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在薰 113

백두산

■ 백두산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白頭山) 이라는 이름은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 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말 그대로 '흰 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백두산을 장백산신으로 봉한 이후에 '장백산(長白山, 창바이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산의 고도(높이)는 2,750m(북측 측량)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전체 면적중 1/3은 중국의 영토에, 2/3는 북한의 영토에 속한다. 그리고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상징으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천연식물원처럼 다양한 야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두산에 오를려면, 제1코스는 안도현의 이도백하(북쪽 기슭)등산로이다. 이곳을 경유하면서 관광객들은 먼저 백두산에 관한 기초지식을 습득한 후 산..

박수량(朴守良)

■ 박수량(朴守良) [생졸년] 1491 (성종 22) - 1554 (명종 9) [문과] 중종(中宗) 9년(1514) 갑술(甲戌)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합격연령 : 24歲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5위 /합격연령 : 23歲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군수(君遂). 전라남도 장성 출신. 종원(宗元)의 아들이다. 김개(金槩)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

청호공 배위 죽산안씨

경상도관찰사 청호(淸湖) 이희(暿)선생의 배위 죽산안씨(竹山安)와 그의 부모 묘는 563년간 고양시 원당리에 있었는데, 묘소 위로 도로가 나는바람에 불가피 이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익재공후 청호공파 파조모인 죽산안씨는 무남독녀로서 부모님 묘소를 지키기 위해 경기도 고양에 부모님 산소 아래 있었는데 2011년 봄에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에 있는 부군 청호공 묘역으로 합장 이장했다. 그리고 청호공의 합장묘 위에 장인 정경공 안등선생 산소도 이곳으로 함께 이장했다. 죽산안씨(청호공 배위) 집안의 세계도를 살펴 보면, 1世--2世--3世--4世--5世--6世--7世--8世--9世--10世--11世--12世--13世--14世--15世--16世 안원-방준-국보--륜--덕생--사--학겸--준--시무-세윤-자유--한..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㊶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上) 입력: 2008년 08월 22일 17:42:21 당쟁 소용돌이서 국정을 바로잡다 채제공의 죽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 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의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번암 채제공의 73세 때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당대의 화가 이명기의 솜씨다. |사진작가 황헌만 1720년에 태어나 80수를 누리고 1799년 초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다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채제공은 숙종 46년에 태어나 영조 11년인 1735년에 16세로 향시에 급제하고 ..

형제가 모두 6조 판서를 역임한 명문가

■ 형제가 모두 6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 전무후무한 형제 6조판서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형제. 가문에 판서하나 나면 온동네가 시끌벅적할 만큼 판서되기가 쉽지 않은 조선조 문벌사회. 한사람이 6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형제가 모두 6조판서를 지낸다는 것이 가문과 개인의 영광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바로 동래정씨(東萊鄭氏)가 배출한 두 정승 정태화(鄭太和), 정치화 (鄭致和) 형제로서 이들 형제는 6조판서를 모두 지냈고 형은 영의정, 동생은 좌의정까지 지냈다. 이러한 관직운과 가문의 배경, 개인의 피나는 노력 등이 두루 구비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두루 구비하고 관운을 타고난 인물이 있으니 영의정을 6번이나 지낸 정태화와 그의 동생 치화였다. 이들의 가문에는 5..

이시일(李時逸)

■ 이시일(李時逸) [세 계] 국당공 후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 후손 [생졸년] 1731년(영조 7) 10월 15일∼1792년(정조 16) 4월 7일. [문 과] 영조(英祖) 32년(175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26세 입격 -------------------------------------------------------------------------------------------------------------------------------------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안(敬安)이고, 호는 한와(閒窩)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적은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杞溪面) 출신이다. 증조는 이집(李楫)이고, 조부는 이효겸(李孝謙)이다. 부친 ..

李慶徵 - 왕실의궤자료

왕실의궤자료 李慶徵 李慶徵時發庶子宣祖庚子生字君善仁祖癸酉以司果登明經科丁丑亂以藍浦縣監火死陣中年三十八三 [주 : 兄弟文科 弟 慶徽 慶億 見下] 기사메타 : 君善司果李慶徵縣監 ---------------------------------------------- 이경선(李慶善) 李慶善 慶億庶弟字君善 仁祖丙子以藍浦縣監 從 監司 鄭世規 爲運糧差使員及師潰不旋踵而戰死孝宗朝其子陳疏 이경선 경억서제자군선 인조병자이남포현감 종 감사 정세규 위운량차사원급사궤불선종이전사효종조기자진소 祈恩朝廷問于世規良然遂贈官英祖 朝旌閭 기은조정문우세규양연수증관영조 조정려 ----------------------------------------------------------------------------------------------------..

은송정기(隱松亭記)

■ 은송정기(隱松亭記) 역문(譯文) 저번에 고령(高靈)의 이태희(李台熙)라 하는 분이 한권의 가승(家乘)을 가지고, 내집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請)하고 말하기를, 이는 우리집의 파보(派譜)이고, 하나는 곧 우리 11대조가 되는 남포공(藍浦公)의 순절(殉節) 한때의 실상(實狀)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남포공(藍浦公)은 벽오공(碧梧公)의 第五子로서 일찍이 벼슬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남포현(藍浦縣 : 오늘날 충남 보령시)을 다스리다가 丙子年[1636(인조 14)]에 북쪽 오랑케가 일으킨 난리(亂離)를 만났다. 나라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잇달아 일어났고, 난리(亂離) 뒤에 우리 조상(祖上)은 멀리 외가(外家)에 찾아가 함께 살려고 남하(南下)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고령(高靈)의 가곡(佳谷) 땅에 이..

정만록(征蠻錄)

정만록(征蠻錄) ◈종목 : 보물 제880호 ◈소재지 : 경북 의성군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보물지정일 : 1986년 10월 15일 ◈수량 및 면적 : 2권 2책 ◈시대 : 조선 ◈소유자 : 경주이씨 직장공파 문중 이진우(慶州李氏 直長公派門衆)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579번지 ◈관리자 : 국립진주박물관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저자(著者) : 이탁영(李擢英) ◈1541년(중종 36)~1610년(광해 2). ◈慶州李氏 十九世 直長公 李養吾의 五代孫임. ◈경주이씨 직장공파 집성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1923년 초판 자(字)는 자수(子秀), 호(號)는 반계(盤溪) 또는 효사재(孝思齋),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영리(營吏)로서 임란(壬亂)이 발발하자 순찰사(巡察使)..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

■ 결국 봉기한 준소(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완소(緩少)가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3호] 20091206 입력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는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적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절반의 성공 영조②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