄淸之志, 세상의 어지러운 것을 맑게 하려는 뜻)가 있어서 20년 경악(經幄)에서 흉금을 털어놓고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말씀드린 것이 많았다.

 

마침내 벼슬을 사양하고 강호(江湖)에 우유(優遊, 넉넉히 놂)하면서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없은즉 공의 어진 것을 가히 알 것이다. 공이 돌아가신 뒤 무오년에 사화(士禍, 연산4년 이극돈․유자광이 사화를 일으켜 일시 명인 36명을 혹살 혹해했음)가 일어나 공의 3종손 정간공 목(穆)이 일대의 선류(善類)와 더불어 혹독한 화를 입었으니 공이 일찍이 스스로 용퇴(勇退)한 것은 또한 어찌 기틀을 명확히 본 것이 아니겠는가.

 

아깝구나. 세대가 점점 멀어져 가언선행을 다 전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계부인잠(誡夫人箴) 1편은 그 충효 단심이 권권(拳拳)하여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족히 볼 것이니 이것이 전정지일연(全鼎之一臠, 솥 안의 전체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그 솥에 있는 살점 하나 먹어보면 전체의 고기 맛을 안다는 뜻)이라고 가히 이를 것이다.

 

전주 서쪽 이성동 갑좌에 장례 모셨고 황강 사우에 배향하였으며, 배위 정부인 상산김씨는 지평 이용의 따님이니 묘는 공과 더불어 같은 언덕이다. 1남 강의(綱義)는 영고봉사요, 1녀는 여서가 윤세흠(尹世欽)이니 판서이다. 손남(孫男) 우(羽)는 참봉이다. 증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그의 후손 정호(正鎬), 면호(冕鎬), 주호(周鎬)가 장차 비석을 세워 수도(隧道)를 꾸미고자 현진(顯晋), 직선(直善) 등이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이 노후(老朽)한 것을 돌이켜보아 나의 소임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그 간청함이 더욱 도타워 드디어 행장을 고증하야 서술하고, 계속하여 명(銘)을 하니 명에 가로대 황강의 초손(肖孫)이요 성종의 현신(賢臣)으로서 언행에 흠이 없이 옥 같은 그 사람이로다.

 

처음 마음에 잡은 것은 요순의 인군과 요순의 백성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남쪽나라 호숫가에서 임을 그리워할 뿐이로세. 직위는 덕에 맞지 않고 수명은 인(仁)에 맞지 않으셨는데 오히려 유방(遺芳)이 있어 백세(百世)에 인멸하지 아니하였도다.

 

조두(俎豆)로 높이 봉향하였으니 공의 거동이 멀리 고루 모범이 되시었네. 내가 그 이유를 천명하여 정민(貞珉; 비석을 말함)에 걸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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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兵曹參判楸灘李公墓碣銘 幷序

 

慶州 崔益鉉 撰

 

吾東盛族。李氏爲最。而國朝五百年。名卿顯士。譜不絶書者。惟全州氏是已。昔在成廟之世。則有若騎曹侍郞諱瓊仝。字玉如。號楸灘公。其一也。高祖政堂文學文挺。號黃岡。䟽論崇佛廢學短喪之非。爲麗朝名臣。曾祖檢校中樞副使蒙。祖河東監務贈吏曹參議仲由。考判官贈吏曹參判達誠。縣監慶州李種彌。其外祖也。公以正統戊午生。天順壬午擢文科。選湖堂。歷弘文館副修撰。成化庚寅。擢重試。移拜應敎。兼經筵侍講官。乙未。又擢重重試。陞嘉善。拜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又拜司憲府大司憲。晩年。休退于全州之楸川。漁釣觴詠。爲終老計。竟以弘治甲寅二月二十二日卒。享年僅五十七。成廟親製輓詩以悼之。噫。聖主眷念之篤。豈無所以而然哉。公才藝出類。加之以博學文章鳴世。兼之以篤行。一自就傅。華聞大播。逮至釋褐。慨然有澄淸之志。卄載經幄。啓沃甚多。終乃辭却簪纓。優遊於江湖之上。而無怨悔之意。則公之贒可知也已。公歿後五年戊午。史獄起。而公之族孫貞簡公穆。與一代善類。同被酷。則公之早自勇退。亦豈非見幾之明也歟。惜乎。世代寖遠。嘉言善行。不得盡傳。而惟誡夫人箴一篇。足見其忠孝丹心。眷眷不渝。此可爲全鼎之一臠也。塟于府西伊城洞甲坐。從享于黃岡祠。配貞夫人商山金氏。持平利用女。墓與公同原。一男綱。義盈庫奉事。一女尹世欽。判書。孫男羽。參奉。曾玄以下不盡記。今其雲仍正鎬等。將伐石以賁隧道。請文於不佞。顧此老朽。累辭非其任。而厥懇愈篤。遂按狀而叙之。系以銘。銘曰。

黃岡肖孫。宣陵賢臣。言行無疵。如玉其人。攬轡初心。堯舜君民。終焉卷懷。南湖之濱。位不副德。壽不稱仁。尙有遺芳。百世不湮。俎豆崇奉。公議攸均。我闡厥幽。俾揭貞珉。<끝>

 

勉菴集卷之二十八 > 墓碣/崔益鉉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