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在薰 113

경주이씨 선조 불천위 및 유림 배향록

종가(宗家)는 원래 불천위(不遷位) 유림이나 나라에서 영원토록 제사를 모셔도 된다는 의미의 위패를 모시는 집을 의미 합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입향 조나 특정인물 또는 4대를 봉사하는 제일 큰집을 종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를 명한 경주이씨 종가 1. 17世 익재공 이제현(益齋公 李齊賢/현릉묘정 배향(玄陵廟庭配享) 2. 19世 석탄공 이존오(石灘公 李存吾) 3. 20世 경절공 이래(景節公 李來)/태종묘정배향(太宗廟庭配享) 4. 24世 충무공 이수일(忠武公 李守一) 5. 25世 오제공 이탕(悟齊公 李宕) 6. 25世 정익공 이완(貞翼公 李浣) 7. 25世 백사공 이항복(白沙公 李恒福) 8. 25世 경양군 이사공(慶陽君 李士恭) 9. 26世 청와공 이경한(淸窩公 李景漢) 1..

최명길과 김상헌

■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주전파(主戰派) 김상헌 우리의 역사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로....조선 건국 당시의 정도전과 이방원....단종 폐위와 관련하여 사육신 성삼문과 신숙주.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의 김상헌과 최명길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충절과 변절 (忠節과變節)의 대비(對比)로 설명되거나, 개인의 가치관 또는 처세(處世)로 구별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유교의 다른 가르침에 있슴을 알게 된다. 유교가 발생한 중국에서....유교는 크게 두개의 흐름으로 나뉘어 서로 발전한다. 하나는 원리(原理)를 중시하는 성리학(性理學)과 보다 실질(實質)을 중시하는 양명학(陽命學)이 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한 유교 원리주의가, 또 그만큼 배타적인 성리학만이 발전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국민성과도..

15세기 나신걸(羅臣傑)의 한글편지

■ 15세기 나신걸(羅臣傑)의 한글편지 ↑국가기록원이 최근 복원에 성공한 대전 유성구 안정 나씨 선산의 분묘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애들이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하다가 … 못보고 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 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하며) 울고 가네」 500년 전, 부인을 아꼈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편지가 국가기록원에 의해 복원되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안정나씨(安定羅氏) 묘에서 미라와 함께 출토된 조선시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한글 편지를 복원했다. 이 편지는 대전 유성구 안정나씨 종중 분묘 이장 중 나온 것으로, 나신걸(羅臣傑 15C중반~16C전반..

전주류씨 5대 봉군 묘역 - 남양주시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0호(2009. 10. 14지정)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548-1(별내동 산 210-1)에 있는 전주유씨(全州柳氏) 문중묘역이다. 전주류씨 묘역 입구의 홍살문 전주류씨 묘역(全州柳氏墓域) /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0호) 이 묘역은 전주류씨 오대봉군 묘역(全州柳氏 五代封君 墓域)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류영경(柳永慶, 1550~1608)과 그의 아버지인 문소전 참봉, 증영의정 전릉부원군(全陵府院君) 류의(柳儀, 1518~1576), 장자인 통진현감, 증영의정 전원군(全原君) 류열(柳悅, 1571~1612), 손자인 오위도총부도총관, 전창군(全昌君) 류정양(柳廷亮, 1591~1663)과 배위인 선조의 6녀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1653..

이해룡선생 세계조사

■ 繕工監奉事慶州李公諱希哲墓 卯坐. 淑人李氏祔右 ◈광해군일기 >광해 2년(1610년) >광해 2년 5월 >광해군 2년 5월 7일 주청사 신흠 등 그 일행에게 포상을 내리다. 사자관(寫字官) 이희철(李希哲)에게는 7품의 직을 제수하였다. ◈광해군일기 >광해 7년(1615년) >광해 7년 윤8월 >7년 윤8월 9일> 사은사 윤방 등에게 가자하고 역관 등에게 관직 제수할 것을 전교하다. 사자관(寫字官) 이희철(李希哲)은 동반(東班)에 승급하여 서용하라.” ◈인조실록 >인조 4년(1626년) >인조 4년 11월 >인조 4년 11월 17일 호패청이 아뢰기를, “이천(利川)에 사는 전 현감 이양문(李揚門)과 업유(業儒 : 예전에, 서자로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이르던 말 ) 이복(李穙)· 이희철(李希哲) 등은 비..

경주이씨 울진 입향조

■ 경주이씨 울진 입향조 : 이길(李吉) 1455년 단종 때 이달충의 후손 이길(李吉)이 1453년(단종 1) 계유정란(癸酉靖亂)을 피해 입향한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의 깊은 산중 등지로 피난을 하여 정착하였다. 이 밖에도 사화를 피해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이거한 사례도 있다. 경주이씨들이 울진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주로 경주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길(李吉)의 묘는 울산광역시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리에 소재한다. ● 현황 현재 경주이씨들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근남면, 온정면 일대를 비롯하여 울진읍 고성리, 기성면 봉산리, 원남면 길곡리·신흥리·매화리, 죽변면의 봉평리·죽변리 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학행과 덕행과 관련된 여러 인물을 배출하였다.

松窩先生文集 - 22世 李從允 著/국당공 후

■ 松窩先生文集. [서지(書誌)] 李從允선생의 석판본 4권 2책(完帙). ◈경매일자 : 2013. 01. 15 ◈手書刻序 : 歲閼逢執徐(甲辰, 1964) 重陽節 眞城后人 李起鎬 謹 序. ◈後敍 : 甲辰(1964) 首夏聞韶金正模謹書. ◈後識 : 甲辰(1964) 臘月晦鷲山後學辛檍謹識. ◈跋 : 歲甲辰(1964) 南至月十五世孫[李]鍾濩 謹 撰. ◈小識 : 十六世孫[李]殷雨 敬書. ◈크기 : 20.0×30.0㎝ ◈著者 : 李從允 著. 필자 소장본 [책의내용]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 이종윤(李從允)의 시문집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17대조이다. 4권 2책. 석인본. 1964년 후손 찬우(贊雨)ㆍ형우(亨雨)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기호(李起鎬)의 서문과 김정모(金正模)의 후서가 있고, 권말에 이종호(李鍾濩..

신라 제41대 헌덕왕릉(慶州 憲德王陵)

↑경주 헌덕왕릉(慶州 憲德王陵) ※(신라헌덕왕릉 →경주 헌덕왕릉)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종목] 사적 제29호 [명칭] 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수량] 및 면적 18,007㎡ [지정등록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시대] 통일신라 [소유자(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시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

의안대군 영의정 이화 묘-이성계의 이복동생.

사당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면 151번지(향토문화 유적 제4호)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면 산97-3(곡선 850m 거리) ⓒ개미실사랑방 ■ 이화(李和) 1348년(충목왕 4)∼1408년(태종 8). 조선왕조 개국 1등공신.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이요정(二樂亭). 이성계의 이복동생이다. 이자춘(李子春)과 비첩(婢妾-여자 종으로서 첩이된 사람)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회군공신에 봉해지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의안군(義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서훈되고, ..

이인보 묘(李仁寶 墓)

▲26世 사어 이인보선생 묘(司禦 李仁寶先生墓) / 국당공파 □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강천리 □ 시 대 : 조선 □ 진사시 :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式年進士) 3등(三等) 38 위/합격연령: 29歲 이인보(1607~1668)는 현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효장(孝章)이다. 증 좌찬성(贈左贊成) 이유일(李惟一)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익(李瀷, 1581~1628)의 아들이다.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묘는 강천리 중간말의 좌측 구릉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