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정만록(征蠻錄)

야촌(1) 2010. 9. 21. 20:42

정만록(征蠻錄)

 

 

 

 

 

 

◈종목 : 보물 제880호

◈소재지 : 경북 의성군 (국립진주박물관 보관)

◈보물지정일 : 1986년 10월 15일

◈수량 및 면적 : 2권 2책

◈시대 : 조선

◈소유자 : 경주이씨 직장공파 문중 이진우(慶州李氏 直長公派門衆)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579번지

◈관리자 : 국립진주박물관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저자(著者) : 이탁영(李擢英)

 

◈1541년(중종 36)~1610년(광해 2).

◈慶州李氏 十九世 直長公 李養吾의 五代孫임.

◈경주이씨 직장공파 집성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1923년 초판

 

자(字)는 자수(子秀), 호(號)는 반계(盤溪) 또는 효사재(孝思齋),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영리(營吏)로서 임란(壬亂)이 발발하자 순찰사(巡察使) 몽촌(夢村) 김수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하였을 때에도 수종(隨從)하여 헌책(獻策)한 바가 많았다.

 

1593년(선조 26)에는 초유사(招諭使)와 경상좌감사(慶尙左監司)를 지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서 초병(招兵) 및 모량(募粮) 등의 방책(方策)을 건의하여 전승(戰勝)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그리고 두 관찰사의 막하에서 대소문보(大小文報)를 대작(代作)한 바가 많은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평란후(平亂後) 논상(論賞)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며 효행이 특출하였다 한다. 

 

숙종(肅宗) 때 평란(平亂)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정조(正祖) 때 충효사(忠孝祠)가 세워졌다. 저서(著書)로는《정만록(征蠻錄)》효사재문집《(孝思齋文集)》이 전한다.

 

이《정만록(征蠻錄)》은 원래 저자(著者)가 임란시(壬亂時) 진중(陣中)에서《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목(題目)으로 초(草)하여 두었던 것이다. 난(亂)이 평정(平定)된 선조 34년(1601)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시발(李時發)을 시켜 도내(道內)의 사적을 채집케 하였는데 이 때 저자가 이 일록을 재정리하여 제출하였던 바, 이를 어람(御覽)한 왕은 정만록(征蠻錄)이라 명명하여 계하(啓下)하였다.

 

건권(乾卷) : 표지 이면(裏面)에 임진록(任辰錄) 제하(題下)에 임난 당시의 참전한 영상(領相)이하 군관(軍官)의 좌목(座目)이 있고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하(題下)에 월일(月日)을 별행(別行)하여 그날 그날의 듣고, 보고, 겪고, 느낀점을 기록하였다. 권말 여백에는 1712년(숙종38년)에 쓴 보만당주인(保晩堂主人) 안연석(安鍊石)의 자작자필(自作自筆)의 후지(後識)가 있는데 저자(著者)의 충효(忠孝)와 재능(才能)을 찬양하고 있다.

 

곤권(坤卷) : 먼저, 임란(壬亂)의 개황(槪況)과 이 일록(日錄) 및 연혁(沿革) ·통문(通文)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謄書)하게 된 연유를 6면(面)에 걸쳐 자세히 적은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敎書) ·장계(狀啓) ·통문(通文) ·첩보(牒報) ·치보(馳報) ·격문(檄文) 등을 전재(轉載)하고 있는데 당시 조야(朝野)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資料)다.

 

권말(卷末)에 일본(日本)에 피로(被虜)된 명인(明人) 허의후(許儀後)가 자국(自國)에 진달(陣達)한 기밀봉사(機密封事)를 전재하고 있는데 즉 진일본지상(陣日本之詳) ·진일본입구지유(陣日本入寇之由) ·진어구지책(陣禦寇之策) ·진일본관백지유(陣日本關白之由) ·진일본육십육국지명(陣日本六十六國之名) 등 6조로 당시 일본(日本)의 사정을 살피는 자료이다.

 

임란(壬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는《선묘보감(宣廟寶鑑)》을 비롯하여 이순신(李舜臣) 난중일기(亂中日記)記, 유성룡(柳成龍)《징비록(懲비錄)》, 조경남(趙慶男)의《난중잡록(亂中雜錄)》, 신경(申炅)의《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이노(李魯)의《용사사적(龍蛇事蹟)》 등 수십 종(種)에 달하고 자필본(自筆本)으로서는《난중일기(亂中日記)》와《징비록 (懲비錄)》이 대표적인 것임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라 하겠다.

 

이《정만록(征蠻錄)》은 위의 제기록(諸記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敵情)과 아군(我軍)의 병력배치(兵力配置)를 위시한 전투상황과 조야관민(朝野官民)의 사정을 상술(詳述)하고 있음은 물론 당시의 교서(敎書) ·유서(諭書) ·격문(檄文) ·장계(狀啓) ·치보(馳報) 등을 아울러 등초수록(謄초收錄)하고 있어 임란연구(壬亂硏究)에 큰 도움이 되는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영리(營吏)의 신분으로 순찰사(巡察使)의 막하(幕下)에서 적은 일기(日記)이어서 가사의 제약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 임진기사(壬辰記事)는 4월 14일 임란발발일(壬亂勃發日)로부터 기필(起筆)하여 그해 연말(年末)까지 약 10일간(日間) 결기(缺記)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적혀 있어 어느 임진란일기(壬辰亂日記)보다도 충실하고 자세하다.

 

특히 순찰사(巡察使)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을 때 함양(咸陽)에서 출발(出發),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했다가 다시 환영(還營)한 저간(這間)의 역로(歷路)의 일기(日記)는 다른 문헌(文獻)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인 듯하다. 그리고《정만록(征蠻錄)》이란 서명(書名)이 선조(宣祖)의 어정(御定)이란 점에서도 이 자료의 가치(價値)는 한층 더해진다.

 

 

↑충효사(忠孝祠)

 

●충효사(忠孝祠)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에 있는 효자(孝子) 이탁영(李擢英)을 배향(配享)한 사우(祠宇)이다.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충효사(忠孝祠) 건물은 그 후손들이 1801년(순조 원년) 신유에 세웠다가 대원군(大院君) 때 일시 훼철되었다가 1923년 계해년 유림(儒林)의 발기로 재건되어 춘추(春秋) 2회 재향 한다. 

선생이 태어난 집이기도 한, 효사당(孝思堂)은 1957년에 원형대로 개축 되었다.

 

그는 조선시대 지방 향리(鄕吏)였으며 저서(著書)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종군일기인《정만록(征蠻錄, 보물 제880호)》과 효사재문집《(孝思齋文集)》이 전한다.

------------------------------------------------------------------------------------------------------------------------------------

■ 정만록

     1592년(선조 25) 이탁영(李擢英)이 임진왜란 시발일로부터 끝난 98년까지 전후 7년간에 걸쳐 쓴 일록(日錄)과

     교서(敎書)이다.

 

[보물지정번호] 보물 제880호.

[소 장] 이종하(李鍾夏).

[시 대] 조선시대.

[종  류] 친필고본(親筆稿本)

 

보물 제880호. 장계(狀啓) ·첩보(牒報) 등을 수록한 이탁영(李擢英)의 친필고본(親筆稿本). 건(乾) ·곤(坤) 2권 2책. 이종하(李鐘夏) 소장.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의 영리(營吏)로 있던 필자가 진중에서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라는 제목으로 초하여 두었던 것을 1601년 선조가 읽고 명명한 이름이다.

 

건권(乾卷)은 ‘임진록’이라는 제하(題下)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영상(領相) 이하 군관(軍官)의 좌목(座目)을 실었고, 그 다음에 ‘임진변생후일록’이라는 제하에 월일별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점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임진년(壬辰年) 기사는 매일 기록하였고, 1593∼98년간은 O표를 하고 나서 연월일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만 적었다.

 

권말에는 이덕형(李德馨) 등 7명이 명나라의 흠차감군(欽差監軍)에게 보낸 정문(呈文)을 전재하고 있는데, 그 안에 쓰시마섬(대마도)이 경상도 지방임을 고증한 부분이 있으며, 또 이충원(李忠元) 등 6명의 정문(呈文)도 수록하였다.

 

곤권(坤卷)은 서문에서 임진왜란의 개황과 일록(日錄) 및 연혁 ·통문(通文)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騰書)하게 된 연유를 자세히 적고, 이어서 7년 동안에 있었던 교서 ·장계 ·통문 ·첩보 ·격문(檄文) 등을 전재하였다. 권말에는 일본의 포로가 된 명나라의 허의후(許儀後)가 자기 나라에 보낸 기밀봉사(機密封事)를 전재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사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 책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敵情)과 아군의 병력배치를 비롯하여 조야관민의 사정을 상술하고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값진 사료로 평가된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양민학살 사건.

 

정만록은 조선 선조 때 경상우감사의 막하 참모였던 이탁영(1541∼1610)이 쓴 일기로서 건(乾), 곤(坤)의 2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진왜란의 발발과 하루하루 보고 들은 각종 기록을 고스란히 싣고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주요한 사료중 하나입니다. 

 

오희문의 쇄미록과 함께 시중에 판매도 안되고 인터넷으로 번역본을 볼수도 없는 사서로 대학도서관 등에서 구할수 있는 비매품은 국한문 혼용이라 한문실력 떨어지면 제대로 읽기 힘듭니다.(누가 국역 좀 하면 좋을 것 같음.) 아무튼 정만록의 임진년 6월짜 기록을 살펴보다보면 한가지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6월)27日
(전략) 지금 포로가 되었다 살아 돌아온 김해 사람의 말을 듣건대 동료 배덕민(裵德民) 온 가족이 피살되었다고 하니 통분을 금할 길이 없다. 덕민은 본시 온유하며 신의가 있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또 벗인 배지상(裵智祥)의 아들도 살해당했다고 하니 더욱 통탄할 일이다. 게다가 배송서(裵宋瑞)의 딸과 손녀도 끌려갔다고 한다. 이들은 허 생원(許生員)의 아내와 딸이다.

 

이와 같이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水使: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경상우감사 밑에 있던 이탁영이니 수사는 원균하나 밖에 없지요. 하여튼 젠장맞을 재간둥이 균사마. 항상 범인의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굳이 충무공하고 비교할것도 없이 군인이 할 짓이 아닙니다. 이런짓은 지원군으로 들어온 명군도 많이 했지만 그들은 그래도 외국인이고 같은 조선사람 그것도 백성을 지켜야할 군인이 백성을 학살하고 그 목바쳐 공을 세우려하는지...


이 기록 하나뿐이면 모르겠는데 원균은 이후 이순신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백성들 목을 베어 바치려다 발각됩니다. 난중일기 계사년(1593년) 2월 28일. 맑고 바람도 없다.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움츠리고 있어 조금도 나와서 대항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곧장 가서 작은 섬을 에워쌌다.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 2척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면서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세 성을 냈다. 그의 본뜻이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을 찾아 그 머리를 베어오게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후략)


일본 어부들이 먼 남해안 작은 섬까지 원양어업을 나올리는 없을테니 전란으로 원래 살던곳을 떠나 인적이 드문 섬에 숨어 살면서 고기잡이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조선인 어부들을 죽여다 수급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순신이 그걸 막았더니 본인이 더 성을 내죠.


난중일기 계사년(1593년) 맑음. 아침에 제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썼다. 경상우사사와 충청수사, 본도 우수사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수사 원균이 음흉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주 형편이 없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 앞으로 갔다.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만나고 곧 돌아갔다. 사도 첨사 김완이 복병했을때 사로잡은 포작(바다에서 포획한 각종 해산물을 소금에 절여 진상하는 어민) 10여명이 왜군 옷으로 변장하는등 하는 짓이 심상치 않아 추궁을 하였다. 어떤 근거가 있을듯 하더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발바닥을 10여대씩 때리고는 놓아주었다.


원균은 어째서 어민들한테 왜군의 옷을 입혔을까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라면 무엇이며 충무공은 왜 그들을 벌했을까요?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이때는 그래도 변장도 시키며 머리 꽤 굴린 모양입니다. 이런식으로 수급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끝에 선조에게 잘보이고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죠.


그리고
선조 71권 29년 1월 12일 (기묘) 001 / 사헌부에서 충청 병사 원균의 추고와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박탈하도록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에게는 본래 종사관이 없는 법인데, 충청 병사 원균은 전 군수【최덕순을【사신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 군수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원균이 수군에서 패악질부리다 중간에 충청병사로 전출당했을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런걸두고 사람들은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인다. 라고 합니다. 

'무능하고 성질더러운 원균'이란 인식은 너무 미화된감이 있습니다. 임란이후 조선에서 처럼 완전히 무시하고 묻어버릴게 아니면 욕 좀 더 먹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