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야촌(1) 2011. 9. 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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㊶ 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上)

     입력: 2008년 08월 22일 17:42:21

 

당쟁 소용돌이서 국정을 바로잡다
채제공의 죽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 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의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번암 채제공의 73세 때의 초상화.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당대의 화가 이명기의 솜씨다. |사진작가 황헌만

 

1720년에 태어나 80수를 누리고 1799년 초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다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채제공은 숙종 46년에 태어나 영조 11년인 1735년에 16세로 향시에 급제하고 영조 19년인 1743년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무렵 영조의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시행되던 때였기에 남인계열이던 채제공은 그런 분위기에서 한림학사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영조의 특명에 의해서 29세에 한림벼슬을 거쳐 34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돼 균역법의 폐단을 알아냈고 변방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벼슬은 1798년 79세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세월 동안 계속됐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영조·사도세자·정조의 3대에 걸친 명재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문신이 채제공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때는 언제나 어진 재상이 생각나게 마련.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세상이어서 어진 재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번암 채제공의 삶과 높은 경륜의 지혜를 살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번암은 애초에 충청도 홍주, 지금의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아가는 이유로, 고향인 청양읍에는 ‘상의사(尙義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있을 뿐 번암의 생가나 유적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또 근래에는 후손들이 경기도 수원시에 번암의 유품이나 유물의 대부분을 기증해 수원시의 ‘화성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전시될 예정이니 바로 그곳이 번암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1776년 3월, 52년 동안 왕위에 있던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57세의 호조판서 채제공은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돼 총책임을 지고 영조의 장례를 치렀고, 정조의 치세를 맞아 본격적으로 국왕을 보필하는 희대의 재상으로 온갖 역량을 발휘해 격화된 시·벽의 당쟁 속에서도 국정을 제대로 바로잡는 중신의 임무를 다해냈다.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을 보좌하고 정조보다 1년을 앞서 영면한 번암은 인신(人臣)으로서는 최대의 예우와 최상의 대접 속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평생 동안 번암의 친구로 형조판서에, 홍문제학의 지위에,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세상에 큰 이름을 얻었던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1723~1801)는 번암의 일대기로 정리한 ‘신도비(神道碑)’라는 장문의 글에서 그가 타계한 뒤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1799년 1월18일 부음을 들은 정조는 식사를 폐하며 슬퍼했고, 바로 하교(下敎)해 자신과 채제공의 깊은 인연에 대한 말을 전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시장(諡狀)도 없이 시호를 올리게 해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해 3월28일 장례일에는 임금이 직접 뇌문(文:祭文)을 지어 각신(閣臣)으로 해 읽도록 했다. 

신하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자 높은 칭송으로 세상에 없는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번암의 일생은 500여 글자에 가까운 정조의 제문에 모두 열거됐으니, 다른 어떤 역사가의 평도 필요 없이 당대의 제왕이 내린 평가에 온전하게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선생집’.

 

3대를 섬긴 재상번암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해 하급관료에서 영의정이라는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고 79세의 치사(致仕) 때까지 55년의 긴긴 세월 동안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진 세 조정의 큰 신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이나, 그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삶을 마칠 때까지 번암은 온갖 충성심을 발휘해 세자를 보살폈다.

 

당쟁에 휩싸여 세자를 폐위한다는 영조의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졌던 1758년, 39세의 도승지 채제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뿌리치는 영조의 옷소매를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하게 애걸복걸해 그 부당한 명령을 취소하게 했던 세자의 충신이었다.

 

1772년 53세의 판서 채제공은 21세의 세손(世孫)이던 정조의 우빈객(右賓客)이 돼 세손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이래,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의 정승으로 꼬박 10년을 보필해 정조의 치세를 이룩하게 했다.

1775년 24세의 세손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평안감사로 있던 번암은 다시 궁궐로 돌아와 호조판서를 맡아 세손을 돕고 다음해에 영조가 승하하자 국사를 책임지고 새로운 임금 정조를 보필한다. 

 

사도세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구제하려 했으나, 1762년 아버지 상을 당해 조정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그런 끔찍한 뒤주 안의 죽음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간 영조의 조정에서 중신으로 일했던 채제공이었기에, 영조도 그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다. 마침내 영조는 왕위를 세손인 정조에게 물러주기 직전, 채제공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정조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영조께서 제 손을 잡고 해주시는 말씀에, ‘나와 너로 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라는 내용이었다.

 

죽어서 말이 없는 사도세자야 채제공을 평할 수 없었지만, 영조와 정조는 채제공에 대해 ‘순신’과 ‘충신’이라는 가장 명확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정약용의 ‘번옹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1791년은 ‘신해옥사’가 일어난 해다. 

 

번암의 나이 72세로 몇 년째 정승의 지위에 있으며 노재상으로 마음껏 정치의 경륜을 펴며 정조의 문예부흥기가 전성기에 이르던 때다. 70평생 동안 지었던 시문(詩文)을 정리해 ‘번암시문고’라는 이름으로 엮어놓자, 그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 시문집에 대한 평을 겸한 서문을 지어주었다.

 

 ‘어제어필(御制御筆)’이라고 앞에 쓰고 ‘서번암시문고(書樊巖詩文稿)’라는 글을 내렸다. 제왕이 신하의 문집에 서문을 짓고, 친필로 써서 하사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 드문 일이자 신하로서의 영광은 어떻게 비교할 방법이 없는 일이다. 노재상의 글솜씨를 찬양하고 그의 인간됨을 칭찬한 전고에 없는 큰 문자다.

 

걸출한 기운 구사하며 필력도 굳세니
초상화의 그대 모습 그대로 보는 듯하오
거침 없이 치달리는 곳은 큰 파도의 기세가 있고
강개한 대목에는 감개하고 슬픈 소리 많아라

북극의 풍운은 만년의 만남에 밝았고
창강의 갈매기는 옛 맹약에 속했네
호주(湖洲) 이후에도 그만한 후손이 있으니
중국의 사안(謝安) 같은 재상 문장가가 나왔음을 다시 기뻐하노라.

 

종고조인 호주 채팽륜은 판서에 대제학으로 큰 문장가였다. 그 후손에 번암이 나왔음을 칭찬하고 높은 재상의 지위에서도 시문으로 뛰어났다는 내용은 얼마나 정조가 번암의 시문을 애호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60의 나이에야 정조와 번암은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년의 만남이 밝았다고 했다. 생전에도 정조는 모든 정치를 채제공에게 의뢰해 시행했다. 

채제공의 문집도 임금인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했고, 또 책의 체제나 편찬도 왕명에 의해서 정리돼 그대로 따랐다.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대부분을 채제공과 의논했고, 채제공의 조언을 받아 집행했음을 문집의 소차(疏箚)조항이나 서계(書啓)나 헌의(獻議)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정조시대의 대부분의 정책이 채제공과의 의논 속에서 나왔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樊巖集)

 

1788년에서 1790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제대로 강화시킨 채제공은 1793년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화성유수가 돼 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앞장선다. 

 

화성유수에서 바로 영의정에 올라 1794~1796년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화성을 쌓는 성역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이 된다. 그의 지도력으로 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완공했다. 탁월한 영의정 채제공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비명에 보냈던 정조의 한을 그렇게 해서 풀어주었다. 이런 신하를 정조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는 생전에 시문집의 평을 써준 글을 문집의 서문으로 삼아 국가에서 간행하도록 채제공 장례일의 치제문에서 엄명했다. 채제공의 장례를 치르자 이가환·정약용 등이 번암의 양자 채홍원과 힘을 합해 문집을 교정하고 정리해 인쇄만 하면 간행되게 했으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49세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해인 1801년 신유년에 신유옥사가 일어나 채제공 일파는 온통 풍비박산으로 궤멸되면서 문집간행도 중지됐다.

 

 1801년 가을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신서파의 원로로 지목받아 채제공은 모든 관작이나 시호까지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정조 재위 24년 동안 큰 힘을 못 쓰던 벽파들이 정조의 죽음으로 재등장, 반동보수로 우회전하여 일대 보복정치를 감행해 ‘번암집’은 간행이 중단돼 다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