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

야촌(1) 2010. 9. 17. 02:51

결국 봉기한 준소(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완소(緩少)가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3호] 20091206 입력

 

사회 불안요소 해소의 최선의 방법은 불안요소를 정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6·25 때 농민들의 동조 봉기가 거의 없었던 것은 발발 직전 단행됐던 토지 개혁 덕분이었다.

 

영조도 재위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 온건파에 정권을 넘기는 것으로 소론의 불만을 수용했기에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되돌아봐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무신(戊申) 봉기 영수’ 이인좌는 세종 대왕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형인 남인 명가

     출신이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②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3월 15일 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청주 병영(兵營)에 돌입하는 무리가 있었다.

 

병영 문은 굳게 잠겨 있어야 했지만 이날 밤은 달랐다. 병영의 기생 월례(月禮)와 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이 신임하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내통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난(戊申亂)으로 불리는 소론강경파와 일부 남인의 연합 거병의 시작이었다.

 

권서봉(權瑞鳳)은 경기도 양성(陽城)에서 미리 무리를 모아 청주성 경내로 들어온 뒤 행상(行喪:주검을 산소로 나르는 일)을 핑계로 상여에 병기를 실어 성 앞 숲 속에 몰래 숨겨 놓았다. 청주 인근 여러 고을에 건장한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상하다는 말이 유포됐고, 충청병사 이봉상에게 보고했지만 무시됐다.

 

결국 절도사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등은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했는데 『영조실록』은 “성 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의 즉위와 노론의 집권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믿는 세력들과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에서 실제로 독약을 사용하는 소급수(小急手)를 실험했던 것이 확인된 상황에서 영조가 즉위 직후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자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일찌감치 거병을 준비했다.
여기에 경종의 전비(前妃:전 왕비)인 단의 왕후 심씨의 동생 심유현(沈維賢)의 목격담이 더해졌다.

 

심유현은 경종 사망 당일 특별히 명소(命召)를 받고 유문(留門:궁궐 문을 임시로 닫지 않는 것) 입시했는데 그가 이유익(李有翼)에게 말한 목격담이 전파됐다. 심유현은 “그때 유문하면서 급히 부르기에 환취정(環翠亭)에 들어가 우러러 (경종을) 뵈었더니 옥색(玉色:임금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으셨다.

 

그런데 대신이 고복(皐復)을 청하기에 비로소 승하하신 것을 알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9일)”고 말했다.

자신이 봤을 때만 해도 이상이 없던 경종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대신이 고복, 즉 죽은 사람의 저고리를 들고 지붕에 올라 북쪽을 향해 혼(魂)을 다시 부르는 초혼(招魂)을 했다는 것이다.

 

소급수를 사용한 김성(金姓) 궁인(宮人)에 대한 조사 요청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김성 궁인은 인현 왕후 민씨가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였던 숙종의 후궁이자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 귀인(貴人) 김씨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사건 수사 기록인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에 따르면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은 경종의 사인(死因)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가 김일경이 사형당한 직후인 ‘을사년(乙巳年:영조 1년) 봄부터 가산(家産)을 털어 삼남(三南)을 돌며 ‘팔도의 저명한 인사(八道知名之士)’ 규합에 나섰다. 동조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노론에 의한 피화자(被禍者) 후손을 중심으로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 인사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영남 세력이 많았지만 거사에 동조했던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이 “호남·영남에 적도(賊徒)가 번성하다”고 말한 것처럼 호남도 동조자가 적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태인현감 박필현과 담양부사 심유현, 무장(茂長)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朴弼夢) 등이 호남에서 거병을 준비했다. 이들은 소현 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坦)을 추대했는데 이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이 연잉군(영조)의 역모 가담으로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왕통은 소현 세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정통론이었다.


이인좌는 현재 『민족문화백과사전』 등에 광주(廣州) 이씨로 나오지만 세종의 4남 임영(臨瀛) 대군의 후손으로 조부는 숙종 때 감사를 역임한 이운징(李雲徵)이고 조모는 남인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딸이고, 부인 윤자정(尹紫貞)은 윤휴(尹鑴)의 손녀로서 전형적인 남인 가문이었다. 지방에서 이인좌가 거병하면 서울과 경기도에서 즉각 동조 봉기를 해 도성을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영조 1년 1월 의릉(懿陵:경종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영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독살’ 운운한 이천해의 행위도 박필현과 이유익이 시킨 것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는 한편 무장 거병을 준비했다.

 

특히 평안병사 이사성의 가담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무신역옥추안』에 따르면 이사성은 “많은 군병을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賊)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있으면 국가는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아 격퇴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틈타면 어렵지 않게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인좌는 권서봉에게 ‘영남에서 올린 상소문의 소유(疏儒:상소에 이름을 올린 유생)가 만여 인이니 각자 가정(家丁)을 끌고 나오면 12만 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병력 동원에 자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이 끌어모은 무리 중에는 녹림(綠林)까지 있었다.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잇따른 실정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유리하던 농민들이 집단 도적이 된 무리가 녹림이었다. 녹림을 끌어들인 인물은 정인지의 후손으로 알려진 업유(業儒) 정세윤(鄭世胤)이었다.

 

용인의 사대부 안엽(安<7180>)은 이사성에게 “정세윤은 녹림 도적(綠林盜) 100여 명과 인연이 있는데 만약 은자(銀子) 수백 냥만 있으면 300~400명은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600~700여 명의 녹림을 모을 수 있었는데 주로 삼남에서 활동하는 무리였다.

이는 농촌에서 유리된 세력들이 중앙 정권 다툼에도 개입할 정도로 강한 세력을 형성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봉기 준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영조가 재위 3년(1727)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 온건파로 바꾸는 정미환국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자 임환(任還)의 공초는 정미환국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잘 말해 준다.


“정미년 7월 초하루 환국이 있었는데 8~9월 사이에 박필현·이세홍 등이 이유익의 집에서 만나 크게 놀라며 ‘일이 이뤄지지 않는구나. 노론이 그대로 있다면 일은 용이하겠지만 지금 소론이 천만의외로 다시 들어가게 됐으니 들어간 자가 비록 완소(緩少:소론 온건파)라 하더라도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도 희망이 있다고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무신역옥추안』)”


정미환국은 노론이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조가 “사적 복수를 앞세우고 국사를 뒤로 미룬다(先私<8B8E>後國事)”고 비판하면서 취했던 조치로서 소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조로서는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사성의 “남인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완소는 마땅히 모두 장살(杖殺)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론 강경파는 온건파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봉기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고, 아는 자도 너무 많았다. 당초 계획보다 규모가 축소됐지만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자 각지에서 동조 거사가 잇따랐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 호남에서는 박필현 등이 앞장섰다.

 

이들은 진중(陣中)에 경종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선왕의 복수를 다짐했다.

각지에 관문(關文)과 격문(檄文)을 뿌렸는데 영조는 이를 모두 불태우게 하고 이를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목을 베라고 명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이 담긴 관문과 격문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영조는 총융사 김중기(金重器)에게 출전을 명했으나 반군을 두려워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노론은 위축됐다. 이때 진압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소론 온건파 오명항(吳命恒)이었다.

 

안성에서 패전한 이인좌는 죽산의 산사로 도주했다가 승려들에 의해 붙잡히면서 결국 소론 강경파(峻少)가 일으킨 이인좌의 봉기는 소론 온건파(緩少)에 의해 진압됐다.

 

정미환국이 없었다면 소론 전체와 남인이 가담하는 전국적인 내란으로 확대됐을 것이고 승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인좌의 봉기는 노론, 소론·남인의 잘잘못을 떠나 조선 정당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표출한 사건이었다.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영조는 노론에서 이를 계기로 소론 온건파를 다시 공격하자 “지금 역변이 당론(黨論)에서 일어났으니 이때에 당론을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며 탕평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노론이 장악한 언관(言官)들은 계속 소론 온건파까지 공격했다. 심지어 분무(奮武) 일등 공신 오명항까지 과거 김일경과 신축소를 올렸던 이진유(李眞儒)의 유배지를 내륙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공격당했다.

 

『당의통략』은 “노론 언관들이 심하게 탄핵하자 오명항이 근심과 걱정으로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때가 영조 4년 9월이었으니 불과 6개월 전의 대사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결국 봉기한 峻少, 하지만 영조 곁엔 緩少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